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실학(實學)

Gijuzzang Dream 2009. 12. 3. 07:29

 

 

 

 

 

 

실학연표

연도

세계

한국

1631

明, 이자성(李自成)의 반란

장현광 <우주설> 저술

1632

 

정두원 일행이 양마낙(陽瑪諾, E.Diaz)의 <천문략(天問略)>이라는 서적을 서양 천문학 서적으로는 처음으로 가져옴

정두원, 明에서 천리경, 서포(書鋪), 자명종 등을 가지고 옴

1633

갈릴레이, 종교재판에서 지동설 포기 강요당함

 

도쿠가와 막부, 제1차 쇄국령 반포

1634

영국, 처음으로 선박세 입법화

처음으로 상평통보 사용

1635

양명학의 개조(나카에 도쥬, 中江藤樹)

 

1636

후금, 국호를 淸으로 함

중국에서 신법지평일구(新法地坪日晷) 도입

병자호란,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1637

데카르트 <방법서설> 출간

 

1639

고학(古學),

오규우 소라이(荻生狙徠, 1666-1728) 왕래

 

1640

 

한백겸 <동국지리지> 편찬

1641

영국, 청교도혁명 일어남

 

1644

明나라 멸망, 淸에 의해 중국 통일

소현세자, 심양에서 한성으로 돌아옴

김육, <시헌력> 서적구입

김육, 새 역법을 도입 주장

김육이 아담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의 천문역학서(天文曆學書)을 가져옴

1646

 

이기영이 아담샬의 시헌력법을 배움

1648

 

홍주원이 북경에서 시헌력을 가져옴

1649

영국, 크롬엘의 공화정시대

2월 일관 송일용(宋日龍), 아담샬을 만나 역법을 구전 받음

1651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 출간

삼각산 문수암의 비구니 선자화(仙子花)가  직경 36.5㎝의 놋쇠 원반으로 된 성도(星圖) 만듬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사회개혁의 기원

평안도와 황해도 금속화폐 유통

천문학관을 연경에 보내 시헌력법을 배워오게 함

어영청을 설치하고 어영군을 둠

황해도 지방에 화폐 유통

김육, 충청도에서 대동법 시행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표착

정기법 태음태양력 ‘시헌력’ 채택

1653

하멜, 제주도 표류 이후 13년간 조선에 억류

김육, 시헌력의 시행

1655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신문 발행

김육, 금속화폐의 유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 제기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 굴절망원경 제작, 토성 고리 발견

1656

 

김육, 전라도에 대동법 실시

1657

 

5월 최유지(崔攸之, 1603-1673)가 수격식 동력장치(水激式動力裝置,Water Wheel Driven) 혼천의 제작

1660

淸, 프랑스 배가 처음으로 광주에 기항

허목 등 상소하여 복제를 3년설로 주장, 예론 논쟁의 시작

재정부족을 메우기위해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급

1661

프랑스 루이 14세 친정 시작, 콜베르재상 임용

 

1662

그레고리 <광학의 진보> 출간, 그레고리식 망원경 설계

화전의 폐해가 심함

전라도 대동법 시행

1664

프랑스, 인도에 동인도회사 설립

전라도 대동법 중지

몰리에르 <타르티프> 출간

1665

 

전라도에 유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 등 7인, 일본으로 도주

1667

밀턴 <실낙원> 출간

 

1668

뉴턴, 세계최초 반사망원경 발명

김육 <잠곡유고> 저술

김만중 <지구고증> 지음

송이영(宋以穎)의 자명종시계(혼천시계) 제작

유형원 <반계수록> 저술

1669

네덜란드, 하멜 <조선표류조난기> 간행

이민철(李敏哲)이 수격식 혼천의 제작

송이영(宋以穎)이 추동식 혼천의 제작

소현세자, 아담샬에게 천문, 천주교서적과 여지구, 천주상을 가져옴

1670

파스칼 사후에 <팡세: 종교 및 기타 주체에 관한 사상> 간행

 

1672

구마자와 반산(態澤蕃山, 1619-91) <집의화서(集義和書)> 저술

 

1673

淸, 삼번(三藩)의 난(1673-1681)

호패법 시행

(한성은 3월1일부터, 지방은 5월1일부터)

1674

페르비스트(남회인) ‘곤여전도’ 제작

 

1675

스피노자 <윤리학> 완성

 

1677

J.B.라신 <페드로> 출간

경상도에 대동법 실시

스피노자 <국가론> 출간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 선포

1678

핼리 <남쪽 별 목록> 출간

 

1680

영국, 동인도회사 淸과 무역 시작

남인 숙청을 둘러싸고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

1685

영국, 제임스 2세 즉위

 

동인도회사, 벵골 군과 교전

1686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서설> 출간

 

1687

뉴턴(Isaac Newton) <프린키피아(principi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출간,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1688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흰 대리석에 다시 새김

허목(許穆) <기언(記言)> 편찬

창경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관천대(觀天臺)가 축조됨

이민철이 만들었던 선기옥형을 수리하여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제정각(齊政閣)을 세워 설치

1689

淸, 러시아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김석문 <역학이십사도총해> 저술하여 지구 자전설 주장

영국, 권리장전 발표

1695

이토 진사이(伊藤仁濟, 1627-1705) <어맹자의(語孟字義)> 저술

 

1696

네덜란드, 자바에서 처음으로 커피재배

 

해리슨 <경도에 관하여> 출간

1697

핼리(Halley Edmond, 1656-1742), 지구자기 편각 측정을 위해 1차 대서양 항해

숙종, 탕평챙을 지시함

미야자키 야수사다(宮崎安貞, 1623-97) <농업전서(農業全書)> 저술

1699

淸, 영국의 광동무역 허가

 

1705

淸, 러시아 사신이 와서 무역 요구

관상감 관원 허원(許願)을 淸에 보내서 시헌법칠정표(時憲曆七政表)를 배워오게 함

최석정 <우주도설> 저술

淸에서 <칠정력> 수입

핼리, 핼리혜성이 태양주위를 76년 주기로 공전함을 발견

시헌력오성법(時憲曆五星法)을 사용

숙종, 대보단에서 明의 신종을 제사지냄

관상감에서 아담샬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모사(模寫)함

1708

가이바라 에키켄(具原益軒, 1631-1716, 일본의 醫聖) <대화본초(大和本草)> 저술

 

1709

바를리 <새 시각 이론을 위한 소논문> 출간, 뉴턴 우주론 비판

 

1710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완공

관상감 관원 허원(許願)은 淸의 흠천감(欽天監)에서 시헌력의 추보법(推步法)을 해독하여 저술한 <세초류휘(細草類彙)> 출간

1711

그리말디, 민명아 <방성도> 제작 1876개의 별 수록

 

포프 <비평론> 출간

1712

루소 <고백록>

허원(許願), 청나라로부터 자명종을 가지고 와서 자명종을 만듬

베르누이 <추측술> 출간

1713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채람이언(采覽異言)> 저술

 

1715

 

관상감에 혼천의 제작 지시

1717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변도(辨道)> 저술

 

1721

쾨글러 <황도총성도>출간, 별 3083개 수록

서얼 200여 명이 차별대우 철폐 요구

영조, 붕당의 폐해를 하교

1725

淸, 진몽뢰와 장정석 <고금도서집성> 편찬

신수시헌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을 사용

1726

스위프트 <걸리버여행기> 출간

 

1727

 

오가작통법 및 이정법을 개정하여 통제 강화

1729

淸, 영국 등 여러 나라와 무역 시작, 아편 판매 금지

수어청에 명하여 총을 만들게 함

베르누이, 액주 압력계 발명

1730

플램스티드(Flamsteed, 1646-1719) <천문표: 별의 목록 (star catalogue)> 출간

관상감 관원, 淸에서 만년력(萬年曆)을 가져옴

혼천의가 오래되어 안중태 등이 제작, 규장각에 설치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시행

사은사(謝恩使) 여천군(驪川君), 귀국하여 사들인 신역서(新曆書)를 바침

1732

 

숙종대의 부건(副件) 혼천의가 오래되어 오차가 생겨 안중태(安重泰) 등이 개조, 8월에 완성된 것을 경희궁에 규정각(揆政閣)을 세워 설치

1734

볼테르 <철학서간>

 

1736

프랑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등 계몽사상가 활약

 

1738

베르누이 <유체역학> 출판

각 지방의 도량형기를 통일시키도록 함

1740

 

탕평비 세움

이익 <성호사설> 편찬, 지구설

1741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을 이해하기 위해 관상관원 안국빈이 역관 변중화(卞重和), 김재현(金在鉉)과 항께 대진현(戴進賢, I. K gler), 서무덕(徐懋德)에게 그 산법을 배우고 <일월교식표(日月交食表)>, <대수표(對數表)>, <팔선대수표(八線大數表)>, <천미표(闡微表)>, <일월오성표(日月五星表)>, <율여정의(律呂正義)>, <수리정온(數理精蘊)>, <일식산고(日食算稿)> 등을 얻어 옴

1742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쟁탈전 시작

<속대전> 간행

쾨글러(Igatius Kogler, 중국명은 戴進賢, 1680-1746), 서무덕(徐懋德, Andre Pereira, 1689-1743)의 <역상고성 후편(曆象考成 後篇)> 출간

1744

 

7월 관상감관 김태서(金兌瑞)가 청에서 대천리경을 사옴

1745

 

안국빈 <누주통의(漏籌通義)> 편찬

1750

장 자크 루소 <과학과 예술론> 출판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실시

이중환 <택리지> 저술

1751

프랭클린(Franklin, Benjamin, 1706-1790), 피뢰침(避雷針, lightning rod) 발명, 전기 유기체설(電氣有機體說, Electric Fluid Theory) 제창

병조판서 홍계희 <균역사실>의 책자 올림

1752

볼테르 <강디드(candide)> 출간

홍대용(洪大容)의 후원에 나경적(羅景績)과 안처인(安處仁)이 공동으로 추동식(錘動式) 혼천시계를 제작

1753

인도 쇼에키(1703-62) <자연진영도(自然眞營道)> 저술

 

1760

 

통신사 조엄,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옴

1762

루소 <사회계약론> 저술

 

1763

영, 프, 이탈리아 파리조약 체결

성대중 <일본록> 저술

루소 <에밀> 완성

1764

 

홍대용 <의산문답> 저술

1766

리드 <상식원리에 의한 인간 정신의 연구>출간, 상식철학 창시

규장각, <동국문헌비고> 편찬

1770

영국, 차(茶) 이외의 수입세 폐지

칠정백중력(七政百中曆)을 시헌력법으로써 편성하여 <시헌칠정백중력(時憲七政百中曆)>을 간행하여 사용

이덕무 <사소절> 저술

1773

미우라 바이엔(1723-89) <가원(價原)>과 <현어(玄語)>(1775) 저술

홍대용 <주해수용> 저술

1774

수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 등 <해체신서(解體新書, Kaitaishinsho)> 번역, 출간

 

1776

미국의 독립선언

정조, 규장각 완성

스미스 <국부론>

유금 <한객건연집> 간행

1777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 1723-1803) <관려비언> 저술

숙종대 제정각 혼천의 제조 서호수(徐浩修), 이덕성(李德星), 김계택(金啓宅) 등에 의하여 중수

안정복 <동사강목> 저술

1778

 

박제가 <북학의> 저술

안정복 <대륙지> 편찬

1779

흄 <자연 종교에 대한 대화> 출간

박지원 <열하일기> 저술

1780

 

정찬순 <송도지> 편찬

1782

실러 <군도> 출간

유득공 <발해고> 간행

<천세력(千歲歷)> 제작

1783

칸트 <순수이성비판> 발표

서명응, 채제공 <규장각지> 간행

경위중성기(經緯中星紀)를 정함으로써 그 적도경위도에 따라 한양북극고도 37도 39분 15초를 써서 각 절후의 시각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됨

1784

영국, 미국과 파리조약 체결

이승훈, 연경에서 천주교 관련서적을 가지고 귀국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대전통편> 편찬

1785

 

해시계인 간평일구, 혼개일구, 평혼의 제작

1786

아사다 고류(1734-99) <실험록> 저술

 

1787

 

유금 <아스트로라베> 제작

1789

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의 <무예도보통지> 간행

프랑스, 삼부회 소집

정약용, 해미현으로 유배

1790

프랑스, 바스티유 공격으로 혁명 발발

시전의 특권을 없애고 자유매매를 허가한 신해통공 공포

신해박해, 조선 최고의 천주교박해사건, 서양서적들 불태워짐

정약용, 수원화성 설계

수원화성 쌓기 시작

정약종 <주교요지> 저술

안정복 <잡동산이> 저술

1797

 

사주당 이씨 <태교신기> 저술

1798

오스틴 <오만과 편견> 출간

 

1800

프랑스, 나폴레옹군 로마 점령

신유박해(권철신, 이승훈, 이가환 등 처형)

미국, 워싱턴에서 제1회 국회가 열림

정약용 강진으로 귀양

정약전 흑산도로 귀양

황사영 처형

장용영 폐지

1802

프랑스 나폴레옹, 국민투표로 종신통령

 

1804

프랑스, 나폴레옹을 황제로 추대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1804-1860)

1807

독일, 농민해방령 공포

 

1811

 

정약용 <아방강역고> 편찬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저술

강이중(姜彛重)과 강이오(姜彛五)가 추동식으로 송이영의 전통을 이은 천문시계 제작

정약용 <민보의> 저술

규장각 <홍재전서> 편찬

1812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 출간

정약용 <대동수경> 편찬

1814

프랑스, 연합군에 파리 점령당함

정약전 <자산어보> 저술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탄압(을해교난)

유럽, 빈 회의 개최

성주덕 <서운관지> 편찬

1815

淸, 아편수입 금지

정약용 <경세유표> 저술

영국, 곡물법 공포

이강회 <운곡잡저> 저술

1817

바이런 <맨프레드(Manfred)> 출간

정약용 <목민심서> 저술

1821

그리스, 독립전쟁(1821-1827)

 

헤겔 <법철학강요>

1823

미국, 먼로주의 선언

신작 <시차고> <역차고> 간행

1825

러시아, 데카브리스트의 난 일어남

 

1826

콩트, 실증철학 강의 시작

 

1830

프랑스, 7월혁명 발발

 

1831

괴테 <파우스트> 완성

 

스탕달 <적과 흑> 출간

1832

가우스, 전보 기계 발명

유몽인 <어우집> 간행

김정호 <청구도> 제작

1833

독일, 관세동맹 체결

최한기 <지구전후도> 제작

1834

 

김정호 <청구도> 제작

서북인을 등용함

1835

가우스, 전기에 관한 가우스법칙 제안

최한기 <추측록> <신기통> 출간

1837

빅토리아 여왕 등극, 빅토리아시대 시작, 해가지지 않는 영국

 

1840

영국, 淸 침공(아편전쟁 시작)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시작

휴얼 <귀납적 과학의 철학> 출간

최한기 <심기도설> 저술

1842

영국, 淸의 상해와 남경 함락

김대건 체포(7.26 순교)

1846

르베리에, 해왕성의 존재를 이론적 예측

 

1847

브론테 <폭풍의 언덕> 출간

이양선이 함경도 앞바다에 나타남

1848

 

‘도광기유(道光己酉)’의 제작연대가 명기된 목제의 휴대용 해시계 제작

1849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855

 

남병길(南秉吉)이 양도의(量度儀)를 도해(圖解)하고 그 원리를 설명하여 <양도의도설(量度儀圖說)>을 저술

1860

 

남병길이 시헌역법의 산법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로서 <시헌기요(時憲紀要)> 2권 2책을 저술하여 간행

1894

 

11월 서양의 태양력을 쓰되 시헌력을 참용(參用)하기로 결정

1904

 

천세력을 개정하여 만세력(萬歲曆)으로 하여 널리 간행

 

 

 

 

  

 

 

 

 실학 속의 천문학

 

실학자들이 서양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필터는

재정립된 성리학적 인식 체계였다.   

   

실학 속의 과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종래의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를 비판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수정해 재정립한 새로운 체계이고, 또 하나는 17세기 초 이후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과학의 새로운 지식정보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전통적 자연지식과는 상당히 다른 서양과학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새로이 정립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리학적 인식체계에 기반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실학자들이 접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한 서양과학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천문학 지식이었다.

 

조선의 실학자들이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한 통로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한문으로 변역 정리된 서양과학 서적이었다.

17세기 초 이후 주로 사신 일행에 들여온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와 같은 서양 천문학 책을 통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새로운 천문학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조선 유학자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지구설 이었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믿어오던 '땅이 평평하고 모나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부정되고,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은 '공과 같이 둥글어 저 반대편 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인 천체 운행의 계산과 같은 천문학은 실용적인 차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

1644년에 중국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서양식 역법 시헌력을 곧이어 수용하기 시작해

불과 10년 만인 1653년에 독자적인 자체 노력과 능력으로 시헌력으로 개력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서양식 천문도의 도입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다.

1623년에 제작된 아담샬의 『적도남북양총성도』가 1631년에 수입되었으며,

1723년에 제작된 쾨글러의 『황도총성도』는 1742년에 수입되었다.

이후 관상감에서는 그것들을 모사해 사용했다.

또한 민간에서도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목판으로 제작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천문학 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이

천문학 서적이 아닌 가시적인 형태의 천문도를 보면서 신기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 천문학을 접한 조선 실학자들은

객관적 지식 정보는 긍정하면서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전체 우주의 생성의 원리, 우주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 등에 대한

자연 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아가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유럽인들이 해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실학자들이 서양 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필터는

재정립된 성리학적 인식 체계였다.

크게 나누어 홍대용과 최한기의 기론적 메카니즘을 이용한 해석의 방식이 하나이고,

김석문과 서명응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수학적 서양과학 읽기가 또 하나였다.

홍대용의 지구설과 지동설, 최한기의 기륜설로 이해되는 뉴튼 천문학 이해가 그것이었다.

또한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가장 정합적인 우주론을 펼쳤고,

홍대용 이전에 지동설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김석문의 우주론은

다름 아닌 상수역학과 서양과학 지식의 결합으로 태어난 독창적인 우주론 사색이었던 것이다.  

- 문중양교수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실학과 사회

 

<소현세자의 외교활동>

 

 

 

볼모로 심양에 가다

 

1636년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달 여를 버티다가 성을 내려와

삼전도에 주둔하던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청과 12개조로 된 조약을 맺었다.

역사책에서는 이를 ‘성 아래에서의 맹약(城下之盟)’이라고 기록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가 항복하는 자리에 동석하였다가 바로 볼모의 길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청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 국왕의 장자와 차자, 여러 대신의 아들(아들이 없는 사람은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문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와 두 대군의 부인들이 모두 인질의 몸으로

심양으로 갔던 것이다. 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붙잡혀 간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심양관의 조선인 정부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이었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직후에는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머물렀고,

5월에 심양관(瀋陽館)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1644년까지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대표부로 활용되었다.
심양관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공방(工房) 기구를 조직하였고,

각 기구가 은의 출입, 물품 및 의약의 공급, 사람과 말의 관리, 물건 제조 및 수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대표로 하는 조선인의 미니 정부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심양에는 볼모로 잡혀온 조선 고관들의 자제가 있는 질자관(質子館)이나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동관과 서관이 있었으므로,

심양은 조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외교활동을 벌이다

 

청이 소현세자를 볼모로 둔 이유는 조선과 명의 긴밀한 관계를 끊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 군대와 물자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이 명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이 명나라 군대가 머물던 가도를 정벌하거나 명 본토를 공격할 때 구원병을 파견해야 한다는

조문이 있었다. 과연 청은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면서

소현세자를 통해 군대와 병선, 군수 물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소현세자는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조선 정부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인조대의 조선 정부는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광해군은

명과 청의 상반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해 가는 실리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崇明排淸)’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이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하였지만,

명 왕조의 재기를 기대하며 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연기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대한 청의 불신은 날로 깊어졌고,

소현세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639년(인조 17) 청이 명나라 금주를 공격할 때,

조선에서 마지못해 파견한 임경업 장군의 군대는 명의 군대와 내통하여 청 군대의 동태를 알렸고,

이를 알아차린 청 태종이 소현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엄중하게 항의했던 것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소현세자는 청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하는 모든 사무를 조선의 승정원에 알려 인조의 지시를 받았으며,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세자가 직접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에게 명령을 내려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파악된 주요 정보를 조선 정부에 알려 대책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세자가 보고한 내용에는

만주 지역 팔기군의 동향, 산해관과 북경 일대의 청 군대 동향, 심양과 의주에서의 무역,

청 황실의 후계자 문제, 청이 일본과 외교를 맺으려는 의도, 청과 몽고의 관계 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소현세자는 특별히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기밀 문건을 별도로 작성하거나

사람을 통해 구두로 전달하였는데, 이는 청 정부 쪽으로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 군대는 조선인 포로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하였고,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의 군대는 일반 백성보다 종실이나 양반집 부녀자를 많이 잡아가려 하였는데,

이들을 풀어줄 때에는 거액의 보상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가 몰려든 심양에는 포로를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났고,

보상비가 싼 경우에는 1인당 25-30냥, 보통은 150-250냥이었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면 천냥을 상회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재력을 가진 친척을 둔 포로들은 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구제될 길이 없었다.

풀려나지 못한 조선인 포로들은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으로 몰려들었고,

국가에서 공금을 내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날마다 울부짖는 조선이 포로를 보며 살아야했던 소현세자는

청과의 무역이나 농업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활용하여 많은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 때 심양관의 경제 활동은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아담 샬과의 만남

 

1644년 청이 북경에 입성하자 소현세자 일행은 청 군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청 태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현세자를 연회석이나 전쟁터로 불러들였다.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세자에게 날로 강성해지는 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세자와의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면서 청 조정은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마다 청에 바쳐야했던 공물을 줄이고, 조선에 귀화한 한인이나 여진인의 송환을 면제하며,

상당수의 조선인 인질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9년 동안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루었으므로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인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아담 샬은 1628년 북경에 들어와 명 의종의 신임을 얻었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는 중국의 황제에게 접근하여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시키려는 포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천문학, 수학, 역학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이들의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담 샬 역시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서 시헌력을 만들어낸 과학자였는데,

소현세자가 바로 그를 만난 것이다.


아담 샬은 조선인이 만난 최초의 독일인이자 과학자였다.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이수광이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그가 만든『천주실의』만 구입하여 돌아왔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청에서 간행된 천주교 서적과 서양 문물을 세자에게 주었고,

세자가 귀국을 할 때에는 천주상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을 선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아담 샬(Joemes Adam schal von Bel, 1591-1666)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과학자로서

1622년 중국으로 파견된 이후 선교 및 <숭정역서>의 편찬 등

과학활동에 힘쓴 인물인데,

'탕약망(湯若望)'이란 중세 서양천문학과 역법보급에 대한

큰 공을 세웠던 그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다

 

1645년 1월 18일, 소현세자는 서울 땅을 밟았다.

오랫동안 이국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온 세자였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사망하였다.

실록에서는 ‘세자의 시신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기록하였다.

독살의 혐의가 크다는 말이다.


정국의 흐름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외교 노선은 당대 집권 세력의 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정부는 청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청 황실과 긴밀한 친분을 맺고 청에 협조적이었던 소현세자의 개방 노선이

국왕 인조의 왕권까지 넘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세자가 사망한 후 세자빈 강씨는 국왕 독살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가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

- 김문식 (문학박사, 서울대규장각)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더보기


[실학박물관]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