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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국립미술관 - 엘 그레코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外

Gijuzzang Dream 2009. 10. 6. 22:00

 

 

 

 

 

 

 

 헝가리 국립 미술관의 작품들

 

헝가리 옛 왕궁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국립미술관은

부다페스트 시와 다뉴브 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있다.

립미술관이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시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부다 왕국을 건설한 벨러 4세가 다뉴브 강변 언덕에 요새를 겸한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후에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과 합병한 뒤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 채의 날개 건물을 가진 바로크 양식의 왕궁을 지어 머물렀다.

두 개의 날개 건물 사이와 둥근 지붕이 있는 성을 증축하면서 현재 부다 왕궁의 완성되었다.

 

이후 부다 왕궁은 제 2차 대전 중에 거의 파괴되었지만

1955년 왕궁을 다시 건축해 루트비히 재단의 현대 미술관과 역사박물관, 도서관이 들어섰다.

국립미술관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있지만

케이블카를 운영하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미술관으로 연결된 케이블 철도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철도로

일반인들은 1870년부터 케이블을 타고 갈 수 있었다.

왕궁을 헝가리 국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소장품의 역사는 15세기부터다.

부다 왕국의 마차시 왕은 이탈리아에서 선물 받은 귀중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실을 만들

정도로 예술품 수집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의 특별한 예술품들은 사후에 터키의 침략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일부만 남게 되었다.

그 이후 귀족들에게 기증받은 작품들이 토대가 되어 국립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새장에 갇힌 여인의 마음

 


 전통 거부한 독특한 화풍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576년경, 캔버스에 유채, 164×121 


헝가리 국립미술관에서 당시의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엘 그레코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다.

개종하려는 순간의 막달레나를 표현한 이 작품은

국립미술관의 소장하고 있는 작품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성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귀신으로 해방시켰던 여인,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매춘부가 되었지만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를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여인, 간음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6세기경부터는 세 인물이 동일시되어 죄를 용서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 광야 동굴에서 살면서

평생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선교하며 살았다.

동굴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가슴을 손을 얻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 앞에 있는 책 위에는 해골이 놓여 있다.

이 작품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긴 머리카락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생활을 멀리하고 회개한 삶을 나타내고 있다.

화면 왼쪽 향유 병은 개종하기 전에 창녀였던 막달레나를 상징하며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결심한 후 세속적인 행복을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책은 성서를 나타내며 해골은 은둔하는 성자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는 죽음에 대한 은둔자의 명상을 암시한다.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있는 막달레나의 행동은

세속적인 삶이 끝났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골과 긴 머리카락은 막달라 마리아의 도상학적 상징물이다.

화면 왼쪽 두 개의 섬이 보이는 풍경과 베네치아 풍의 화병은

이 작품의 배경이 베네치아임을 나타낸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화면 전면에 크게 부각되고 있는 인물과

가운데 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을 붙여서 표현했다.

또한 배경의 풍경도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일부 차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로마 시절의 제작된 것으로

후에 그는 스페인에서 활동하면서 같은 주제로 다시 제작했다.

후기의 작품과 이 작품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있지만 스페인 작품은 성녀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엘 그레코는 고향 그리스를 떠나 예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정착하기를 원했으나

티치아노를 비롯한 거장들 때문에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이 풍부한 스페인으로 이주한다.

엘 그레코는 톨레토에 살면서 가톨릭 교구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종교화를 제작해 성공한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식적이고 과장된 것으로 간주되어

비난을 받기 시작하면서 미술사에서 잊어졌지만 1900년부터 그를 추종하는 피카소나 잭슨 폴락 등

모더니즘 작가들과 미술 평론가들에게 재조명되었다.

 

 

 

「참회하는 막달레나」

 
막달레나와 세례자 요한의 공통점은?
 

둘 다 광야에서 고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미술에서는 자주 알몸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답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숲 속의 세례자 요한'은

알몸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림을 본 사람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고 하고,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심하게 벗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들 뿐 아니라 성 예로니모도 광야에 나가면 웃도리를 예사로 벗어 던지고, 성 세바스티아노, 성 아녜스, 성 가타리나도 덩달아 몸매를 자랑한다.

아마 미술의 역사에서 노출 패션을 선보인 것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알몸은 「진실」의 다른 말이다.

진실은 모름지기 한 올의 거짓도 없는 알몸이라야 한다는 「벌거벗은 진실(nuda veritas)」의 재현 전통이

고대의 전통으로부터 종교미술에 스며들면서 15세기에는 성자들도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게 되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목부터 조심스레 드러내다가 차츰 어깨와 등허리로 옷주름이 흘러내리고 급기야는 가슴과 배꼽을 거쳐 둔부와 허벅지까지 시원스레 노출한다.

남자들도 뒤질세라 너나없이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각선미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때부터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교회와 세속의 엇갈린 요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성서가 말하는 막달레나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알몸의 성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태로운 소재였다.

죄악과 참회, 관능과 정숙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를 들추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막달레나)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온다.

웬만한 제자들은 저리 가라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와 어깨를 겨룰 만큼 기록이 풍부해 예수님께서 왜 막달레나를 열 세 번째 제자로 삼지 않았나 궁금할 정도다.

 

얼른 생각나는 대목만 꼽아도,

간음의 죄를 저지르고 돌에 맞을 뻔한 마리아,

시몬의 집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마리아,

베다니아에서 예수님의 발에 나르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낸 마리아,

언니 마르타가 끼니를 준비하는 동안 주님 곁에서 귀기울인 마리아,

죽은 오라비 라자로를 살려 달라고 간청한 마리아,

예수님께서 골고타에 오르시는 고난을 지켜보았던 마리아,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

입관을 앞두고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리아 같은 주제들이 떠오른다.

 

그뿐일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찾았던 사람도 막달레나였다.

어머니 마리아나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척 섭섭했을 테지만,

이런 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막달레나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가워서 손을 내미는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잘라 말하셨다.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요한 20, 16~18).

 

 
광야에서의 고행

 

화가 엘 그레코는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여러 차례 그렸다.

엘 그레코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16~17세기 화가들에게 가장 주문이 많이 들어왔던

주제였다. 그 까닭은 대강 이랬다.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의 개신교 운동이 확산되자

가톨릭에서도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로마에서는 막달레나가 과거를 후회하면서 눈물을 뿌리는 그림을 교화의 수단으로 내세운다.

신앙의 변절자들에게 재개종을 권유하는데 '참회'의 슬로건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막달레나가 광야에 나가서 30년 동안 고행했다는 이야기는 성서에는 없고

「황금전설」에 나온다. 왜 하필 광야를 참회의 장소로 골랐을까?

막달레나 뿐 아니라 많은 은둔 성자들이 그랬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고행하시며 시험을 받으신 적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자신들의 삶을 개척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광야'는 도시의 반대말이다.

도시와 전원, 문명과 자연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일반화된

근대의 사상이다. 도시가 인간이 지어 올린 유혹과 죄악을 상징한다면

광야는 그것의 속죄와 물림을 의미한다.

땅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모성이요, 무한히 인내하는 생명의 품으로 보았다.

 

 
엘 그레코의 그림

 

엘 그레코는 자연의 품에 돌아가서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그렸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스산한 풍경이다. 인적도 보이지 않는다.

막달레나는 바람이 씽씽부는 추운 겨울을 남루한 겉옷 한 벌로 지낼 모양이다.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있지만, 우리가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깝다.

막달레나의 파리한 입술과 시린 눈망울에는 슬픔이 짙게 묻어있다.

금세라도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다.

 
막달레나는 오른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감싸쥐었다.

시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응시한다. 앞에 놓인 해골은 죽음의 단호한 표상이다. 막달레나의 왼팔은 육신과 죽음이 한 매듭으로 묶여 있다는 덧없음의 교훈을 설명한다. 뒤쪽 벼랑에는 인동넝쿨이 한 가닥 붙어 있다.

시련을 이기는 기도의 생명력을 이런 식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닐까?

배경에는 푸른 구름이 어지럽게 춤춘다.

죄 많은 기억이 꼬챙이를 휘둘러서 먼 곳의 구름을 휘저어놓은 모양이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는 예사로운 풍경조차 내면의 기억을 반영한다.

 
막달레나의 이름을 풀면 '비탄의 바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비탄의 눈물이 후회의 바다를 씻어준다"라고 읽으면 어떨까?

- 가톨릭신문 [성미술 이야기]

 

 

 

<엘 그레코, El Greco

「참회하는 막달레나」: The Penitent Magdalene>

   

 

1. El Greco. Mary Magdalen in Penitence

 1576-1578. Oil on canvas.108x87cm. 

 Szepmuveseti Muzeum, Budapest, Hungary.

  

 

2. El Greco. Mary Magdalen in Penitence.

   c. 1577. Oil on canvas. 108×101cm

   Worcester Art Museum, Worcester, Massachusetts, USA.  

 

 

 

3. El Greco. Mary Magdalen in Penitence. 

c. 1580-1585. Oil on canvas. 104x85cm,

Nelson Gallery-Atkins Museum, Kansas City, Missouri, USA.   

 

 

4. El Greco. Mary Magdalen in Penitence with the Crucifix.

c. 1585-1590. Oil on canvas. 109x96cm,

Musée del Cau Ferrat, Sitges, Spain  

 

 

5. El Greco, The Penitent Magdalene

1603~1607년, oil on canvas, 118x105cm,

Bilbao, Felix Valdés Izaguirre Collection 

 

 

 

 

 

 

 

 

 

 

 

 

 강한 대비 이루는 <새장을 들고 있는 여자>

 

 

새장을 들고 있는 여자, Woman with a Bird Cage  

Jozsef Rippl-Ronai,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86×130 


 

헝가리 국립미술관은 헝가리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헝가리 화가들은 특히 19세기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펼쳐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들이 등장한다.

헝가리 출신의 화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대표적인 작가가

요세프 리플 로노이(Jozsef Rippl-Ronai)이다.

그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서 나비파로 활동했다.

국립미술관은 리플 로노이의 대표작 <새장을 들고 있는 여자>을 소장하고 있다.

모자를 쓴 갈색 옷을 입은 여인은

새장 속에 있는 카나리아와 눈을 맞추기 위해 몸을 살짝 굽히고 서 있다.

서 있는 그녀 뒤로 어두운 청색의 큰 소파가 놓여 있고 나무 의자가 벽에 붙어 있다.
여인의 등 곡선과 소파의 곡선이 조화롭지만

밝은 빛으로 표현한 여인의 얼굴, 손, 새장은 어두운 실내 분위기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요세프 리플 로노이(Jozsef Rippl-Ronai, 1861∼1927)의 이 작품은

그가 즐겨 그렸던 어두운 실내 풍경을 그린 것으로

여인의 외출복과 새장은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인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칼럼니스트, [명화산책]

- 2009년 10월 06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