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거북선의 잔해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

Gijuzzang Dream 2009. 12. 11. 02:06

 

 

 

 

 

 

 

 거북선의 잔해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

 

 

 

 

1905년 5월 27일 오후 2시경, 제정 러시아의 무적함대로 소문난 발틱함대가

7개월 간의 긴 항해 끝에 드디어 쓰시마해협에서 일본의 연합함대와 마주쳤다.

대치하고 있던 양측 함대의 거리가 약 8㎞로 좁혀지자

일본 해군 총사령관인 도고 제독의 오른손이 번쩍 올라갔다.
일본 연합함대는 그의 지휘대로 선두에 있던 전함이 좌현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가름 지은 이 쓰시마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38척의 발틱함대 중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한 것은 3척뿐이었으며,

나머지 21척은 수장되고 6척은 일본군에 나포되었으며, 그리고 6척은 중립국으로 도피했다.

또 이 전투로 러시아의 병사 5천명이 전사하고 6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쓰시마해전에서 일본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비해 일본 연합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어뢰정 3척이 침몰되고, 전사 110여 명에 부상자 580여 명뿐이었다.

일본 해군이 이처럼 완벽한 승리를 거둔 비법은

전투개시 직전에 올라간 도고 제독의 손짓 속에 숨어 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일본 함대가 취한 전투 대열을 일명 ‘정(丁)자 전법’이라 부른다.

이로 인해 도고 제독은 군신(軍神)으로까지 추앙받게 되고,

영국의 넬슨 제독 및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도 비교되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주변의 칭송에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달게 받을 수 있으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 없다.

이순신이 장군이라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도고 제독이 이처럼 겸손한 말을 한 것은 평소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이순신의 제자라 칭했는데,

쓰시마해전에서 그가 사용한 丁자진도 사실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후 도고 제독의 丁자진은

영국으로 전해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독일 해군을 물리치는 데 응용되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이 레이테만에서 일본의 태평양함대를 궤멸시킬 때 사용한 T자진도

이순신의 학익진(鶴翼陣)에서 응용된 전법이었다.

 


학익진(鶴翼陣)을 응용한 도고 제독

세계 해전사에서 독보적인 자취를 남긴 이순신 장군의 승리 비결은 학익진과 같은 뛰어난 전법 이외에

일정 거리를 확보한 함포사격 전법, 조수나 물살의 세기 등 지형적 조건을 이용한 전술 구사,

적장부터 먼저 궤멸시키는 심리전 등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스스로를 이순신 장군의 수제자라 칭한

일본의 도고 제독 

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도고 제독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거북선에 대한 찬사 역시 상당 부분 일본으로부터 기인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배 만드는 기술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오직 거북선에 대해서만은 뛰어난 군선으로 극찬하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거북선의 위력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1595년(선조 28) 10월 27일자의 선조실록에는 비변사에서 왜적이 머뭇거리고 떠나지 아니하므로 거북선을 더 만들자고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왜적이 가장 꺼리는 바가 바로 거북선이기 때문이었다.

또 병자호란의 굴욕을 당한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해 논의하던 1639년(인조 17) 7월 14일자의 기록에서도 영의정 최명길이 거북선부터 먼저 만들자고 건의하고 있다.

거북선의 위력에 대한 이 같은 소문은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점점 커진 것 같다.

 

1808년(순조 8) 1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순조가 전 통제사 이당(李溏)에게 거북선에 대해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자 이당은 통영의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모양이 거북같이 생겼는데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 없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이 마치 거북이 떠 있는 것 같으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므로 지금도 표류해온 왜인이 이를 보면 서로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사로잡는 기계이다’라고 한다 합니다.”

그런데 거북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중에는 잘못된 게 꽤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잘못된 게 아니라 아직까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항들이라고 해야겠다.

 


태종 때부터 거북선 존재

먼저 거북선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흔히 알려진 바로는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군관 나대용이 건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70여 년 전인 태종 때부터 이미 등장하고 있다.

1413년(태종 13) 2월 5일 태종은 통제원 남교에서 임진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전투 훈련을 참관했다고 되어 있다.

또 2년 후인 1415년(태종 15) 7월 16일 좌대언 탁신은 군사에 관한 여러 가지 준비사항을 보고하면서

마지막으로 거북선을 거론했다.

통영에서 재현된

한산대첩의 학익진 전투 장면 

“거북선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필승의 좋은 계책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이 내용을 보면 당시의 거북선도 임진왜란 때처럼 적진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돌격함으로서의 용도에 적합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외 여러 정황으로 보아 거북선은 거북 모양으로 생긴 전함으로서 고려 때부터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따라서 나대용이 만든 게 이전의 거북선을 더 보완한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모양과 기능을 달리한 새로운 발명품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둘째,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그 화려한 명성과 달리 실제 보유대수는 단 3척뿐이었다는 점이다.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과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이라는 이름의

거북선이 그것들이다. 왜냐하면 거북선은 주력 전투함이 아니라

적 함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진영을 흐트러뜨리는 돌격선의 역할을 하는 보조함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단 3척

당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법은 매우 달랐다.

수군이 따로 없었던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해적 출신들을 수군으로 급조했다.

해적들의 전투 방식은 바이킹이 상선을 노략질할 때와 마찬가지로 배에 접근해서

갈고리를 던져 타고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등선육박전이었다.

더구나 왜군은 전통적으로 칼싸움에 능했기 때문에 백병전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육박전이 불가능하게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조선이 보유한 우수한 화포로 왜선을 격파하는 함포 사격 전법을 구사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 등의 전투함에 배치되어 왜선에 큰 타격을 입힌 천자총통의 경우

사정거리가 900보(약 1.6㎞)에서 1천200보(2.16㎞)나 되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그러나 일본의 대포인 대통은 사정거리가 300m 정도에 불과했다. 또 육상전에서 맹위를 떨친 일본 조총의 유효 사거리도 50m 정도에 불과했으니, 함포전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전투상황에서 거북선은 적진을 무너뜨리고 적장이 탄 배를 공격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자면 육박전도 가능할 만큼 적선과 밀착하여 전투를 해야 했는데, 거북선은 그에 매우 적합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자)

정작 왜선들을 박살내는 건 조선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에서 내쏘는 대포였으나,

자기 진영을 헤집고 다니는 괴상한 모양의 거북선에 대해 일본 수군들은 훨씬 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거북선이 과연 세계 최초의 철갑선일까 하는 문제이다.

일전에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TV 광고가 화제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지난 1986년 정주영 회장이 중앙대학교에서 행한 특강 장면을 편집한 이 광고는

현대 조선소 건립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5만분의 1짜리 지도를 보여주고는,

‘내가 여기에 조선소를 지을 테니 일단 선박 주문부터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은 정주영 회장이 그리스 선박왕인 리바노스 회장을 만나 조선소를 건립하기도 전에

유조선을 수주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리바노스를 정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이었다.

1971년 9월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차관 도입을 위해 정 회장은 영국 런던으로 롱바톰 회장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처음에 롱바톰 회장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차관을 제공한단 말인가.
면담이 진척 없이 마무리될 상황에서 정 회장은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롱바톰 회장 앞에 펼쳐놓았다.

“이 지폐에 그려진 그림을 보시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오.

우리는 당신네 나라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우리는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이 말 한마디에 롱바톰 회장은 마음을 돌렸고, 오늘의 현대 조선소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많이 소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왜군이 쏘아대는 포탄과 조총을 거뜬히 막아내며 적함을 단번에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철갑선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해전 상황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료 중 어디에도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에 의하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시초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왜장 도노오카의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선전기는 도노오카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기록문으로서, 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의 실전 상황을 그리고 있다.

“8일 안골포의 오도항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 진시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盲船 ;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유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여기서 ‘철로 요해하여’라는 대목이 바로 철갑선설의 시초라는 주장이다.

이 기록은 다시 1831년 발간된 일본의 ‘정한위략’이라는 책에서도 인용되었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철갑선설이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를 합리화하는 데 적절한 구실이 되는 셈이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근거는?

남천우 전 서울대 교수도 ‘이충무공전서’ 등 각종 사료를 면밀히 고찰한 결과

당시 거북선의 배수량은 약 65톤인데, 만약 철갑을 입혔다면 전체 균형이 무너져

배가 뒤집어졌을 가능성조차 있었다며 철갑선설에 대한 반박 주장을 펼쳤다.

또 장학근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등에 쇠못을 꽂았다’

‘거북선 판자 덮개에 거북선 무늬를 그렸다’ 등의 기록이 철갑선설의 유일한 근거라며,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고 갑판을 나무판자로 덮은 군함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이를 추정할 만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751년(영조 27) 2월 21일 영남균세사 박문수가 영조에게 전선(戰船)과 거북선의 제도를 아뢰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선은 매양 개조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하기가 어렵고

거북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는 몽충(艨衝 ; 좁고 긴 싸움배)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화살과 돌을 피했습니다.” 즉, 거북선의 덮개는 철이 아니라 두꺼운 판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전체적으로 철갑을 두른 배는 있을 수 없고,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부에 부분적으로 철판을 대고

그 위에 쇠못을 꽂은 것만으로도 철갑선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마지막으로는 거북선이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 해군사관학교와 전쟁기념관 등 전국에 전시된 거북선의 모형은 모두 2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1795년에 난중일기 등을 토대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린 거북선의 간략한 그림을 보면 2층 구조에 가깝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따르면 맨 아래층인 1층은 군량미와 무기고 등의 군수 창고 및 침실 등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2층은 노를 젓는 격군과 활을 쏘는 사수, 포를 쏘는 포수 등이 함께 모여 전투를 치르는 활동 공간이었다는 것.

하지만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거북선이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공간과 포를 쏘는 전투 공간이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거북선은 판옥선처럼 노를 젓는 공간과 전투공간이 분리된

3층 구조설이 대두되어 논쟁의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런데 2004년 8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거북선의 실물을 묘사한 고서화 한 점이 공개되었다.

이 그림을 소장한 이에 의하면 1867년 일본 니기타현 인근의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었다는 것.

가로 176㎝, 세로 240㎝의 비단에 그려진 그림에는

판옥선 한 척과 거북선 네 척이 화려한 채색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거북선에서는 노를 젓는 공간의 위층에서 대포를 장착하고

무언가 작업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즉, 이 그림 속의 거북선은 3층 구조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약 200년이 지난 1790년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거북선의 내부 구조가 임진왜란 당시는 2층이었지만

18세기에 제작된 거북선은 3층이었을 거라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칠천도 해역에서의 거북선 탐사 작업

최근 경상남도는 2012년 여수엑스포 기간에 여수 신항 일원에 전시하고,

전국에서 열리는 이순신 관련 행사에 순회 전시할 거북선을 전국 최초로 3층 구조로 복원한다고 밝혔다.

거북선에 얽힌 수수께끼가 이처럼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유명세와 달리 거북선과 관련된 역사 자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거북선의 실물을 직접 발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를 위해 경상남도는 2008년 6월부터 2009년 7월까지 거제 칠천도 해역에서

거북선의 수중탐사 작업을 펼쳤다. 첨단장비를 동원하고 관련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수심 12~20m의 뻘층 하부까지 뒤졌지만 결국 거북선을 찾지는 못했다.

미국 뉴욕에서 공개된

고서화 속의 거북선 모습 

거북선의 발굴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문화공보부가 1973년부터 1978년까지 탐사 작업을 벌인 이후 해군에서도 1998년까지 발굴조사단을 운영했지만 끝내 거북선은 찾지 못했다.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배는 격침당한 적이 거의 없다. 경상남도가 거제 칠천도 해역에서 거북선 탐사 작업을 벌인 것은 원균이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파면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전투 때 일본군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지 않아 그들의 등선육박전에 휘말려 버렸다. 그러다 육지까지 쫓겨서 전선 대부분과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의 배를 격침시키는 조선군의 전법과 달리 일본군은 상대 배에 올라 인명을 살상하고 배를 나포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따라서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를 했다고는 하지만 거북선이 격침되었을 가능성을 그리 높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별다른 소득 없이 탐사활동을 마친 경상남도는 예산 확보가 되는 대로 2010년부터

다시 2차 탐사를 펼칠 예정이다.

또한 다른 기관 및 단체에서도 앞으로 바다 속에 묻혀 있는 거북선의 잔해 발굴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거북선이 앞으로도 발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북선에 얽힌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부서진 채 뻘 속에 묻혀 있는 거북선의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거북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무적 함선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까….

 

- 이성규 기자

- 2009.12.10/ 12.18 [이야기과학실록]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