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사>
100년 전 우리는…되새기는 부끄러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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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8일,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낭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을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을미사변). 당시 광화문을 경비하던 병사들은 10여 분 만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빴고, 폭도는 거침없이 경복궁 건청궁까지 난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를 칼로 베고 사체를 불태웠다.
을미사변의 충격을 딛고 고종은 1897년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며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따라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국왕은 황제로 승격되었다. 민비도 이때 ‘명성’이라는 시호를 얻어 이후 명성황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허약한 체질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05년 일본은 소위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자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을사늑약),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폐위하고 황태자를 새 황제로 즉위시킨다. 순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망국(亡國)의 어둠은 더욱 짙어갔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고 그럴수록 일본은 차근차근 ‘병합’을 준비했다.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하자
1909년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한일가설(日韓一家說)’로 병합론에 힘을 싣자 그해 10월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한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한일조약은 이토 히로부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되었으므로 만국 공법에서는 무효이며, 민족 · 국가의 존망 위기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 된 자로서 도리가 아니다”는 내용의 마지막 진술로 한일조약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고 1910년 3월26일 처형당한다.
안중근 의사의 사생취의(捨生取義)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은 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인시켰다. 그날 밤 데라우치는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바야가와, 고니시, 가토가 이 세상에 있다면 오늘밤 저 달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꼬?” 고바야가와 등은 모두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왜장들이다. 이 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루지 못한 조선 정복을 이뤄냈다는 데라우치의 자만심을 드러낸다.
모든 과정은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병합되길 원했고, 일진회 조선인들이 병합되길 희망하여, 일본 천황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위장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은 강압에 못 이겨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에 서명 날인했으나 비준서에 해당하는 공포 조칙에는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비준을 거부했다.
을미사변 114년, 을사늑약 104년, 안중근 의거 10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99년…. 2009년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슬픈 역사다. 우리는 개천절, 광복절과 같이 경축할 일들을 기념할 뿐 부끄러운 역사는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유대인은 다르다. 유대문화 전문가인 현용수 박사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는 것은 후손들에게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현용수의 인성교육 노하우’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민간 차원에서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첫 사업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앞두고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통감 관저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출판계도 이 시대를 재조명하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일병합사 1875~1945>(눈빛)다.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사진집은 재일교포로 한일관계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신기수씨가 주로 일본인이 찍은 조선 관련 사진들을 수집하여 1987년 일본에서 출간한 것이다. 엮은이는 고인이 되었지만(2002년 작고) 그가 수집한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들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군국주의 선동용으로 이용
<한일병합사>가 굴욕의 역사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1875년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을 앞세워 조선 침략을 꾀하는데, 그 시작이 일본 함대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투한 사건이었다. 이듬해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무릎을 꿇고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된다. 이어 1890년 서울에 일본공사관이 설치되었고 이들과 함께 일본의 사진가들도 현해탄을 건넜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 신동아, 2009.11.01 통권 602호(p590~593) [뒤죽박죽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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