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390호
경상남도 진주에서 시내를 벗어나 하동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
승용차로 약 20분 정도를 달려 내동면 유수리라는 마을을 지날 때면,
도로 남쪽 건너편의 진주-사천간 지방도로와 2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 하천을 만나게 된다. 이 하천은 남강의 지류인 가화천으로,
이곳의 하천 바닥과 그 주변에는 우리나라 다른 산간 지역의 하천과는 달리
폭이 100m - 150m에 이르고 길이가 2km가 넘는 넓고 긴 계곡을 따라 암석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처럼 이 지역에 암석이 넓게 노출된 것은
가화천 상류 지역에 위치한 남강댐의 수위조절을 위해 저수된 물을 방류할 때 발생하는 하류지역의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하천의 유로를 직선화하고 폭을 넓힌 직강화 공사로 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토목 공사에 의해 우리들의 문화유산이 사라져 가는 일이 대부분의 경우인 것과는 달리,
바로 이 토목 공사에 의해 1억 2천 만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백악기 초기의 귀중한 자연사 기록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곳에 노출되어 있는 백악기 퇴적층에서는
네 발로 걷는 목이 긴 공룡인 초식성 용각류 공룡의 어깨뼈와 다리뼈의 일부 및
수백 점의 공룡 뼛조각 화석들이 발견되었고,
이 외에도 조개화석, 나무 그루터기 화석, 숯 조각 화석,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 고토양 등
백악기 당시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 생태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가치 있는 다양한 자연사 기록들이 발견,
1997년에 이 지역 일대가 천연기념물(제39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공룡화석지의 자연사적 중요성이 국내에서도 새롭게 인식되면서,
전라남도 해남의 우항리, 경상남도 고성군 덕명리, 전라남도 여수시 낭도리, 전라남도 화순군 서유리 등의
공룡발자국 화석지와 경기도 화성군 고정리 및 전라남도 보성군 비봉리의 공룡알 화석지에 대한
천연기념물 지정이 잇따르게 되었다.
백악기의 평원에서 공룡의 숨결을 느끼다
이 지역에는 ‘하산동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백악기의 퇴적층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퇴적층은 백악기 당시 이 지역에 발달되어 있던 넓은 평원과 평원 사이를 가로 지르며 굽이지어 흘러가는 강,
그리고 강 주변에 위치한 작은 호수 등지의 환경에서 쌓인 자갈, 모래, 진흙 등이 오랜 세월 땅속에서 굳어져 만들어진 역암, 사암, 이암, 셰일, 석회암 등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퇴적암들은 이곳에서 붉은색, 녹색, 회색 등 갖가지 색과 탁자모양, 소박한 언덕의 모양, 울퉁불퉁한 진흙길 모양 등의 여러 모습으로 단장하여 1억 2천만 년 전 이 곳에 존재했던, 그리고 다양하게 변화해 갔던 자연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오랜 풍상의 세월을 견뎌내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하천 계곡을 방문하였을 때에 우리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암석 중의 하나는 하천가 언덕의 이곳저곳에 분포되어 있는 자줏빛의 암석들이다.
이 암석들을 가까이 가서 관찰해 보면, 연한 붉은색이나 갈색, 또는 회색을 띠는 주먹만한 크기의 돌덩어리들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는 암석들은 경상남북도 일대의 여러 지역에서 우리들이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암석들인데,
특히 부산-대구간의 경부 고속도로, 대구-안동간의 중부 내륙고속도로,
그리고 부산-하동간의 남해 고속도로 등의 도로변에 흔히 노출되어 있다.
이 자줏빛을 띠는 암석은 백악기 당시 경상남북도 일원에 넓게 발달되어 있던 충적평원에
이따금씩 홍수가 일어나 강이 범람하면서 쌓인 모래와 진흙이 굳어진 것이다.
암석 내에 박혀 있는 감자 모양의 석회질 돌덩어리들은 평원에 쌓인 퇴적물에 나무들이 자라면서,
그 밑의 퇴적물에서 성장한 토양기원의 물질들이다(이를 지질학 용어로는 캘크리트(calcrete)라 부르는데,
간혹 이를 공룡의 배설물 흔적으로 오인하여 언론에 발표되는 경우가 있음).
이처럼 토양기원의 석회질 돌덩어리들이 나타나는 것은
백악기 당시 이 지역이 비교적 건조한 기후환경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함께 자줏빛을 띠는 암석에는 표면이 검고 부분적으로 광택이 나는
마치 미끌어진 흔적 같은 휘어 있는 면들이 관찰되는데,
이 기록은 백악기 당시 이 지역의 기후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교차함에 따라
토양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로, 백악기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오늘날의 사바나성 기후에 가까운 환경이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 자줏빛을 띠는 평원에서 쌓인 이 지역의 암석 내에서 공룡의 뼈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자줏빛의 암석들 사이에는 회색이나 연한 황색을 띠는 사암층들이 나타나는데,
이 사암들은 당시 평원 사이를 가로지르며 굽이지어 흐르던 강에서 쌓인 것들이며,
때로 이 사암에는 강바닥에 쌓인 자갈들이 들어 있다.
한편 이 지역 하천 계곡의 동측으로 올라가다 보면
어두운 회색을 띠며 책처럼 쌓여 있는 퇴적층을 만나게 되는데,
이 퇴적층은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 늪처럼 강가에 형성된 작은 호수에 쌓인 진흙이 굳어진 것들이다.
이 어두운 색의 퇴적층에서는 백악기 당시 이 지역의 호수에 살던 자라와 조개의 화석,
평원 위에 자라던 나무의 그루터기 화석, 이 나무들이 가뭄 때 불에 타고 남은 숯 조각화석,
그리고 이 숯 조각 위에 호수에 사는 미세식물인 조류(藻類, algae)가 성장하면서 만든
스트로마톨라이트 등의 흥미로운 자연사기록들이 관찰된다.
이와 같은 유수리 하천 계곡의 퇴적층에 잘 남겨져 있는 여러 자연사 기록들을 관찰하며
백악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면, 우리들은 백악기 당시 이곳에 펼쳐져 있던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우리나라 자연사의 한 단면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게 된다.
이곳 저곳에 겉씨식물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백악기의 넓은 평원과 고즈넉한 호수,
그리고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여러 종류의 공룡들과 그 외 자라, 조개 등의 작은 동물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이후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오랜 가뭄이 시작된다.
가뭄과 이로 인해 발생한 화재에 의해
병약한 공룡들이 죽고 그 사체들은 평원에 널브러져 백골을 드러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평원 저 멀리 산위에 걸쳐 있던 먹구름이 몰려오며 기다리던 우기가 시작되고,
이내 강물이 넘쳐흐르며 평원 위를 뒤덮으면 마침내 공룡의 뼈들은 진흙 속에 묻히며 안식을 찾게 된다.
우기가 끝나고 또 다시 시작된 가뭄,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서
평원의 퇴적물은 석회질의 토양으로 바뀌게 되고,
바로 이 석회질 토양이 오늘 우리들에게 백악기 공룡의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시간상자를 만들게 된다.
천연기념물의 ‘숨겨진 영웅(unsung hero)’
이처럼 우리들에게 독특하고 흥미로운 4차원의 시간여행을 안내해 주는 유수리 지역의 천연기념물은
고성의 덕명리나 해남의 우항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처럼 대중에게 그리 알려져 있지를 않아,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박지성 선수에게 현지 언론이 사용하는 용어를
잠시 빌린다면, 공룡관련 천연기념물의 ‘숨겨진 영웅(unsung hero)’이라 부를 수 있다.
유수리 천연기념물 이외에도 경상남도 지역에는 숨겨진 영웅들이 여럿 있는데,
마산시 호계리의 공룡발자국화석지와 창녕군 도천리의 공룡발자국화석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들 주변에서 오랜 세월 이 땅의 토대로 묵묵히 버텨 온 암석과 지층으로부터
우리들이 그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지식과 관심, 그리고 애정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들 삶의 영원한 터전인 지구의 역동적인 변화의 모습을 마치 파노라마 영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들은 보고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 앞으로 우리들 앞에 다가 올 지구의 미래 환경 또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글 · 사진, 백인성 문화재위원, 부경대학교 환경지질과학과 교수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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