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미술의 중심 '코펜하겐 미술관'의 작품들
상식을 벗어나 색의 본질을 추구하다
덴마크는 천년이 넘도록 군주제가 오래도록 유지된 나라로서 코펜하겐 국립미술관은 왕실의 소장품으로 비롯된 미술관이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당시 유행에 민감해 골동품과 특이한 물건들을 수집했다. 1650년 프리드리히 3세는 아버지와 자신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왕실 소유의 미술 전시실을 만들었다. 18세기 중반부터 크리스티안스보르 궁 전시실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왕실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오늘날과 같이 미술관의 면모를 갖추게 된 1763년부터 왕실 미술품을 담당했던 게르하르트 모렐 덕분이다. 그가 사들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유럽 거장들의 작품은 코펜하겐 국립미술관의 자랑이다. 덴마크 미술 중심지이며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곳으로 9000여 점에 달하는 회화와 조각, 30만점의 소묘와 판와, 2000여 점에 그리스 로마, 중세 조각의 석고 주형물을 갖추고 있다. 방대한 소장품을 코펜하겐 미술관은 1855년에 지어진 구건물과 1986년 건축한 신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파리스의 심판> 자연과 인간을 같은 비중으로
비중으로 다룬 작품이 大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파리스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다. 크리나흐는 파리스의 심판을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 하나다.
여신 에리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라는 문구가 적힌 황금 사과는 식탁 위에 던진다. 헤라, 비너스, 아테나가 황금 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자 제우스는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스로 하여금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황금사과를 주라는 한다. 파리스 앞에 나타난 세 여신은 황금 사과를 얻기 위해 헤라는 유럽과 아시아를, 아테나는 전쟁의 승리를,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헬레네의 사랑을 약속한다. 파리스는 비너스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시작이다. 세 여신은 파리스를 매수하기 위해 서 있다. 헤라, 아테나, 비너스는 명예, 권력, 사랑을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여인의 누드는 풍만한 고전적인 누드와 거리가 멀지만 당시 북유럽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등을 돌이고 있는 여인의 팔을 보면 해부학적으로 여인들의 몸은 부정확하다. 말의 시선은 어려운 심판을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화면 상단 큐피드의 화살을 쏘고 있는 방향으로 가운데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이 비너스라는 것을 암시하며 황금 사과의 주인공이 비너스라는 것을 나타낸다. 헤르메스 옆에 있는 여인이 아테나는 당시 처녀들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크라나흐는 그림의 배경을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로 설정해 메시지를 담고 있다.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파리스의 행동과 반대로 명예, 권력, 사랑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화면 상단은 북유럽의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크라나흐는 어릴 때부터 오스트리아와 알프스 풍경에 익숙해 그림에 풍경을 그려 넣는 것을 좋아했다. 에로틱한 여성의 누드에 관심이 많았으며 다양한 여성의 누드를 표현하기 위해 성경과 신화를 주제로 그림을 제작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빈 도나우 화파의 공동 창시자로 당시 북유럽에 인기가 없었던 누드화를 새로운 주제로 삼아 인기를 끌었다.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을 독일을 제외하면 코펜하겐 국립미술관이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티스의 부인(초록색 선)>
상식을 벗어났지만 색의 본질을 표현
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마티스(Henri Matisse)의 <마티스의 부인(초록색 선)>이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부인 아멜리의 초상화로서 상식을 벗어난 초상화이지만 색의 본질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초록색이 코를 가로지르고 그 색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얼굴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부자연스럽게 칠해진 초록색은 이 작품에서 빛과 그림자 구역을 나누어 주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얼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칠해진 색이 없다. 그는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색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았던 마티스는 색을 중심으로 인물을 묘사했다. 그는 색채뿐만 아니라 선과 장식을 사용해 화면을 리드미컬하게 구성했다. 마티스가 아멜리에게 수없이 포즈를 바꾸도록 요구해 완성한 이 작품은 그의 화가 인생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칼럼니스트 [명화산책] - 2009.09.29 ⓒ ScienceTimes
화려한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Matisse, Henri-Emile-Benoit, 1869~1954)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 등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길 추구했다. 이를 위해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에서 일탈한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수많은 시도 속에서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다. 대담한 색채의 사용과 강렬한 표현력을 지닌 그림을 그리면서 마티스가 유지하고자 했던 질서와 절제의 아름다움과 마티스가 진정한 색채의 대가로 인정받는 것은 화려함 속에서 절제의 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세잔과 고갱, 고흐의 후기인상파 작품에 영향을 받고 이 시기에 열풍처럼 인기를 모았던 일본예술의 영향도 받게 된다. 밝고 명확한 색상을 즐겼고 드랭, 블래맹코와 함게 야수파를 이끌어갔다. 이후 피카소의 큐비즘에 매료되기도 했으나 그 어떤 유형도 마티스의 화풍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여 야수파와는 다른 장식적이면서도 현란한 색채를 사용한다. 빨강, 파랑, 초록 3가지 색채만으로 강렬하고 풍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마티스는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를 만들어낸다’라고 말했다.
마티스 이전에는 모든 그림이 빛을 발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이것은 오류이며 불공평한 견해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그림 옆에서는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의 그림마저 빛을 잃고 만다. 젊은 세대는 그에게서 태양의 모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루이 아라공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양한 색채를 서로 약화시키기 때문에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앙리 마티스
활동
1891년 파리에서 에꼴 데 보자르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는 처음엔 푸생이나 샤르댕의 그림 같은 보수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중 유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에게 발탁되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책이나 수집하는 작품 등을 통해 피사로, 서냑, 세잔,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898년,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코르몽, 카리에르의 스튜디오로 옮겨 작업을 하다가 코르시카, 툴루즈, 생-트로페롤 여행하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확립 하게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여준 빛과 색채의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마티스는 자유로운 색채 화가로서의 길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비슷한 화풍을 보이며 야수파로 불렸던 드랭이나 블라맹크와도 교류하던 마티스는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자유로움을 실험했다. 이들과 함께 시작한 색채의 자유로움에 대한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었다. 특별히 1904년부터는 남부 프랑스에서 지중해의 찬란한 햇빛과 색채의 낭만에 젖어 들기 시작하면서 그의 그림들은 더욱 자유로와졌다. 이때부터 유명한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가히 색채의 해방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림들이었다.
회화의 제왕인 피카소가 일생의 라이벌로 여긴 화가가 있었다. 탁월한 미술적 재능에 고개를 조아렸고 두 화가는 평생토록 질투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천재성의 우열을 가르는 세기의 대열을 벌였는데 영원한 맞수인 두 화가의 치열한 승부욕으로 인해 현대 미술은 찬란하게 꽃피웠다. 바로 색채의 대가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는 숙명적인 맞수였다.
피카소가 원근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회화의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마티스도 색채의 왕국을 설립했다. 마티스가 건설한 색채의 나라가 미술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야수의 화가들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데생, 즉 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데생은 이성, 색채는 감정에 비유하면서 데생은 우대하고 색채는 홀대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색채를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면서 데생을 버리고 색채로 사물을 표현했다. 나무는 빨강색, 사람의 피부는 파란색, 하늘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1905년 살롱 도톤느 전에는 마티스, 루오, 블라맹크 등의 야수파들이 한 방을 차지하면서 전시회를 열었다.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과 <창>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에 걸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던진 야유의 표현으로, 마티스에게 ‘야수파(Fauvism)’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대상의 원래 색깔과는 전혀 다른 색채, 그것도 강렬하게 칠한 바람에 마티스는 '야수파' 화가라는 희한한 별명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다. 야수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원색을 사용해서그림에 표현했다는 뜻이다.
출품했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발적이고 다채로운 초기의 포비즘적 경향인데, 이로써 당시 포비스트들이 살롱에 첫 인정을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특히 마티스가 출품한 <모자를 쓴 여인>은 파격적인 오렌지색, 초록색, 하늘색들로 여인의 얼굴을 칠해 많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그림의 모델인 마티스 부인조차 불쾌해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구입한 레오 슈타인은 " 내가 보아온 그림들 중 가장 소름끼치는 황홀감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다" 라고 평하였다.
<모자를 쓴 여인> 작품은 상당히 억제된 수법으로 화면을 완성하고 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한 밸런스에 의하여 구사한 이 작품에 있어서, 마티스는 그가 단지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색채에 의하여 건실한 화면을 구성하는 화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중앙의 녹색을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일정한 면적에 검정과 청색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했다. 주인공의 얼굴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하기 위해 회색 종류로 칠했다.
이 그림은 부인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작가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고 색채 고유의 질서에 따라서 칠한 것이다. 이것이 회화의 본질에 가깝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를 쓴 여인, 마티즈, 1905년
마티스가 36세에 그린 이 그림은 포비즘 화풍을 받아들였을 때 그린 그의 아내 초상화이다. 이 그림의 강렬하고 도전적인 표현, 혼란스러울 정도의 요란한 색채는 파리 화단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거칠고 현란한 과시적인 색채란 비난의 성토를 마티스도 인정하며 “어쩌다 나의 그림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노력의 서막이 오른 셈이었다”라고 뒷날 술회했다.
마티스의 부인은 크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주황색 벨트가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으며 한 손에는 부채를 든 채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인물의 표현방식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파격적이다. 커다란 모자는 물감을 칠했다기보다 물감을 덕지덕지 붙인 꼴이고, 얼굴도 피부색 대신 녹색, 연보라색, 파랑색을 칠했으며, 목에는 빨강과 주황을 마치 낙서하듯 색칠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도 한쪽은 빨강, 다른 한쪽은 녹색이다. 야한 원색을 화면에 거칠게 문질러서 지저분해진 초상화는 여인을 우아하고 감미롭게 묘사하던 이전의 다른 초상화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마티스는 인물을 닮게 그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화가의 회화적 기교나 재능의 잣대인 데생이나 명암까지도 무시했다. 마치 난폭한 무법자처럼 원색의 색채를 무기 삼아 화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회화의 전통을 파괴한 이 마티스의 초상화는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평론가들은 입체감, 공간적 깊이, 정교한 붓질 등 전통 미술이 추구한 미적 가치를 짓밟은 마티스의 야만적인 행위에 경악했다. 마티스는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해야 할 예술가의 본분을 저버리고, 화가에게 금기인 원색을 버젓이 사용했다. 해부학적인 지식도 저버렸다. 추함이 아름다움을 이겼다. 조화와 균형, 비례를 존중하던 미술의 고귀한 전통은 야만인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관람객들은 미술의 질서를 파괴한 화가의 야수같은 짓에 분개했다. 조잡하고 역겨운, 최악의 그림이라면서 마티스에게 야유를 퍼붓고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미술계를 장악한 보수적인 화가들도 마티스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기대에 부풀어 전시장을 찾았던 마티스는 자신을 겨냥한 인신공격성 비난이 쏟아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두 번 다시 전시장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아내에게도 전람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티스는 왜 비난을 자초한 것일까? 색채가 형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했던 마티스는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색채라고 믿었다. 감정의 언어인 색채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최초의 화가가 되고 싶었다. 마티스는 그런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 감정이 없는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
- “정확성이 진실은 아니다.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진정한 화가에게 장미 한 송이를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장미를 제대로 그리려면 지금껏 그렸던 모든 장미를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앙리 마티스 -
마티스에게 색채는 주제이고 형태이며 명암이었기에 그는 평생에 걸쳐서 열정적으로 색채의 가치를 증명하는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마티스는 색채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탐구하라. 그림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특정한 파란색은 당신의 영혼을 파고들며, 특정한 빨간색은 당신의 혈압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 1905
마티스 부인의 초상 정신성을 높여주는 선(線)과 리듬
<마티스 부인 "초록색의 선">은 살롱 도톤느 전시 기간 중에 그렸다. <모자를 쓴 여인> 보다 더 파격적으로 초록색을 얼굴에, 파란색을 머리에 넣었다.
사람의 얼굴은 보통 피부색으로, 머리는 검정색으로 칠하는데 이 작품은 관습에 개의치 않고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색을 결정했다.
색채의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 한가운데 그어진 녹색 선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얼굴색이 완전히 다르고 배경도 마찬가지이다. 명암을 없애는 대신 서로 반대되는 색을 칠해 강하고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초상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거친 야수주의 필법으로 그려 파리 화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마티스의 부인>의 작품가격은 현재 400억원에 달한다.
야수파의 선구자로서 강렬한 색채와 대비가 뚜렷하게 보이는 전형적인 야수파적인 그림이다. 마티스가 의도한대로 그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관람객이 마티스에게 이 그림은 여자 같지 않다고 하자 마티스가 말하기를 여자가 아니라 작품이라고 했다.
한편 마티스의 작품 모델이 되어주었던 아내와 1936년 이혼한 이후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모델은 조수 리디아였다. 러시아 출신의 리디아는 의과대학을 다니다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로 마티스를 돕기 시작했다. 리디아는 비서와 말동무, 집사 역할까지 맡았다. 마티스가 1954년 사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도 리디아였을 만큼 그녀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마티스는 20세기 회화에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열어놓은 탁월한 색채감각을 지닌 화가였다. 야수주의는 고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차이점으로는 야수파 작품은 프랑스식 표현주의로 말하고 헤겔의 작품은 독일식 표현주의라고 말한다. 야수파와 표현주의는 정신적으로 같은 것을 지향한다. 야수파의 마티스는 색채의 신비성, 상징성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리고, 독일식 표현주의는 선으로 표현했다. 똑같이 자기가 느낀 것을 강렬하게 표현했지만, 야수파는 색채로 독일식 표현주의는 선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티스는 신고전주의, 현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등의 19세기 각종 운동을 거쳐 나름대로 독특한 스타일을 굳히게 된다.
피카소가 형태를 원래의 대상에서 변형을 시도했다면 마티스는 색상을 변형시켰다. 마티스의 이러한 시도는 추상표현주의에 많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물의 고유의 색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속의 주관적인 색상만 표현하려고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20세기의 미술의 큰 방향을 제시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는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가 마티스의 그림과 그의 가족을 좋아해 마티스의 집에 자주 출입하는 사교조차 못마땅한 눈으로 보았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리오 스타인 남매 - 파리 화단의 권위 있는 수집가)
페르낭드는 피카소보다 12살 연상인 당시 37세의 마티스를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마티스는 잘생긴 용모에 짙은 붉은색 턱수염을 길렀고 몸집이 크고 당당했으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는 말할 때도 언제나 어휘를 신중하게 골랐고, 연하의 피카소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예의를 갖추었다. 피카소는 마티스를 대할 때 무뚝뚝했고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으나 마티스는 마치 큰형처럼 당당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피카소의 세탁선 작업실은 온갖 잡동사니로 난장판이었다. 세워진 화판과 잡다한 물건들로 몸 돌릴 틈조차 없는 공간에 개와 고양이, 심지어 거북이와 원숭이도 데리고 살았으며 밤에는 쥐까지 설쳐댔다. 거기에 비하면 마티스의 작업실은 누구나 쉬어가고 싶을 정도로 안정감 있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 수집가 칸바일러는 <나의 화랑, 나의 화가들>에서 세탁선의 피카소작업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를 이렇게 썼다. “라비냥 거리에 있는 화가들의 작업실이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한지 아마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피카소의 방엔 염색한 종이들이 벽면에서부터 바닥까지 넝마처럼 널려 있었고, 데생화 위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앉아 있었으며, 푹 꺼진 안락의자 위에는 돌돌 말린 그림들이 겹겹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화덕 밑에는 잿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요. 한마디로 끔찍했습니다.”
둘은 성격 또한 정반대였다. 마티스는 이해심이 깊어 상대를 편하게 해주었고 몸에 밴 교양과 점잖은 화술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는 어떤 합동 전람회에도 출품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기 작품과 견주어 타인 그림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 작품에 대한 타인의 비평에도 다소곳이 귀 기울여 경청했다.
그에 비해 피카소는 전람회가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세속적 행사라며 공모전 출품을 일체 거절했고 자신의 개인전시회도 잘 열지 않았으며, 자기 작품을 남의 작품과 비교하는 것조차 듣기 싫어할 만큼 늘 자만심에 차 있었다. 무엇보다 피카소의 인간적인 결점은 유아독존의 오만함이었다. 그렇다보니 그의 주위에는 좋든 나쁘든 칭찬 일변도의 아부꾼만 모여들었다. 피카소는 자기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과는 상종하려 들지 않았다. 비판의 쓴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자기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통설에서 피카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작품의 비공개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선대의 그림이나 당대의 그림 중 배울 만한 점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이를 깨달아 자기 작품에 이용할 장점을 찾아냈다. 평소에는 늘 무뚝뚝했으나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취흥에 젖으면 갑자기 다변가로 돌변했다. 특히 다혈질의 선동가 아폴리네르와 죽이 맞아 때론 짓궂고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상함, 점잖음, 예의와는 거리가 먼 놓아기른 야생마였으며 술판 분위기를 휘어잡는데 장기를 발휘했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를 만나면 “그림 잘 돼가?”하고 물었지 “언제 전람회 열어?” “그림 좀 팔렸어?” 하는 말은 묻지 않았다. 그는 그런 세속적인 영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프리카 원시미술을 그림에 응용하기가 파리화단에서는 마티스가 처음이었을까? 피카소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에서 인물의 얼굴을 아프리카 가면같이 처리한 것이 과연 피카소만의 독창성에서 나온 방법일까? 당시 파리 화단에는 원시미술에 주목한 화가들이 여럿 있었기에 그 출발은 한 시대에 무슨 유행처럼 공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새로운 미술의 개척자로서 파리 화단에 심심찮게 화젯거리를 제공하고 있던 마티스와 피카소, 그 둘의 선두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발견과 함께 둘의 경쟁에 끼어든 제3자는 앙드레 드랭이다.
***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경쟁관계는 마티스가 사망한 1954년까지, 근 50여 년 동안에 걸쳐 이어졌다. 둘은 서로의 그림을 시기했으나 내심으로는 서로를 아꼈다. “네가 그렇게 표현했다면 나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며, 둘은 그림을 통해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피카소와 마티스. 피카소와 브라크의 관계도 그랬다. 그들은 상대의 그림을 사랑했기에 질투하고 괴로워했다. 페르낭드를 사랑할 때에도 피카소는 페르낭드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질투심을 앓았다. 그러나 그 질투심이 사라졌을 때 괴로움도 사라졌고 무관심에 이어 이별이 찾아왔다.
- 김원일, 피카소, 이룸, 2006, p1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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