조선 운명 바꾼 ‘역관의 휴머니즘’- 선조 때 홍순언
명에서 만난 여인 공금으로 도와 …
후일 종계변무 · 임란 파병 보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사대전고(事大典故) 역설(譯舌 · 역관)조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라는 인물은 젊어서 낙척(落拓 · 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했으나 의기는 있었다.
일찍이 중국 연경에 갈 때 압록강 통주(通州)에 이르러 청루(靑樓)에서 놀다가, 자태가 유난히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주인 노파에게 부탁해 서로 즐기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소복(素服)을 입어 연유를 물었더니 “첩의 부모는 본시 절강(浙江) 사람인데, 경사(京師)에서 벼슬하다가 불행히도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 널이 사관(舍館)에 있으나, 첩 한 몸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례 치르려는데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파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목메어 울었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례비용을 물으니 300금(金)이면 된다 하여 공금(公金)을 유용해주고 그 여인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그때 여인이 순언의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여인이 “대인(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첩도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홍씨 성(姓)만 말하고 나왔다. 동행한 무리는 그 얘기를 듣고 오활함에 웃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여인이 후일 명(明) 조정의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 · 후실)이 됐다. 그리고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동사(東使 · 조선 사신)를 볼 때마다 반드시 홍 통관(通官)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물었다.
은인 기다리며 비단 10필에 ‘報恩’ 수놓아
그 후 순언은 환국했으나 공금 빚을 갚지 못해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성주 이씨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고려 왕씨 네 왕을 차례로 시해했다고 기록돼, 그 오명을 벗기려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전후 10여 명의 사신이 명에 갔다 왔으나 아무도 청(請)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200여 년이 지나도록 종계변무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가 노해 교지 내리기를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수석통역관 한 사람을 목 베리라”라고 하명했다. 이에 모든 역관이 감히 가고자 하지 않았는데, 역관들이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빚진 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해 그를 중국에 보내자. 만일 그 일을 허락받고 돌아오면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고, 비록 죽는다 해도 진실로 한(恨) 될 바는 없을 것이다”라고 의논하고 모두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순언이 개연히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1584)에 순언이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 · 1532∼1607, 황희의 후손)을 수행해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쪽을 바라보니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 홍 판사(判事)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예부의 석 시랑(侍郞)께서 공(公)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보니 계집종 10여 명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에서 나왔다. 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가고자 하니 석성이 “당신은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義士)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부인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므로 순언이 굳이 사양하니 석성이 “이것은 보은의 절(報恩拜)이니 당신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크게 연회를 베푼 뒤 “동사가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물었다.
순언이 종계변무 문제를 꺼냈더니 석성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사관에 머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그 일이 과연 청한 대로 허가됐으니, 석성이 참으로 그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순언이 돌아올 때 부인이 전함(鈿函) 10개에 각각 비단 10필을 담고 말하기를 “이것은 첩이 손으로 짜가지고 공(公)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순언이 사양해 받지 않고 돌아왔는데, 압록강에 이르니 깃대를 든 자가 그 비단을 놓고 가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비단을 보니 자락 끝에 모두 ‘보은(報恩)’이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순언이 돌아온 뒤 조정에서는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아 왕실의 정통성을 회복해준 공적을 치하해 선조 23년(1590)에 그를 광국공신(光國功臣) 이등훈(二等勳)에 책봉하고, 역관으로는 처음으로 공신 작호인 당릉군(唐陵君)을 봉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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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 2009.12.08. 714호(p78~79)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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