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문자(碑誌文字)
<忠州石, 效白樂天>
충주돌 아름답기 유리와 같은데
천 사람이 깎아서 만 마리 소로 실어가네.
돌을 실어 어디로 가느냐 하니
세돗집 신도비를 만든다 하네.
신도비명 지은이 그 누구인가
필력도 억세고 문법도 기이하네.
“이 분은 세상에 살아계실 때
자질과 학문이 무리에서 뛰어나
충성과 직언으로 임금을 섬기고
효성과 자애로써 집안을 다스렸네.
뇌물은 문 앞에 얼씬도 못하고
곳간에 재물이 전혀 없어도
그 말은 능히 세상에 법도가 되었고
그 행실도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네
평생토록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리와 맞지 않음이 하나도 없었으니
때문에 또렷하게 돌에 새겨 세우나니
영원히 변치 말고 닳아지지 말지어다“
이 말을 믿거나 말거나
님이야 알아주건 몰라주건
그리하여 충주의 산속 돌들이여
날로 달로 깎여나가 남은 것이 없구나
돌에게 입이 없으니 다행이지
입이 있다면 응당 할 말이 있으리라.
-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 『석주집(石洲集)』卷 2.
■ 묘도문자(墓道文字) = 비지문자(碑誌文字)
<예기(禮記)>에는
“자손으로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가
그 선조에게 아름다운 점이 없는데도 이를 찬양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子孫之守宗廟社稷者,
其先祖, 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弗知, 不明也, 知而弗傳, 不仁也, 此三者, 君子之所恥也.)
후손이 ‘조상의 사업을 잊지 않고(勿望祖)’
‘조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서 전하려면(稱美而傳後)’
조상의 사업과 아름다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실상 조상의 생평이력(生平履歷)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설령 후손이 선조의 생평이력을 기록으로 남겼다 해도 이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다면
먼 훗날 후예들이 먼 조상의 사적을 알 수 없게 되는 염려가
무덤 앞을 크고 작은 비석(빗돌)으로 수식하게 만들었다.
비지문자(碑誌文字)는 빗돌에 새겨질 내용 일반을 말한다.
빗돌이 간혹 산 자를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 빗돌은 비지문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지문자는 엄격히 인간의 죽음, 묘역을 전제로 성립하는 문체로
제문(祭文) · 애사(哀詞) · 뇌사(誄死) 등의 애제(哀祭)류 산문과 함께
전통시대 문인들의 주된 문필활동의 하나였다.
비지문자에서 ‘문자(文字)’란 사대부들이 즐겨 사용했던 바로 ‘한문체문장’을 지칭한다.
예컨대 ‘성리문자(性理文字)’니 ‘관각문자(館閣文字)’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곧 비지문자란 ‘비지(碑誌)’ 혹은 ‘비지문(碑誌文)’ 등과 혼용되어 쓰이며
석비(石碑)에 새겨져 있는 글월을 말하는 것이다.
‘비지(碑誌)’란,
옛적 장사를 치를 때 돌을 광중(壙中)에 시설(施設)하여 하관(下棺)하였고,
사묘(祠廟)에 설치한 것은 모두 애초에는 문자가 없던 것을 후인(後人)이 글을 그 위에 새겼으니
‘碑’가 이에 문체의 하나로 등장하였는데 대체로 공덕(功德)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무덤에 세운 것은 ‘묘비(墓碑)’ ‘묘표(墓表)’ ‘묘갈(墓碣)’이라 하고,
묘도(墓道)의 곁에 세운 것은 ‘신도비(神道碑)’,
광중(壙中)에 묻은 것은 ‘묘지(墓誌)’ ‘묘지명(墓誌銘)’ ‘광지(壙誌)’ ‘광명(壙銘)’이라 했다.
비지문자의 시원과 연변의 양상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한데
비지문자의 종류는 비문이 쓰이는 목적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공덕을 기록한 것, 둘째는 궁실이나 묘우(廟宇) 앞에 세우는 것,
셋째는 개인의 묘 앞에 세우거나 지하에 넣는 것 등이 있다.
여기에서 고문론(古文論)에서 주로 언급했던 비지문자(碑誌文字)는 바로 셋째 묘비문(墓碑文)이다.
묘비문(墓碑文)이란 묘비에 새겨 넣을 양으로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한 글이다.
그냥 碑라 하기도 하고 비문(碑文)이라 하기도 하며,
묘비(墓碑) · 신도비(神道碑) · 신도비문(神道碑文) · 묘신도비(墓神道碑) · 신도비명(神道碑銘) ·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 · 비송(碑頌) 등 달리 부르기도 한다.
불승(佛僧)도 죽으면 비를 세우는데 유가의 묘비 형식을 본뜨며
이 경우 비(碑) · 비명(碑銘) · 탑비명병서(塔碑銘幷序) · 비명병서(碑銘幷序) 등으로 제목을 붙인다.
묘비문은 묘 앞에 세우는 碑와 묘광(墓壙) 속에 파묻는 지(誌)를 지칭한다.
모두가 한 개인의 죽음을 전제로 성립하는 석물이요 문자이다.
묘비문의 명칭은 다양하다.
돌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하고 문자의 기록양태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묘비의 다양한 명칭들은 중세신분제 사회가 제도로 규정한 결과인데
품계에 따라 규모를 정하는 원칙이 법전에 보이기도 한다.
신도비(神道碑)는 중국 진송(晋宋)대 처음 일컬어졌는데,
감여가(堪輿家)들이 동남방을 신도(神道)라 하여 그곳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기에
그런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을 역임한 관원에 한하여 대략 7척의 높이로 세울 수 있거니와
무덤 동남쪽 사자(死者)의 묘로(墓路)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아울러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세우는 것이 상례이다.
신도비를 이고 있는 거북바탕의 귀부(龜趺)와 용트림하는 교룡이수(蛟龍螭首)를 지붕돌로 만들어
머리에 올리는 것은 왕가의 제도로서 왕자군(王子君)이나 부원군(府院君)과 같은 급에 해당하는
1품관 정승출신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비록 2품 출신은 아니지만 학덕과 행의가 뛰어난 이를 위해 신도비에 버금가는 묘도비(墓道碑)를
세울 수는 있었으나 비의 규모가 5척 이하로 제한되었고 비각도 세우지 못했다.
가첨석(加檐石, 지붕돌, 蓋石)은 빗돌이 5척이상일 때 씌우는데
피전자(被傳者)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인출신이어야 한다.
신도비를 세울 수 없는 3품 이하의 관인출신들은 갈(碣=墓碣)로 만족해야 한다.
갈(碣)은 비(碑)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돌의 머리가 둥근지, 모난지를 가지고 碑와 碣을 구분하기도 한다.(方者謂之碑, 圓者謂之碣)
일반적으로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얹은 것을 ‘碑’라 하고
가첨석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을 ‘碣’로 보기도 한다.
대체로 묘비문의 체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죽은 이의 생평이력을 기술한 산문체의 서문(序文 : 傳)과 이를 운문화한 명문(銘文)이 그것이다.
‘명(銘)’ 은 원래 청동과 같은 금속에 새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돌에 새긴 것도 모두 그렇게 불렀다.
문체역사에서 보면 잠명(箴銘)의 명보다 뒤에 나온 것이다.
묘지명 이외의 광지명(壙誌銘) · 광명(壙銘) · 권조지(權厝誌) · 화표명(華表銘) · 장명(葬銘) ·
폄석지명(窆石誌銘) 등을 모두 ‘잡명(雜銘)’이라고 한다.
또한 이외의 광지 · 장지 · 권조지 · 폄석지 등을 ‘잡지(雜誌)’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인공의 생애에 걸친 인적사항,
즉 성명(姓名) · 자호(字號) · 관향(貫鄕) · 가계(家系) · 선덕(先德) · 출생과 졸수(卒壽),
천분(天分) · 자질(資質) · 관력(官歷) · 행적(行蹟) · 공업(功業)과 학덕(學德) · 품행,
처자녀와 장일(葬日) · 장지(葬地) 등을 서(序)로 기술하고
이 기술 내용과 관련하여 운문으로 된 명(銘)을 붙임으로써 결미(結尾)를 삼는
일종의 의식성(儀式性)을 띠는 실용문의 범주에 드는 문장이다.
보통 4언의 형식을 취하는 명문의 설정은
사전(史傳)에서 본문 말미에 붙이는 논찬(論贊) 구성에서 일정하게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서(序)와 명(銘) 두 부분 중 간혹 명문이 빠지거나 생략된 묘비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서문이 결여된 묘비문은 그리 흔치 않다.
대체로 ‘비문(碑文)’이라 하면 명(銘)을 짓지 않아도 되지만
‘비명(碑銘)’이라 했을 때는 반드시 명(銘)을 달아야 한다.
비문의 변체로 ‘비기(碑記)’가 있는데 비문 말미에 운어(韻語 : 銘)가 없는 것을 말한다.
모든 비는 앞(面)이 있고 뒤(背)가 있게 마련이다.
비(碑)의 앞부분을 ‘양(陽)’이라 하고 뒷부분을 ‘음(陰)’이라고 한다.
‘비음문(碑陰文)’은 비 뒤에다가 새기는 글을 말하며 대개 비를 세운 연월일만을 기록하는데,
비를 이립(移立)했거나 개각(改刻)했을 경우
일의 전말을 추보(追補)하거나 새겨진 비문에서 미진한 뜻이 있을 때 보각(補刻)하기도 한다.
‘묘표(墓表)’ 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로
죽은 자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묘주 등을 새기는데 ‘표석(表石)’이라고도 한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묘소에는 여러 석물을 세우지 않고 다만 조그마한 묘표의 비석만 세운다 했다. 전통시대에는 예월장(禮月葬 : 3월장)을 치렀기에 여유가 있어 장례기간에 묘표를 세웠다.
작은 표석은 3자 높이에 1자 너비, 7촌 두께 정도의 빗돌을 썼다.
묘지명은 장례를 치를 때에 능곡(陵谷)의 변천을 걱정하여
광중(壙中)에 넣어 후대인들이 본래의 묘터를 상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조치한 것이었다.
지문(誌文)은 ‘전(傳)’과 같이 기술하고 ‘명(銘)’은 시처럼 짓는다.
'묘지(墓誌)'는 '묘지(墓志)'라고 적기도 하는데 말미에 명(銘)이 없을 때 그렇게 부른다.
묘지석(=지석, 誌石)은 묘지문에 새긴 돌을 말하는데
두 개의 돌판에 글씨를 새기거나 횟가루를 써서
광중 앞쪽에 묻어 뒷날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지석에서 뚜껑이 되는 것을 ‘지개석(誌蓋石)’이라 하고,
바닥이 되는 돌을 ‘지저석(誌底石)’이라고 한다.
지개석에는 남자의 경우 관작과 관향, 성명을 쓰고 여자는 봉작과 관향, 성씨만 쓴다.
지저석에는 묘지문을 써 넣는다. 지문이 길면 여러 장의 지저석에 안배하여 쓴다.
지석은 돌을 잘라 얇게 다듬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우에 따라 지개석과 지저석이 하나로 된 지석을 사용하기도 하고
뚜껑이 있는 오지그릇에 지석을 담아서 묻기도 한다.
또는 아예 오지그릇을 지석으로 대용하기도 하거니와
기왓장 같은 오지에 글씨를 새겨 구워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여러 형태의 지석이 만들어졌다.
그밖에 석회에다 쓰는 지문도 있고 사발 안에 먹으로 글씨를 쓰고
이를 밀랍으로 발라 묻는 사발지석도 있다고 한다.
지석은 장삿날 하관 후에 광중 앞 가까운 곳에 묻는 것이 원칙이다.
■비지문의 구성과 성격
비문(碑文)은 본래 서사(敍事)를 위주로 하는 것이다.
피전자(被傳者)의 사적을 진솔하게 묘사하는 것이 비문의 본령이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점차 의론(議論)이 뒤섞이게 되어
언행이나 사건을 두고 글쓴이의 생각이 끼어드는 것이다.
대개 서사를 주로 하는 비문을 ‘정체(正體)’ 로 보고, 의론을 위주로 하는 것을 ‘변체(變體)’ 로 본다.
서사를 주로 하되 간간이 의론을 첨가하는 것을 변체이지만 바름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탁물우의(託物寓意 : 사물이나 현상에 의탁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일)하는
비문도 있는데 이를 ‘별체(別體)’ 로 보아 구분한다.
비지(碑誌)는 전기류(傳記類) 산문양식에 속한다.
그러나 비지는 본디 문예문이라기보다 응용문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일정 정도 문예적 성격을 지닌 비지작품에 한해 광의의 전기문학에서 다룰 수 있다.
전기류 산문은 실제인물의 행적을 역사사실에서 구하기에 허구나 가공을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소설과 현저히 구별되는 요소이다.
대저 솥에 명(銘)이 있으니 명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름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름하여 그 선조의 미덕을 찬양하여 밝게 이를 후세에 나타내는 것이다.
선조인 자는 아름다운 점이 없지 않으며 또 나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명의 의리는 아름다운 점을 일컫고 나쁜 점을 일컫지 않는다(銘之義, 稱美而不稱惡).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 오직 현자만이 이를 할 수 있다.
“...... 옛날의 군자란 그 선조의 아름다운 점을 논하고 기술(論撰)해서
밝게 이를 후세에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그 몸에 비(比)하고 이를 가지고 그 나라를 중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자손의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가 그 나라를 중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자손으로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가
그 선조에게 아름다운 점이 없는데도 이를 찬양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無美而稱之 , 是誣也],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요[有善而不知, 不明也],
알고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知而不傳, 不仁也].
이 세 가지는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했다.(禮記, 祭統)
비지문은 ‘선조의 아름다운 행실은 말하지만 나쁜 행실은 언급하지 않는다[稱美而不稱惡]’는
원칙을 중시하기에 인물비판(褒貶)의 형평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곧 사전이 공정한 포폄을 중시하는 것과 다르다.
비지는 피전자의 후손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쓰는 것이 상례여서 찬술의 계기가 매우 수동적이다.
물론 피전자가 문호(門戶)를 열었던 유명 인물의 경우,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찬자(撰者)가 정해지는 예가 적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찬자의 확정은
문중(門中)이나 기타 향당고리(鄕黨故吏)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상례이다.
또한 비지는 비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새겨 넣어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글자의 수효가 자연 한정될 수밖에 없다.
비지는 또한 찬술의 기초 자료인 행장(行狀)이나 유사(遺事, 혹은 遺錄)에 의존하는 관례에 따르기에
자의적인 서사가 어렵다.
이렇듯 비지의 서사 공간은 자료의 선택적 수용을 열어 놓고 있는 사전보다 폐쇄적이다.
비문과 지문은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종결, 즉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성립하는 문체이다.
따라서 죽음은 단순하게 보면 한 개인의 일에 그치지만,
여기에는 생전에 그와 일찍이 관계를 맺었을 수많은 인적요소들이 개입한다.
죽음의 문화는 조선조에 들어와 제의(祭儀)라는 형식요소와 만난다.
특히 상례(喪禮)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공자가 ‘제사를 모실 때 살아계신 그때처럼 해야 하고,
신을 제(祭)할 때는 신이 거기에 재림(在臨)해 있는 듯이 하라(祭如在, 祭神如神在)’.
그 바탕이론이 유학에서 나와 유교(儒敎)로 전이되면서
자자손손 면면한 계승의 과정을 존중하고 정성과 공경이 생존시와 다름없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져야 했다.
비지문의 성립과정
유가의 역사주의는 증자(曾子)의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정신으로 한층 강화되어
죽음의 의식을 인간 삶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죽은 이를 잘 보내고[愼終]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않도록[追遠] 하는 방법에 대한 고대인들의
거듭된 모색은 마침내 상(喪) · 장(葬) · 제례(祭禮)라는 틀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조선시대의 비지는 철저히 그러한 의례의 틀 안에서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죽으면 상 ·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상주는 지석을 준비한다.
지석은 광중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상중에 서둘러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장사를 치르고 나면 묘비를 세우기 위해 비문의 찬술자료인 행장과 유사를 마련하여,
이것을 가지고 후손은 적임자를 물색하여 비문을 청탁한다.
신도비의 경우 일반적으로 당대의 문장가, 즉 홍문관 대제학에게 청하는 것이 상례이다.
묘갈명은 대체로 3품직 이하의 관료를 지낸 양반층에게 사용되는 것이고
그 이상의 품계를 지낸 분에 대해서만 신도비가 허용된다.
신도비나 묘갈은 찬문(撰文)ㆍ사자(寫字)ㆍ전액(篆額)을 위해
세 전문가(문장가와 서법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
이 때 청탁자에게 보내는 예물을 ‘윤필(潤筆)’이라고 한다.
비문을 청탁하고 나면 바로 돌을 사서[買石] 갈아[磨石] 바탕비[白碑]를 만들어 둔다.
그래야만 돌의 규모에 맞게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문이 마련되면 석공으로 하여금 문자를 새겨 넣고[入石],
길일을 택하여 묘 앞에는 갈석을 세우고 묘도(墓道) 동남방에는 비석(신도비)을 세운다[立石].
이처럼 하나의 비석을 무덤 앞에 세우려면, 일정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처럼 묘비 성립의 과정은 후손에게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안겨준다.
따라서 정성만을 가지고 신도비나 묘갈을 세울 수는 없다.
수년간 경비를 모아 돌을 마련한다고 해도 비문을 찬술할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몇 년이고 입석은 미뤄지고 만다. 때문에 사대부라 하더라도 후손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넉넉하지 못하면 역시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비지문자는 이렇듯 사대부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계층적 입장이 죽음 이후에까지 가장 잘 반영되고 있는 중요한 형식이었던 것이다
#출처
(1) 퇴계학 에세이 '온유돈후', 이종호, 아세아문화사, 2008
p141-154 <퇴계의 비지문자(碑誌文字)를 어떻게 볼 것인가> 中
(2) 권광욱 <육례이야기> 2. 도서출판 해돋이, 1996
(3)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묘도문자(墓道文字)>
비지문자(碑誌文字)
-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권 경전화시편(瓊田花市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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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贊) |
‘찬(贊)’ 은 인물 · 서화(書畵)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한문 문체를 말하며, 글자를 본래는 ‘찬(讚)’ 자로 썼다. 본래는 ‘송(頌)’과 같이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바치는 글이었는데 뒤에는 바뀌어 인물의 덕을 칭찬하는 데 주로 쓰였다.
옛날 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으로 형가(荊軻)의 찬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본문은 비록 없어졌지만 내용은 형가의 인물됨을 칭찬한 것으로 보인다. 후세 사람이 이것을 원조로 하여 지은 작품이 매우 많다. 唐나라 때에는 심지어 이 문체로 과거를 보기도(試取) 하였으니, 세상에서 이 문체를 중시한 지가 오래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 반고(斑固)의《한서(漢書)》의 편말에 붙은 찬은 산문이었는데《한서》에서 반고가 ‘찬왈(贊曰)’, ‘전왈(傳曰)’이라는 명목 하에 쓴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宋나라 범엽(范曄)의〈문체명변(文體明辯)〉에 따르면 찬의 체는 유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①잡찬(雜贊):그 뜻이 전적으로 아름다움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여러 문집에 실려 있는 것처럼 인물 · 서화 · 문장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글이다. ②애찬(哀贊):죽은 사람의 덕을 찬양한 글로 漢나라 채옹(蔡邕)의〈의랑호공부인애찬(議郞胡公夫人哀贊)〉이 유명하다. ③사찬(史贊):내용이 포폄(褒貶)을 겸하고 있다.《사기색은(史記索隱)》·《후한서(後漢書)》·《진서(晉書)》와 같은 역사서 끝에 수록된 인물에 대한 평을 적은 찬을 예로 들 수 있다.
유협이 이르기를, “贊이란 문체는 범위를 좁히고 확대하지 않으며 사자구(四字句)로 글자를 엮고 두어 개의 운자 내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송(頌)의 지류(支流)가 아닌가 싶다.” 하였는데, 이 말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반고(班固)의 찬을 이것과 같은 유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그렇지 않다고 본다.《한서》를 가져다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가 찬을 쓴 것이 이름은 찬이지만 사실은 평론하는 글이고, 전(傳)을 쓴 것도 내용은 찬과 같지만 사실은 소서(小序)에 해당된다. 그런데 어찌 개괄적으로 찬이라고 하여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贊)’은 매 구가 4언으로 격구(隔句 : 마지막 2구는 낙구落句 또는 후구後句라고 부르는데, 보통 그 첫머리에 감탄사를 써서 시상詩想을 고양시키면서 종결을 짓는다)하여 운(韻)을 다는 것이 보통이고 5~7언, 8~9언 등의 장구가 있다 해도 운자(韻字)는 꼭 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찬 · 사찬보다 잡찬이 많이 씌어졌다. 최치원(崔致遠)의〈화엄불국사 석가여래 수상번찬(華嚴佛國寺釋迦如來繡像幡贊)〉에서 시작되어 영찬(影贊) · 진찬(眞贊) · 상찬(像贊) · 자찬(自贊)과 같이 인물의 영정 옆에 그 덕을 찬미하거나 쓴 것이거나 서화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것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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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碑文) |
유협이 이르기를, “비(碑)란 돋운다[埤]는 뜻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제황(帝皇)이 처음으로 호(號)를 기록하고 봉선(封禪)을 할 때에 돌을 세워 산악 위에 도드라지게 하였으므로 비라고 한 것이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엄산(弇山)의 바위에다 사적(事跡)을 기록하였다.”하였고, 진시황은 역산(嶧山) 꼭대기에 명(銘)을 새겼는데 이것이 비(碑)의 시초이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사혼례(士婚禮)의 “문에 들어서서 비를 맞닥뜨리게 되면 읍을 한다.”라는 글의 주에 “궁실(宮室)에 비를 세워 두고서 해의 그림자를 표시함으로써 시각을 안다.” 하였고, 제의(祭義)의 “희생을 들여와서 비에다 묶는다.”라는 글의 주에 “옛날에 종묘(宗廟)에다 비를 세워 희생을 매어 두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궁궐이나 종묘에 모두 비를 세워서 그림자로 시간을 표시하고, 희생(犧牲)을 매어 두는 용도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인하여 그 위에다 공덕을 기록하였으니, 비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모방하여 명(銘)을 새긴 것은 周나라와 秦나라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後漢 이후로는 작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산천(山川)의 비가 있고, 성지(城池)의 비가 있고, 궁실(宮室)의 비가 있고, 교도(橋道)의 비가 있고, 단정(壇井)의 비가 있고, 신묘(神廟)의 비가 있고, 가묘(家廟)의 비가 있고, 고적(古跡)의 비가 있고, 토풍(土風)의 비가 있고, 재상(災祥)의 비가 있고, 공덕(功德)의 비가 있고, 묘도(墓道)의 비가 있고, 사관(寺觀)의 비가 있고, 탁물(託物)의 비가 있게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용기(庸器 : 공로를 명기한 그릇으로 이정彝鼎과 같은 유이다)가 점점 없어짐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돌로 금속을 대신한 것인데 썩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비(碑)’는 실로 명(銘)을 쓰는 기물이고, ‘명(銘)’은 실로 비를 채우는 글인 것이다. 따라서 그 ‘서(序)’는 전(傳)에 해당하고 그 ‘문(文)’은 명(銘)에 해당한다. 이것이 비의 체재(體裁 : 생기거나 이루어진 틀. 또는 그런 됨됨이)이다. 또 비의 체재는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 뒤로 점점 의논을 곁들인 것은 잘못이다. 사실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한 것은 정체(正體)이고, 의논을 위주로 한 것은 변체(變體)이며, 사실을 서술하면서 의논을 곁들인 것은 변체이지만 그 정당성을 잃지 않은 것이며, 사물에 가탁하여 생각을 나타내는 경우의 글은 또 다른 별체(別體)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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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행장 (行狀) |
유협(劉勰)이 이르기를, “장(狀)이란 묘사하는 것[貌]으로 본원(本原)을 그대로 묘사하여 사실을 취하는 것이다. 선현(先賢)의 묘표(墓表)나 시장(諡狀)에 모두 행장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은 장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하였다.
漢나라 승상부의 창조 참군(倉曹參軍)인 부조간(傅朝幹)이 처음으로 양원백(楊元伯)의 행장을 지었다고 했는데, 후세에 이것을 따라 하였다.
대개 죽은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등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혹은 고공(考功)과 태상(太常)에 이첩(移牒)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할 수 있게 하고, 혹은 사관(史館)에다 이첩하여 편록(編錄)을 요청하기도 하고, 혹은 작자에게 올려서 묘지(墓誌), 묘비(墓碑), 묘표(墓表) 등과 같은 유의 글을 요청할 때에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 글은 대부분 문하생이나 수하의 관속들이나 친구들의 손에서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사장(逸事狀 :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상부에 보고하는 형식으로 쓰는 글)의 경우는 다만 그 빠뜨린 것만을 기록하고 이미 수록한 것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하지 않았다. 이는 행장(行狀)의 변체(變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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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묘지명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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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誌)’는 기록한다[記]는 뜻이고 ‘명(銘)’이란 이름하는 것[名]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만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 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에다 새기고 덮개를 덮어서 광(壙) 앞 석 자[尺] 되는 곳에 묻어서 훗날 능곡(陵谷)이 변천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으니, 지명(誌銘)이라고 했을 경우 그 사용한 의도가 심원하고 옛 뜻에도 저해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에 문사(文士)의 손을 빌어 오늘날에 신뢰받고 후세에 전하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미화한 자가 이따금씩 있었으니, 글은 비록 같지만 의미는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사람에게 쓰게 한다면 필시 사정(私情)에 치우쳐 남들을 따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논하면,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한 경우는 지(誌)도 있고 명(銘)도 있는 경우를 말하며, 묘지명 병서(墓誌銘幷序)라고 한 경우는 지도 있고 명도 있는 상태에서 또 앞에 서(序)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지명(誌銘)이라고 하였으나 지만 있고 명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만 있고 지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별체(別體)이다. 묘지(墓誌)라고 한 경우에는 지만 있고 명은 없으며, 묘명(墓銘)이라고 한 경우에는 명은 있고 지는 없다. 그러나 또 오로지 지(誌)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명(銘)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명(銘)이라고만 했는데 도리어 지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또 제목은 지라고 하고서 내용은 명인 경우가 있고, 제목은 명이라고 하고서 내용은 지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모두 별체이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가매장[權厝]한 경우를 권조지(權厝誌) 또는 ‘아무의 빈에 쓰다[誌某殯]’라고 하고, 후장(後葬)을 하면서 재차 쓰는 지문(誌文)인 경우에는 속지(續誌) 또는 후지(後誌)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죽어서 귀장(歸葬)하는 경우에는 귀부지(歸祔誌)라고 하고, 다른 곳에다 장사하였다가 뒤에 천장(遷葬)하는 경우에는 천부지(遷祔誌)라고 한다. 덮개에다 새기는 것을 개석문(蓋石文), 벽돌에다 새기는 것을 묘전기(墓磚記) 또는 묘전명(墓磚銘)이라 하고, 목판에 쓰는 것을 분판문(墳版文) 또는 묘판문(墓版文)이라고 한다.
이 밖에 장지(葬誌), 지문(誌文), 분기(墳記), 광지(壙誌), 광명(壙銘), 곽명(槨銘), 매명(埋銘)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불가에서는 탑명(塔銘)이니 탑기(塔記)니 하여 모두 20개의 제목이 있는데, 혹은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혹은 명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바, 이것은 모두 지명(誌銘)의 별제(別題)이다.
그 문체는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체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변체는 사실을 서술하고 의논을 덧붙인 것이다. 또 순전히 야(也) 자만 써서 단락을 삼는 경우도 있고 허위로 지문(誌文)을 짓고서 명(銘) 내에 비로소 사실을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도 모두 변체이다.
명(銘)의 체(體)로 말할 것 같으면 삼언(三言), 사언(四言), 칠언(七言), 잡언(雜言), 산문(散文)이 있고, 문구 가운데에, 또는 맨 끝에 혜(兮)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맨 끝에 야(也) 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운자(韻字)를 쓰는 데도 한 구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두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세 구에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앞에는 운자를 사용하고 끝에는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앞에는 운자가 없는데 끝에만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 편 안에 이미 운자(韻字)를 사용하고 한 장(章) 안에서 또 각각 따로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 구절씩 걸러 운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어조사에 운을 두는 경우가 있고, 한 글자를 한 구절씩 건너 거듭 사용하여 스스로 운자로 삼는 경우가 있고, 전체 다 운자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운자를 바꿀 경우에 두 구절마다 한 번씩 바꾸는 경우도 있고 전편에 걸쳐 바꾸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각 편 중에 섞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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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문 (墓碑文) |
옛날에는 장사 지내는데 ‘풍비(豐碑)’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서 곽(槨)의 앞과 뒤에다 세우고 그 가운데를 뚫어서 녹로(鹿盧)를 만든 다음 동아줄을 꿰어 하관하는 것이다. 한나라 이후로 죽은 자의 공업을 맨 처음에는 그 위에다 새기던 것을 점점 바꾸어서 따로 돌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유협이 이른바 “원래 종묘에 세워졌던 비(碑)가 무덤에도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晉나라와 宋나라 시기에 처음으로 ‘신도비(神道碑)’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개 풍수가들이 동남쪽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그곳에다 비를 세웠던 것인데 이것을 인하여 이름을 삼은 것이다. 唐나라 비의 제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5품 이상인 관원만 사용하였는데, 근세에는 높이와 너비에 각각 차등을 두었으니 제도가 세밀해진 것이다.
대체로 장사를 치른 자가 지(誌)를 만들어서 유택(幽宅)에다 보관하고 나서 또 비(碑)나 갈(碣)이나 표(表)를 만들어 밖에다 내걸었던 것은 모두 효자와 자손이 차마 선조의 덕을 은폐시키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 문체가 문(文)도 있고 명(銘)도 있고 서(序)도 있는데, 혹은 사(辭)라고 하고 혹은 계(系)라고 하고 혹은 송(頌)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모두 명(銘)을 이르는 것이며, 거기에는 또 정체와 변체가 있다.
불가와 도가에서 장례 지낼 때도 역시 비를 세워 참람하게 품관처럼 하였으니, 아마도 역대로 서로 인습에 젖어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금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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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묘갈문 (墓碣文) |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갈(碣)을 지었으니 晉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唐나라의 묘갈(墓碣) 제도를 보면 부석(趺石)은 네모나고 수석(首石)은 둥글었는데 5품 이하의 관원만 사용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비(碑)와 갈(碣)을 본래 서(序)로 통용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관직의 등급 문제로 인하여 그 명칭을 구분하였지만,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문체도 비(碑)와 유사하다. 그러나 명(銘)이 있고 없고는 짓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다. 오로지 갈(碣)이라고만 하고서 도리어 명(銘)을 쓰는 경우도 있고, 혹은 명까지 겸해서 말하고서 도리어 명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지(誌)나 조(詔)처럼 확고부동한 표준을 내세울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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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묘표 (墓表) |
묘표(墓表)는 東漢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원년에 알자(謁者)인 경군(景君)의 묘표를 세웠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그 문체는 비(碑)나 갈과 동일한데,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다 쓸 수 있었으니 비나 갈에 등급의 제한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또 천표(阡表), 빈표(殯表), 영표(靈表)가 있는데, 대체로 천(阡)이란 묘도(墓道)를 말하며, 빈(殯)이란 장사하기 전을 지칭하며, 영(靈)이란 막 죽었을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으로부터 빈을 하고, 빈으로부터 묘를 쓰고, 묘로부터 천을 만들게 된다. (靈→殯→墓→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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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애사 (哀辭) |
애사란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그래서 간혹 문(文)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슬프다는 말은 의거한다[依]는 뜻인데, 슬픈 감정이 마음에 의거하기 때문에 애(哀)라고 하고, 말을 해서 슬픔을 해소하기 때문에 애사라고 하였다. 예전에 한나라 반고(班固)가 맨 처음 양씨(梁氏)의 애사를 지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어 대대로 그와 같은 작품을 지었다.
혹은 재주는 있었지만 쓰이지 못한 것을 애처로워하고, 혹은 덕망이 있었으나 장수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고, 어려서 덕을 이루지 못하였으면 칭찬은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는 정도에 그치고, 나약해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면 애도하는 마음을 표정에다 더하였으니, 이것이 애사의 대략이다.
그 글은 모두 운문을 사용하며 사언(四言)의 초사체(楚辭體)를 오직 뜻이 가는 대로 쓰는 점에 있어서는 뇌문(誄文)의 문체와 다르다. 그런데 오눌(吳訥)이 이 둘을 함께 열거하였으니, 아마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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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제문 (祭文) |
제문이란 친척이나 벗에게 제전(祭奠)을 드릴 때 사용하는 글이다. 옛날의 제사는 단지 고향(告饗)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는데, 중세 이후로 언행까지 겸하여 찬양하고 애상(哀傷)하는 뜻을 부쳤으니, 대체로 축문(祝文)의 변체(變體)라고 하겠다.
그 글은 산문도 있고 운문도 있고 변려문도 있으며, 운문 중에도 산문, 사언(四言), 육언(六言), 잡언(雜言), 초사체(楚辭體), 변려체(駢儷體) 등 다양한 양식이 있다.
유협이 이르기를, “제전(祭奠)은 본디 공순하고 애절해야 한다.”하였으니, 문사(文辭)가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거나 정서가 맺혀서 펴지지 않는 경우는 모두 여기에 공력을 들이지 않은 것들이다. 또 송나라 사람이 지은 제마문(祭馬文)이 있다.
제사를 올릴 때 읽는 고문(告文) · 축문(祝文), 불교나 도교 의식에 사용하던 재사(齋辭) · 원문(願文) · 초사(醮辭) · 청사(靑詞)는 물론, 제사와 상관없이 인물이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뇌(誄) · 애사(哀辭) · 조문(弔文) 등도 모두 제문의 범위에 들어간다. 후대에는 뇌 · 애사 · 조문이 점차 줄어들고 축문 · 고문도 ‘제문(祭文)’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이는 제전(祭奠)이라는 특수한 의식을 매개로 하여 창작되기 시작한 좁은 의미의 제문이 애제(哀祭)의 글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확대 적용된 사정을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제문은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세차연월일(維歲次年月日)’을 필두로 고향(告饗)의 동기와 제문 창작의 배경을 밝히는 도입 부분, 본 내용이 실리는 전개 부분, 그리고 고향한 사실을 확인하고 흠향(歆饗)을 바라는 종결부분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제문 실존 자료는 신라 말기 최치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최치원은〈제오방문(祭五方文)〉·〈축양마성제토지문(築羊馬城祭土地文)〉·〈제초주진망장사문(祭楚州陳亡將士文)〉·〈한식제진망장사문(寒食祭陳亡將士文)〉등 5편의 제문을 남기고 있는데, 앞의 세 작품은 각각 오방 · 토지 · 산신에 올린 제문이고 뒤의 두 작품은 전사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문이다.
그 후 300여 년 간은 자료의 절대 빈곤으로 인해 제문을 찾을 수 없고 고려후기에 가서야 작품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공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의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은 제문이나, 문장력이 뛰어난 문인이 남을 대신해서 지은 제문이 많다. 이런 현상은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혈연의식이 강조되고 사제 및 붕우의 관계가 중시되기 시작하는 16세기경부터 절친한 관계의 가족이나 동료를 대상으로 많은 제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한글 제문은 18세기말부터 주로 영남지방에서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하던 가사체의 글이다. 초기에는 주로 한문 제문을 번역, 또는 번안하여 낭송하다가 점차 순수한 창작으로 나아가면서 규방가사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죽은 자를 애도하면서 산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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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조문 (弔文) |
조문(弔文)이란 죽음을 조상하는 글이다.
유협이 이르기를, “조(弔)란 이름[至]이다.《시경》에 ‘신이 이르는지라[神之弔矣]’ 한 것은 신이 이르러 온 것을 의미한다. 조문객이 주인을 위로할 때에 이르러 왔다고 말을 하기 때문에 ‘조(弔)’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산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언(唁)’이라고 하고,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조(弔)’라고 한 것 역시 이러한 뜻이다. 간혹 교만하고 귀한 체하다가 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있고, 혹은 편협하고 화를 잘 내다가 도리를 무너뜨린 자가 있고, 혹은 뜻은 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한 자도 있고, 혹은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도 얽매여 펴지 못한 자가 있다. 이런 경우에 후인들이 추억하며 위로하는 것을 아울러 ‘조(弔)’라고 명명한다.” 하였다.
가의(賈誼, B.C. 168∼210, 前漢시대)가 굴원(屈原, 전국시대 楚나라 시인)을 조상(弔喪)한 것이 ‘조(弔)’의 원조이긴 하지만 ‘문(文)’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후인은 또 그것을 ‘부(賦)’라고 하니 잘못이 더욱 크다 하겠다. 제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조상하는 내용의 글에 唐나라 말기 조전장(弔戰場)이나 조박종(弔鎛鍾)과 같은 작품이 있으니, 대저 조문의 문체는 초사체와 방불한데 절실하고 긴요하며 몹시 슬퍼하는 정서가 조금 같지 않은 면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화려함이 지나치고 운자(韻字)가 느슨해서 부(賦)로 변화하고 말 것이니 격에서 벗어났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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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나라 범엽(范曄)《문체명변》의 개론을《임하필기(林下筆記)》의 저자인 이유원(李裕元)이 요약하여 옮긴 것이다. | ||
-《임하필기(林下筆記)》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으로 1871년(고종 8) 조선과 중국의 사물에 대해 고증한 내용이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저자의 해박한 식견을 펼쳐놓은 저술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비롯하여 조선의 전고(典故), 역사, 지리, 산물, 서화, 전적(典籍), 시문(詩文), 가사(歌辭), 정치, 외교, 제도, 궁중비사(宮中秘史) 등 각 부문을 사료적인 입장에서 백과사전식으로 엮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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