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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숭례문현판’ 특별전시

Gijuzzang Dream 2009. 7. 8. 16:54

 

 

 

 

 

 

‘숭례문 현판’ 옛 모습으로 거듭나다!

 

 

- 수리복원이 완료된‘숭례문현판’특별전시 -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숭례문 화재로 일부 훼손되었던 현판의 복원을 완료하고

2009년 7월 7일(화)부터 8월 16일(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중앙홀 에서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복원된 현판과 함께 숭례문 현판의 복원과정,

옛 사진을 비롯한 숭례문 현판 관련 고증자료, 화재 수습당시 모습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지난해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숭례문 현판 복원을 진행하면서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에 소장된 숭례문 현판 탁본자료,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유리건판사진, 복원 전 현판의 글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지덕사 탁본이 원래의 글자체임을 밝힘에 따라 숭례문 현판글씨의 원형을 찾게 되었다.

 

한편, 숭례문 현판 복원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 단청장(丹靑匠)으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오옥진씨와 홍창원씨가 참여

하였으며, 현판복원을 위해 숭례문 화재로 훼손된 부재중 재사용이 불가능한 부재를 활용하여

현판의 복원에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번 특별전시에 앞서 7월 4일(토)에는 11시부터 17시까지 숭례문 현장을 개방하여

현판을 미리 볼 수 있도록 현장 전시를 한다.

방문객들에게는 숭례문 현판 탁본(축소 인쇄본)을 기념으로 나누어 줄 예정이며,

또 희망자에 한해 숭례문 현판 축소모형으로 직접 탁본 해보는 행사도 계획하고 있다. 

 

 

다음은 숭례문 현판 수리부터 복원 공개까지의 과정이다.
▲2008년 2월10일~4월14일 : 숭례문 화재로 인한 현판 손상 및 수습(고궁박물관)
▲2008년 4월15일~8월31일 :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관, 과학적조사, 정밀실측도 작성
▲2008년 10월 8일              : 지덕사 소장 숭례문 탁본 숭례문 현판 진본으로 확인
▲2009년 4월 3일               : 숭례문 현판 복구용 부재 선정
▲2009년 4월22일               : 수리복원 계획보고
▲2009년 4월22일~4월26일 : 현판 복원용 목재 이송 및 제재
▲2009년 4월27일~5월10일 : 복원용 목재 이송, 재 접합 및 판각
▲2009년 5월11일~5월19일 : 보강판 제작 및 조립, 테두리목 조작 및 결합
▲2009년 5월20일~5월26일 : 단청, 수리복원 완료
▲2009년 7월4일                : 숭례문 현장서 복원 현판 공개
▲2009년 7월7일~8월16일   : 국립고궁박물관 2층 중앙홀에서 특별 전시  

 

 

<수리 전, 후 현판 비교> 

    

 

 

 숭례문 현판

  (수리 전)

 

  

 숭례문 현판

 (수리 후)

 

<수리 전, 후 서체 비교>

 

 

    

 

 현판(수리 전)

 

    

 

 지덕사 탁본

 

    

 

 현판(수리 후)

 

 

□ 지덕사(至德祠)

 

ㅇ 명 칭 :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

ㅇ 지정별 :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동작구)

ㅇ 지정일 : 1972. 08. 30

ㅇ 소재지 : 서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

ㅇ 수 량 : 건물 3동(사당, 서고, 제기고) 및 묘 1기

 

- 조선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 -1462)의 묘와 사당

- 사당은 숙종 1년(1675)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으로,

   원래 숭례문 밖에 있던 것을 19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임.

-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에 수록된 이승보와 숭례문 현판 기록

 

ㅇ “숭례문”(崇禮門) 이란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나온 말이다.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柳辰仝)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 이승보(李承輔, 1814-881)

ㅇ 전주(全州), 호는 석산(石山), 자는 치강(稚剛), 해선(海善)의 아들이다.

ㅇ 184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52년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를 지냈다.

    고종 등극 후 대원군의 중용으로 1864년(고종 1) 이조참판, 개성유수, 도승지,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특히 1865년 경복궁영건도감 제조로 재직하였다.

 

 

□ 이유원(李裕元, 1814-1888)과 임하필기(林下筆記)

ㅇ 이유원

- 본관 경주(慶州), 자 경춘(景春), 호 귤산(橘山),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의주부윤(義州府尹),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름

-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1865년(고종 2)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되었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에 오름.

 

 

ㅇ 임하필기

- 이유원이 1871년(고종 8) 임하려(林下廬)에 은거하여 작성한 총 39권 33책의 방대한 도서로

   현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음.

- 조선과 중국의 사물에 대하여 고증한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저술로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비롯하여 조선의 전고(典故) ·역사 ·지리 ·산물 ·서화(書畵) ·전적(典籍) ·

  시문(詩文) ·가사(歌辭) ·정치 ·외교 ·제도 ·궁중비사(宮中秘史) 등 각 부문을 백과사전식으로 엮어 놓음.

 

 

□ 각자장(刻字匠) :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ㅇ 각자란 글을 새기는 것, 즉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판각을 각자 또는 서각이라 하며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각자장이라 함.

ㅇ 무구정광다라니경, 팔만대장경, 훈민정음 원본 등 많은 목판인쇄물이 각자로 이루어짐.

ㅇ 오옥진씨가 기능보유자로서 인정되어 있음.

 

 

□ 단청장(丹靑匠) :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ㅇ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 사찰, 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함.

ㅇ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단청장(丹靑匠), 화사(畵師), 화원(畵員), 화공(畵工), 가칠장 (假漆匠), 도채장(塗彩匠) 등으로 부름

ㅇ 이치호, 홍점석, 임석정, 홍창원 등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음.

 

 

 

'숭례문 현판' 원래의 모습대로 수리 후

제자리에 걸기로 !

 

 

- 지덕사(양녕대군 사당)의 숭례문현판 탁본자료, 진본으로 밝혀져 -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로 일부 훼손된 현판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숭례문 복구공사가 완료된 후 제자리에 걸기로 하였다.  

숭례문 복구자문단은 10. 8(수) 고증 및 기술분과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지덕사 탁본 등 옛 자료와 현재의 현판을 비교․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숭례문현판 처리방안을 논의한 결과, 이와 같이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수습된 현판은 보존처리작업을 위해 해체하여 분석한 결과,

앞판과 뒤판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원래 한 부재였던 앞판이 한국전쟁 당시 포탄 파편 등으로 부분 훼손되어

결손 부위를 나무판으로 땜질식 수리를 하면서 지금과 같이 38조각으로 맞추어

보수되었으며, 뒷면의 보강 덧판은 앞판을 고정하고 보강하기 위하여

15조각의 판재를 가로로 잇대어 붙여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동안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지덕사에 소장된 숭례문현판 탁본자료를 대여받아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일제 때 촬영된 유리건판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덕사 탁본자료, 그리고 현재의 현판 글자를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

그 결과 지덕사의 탁본에는 글자는 물론 현판의 나뭇결까지 동일하게 찍혀있어

진본임을 알 수 있었고,

당시 숭례문 현판글씨의 원형을 확인 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글자 형태의 비교결과

한국전쟁 시 훼손되어 보수된 부분 이외의 글자는 탁본과 동일하며,

탁본과 일제 때 유리건판사진의 글자가 같은 것으로 조사되어

현재의 현판은 한국전쟁 이후에 보수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글자형태는 ‘崇’자와 ‘禮’자에서 개별 획 삐침의 형태, 폭, 연결 등에서

일부 변형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덕사(서울 동작구소재 유형문화재 제11호)는

양녕대군(1394-1462)과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지덕사 관계자들은 현판탁본을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 1814-1881)가

고종 2년(1865) 경복궁복원 영건도감 제조 재직 시 확보한 것으로 전언하는데

이는 19세기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에서도

이승보가 숭례문 현판 개색(改色)을 직접 확인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865년에서 1871년 사이에 탁본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숭례문 현판은 지덕사의 탁본자료를 근거로 더 많은 고증자료를 확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수리할 예정이며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과 서예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완벽한 수리로 원래의 자리에 현액(懸額)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현판실측 도면

 

 

 

 

 

 

 

 

 

 

 

  앞판(앞면) 38조각

  앞판(뒷면) 38조각

뒤판(앞판보강재) 15조각

 

 

 

 

 

  현재현판

  유리건판사진

  지덕사소장 탁본자료

 

<현판과 탁본의 서체 비교>

숭례문 현판

 

 

 

지덕사 탁본

 

 

 

-  담당자 : 건축문화재과 이정연, 김순관(042-481-4865, 4806)

-  문화재청, 2008-10-27

 

 

 

 

 

 '숭례문 현판' 고유제

 

 2009년 7월4일 

  

 

화재 당시, 화마가 현판을 향해 다가오자 소방관들은

현판을 구하기 위해 급히 숭례문에서 현판을 떼어냈다.

그러나 상상 이상으로 현판은 무거웠고

결국 10여m 아래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현판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가슴도 무너졌다.”

 

화재로 부터 숭례문 현판 구한 박성규 소방관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38조각으로 조각조각 깨어진 현판이 1년 5개월에 걸친 복원 끝에

되살아나 지난 토요일(7월4일) 고유제(告由祭)와 함께 공개되었다.

고유제는 중대한 일을 치른 뒤 그 내용을 사당이나 천지신명에 고하는 

제사를 말한다.

나라의 대문인 숭례문의 현판이 본 모습을 찾은 것을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이번 공개행사는 숭례문 앞에 차려진 제단에서 진행되었다.

  

 

좌측으로 새롭게 복원된 현판, 우측으로 이번 복원에서 부재를 강조한 현판의 모형,

앞으로 제물들이 올려져 있었다. 

 

 

먼저 화재 직후 현판의 수습부터 복원까지 과정을 안내한 후, 

피해현황과 보존처리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현판은 추락의 충격으로 테두리목 및 일부 부재의 파손이 있었고

부재와 부재사이의 이격이 발생했으며 바닥판 등 부분적인 유실이 있었다.

현판 본체 및 15점의 파편과 5점의 철물을 수습하여 X-선, 적외선 골고루 쬐어주며

못의 위치 형태 개수를 파악하였고, 

적외선 검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묵서 및 낙관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6종류의 안료를 확인했고 현판의 재질이 비교적 구하기 수월한 소나무인 것도 확인하였다.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현판 역시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복원이 진행되었다.

측면을 보면 두껍게 칠해진 단청 아래로

많은 부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현판을 볼 수 있다.  

복원에 사용된 소나무 역시

숭례문 복원을 위해 기증 받은 소나무 중에

훌륭한 나무들 중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복원전 현판                         지덕사 탁본                      복원된 현판 

 

원서체를 찾기 위해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에 소장된 숭례문 현판 탁본자료와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유리건판사진, 복원 전 현판의 글자를 비교분석한 결과

지덕사 탁본이 원래의 서체로 밝혀냈다.  

붉은 동그라미 안쪽을 유의해서 보면 복원 전과 복원 후 현판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숭례문 현판은 숭례문과 함께 600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미 여러번 보수를 통해 처음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던 것을

원안에 가깝게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