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서울수복작전을 바꿔 덕수궁을 지킨 김용주와 제임스 헤밀턴 딜

Gijuzzang Dream 2009. 11. 26. 07:29

 

 

 

 

 



 

 


주일본전권공사로 간 김용주

 

김용주는 해방 후 1949년에 대한해운공사가 창립되자 사장에 취임, 대일선박반환교섭사절단으로

일을 하면서 맥아더사령부와 교섭을 하여 일본으로부터 선박 5척을 찾아왔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50년 5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김용주를 주일본전권공사로 갈 것을 지시했다.

김용주가 주일대표부 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간 지 한 달 반이 지나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1950년 8월이 되자 연합사령부는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1950년 8월 10일, 김용주는 연합사령부의 위이로비 장군으로부터 미국이 반격할 준비가 되어

한국에 상륙을 하여야 하는데 한국 지리는 물론이고 언어 소통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 가운데 간단한 영어를 통역할 수 있는 청년 1천 명 정도를

모집해 달라는 것이다. 김용주는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여 승인을 받은 다음

민단을 비롯한 대한청년단 등을 통하여 670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였다.

이때 모집된 청년들이 미군들과 함께 인천상륙을 하여 압록강까지 진격을 하였다.


맥아더사령부의 작전을 변경시킨 김용주

 

김용주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위이로비 장군으로부터 상륙작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어디로 상륙하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워싱턴에서는 군산으로 한다고 하고 맥아더 원수는 꼭 인천으로 해야 한다고 하여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용주는 인천이 되든 군산이 되든 최후의 격전지는 서울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였다. 미군의 공격전법대로라면 적전지를 쑥밭으로 만들 것이며 그에 따라 함께 불타버릴 5백년 도읍의 문화재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수일을 생각하다가 9월 10일 맥아더 장군을 한 번 만나보아야겠다고 결심하여 면회를 신청했다. 맥아더사령부에서 용건 제목을 문의하여 김용주 전권공사는  ‘서울시 작전에 대한 건’이라고 했다.

 

김용주 전권공사가 약속한 시간에 맥아더의 방에 들어서니 유엔군 참모장 힉키 중장을 위시한 수 명의 장성들이 동석을 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김 공사에게 서울작전에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김 공사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도 심한 파괴를 하지 않고

“서울 탈환은 포화보다는 포위 작전으로 섬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맥아더 원수는 “도시는 파괴된 뒤에 새로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이고

이번 전후에는 우리 미국이 책임지고 전후복구를 하여 주겠다.”고 했다.

이에 김 공사는 “우리 한민족은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나 과거 역사상 여러 번

이민족의 침략 전화를 입어 모두가 파괴되고 약탈당하여 남은 것이 극소한데

그나마 서울에 모두 집합되어 있어 이번 전쟁에 파괴되면 영구히 민족문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하한 신도시가 되어도 이것에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동정하여 특히 고려해 주기바랍니다.”

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자, 맥아더 원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힉키 참모장에게

“대단히 뜻있는 이야기니 잘 검토해 보라.”고 지시를 했다.

 

다음은 김 공사가 직접 기술한 내용이다.

 

힉키 중장과 참모 일행이 나를 딴방으로 안내하였다.

넓은 홀인데 벽 전체가 한국지도로 메워진 작전상황실이었다.

힉키 장군이 서울시지도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나에게 파괴해서는 아니 될 곳을 색연필로 표를 그리라 하였다.

처음에는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몇 곳에 붉은 표를 하다가 생각하니 현대전은 소각폭격인데 이렇게 점을 쳐보았자 이웃이 타서 연소되면 그만이란 생각이 나서 색연필을 중지하고 한참 있다가 정동에서 남대문, 퇴계로에 붉은 큰 선을 긋고 이 선 이남은 일본인이 새로 만든 신시가이고 이북은 구시가이니, 이 선 이북은 보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참모들은 곧 서울에 이르는 도로를 동서남북으로 찾아서 표시하더니 이렇게는 도저히 불가능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선을 줄여 정동, 을지로, 왕십리선을 그었다.

 

참모들은 절대 보장은 못하겠으나 정동에서 청계천을 그어 이 정도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하였다.

나는 금지선 이남이나 남대문과 덕수궁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 이 두 곳은 절대 보전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김용주,「서울 폭격과 문화재 수호」, 『월간문화재』, 1972년 3월호)  

작전회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맥아더는 김 공사의 등을 두드리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서울을 탈환할 때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500년 도읍의 고궁과 궁궐은 다행히 그 피해가 적었다.

특히 덕수궁의 보호는 수도 서울 탈환의 작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용주 주일전권공사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레디 씨는 김 공사를 보고

자신이 미군장성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며 “귀하는 서울을 포화로부터 구한 은인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사지에서 덕수궁을 구해낸 제임스 헤밀턴 딜

 

9월 15일 짙은 구름 낀 아침에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개시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 상륙에 크게 당황한 북한군은 병력을 재정비하여 수도 방어에 결사적으로 임하였다.

9월 25일 한강 도하작전이 개시되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적들은 치열한 항공공격, 지상포화에도

건물 등을 은폐물로 사용하여 도처에서 저항을 하였다.

 

한국전 초기에 미 포병 중위로 한국전에 참여하였던 제임스 헤밀턴 딜은

미 제7사단의 제31야전포병대대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제31야전포병대대는 해병대가 인천 지역을 확보한 다음 서울로 진군하는 것이다.

제임스 헤밀턴 딜은 9월 23일에 영등포에 도착하고, 9월 25일에 한강을 건넌 후

해병대와 함께 수도 서울의 탈환에 참가하여 덕수궁 탈환을 바로 목전에 두었다.

 

전방 관측자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덕수궁에는 수백 명의 적군이 궁전 건물과 정원에 집결해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장비를 일순간에 괴멸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포격개시’란 말 한 마디면 몇 분 안에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불바다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제임스 헤밀턴 딜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심한 그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를 하여 덕수궁을 살리는데 최대한 노력을 하기로 하였다.

즉 적들이 덕수궁을 빠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적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공격을 해오면 아군의 사상자가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그의 1950년 9월 25일자 수기이다.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측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군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격지휘 소대를 불러내 포격 개시를 지시하였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폭파 위기의 덕수궁』, 국방군사연구소, 1996)

 


그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최선의 방안을 선택”한 것이라 하였다.

이날 이후 서울시내는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다.

서울시청의 경우에는 건물에 숨어있던 적이 발악적인 사격을 가해 와

수류탄이 터지고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지만 가까이 있는 덕수궁에는 별다른 가격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덕수궁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보존되기까지에는

이 같은 문화재 수호자들의 식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옛 왕궁을 보존하는 것은 그 옛날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에 맞는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것”

이라는 제임스 헤밀턴 딜의 역사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 글 · 사진, 정규홍 현 서울대방중학교사  /  사진 · 문화재청

- 2009년 11월9일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