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 김우창 이화여대학술원 석좌교수

Gijuzzang Dream 2009. 12. 6. 18:43

 

 

 

 

 

 

한국학술진흥재단 제3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김우창 이화여대 학술원 석좌교수(영미문학 비평)

 

- 인문학의 거울에 나를 비추다 -

 

 

 

 

 

 

 

 

 (1) '기이한 바다'를 항해하는 인류의 정신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박찬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안병만)가 후원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가 제3기 강좌의 전체 주제는 ‘인문학의 거울에 나를 비추다’이다.

3기 강좌를 기획한 서지문 위원장(고려대 교수, 영문학)은

“3기 인문강좌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체로서 삶을 경영하는데

귀한 거울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1월14일 개최된 3기 첫 인문강좌는

김우창 이화여대 학술원 석좌교수(영미문학 비평)가 맡았다.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자기 형성과 그 진로, 인문과학의 과제’란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김우창 교수는 인간의 자기형성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가 제 3기 강연을 시작했다. 


개인의 모험이 인류 전체의 모험으로...

태어났을 때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어느 쪽에서나 부모, 혹은 다른 사람의 보육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단순히 보육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함을 갖추어 나간다.

‘인간의 미완성’은 약점이 되고, 방황과 오류의 원인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생존의 필요 때문에 자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생존을 위해서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나가야 할 세계에 대한 지적 이해다.

지적 이해는 세계 전체의 원리에 일치해야 한다.

세계와의 바른 관계가 없이는 만족할만한 자기 형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개인 차원의 사회를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야말로 자기 형성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자기 형성의 추구는 잠재적으로 자아실현의 만족과 행복을 가져오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이상을 깨닫게 한다.

세계 전체에 대한 비전은 곧 개인의 지적 노력의 결과이며,

개인의 지적 노력은 또한 전 인류의 지적 발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김우창 이화여대학술원 석좌교수(영미문학비평) 

김우창 교수는 이를 “기이한 바다를 항해하는” 인류적인 정신적 모험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기이한 바다’에서는 개인의 모험들이 합류해 인류 전체의 모험이 전개된다. 창조적인 예술작품, 과학적 발전, 제도적 실험 등은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실험들인 것이다.

교육 역시 사회적인 계획으로부터 비롯된 거대한 실험 중의 하나다. 이 제도는 그 자체로 자기 영속화의 경향을 갖는다. 이 영속화는 제도가 갖는 관성이나 거대함, 또는 권위주의 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외면화된 것을 다시 의식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정보의 확산’은 교육이라는 사회적인 계획을 다시 의식의 과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무 비판성’은 개인이 자기 삶의 능력을 기르고, 삶을 헤쳐 나가는 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있어 일반적인 특징이 되고 있다.


개인의 이익, 사회 이익과 환원될 수 있어

지적과정에 있어 정보량의 확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움을

‘사회적으로 처방된 범위 안에서만 파악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교육의 많은 부분이 내면적 의식이 없는 외면화된 정보로서의 ‘체계의 집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제도이며, 그중에서도 시험제도이다.

그러나 자기형성은 사회적 교육제도와 연결되면서 별도로 개인 차원에서 배움을 적극적으로 만드는

노력이 있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비판적 의식의 발달을 요구한다.

비판적인 의식이란 열려있는 의식의 움직임을 말한다.

자기 고유의 의식이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 의식과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한국 사회의 큰 특징 중의 하나다.

한국에서의 교육의 의미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교육입국’이라든지, ‘교육강국’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교육열은 개인의 이익의 동기를 통해 작용한다.

개인과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입신양명, 또는 부귀영화가 그 주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개인의 입신양명은 공익과 대의에 봉사한다는 의지에 의해 매개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에 대한 봉사는 물질적인 이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인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전제돼야 할 것은 개인 발전의 총체가 사회의 필요를 충당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인 전통은 이것을 강화한다.

개인의 자기 형성은 개체적인 발전이 아니라, 사회가 부과하는 ‘도덕적 당위의 내면화’를 의미한다.

개인도 거기에서 개인적 성취감을 얻는다.

그런데 이 도덕주의는 많은 경우 순수한 것이라기보다는 숨은 개인주의와 연결돼 있다.

개인의 성장, 이익, 도덕주의, 사회와 국가의 요구 등, 이런 것들이 혼합돼 움직이는 것이

우리 사회 동력학의 특징이다. 교육도 이 동력학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 어느 쪽에 역점을 두던지

이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이익의 논리라는 점이다.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극복해나가야

어떻게 시작하든지 간에 개인 이익의 세계에서 사회성의 강조는

심리적인 강제력의 동원, 도덕적 수사를 수반하는 강제력 행사를 의미한다.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의 하나는 도덕적 시장 원리다.

개인적인 동기란 사회 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고,

사회 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개인적 추구와 사회적 성취의 ‘모순적 일체화’는 복잡한 변증법 속에서 움직인다. 개인적인 동기, 또는 이기적인 동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우위에 있는 것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치와 도덕의 왜곡, 위선, 숨은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과학적 사고를 방해하는 원인들을 말하면서, 그것을 네 개의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 가운데 종족의 우상과 동굴의 우상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종족의 우상은 원래부터 세계 인식을 그대로 비추지 못하게 하는, 고르지 못한 인간의 심성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비뚤어진 형태로 비출 수밖에 없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적 품성과 취향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편견과 왜곡, 그리고 오류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면서도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이다. 시장의 우상은 사람들 상호간의 교환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류다.

이것은 금전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용어, 개념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같은 오류는 곧 극장의 오류로 이어진다.

이것은 잘못된 철학 체계, 이념 체계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실의 왜곡과 오류를 말하는데,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의미를 더 확대했을 때 오늘날 상품시장에도 적용된다.

‘과시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는 상품 시장의 한 특징을 말해준다.

이 테두리 안에서 상품의 가치는 간단한 의미에서의 사용가치나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정에 의해 매개되는 가치를 말한다.

이러한 우상들이 어떻게 나타나든 간에 참으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인이 되어간다면,

그것들은 인간의 자기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상들을 허상으로 인식하고, 개인의 편견과 왜곡, 사회의 편견과 왜곡을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자기 형성의 핵심 요건이 될 것이다.

 

 

 

 

 

 

 

 (2) 자기를 돌보는 방법에 대하여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독자적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사회 규범적 정의에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일 서울역사박물과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술원 김우창 교수(영미문학 비평)는 “인간이 도덕적 존재(homo moralis)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본능적 차원에서 공작하는 존재(homo faber)이며, 동시에 유희하는 존재(homo ludens)”라고

말했다.

사람은 먼저 본능에 의해 일과 놀이를 배우고, 이를 통해 자기를 형성해나간다는 것.

농업 사회, 혹은 수공업이 번창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일들을 배우면서

거의 유희적인 형태로 성장한다. 그 결과 놀이는 일의 한 측면이 되고, 일은 놀이의 한 측면이 된다.

또한 놀이는 사회화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공동체적인 축제에서 놀이는 놀이 자체의 충동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사회적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 기능(일)에 대한 전체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은 극히 추상화된, 그러나 집단 이익으로부터 정당화된 도덕성이다.

인간이 자기형성을 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세 가지 요인이 있다.

그것은 교육, 사회, 그리고 자연이다.


유학, 학문의 사회적 종속을 경고

인간의 자기형성은 대체로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로 자기형성을 주된 관심사로 하고 있는 학문 추구에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 추구가 사회적 명성과 명분의 획득, 여러 가지 이익 배분에 연결되고 있는 현실은

‘학문의 자율성’을 어렵게 한다.

공자(孔子) 

유학(儒學)에 있어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말은

학문의 사회적 종속을 경고하고, 그 자율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논어(論語)에 나오는 “옛날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했는데,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란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학에서 중요한 지표를 세웠다.

공자(孔子)는 학문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밥벌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이 때 학문은 취직의 수단, 즉 밥벌이를 위한 수단일 수 있다. 특히 학문이 정치와 관계했을 때 더욱 그렇다.

밥벌이가 중요한 사람에게 정치는 ‘밥벌이 수단으로서의’ 지식일 뿐이다.

그러나 밥이 충분하든지 충분하지 않든지 정치에 대한 학문은 인간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통치자에게 통치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

다시 말해 전통적으로 군자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는 정치에 대한 학문이 매우 필요하다.

군자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 학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에게 있어 학문은 노력한 후 맛볼 수 있는 기쁨이라기보다는

‘당장에 생기는 즐거움’이란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란 글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說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여기서 학문은 사회적인, 혹은 정신적인 의의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즐김의 체험’이란 의미와 연결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배운다’고 할 때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삶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한 의례를 배우는 것이다.


즐거움은 공자의 삶에 있어 근본

공자를 시를 배우는 일에 대해 “시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정치에 나아갈 수 있게 하고, 감흥을 일으키며,

사람을 사귀고, 외교 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양화편, 陽貨篇)고 했다.

‘즐거움’은 공자에게 있어, 그리고 유학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도덕적 실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맹자(孟子)에서 가족의 안녕과 형제의 원만한 관계와 함께,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즉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이라고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화여대학술원 김우창교수 

즐거움은 공자에게 있어 삶의 근본이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옹야편, 雍也篇)는 모든 것의 정점에 있는 것이 즐거움이나 기쁨이라는 말이지만, 동시에 아는 것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하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심하게 말하면 공자는 탐미주의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학문이 그에게 즐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모든 지적 활동에서 그에게 가장 즐거운 것은 음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齊)나라에서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는 이야기는 공자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다만 그의 탐미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도를 잃어버릴 탐식가이거나 관능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좋은 음악, 좋은 음식을 즐기면서도 그 즐김에 절제를 두고자 하였다. 또한 그 절제는 단정한 모양새를 갖는다.

이것은 그의 삶 전체와 사회 철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자의 심미주의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전체적인 조화다.

이 조화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자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리고 이것은 단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적어도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는 목표다.
공자가 추구하던 전체적인 조화는 인간관계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편한 삶은 부귀에 의해 가능한 안락한 삶이 아니라, 많은 것이 조화를 이룬 삶이었다.


가족관계를 확대한 것이 정치

삶이 원한에 사로잡힐 때 난폭하고 저열한 삶이 될 수 있다.

조화로운 삶은 부드러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며, 그것에 기초한 공동체다.

논어 처음에 나오는 효도와 인간관계에 대한 강화(講話)를 단순히 상투적인 윤리강력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가족관계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바람을 확대한 것이 정치다.

위정(爲政)편에 나온 한 삽화에서 공자는 “왜 정치를 하지 않는가?”란 질문에

“오직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이를 정사(政事)에 반영시켜라”란 말을 인용하며,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인데 어찌 관직에 나가야만 한다고 하겠는가?”라며 반문한다.

이 말은 무도가 화합하는 상태로 있으면 정치가 필요 없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가족에게서 경험할 수 있는 온화한 인간관계를 나라에 확대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내적 조화가 국가의 원리라는 말은 무수히 반복되는 공자의 말이기도 하다.
화합을 하는데 있어 예(禮)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관계를 객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에 있어 禮의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유교 가르침의 핵심으로 파악한 미국의 철학자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는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으로서의 그 기능을 매우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禮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을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마술적인 힘”

이라고 해석한다. 禮는 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본질적인 자아의 차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서 그와 그의 행동을 사회의 원활한 움직임의 일부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인 예를 수련하는 사람이 군자이다.

禮가 주로 외적 형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仁)은 내적인 힘이다.

핑가레트에게 있어 仁은 “인간 성장의 개화(開花)에 도움이 되도록 완전하게 조직돼 있는 삶이

예(禮)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仁을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핑가레트는 인과 예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

한 개인이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어 주어진 악곡을 완전하게 연주하는 것에 비유한다.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제된 자기 훈련을 요한다.

또한 자신을 음악의 요구에 맞추어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연주는 주어진 곡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연주하면서 자기 사진의 힘을 표현하는 행위다.

仁에게 있어서도 여러 가지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뜻 있는 선비와 인(仁)한 사람은 살기 위해 인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인(仁)을 이룬다”(위령공편, 衛靈公篇)는 말은

인이 사회적인 삶과 맞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사람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사회의 바른 조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3)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행복추구의 변증법

 

 

 

 

행복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며,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기본 명제 중의 하나다.

그러나 삶 전체에서 행복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행복은 사적인 것인가? 그래서 엄숙한 의미의 공적 의무와 대립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은 공적인 것으로서, 사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해 반복되고 있는 질문들이다.

11월2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2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술원 김우창 교수(영미문학 비평)는

“진정한 행복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하나로 융합한다”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다룬 ‘혁명론(On Revolution)'에서

18세기 정치 철학에서 많이 등장했던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이 용어가 사적인 의미의 행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의미의 행복에 공적인 의미의 행복을 편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누구든지 자신을 존경받기를 원해

김 교수는 어떤 경우에서든 개인 심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행복이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공적 행복을 위한 의무 역시 강제력을 뜻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행복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렌트는 공적 행복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한 사람 중에 미국 정치 지도자였으며

2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존 애덤스(John Adams)를 꼽았다.
애덤스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말을 들어주고, 말을 걸어주고, 존경할 것을 바라는 강한 욕망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고 말했다.

이화여대학술원 김우창교수

(영미문학 비평) 

애덤스는 이 같은 ‘강한 욕망’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면서 이것을 ‘정치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사람들이 ‘정치 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촉구했는데, 아렌트는 애덤스의 말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자 (Let us be seen in action, spectamur agendo)”을 매우 중시했다.

사람의 사회성에서 탄생하는 것이 정치적 공간이고, 이 공간을 제도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헌법(Constitution)'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공간은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행복 추구 욕구에 의해 뒷받침돼 그것 자체적으로 의의를 갖는다는 것.

반면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행복을 “나의 가족의 품에, 그 사랑에, 나의 이웃과 나의 책의 교류에, 나의 농장과 용무의 건강한 일들에” 있다고 보았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도 공적 공간을 행복의 공간이 아니라 ‘불행의 공간’으로 보았다.

대체로 인간의 사회적 만남에서 태어나는 사회 체제는 부패하고, 타락한 체계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타락이 개인의 행복을 크게 왜곡한다는 것.

루소는 자연인의 삶의 있어 근본적인 동력은 자기에 대한 사랑, 즉 ‘자애(amour de soi)'라고 말했다.

그것은 동물의 생명보존 본능과 비슷한 것이다. 거기에서는 타자에 대한 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폐쇄적이면서도 도덕적 가능성을 갖는다.

‘자애’는 자신의 온전함, 진정성, 일관성의 의지가 기초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연민과 이성으로 열리고, 그것들을 통해 다른 생명체에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를 갖지 않는 사회성은 ‘애기(愛己, amour proper)’에 불과하다.


진정성 없는 관계는 동물적 관계

‘애기’의 자아는 늘 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한없이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동기에 있어 자기 팽창의 방편이다.

여기서 자기 팽창은 진정한 자기를 왜곡하고 잃어버림으로서 생겨나는 또 다른 그릇된 자아로 이어진다.

루소에게 있어 자기만의 삶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행복한 인간의 이미지는 공적 공간에서 공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숲 속을 거니는 고독한 산책자다.

장 자크 루소 

이러한 행복에 있어 사회는 어떤 위치를 갖는가?

이에 대해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 Emile ou de l'education)’을 통해 열두 살까지 교육의 주안점은 소년 에밀을 사회의 침해로부터 지켜내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자질 위에서 도덕적, 정치적 덕성을 첨가해 성장하는 것이 루소의 이상적인 교육론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의 교육론은 ‘거짓된 사회적 가치’를 벗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련 속에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루소는 더 나아가 행복의 완성을 “정치적 질서를 넘어 광활한 존재의 영역, 보편적 질서”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이 질서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다.

루소가 명상을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명상(冥想, meditation)은 자연의 저쪽에 있는 어떤 신성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생태주의자들이 국가, 민족사회를 대체하는 큰 주체로서 자연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루소의 이 같은 주장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소의 행복론과 아렌트의 행복론에 있어 강조점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사적인 행복과 공적인 행복이 필연적으로 관계하고 있으며,

상호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4) 곤학(困學)의 역정에 대해 

 

  

 

“나그네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은 넓은 세계로 한없이 나아간다. 우주의 끝까지 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넓고 먼 곳을 보기 원하면서도 또한 섬세하게 보기를 원한다.

12월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술원 김우창 교수(영미문학 비평)는

이 같은 인간의 열망이 곤학(困學)의 역정으로 승화되고 있으며,

이 곤학(困學)의 역정이 정신적 추구의 길의 형태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12월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독일 철학자인 하이데거(Heidegger, Martin)는 말년에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평온한 마음(Gelassenheit)”이라고 말했는데,

이 평온한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그대로 두고, 그 있음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평온한 마음은 불도(佛道)에서 말하는 평상심(平常心)의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불교에서 득도한 사람은 지극히 평상적인 인간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수행을 거친 다음의 일이다.
즉 풍랑을 많이 겪으면서 조용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커다란 정신적 경험이 있은 다음에 일상으로의 삶으로 평온한 귀환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인간 정신세계에서 나타나는 역설(paradox)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역정은 고통으로부터 시작

정신적 역정의 과정은 풍랑처럼 보이는 심한 정신적 혼미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는 아우그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이후

서구 사회의 정신적 추구 역사를 개관하면서 ‘커다란 내적 불안정’이 그 단초가 된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것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경험, 즉 정신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경험에 이르게 된다.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허상으로부터 밝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말하는데,

이 경험이 보다 방법론적인 성찰로 이어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데카르트(Descartes, Rene)는

오랫동안 과학의 통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사로잡혀 생각을 집중하다가,

눈부시게 밝은 빛을 보고 기진해 잠을 자게 되고 세 가지 꿈을 꾸게 된다.

데카르트 

꿈의 내용은 한없는 추락, 멜론의 선물, 천둥 번개, 그리고 고요한 명상, 인생의 길에 대한 어떤 방문자와의 대화 등이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이 꿈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학문적 진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이지만 <방법론 서설>을 쓰게 된다.

테일러는 이 같은 ‘내적인 자아의 추구’가 서구 전통에 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우창 교수는 테일러의 이 같은 주장이 서구와 전적으로 다른 동양의 전통을 잘 알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자아의 추구는 불교나 도교, 또는 유교와 같은 동아시아 전통의 핵심적인 주제라는 것.

그리고 (동 · 서양을 관통하는) 이 자아의 추구에 일정한 단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기단련이 자기를 이기는 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고서는 흔들림이 없을 수 없으며, 자기단련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속에 가득 찬 ‘자기를 떠받치는 많은 것들을 지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교에 있어 비움은 수행과정의 기본

유교적인 수신과정에서 보면 마음을 허령(虛靈)하게 하는 것,

즉 비우고 정신만의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 모든 수행과정에 있어 기본이다.

퇴계(退溪)는 김돈서(金惇叙)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신수양의 구체적인 요령을 설명하면서

“좋은 일, 나쁜 일, 큰 일,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퇴계의 해석에 따르면 ‘둔다’라는 의미의 유(有) 자는 한 군데 붙어서 얽매여 있음을 말한다.

어떤 일을 마음에 두게 되면 마음의 예기(豫期), 조장(助長), 계공모리(計功謨利 ) 등의

각종 폐단이 생겨나기 때문에 결코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화여대 학술원 김우창교수(영미문학비평) 

퇴계는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일이고, 도 허무에 빠지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즉 유(有)를 없애는 것이 “불로(佛老)에서 말하는 바, 형체는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일을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고, 아니 두는 것도 아닌(非著意 非不著意)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퇴계가 말하는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퇴계의 이 말이 단순한 수사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곤학(困學) 과정에서 겪는 유자(儒子) 들의 경험이 불자(佛者)들의 구도경험만큼

극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곤학(困學)은 위대한 우주적 체험으로 가는 길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곤학(困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곤학(困學)이란 말의 출처는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배우는 능력에 등급을 매겨,

“타고 난대로 하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고,

절대로 모르는 사람이 있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여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말은 유자들의 삶이 단순히 가르침을 쫓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여러 유혹과의 싸움을 통과하면서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이이(Pei-Yi Wu) 가 쓴 <유자의 역정(The Confucian's Progress)>에 등장하는

유학자 가오판룽의 삶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가오판룽의 삶은 곤학이 단순히 학문을 닦는 일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체험, 아름다움과 숭엄함과 험난함을 포함하는 자연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가오판룽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체험을 가진 후 이 체험들이 전적으로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우창 교수는 이 같은 곤학의 역정을 ‘나그네로서의 인간’이란 말로 정리했다.

가오판룽의 삶이 그랬고, 불자들의 삶이 그러하며,

플라톤의 동굴을 나서는 사람들의 삶이 또한 그러하다고 말했다.

곤학의 역정을 통해 개인과 사회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괴로운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정신적 여로에서 우주와의 일체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깨달음을 통해 이 세계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4) 곤학(困學)의 역정에 대해 

 

  

자기의 삶에 대한 문제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급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반면 사회와 정치, 그리고 경제로 대변되는 현실은 회피를 허용하지 않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아실현이란 곤학(困學)의 삶이 가능한 것인가.

12월
12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술원 김우창 석좌교수(영미문학 비평)는 그동안 강의내용을 놓고 진행된 종합토론을

통해 “오늘의 조건 아래서 그것이 가능한지를 묻지 말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

이라고 답했다.

종합토론회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김 교수는 변증법을 인용, 자기 형성과 현실과의 관계를

서로 길항(拮抗)하면서 다시 합칠 수 있는 ‘대립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좋은 사회란 사람들이 진정한 삶을 살면서 동시에 공존의 진실한 형태를 실현하는 사회”라고 결론지었다. “이것 없이는 이상 사회 실현도 있을 수 없으며, 현실의 인간화도 미약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며,

“자유를 통해 공존의 윤리적 규범을 실현했을 때 인간 모두가 원하는 자아실현과 이상적인 사회 건설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종합토론은 문광훈 고려대 교수 사회로 김형찬 고려대 교수, 여건종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민은경 서울대 교수,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참여했다. 다음은 토론자들과 김우창 교수 간의 일문일답 내용.

▲ 곤학(困學) 아닌 즐거운 학문성취 과정은 없는 것인가.
“퇴계(退溪)가 남시보(南時甫)에게 쓴 편지에

나날을 즐겁게 보내야 하지 너무 공부만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하루하루를 편하게 즐기면서 즐길 것을 즐기는 것이 좋다는 말인데, 두세 가지 조건이 있다.
산수(山水)와 그림 그리기를 통한 취미생활을 하면서, 사람과 너무 많이 어울리지 말고,

충동적인 것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화를 내거나 원한을 갖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공부를 하되 여유를 갖고 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 하이데거나 릴케처럼 엄숙함을 가져야만 자기실현이 가능한 것인가.

일상적인 삶에서 자기실현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없는지.

“오늘날 사람들은 문화와 학문을 연마할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극히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직업에 매달리고 있다.

(실용적인 가치의) 직업과 정신적 추구 또는 자기실현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오늘의 직업을 인간적인 자기실현에 맞도록 바꾸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다.

이것은 현대적인 일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만, 작업 조건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하루 8시간 노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을 생각할 수 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환경보존이나 환경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지만,

직업 현장에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자연미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 자기를 돌보는데 마음을 쏟다 보면

좋은 사회를 위한 겸손과 미덕이 유지되기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자기를 돌보는데 마음을 쏟다 보면 반드시 겸손·미덕과 같은 규범이 생겨난다.

이러한 규범과 이념들은 인간 존재의 특별한 존재론적 깊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를 돌보는 것이 좋은 사회를 위한 겸손·미덕과 무관하지 않다.

예법에 있어 겸손과 미덕은 나를 낮게 하면서 내가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인 동시에,

깊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근원적인 공존(Mitsein)에 참여하는 것이다.”

 


▲ 유교에서 지켜야할 예법의 세부 항목이 3천여 개에 이르고 있다.

곤학과 곤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이치로 따져서 몸에 익히기가 쉽지 않다.
“유교에서 지켜야할 사항이 3천여 개라고는 하지만, 분석해 보면 자연스러운 동작의 일부이다.

자연스러운 문화습관일 따름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성에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자연스러운 문화습관이 경직되는 일이다.

엄격히 지켜야할 규범·의례들이 많을 경우 이를 악용하는 일이 벌어진다.

즉 ‘지배와 순종의 원리’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의례는 배우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예법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도 비슷한 경우인가.

이화여자대학교 학술원 김우창 교수 

“학문의 세계가 어떻게 이데아의 세계에 관련되느냐 하는 질문으로 생각한다. 학문의 세계가 어떻게 현실 세계와 관련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수학의 경우 이데아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수학의 개념들을 보면 반드시 경험적인 세계로부터 체험돼 증명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등변 삼각형의 두 각의 등각이라든지, 2에다 3을 보태면 5가 된다든지 하는 것은 경험에 관계없이 증명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의 일이다.
또한 그것들이 어떻게 현실에 맞아 들어가느냐 하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연 혹은 신비라고 말 할 수 있다. 정의니 덕성이니 하는 것도 반드시 경험적으로만 추출되는 것은 아닌 추상적 개념들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개념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영원한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생각했는데, 이 세계가 인간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예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설은 삶이 아니라 허구다. 그러나 이 허구적인 삶의 모습들이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괴테 등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 삶의 모습들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삶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을 보면 그 내용 속에 작가의 깊이 있는 성찰이 들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완성감은 삶의 완성감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의 완성감으로 여겨진다.

프루스트에게서 보여 지는 완성감은 삶의 성찰에 있어 완성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미의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직관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안에 대한 형상적 파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현상학자 로만 인가르덴은 문학의 핵심과 관련,

갑자기 순간적으로 의미의 빛 속에 조명되는 경험에 재현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절정의 경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11.16/ 11.24/ 11.30/ 12.07/ 12.1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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