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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영원한 제국>, 정조가 꿈꾸던 세상과 개혁사상

Gijuzzang Dream 2009. 12. 6. 16:00
 

 

 


 소설 『영원한 제국』
 정조가 꿈꾸던 세상과 개혁 사상

 


 

 

이경구(중세사 2분과)


 

 

소설 『영원한 제국』은, 당시까지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차용하여 사상과 정치를 오가는 현란한 수식과 설명을 통해, 당시에 그랬음직한 장면을 박진감 있게 재구성하였다. 재미 만큼이나, 복잡하고 해석이 만만치 않은 정조와 그 시대의 정치적 쟁점을 대중화한 것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정조와 벽파, 노론과 남인, 그리고 금등 사건과 정조 독살설은, 어떤 입장을 견지하든, ‘정조’하면 떠오르는 세인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최근 공개된 정조 어찰을 전하는 언론 기사가 진보ㆍ보수를 가리지 않고 그의 독살설에 초점을 맞췄던 것은, 지금 우리가 정조를 통해 각자 기준에 맞춰 우리 정치 상황을 투사하고픈 욕망이 존재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1> 공개된 정조 어찰(출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제공)

 

허구에 기반했음을 작자가 후기에서 살짝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작자 자신도 소설을 통해 감추어졌다는 역사의 이면을 재구성하픈 욕망을 보였다. 그 욕망은 소외된 지방 사족의 꿈에서 기원했는데, 그 결과가 현재 우리에게 정조에 짝하는 성군(聖君) 혹은 영웅적 인물이 필요하다는 암시로 귀결함은 매우 씁쓸한 뒷맛이다.

 

소설은 국왕과 근왕파 대 특권화된 사대부의 대립이라는 대립선을 축으로 전개된다. 작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긴 했지만, 경종은 독살되었고 사도세자는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노론 청류(벽파)를 비판하다 미치광이로 몰려 부왕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정조는 마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듯 노론 청류를 등용하여 노론 외척을 숙청하고, 점차 본색을 드러내 영조의 비밀 문서인 금등(金縢)을 공개하고 상왕이 되어 화성에 내려가 아들(순조)로 하여금 진정한 역적인 벽파를 토멸하고 유신(維新)할 계획을 세운다.

 

벽파와 대립하는 남인은 정조를 진정한 성군(聖君)으로 믿고 따르며 그의 계획을 도와 특권층 없고 신분 차별 없는 이상 사회를 염원한다. 하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정조는 암살당한다는 암시만 남는다.

 


<사진 2> 영화 영원한 제국 포스터(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

 

소설의 내용 중에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대목도 있다. 먼저 경종의 독살. 경종 재위시에는 실제 그의 암살과 관련한 시나리오가 고변되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노론 집안 인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죽음 당시에도 독살설은 비중 있게 퍼졌고 영조 초반 이인좌의 반란군이 내건 명분이 되었다.

 

사도세자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가장 알기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인데 학계에선 대체로 개인적 갈등과 정파 사이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으로 판단한다. 다만 정치적으로 전성기에 접어든 영조가 굳이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구도를 장기화하였던 배경에는 영조의 왕권강화책과 경종에 대한 과도한 부채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더 지적할 수 있다.

 

정조는 영조 후반에 길러진 척신 세력을 집권 초반에 숙청하고 이후 의리의 보합에 기반한 탕평 정치를 전개하였다. 그는 각 붕당의 의리론을 긍정하고 이를 국왕 중심의 새 의리론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그 점에서 그의 탕평론은 사대부 청류(淸流)의 이론을 포용하는 성군(聖君)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국왕 정조가 새로운 의리 기준을 내세움에 따라 각 붕당은 그에 동참하는 부류(시파)와 그렇지 않은 부류(벽파)로 나뉘게 된다. 하지만 벽파 역시 의리론을 지향한다는 점을 인정한 정조는 그들을 탕평의 한 축으로 끝까지 포용하였다.
  
그 점에서 다시 소설의 주요 모티브를 상기해보자. 정조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공개하며 그에 책임이 있는 노론 벽파를 숙청하려 했다는 부분. 사도세자의 신원은 개인 정분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나,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동기도 없을 수 없었다. 이른바 벽파 또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인정이 벽파에 대한 숙청을 예고하는 것이었을까. 그 점에서 우리는 영조의 을해옥사(1755, 영조 31) 처리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영조는 을해옥사를 계기로 노론의리(신임의리)를 인정하고 소론의리를 부정하였다. 숙종 시대의 논리라면 노론의 일당전제로 흘러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노ㆍ소론 모두에게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자신의 존호를 올렸다. 의리론의 인정이 왕권 강화로 귀결하는 순간이다. 정조 역시 그와 비슷한 수순을 걷고 있다. 정조가 금등을 공개하며 영조의 처분에 대한 수정을 시도했더라도 그 귀결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자신의 탕평을 떠받치는 한 붕당의 의리론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숙청하는 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화성 건설을 계기로 상왕이 되어 원통함을 풀겠다는 것도 숙청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원을 통해 국왕권을 강화하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죽기 직전에 내린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 역시 의리관에 투철한 신하들에게 경고를 내리며 자신이 주도하는 정국에 동참할 것을 압박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신하에 대한 정조의 압박이 세질수록 자신의 의리론을 부정하는 모양이 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표면상 그의 군주권은 강화된 듯하지만 재위 말년이 다가올수록 정국 주도권은 상실해가고 있었다.

 

국왕이 의리를 표방할수록 그는 사심(私心)을 버린 공인(公人)이 되어야 했으나, 말년의 정조는 강화된 국왕권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듯 왕실 구성원 예컨대 화완옹주나 은언군에 대한 비상한 처분을 내리며 신하들을 당혹케 하였다. 그것은 의리탕평에서 출발하여 전제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정조의 정국 운영의 예상된 수순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초기의 모습과는 매우 달리 말년에는 다시 외척 세도가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영조의 경우와 같다. 그의 사후, 벽파 정권이 세워지고 일순 그의 정책이 뒤집어지는 반동기를 거쳤지만 결국 정조가 육성한 시파의 핵심 가문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권이 장기간 전개된다.
  
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의 최후 담당자는 국왕도, 벽파도 아닌 서울의 세도 가문이 된 셈이다.

그 점에서 영조와 정조가 내건 탕평책은 유교 정치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면서, 붕당 정치와 세도 정치 사이의 징검다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조의 역사적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초점은 붕당, 탕평, 세도 가문의 등장을 낳았던 저변의 사회 흐름을 파악하는 데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 필진 : 이경구/ 등록일 : 2009-05-11

-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인문학강좌 제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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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탕평정치와 21세기의 대한민국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