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 잠들어 있는 그대에게 묻는다
한국 미라 연구 프로젝트 그룹
미라는 현대와 고대의 연결 고리
고고학 · 사학 · 의학 전문가 공조
당대 생활 · 질병 등 미시사 복원
조선시대 미라 연구에 빠진 연구자들이 서울대 의대 고병리연구실에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서울대 의대 대학원생 이상준 · 오창석씨,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
서울여대 송미경교수, 단국대 서민 교수, 이화여대 김이석 교수, 단국대 김명주 교수.
2009년 이달 초 한 구의 미라가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지난 5월 말 경남 하동 진양 정씨 문중 묘역에서 이장을 하던 중 발견된 조선 중기 사람,
정희현의 두번째 부인 온양 정씨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이다.
이집트 혹은 알프스, 시베리아 등 건조기후 혹은 냉대기후 지역에서 발견되던 미라가
2000년대 들어 부쩍 한국에서도 발견 · 보고되고 있다.
2001년 경기 양주 해평 윤씨 묘역에서 발견된 소년 미라 ‘단웅이’를 시작으로
2002년에는 경기 파주 파평 윤씨 묘역에서 세계 최초로 모자 미라가 발견됐다.
이 미라는 조선 중기의 세도가 윤원형의 종손녀로 신원이 파악됐다.
2004년에는 대전에서 현존 최고의 조선 미라인 어모장군 송희종의 미라가 출토됐다.
이 밖에 청주와 연기, 문경, 부안, 장성, 나주, 강릉, 서울 등에서도 조선시대 미라가 발견됐다.
![](http://img.khan.co.kr/news/2009/06/24/20090624-b03b.jpg)
400~5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신이 21세기에 미라로 발견되는 기묘한 현실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미라의 가치는 이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미라를 통해 거시사에 가려져 있던 미시사를 복원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시사의 복원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질 수 있다.
미시사의 복원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질 수 있다.
출토복식과 도자기, 서간문 등의 부장품을 통해서는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미라 자체를 통해서는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온양 정씨 미라의 해포작업을 주도한 안동대 임세권 교수(61·사학)와 이은주 교수(51·복식사), 서울여대 송미경 교수(49·복식사),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43·고병리학), 단국대 의대 서민 교수(42·기생충학)와 김명주 교수(37·해부학), 이화여대 의학전문대학원 김이석 교수(36·체질인류학) 등이 조선시대 미라 연구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가칭 ‘한국미라 연구를 위한 학제간 연구모임’이다.
가칭 ‘한국미라 연구를 위한 학제간 연구모임’이다.
조선시대 미라가 출토되면 프로젝트 그룹처럼 움직여 연구를 진행하는 모임에는
부경대 사학과 신명호 교수와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박준범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원장도 함께하고 있다.
미라의 발굴 및 신원확인, 생활사 복원에는 고고학과 사학, 복식사 연구자들의 공조는 필수.
“복식사나 사학, 의학 등 한쪽으로만 고립돼 연구를 진행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제한되게 마련”
이라며 신 교수는
“특히 사학 등의 문헌연구가 미라의 신원 및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라의 신원과 사망연대, 사인 등을 파악하는 데
족보와 조선왕조실록, 개인문집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이들 연구진이 뭉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
이들 연구진이 뭉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
결정적 계기는 조선시대 미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소년 미라 단웅이다.
먼저 현재 미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신동훈 교수는 2001년 단국대 재직 시,
단국대박물관이 주도한 소년 미라 단웅이 발굴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공동연구를 진행한 김명주 교수도 마찬가지. 서민 교수와 김이석 교수도 2000년대 중반 합세했다.
조선시대 미라가 발견 · 보고되는 사례가 늘면서,
미라로부터 유의미한 의학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서 교수는 단웅이의 장기에서 결핵균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간염 바이러스를 검출하면서
국내에는 생소한 분야이던 고기생충학에 눈을 돌렸다.
미라에서 수습한 뼈조직을 바탕으로 신체의 연령을 추정하는 뼈조직연령추정법을 통해
한국인 표준데이터를 만들고 있는 김이석 교수는
“신원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신체의 조직을 바탕으로 연령 등 신원정보를 파악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다”며
“현대인과 고대인의 뼈는 형태상 차이가 나는데 그게 제게는 흥미로운 부분이고
그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다”며 미라 연구에 몰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미라 연구의 성과는 특히 의학 쪽에서 두드러진다.
미라 연구의 성과는 특히 의학 쪽에서 두드러진다.
최근 조사한 하동 온양 정씨 미라의 인변과 장기에서는 민물게와 가재 등에 기생해
폐디스토마를 유발하는 폐흡충이 다량 발견됐다.
서민 교수는 “하동 정씨 미라는 출산 중 사망한 것이라기보다는 임신상태에서 이를 다량 섭취해
폐흡충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미라의 뇌와 장기 등에서 샘플을 채취하고 내시경, 조직검사, 유전자분석, 컴퓨터단층촬영
등을 실시한다. 현재 미라 및 유골만 출토된 묘에서 200구 정도의 샘플을 확보했다.
현재로서는 미라에서 채취한 샘플의 완벽한 보존에 신경쓰고 있다.
현재로서는 미라에서 채취한 샘플의 완벽한 보존에 신경쓰고 있다.
김이석 교수는 “학문의 발전,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뤄지면 갖고 있는 샘플을 통해
새로운 결과가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신동훈 교수도 “아직은 의학적 정보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지만 5년이건 10년이건 자료가 축적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정보의 파편만이 존재하지만 10년쯤 된다면 스토리가 나올 겁니다.
저희의 최종목표는 의학정보를 바탕으로 사학과 복식사 등의 자료를 보강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질병사와 생활사를 재현 · 복원하는 겁니다.”
김명주 교수도 거들었다.
김명주 교수도 거들었다.
“조선시대 미라를 연구하는 이유는 공룡을 연구하는 이유와 비슷하다면 공감하지 않을까요?
미라는 현대인과 고대인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제시해줄 수 있을 겁니다.
미라는 의학 전공자들이 인문사회과학자들과 함께 융합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앞으로 강력한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의 관심은 다만 조선시대 미라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의 관심은 다만 조선시대 미라에 머물지 않는다.
앞으로 아시아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도 참여해 광범위한 샘플뱅크를 구축해
아시아의 질병사 · 생활사를 새로 쓰고 싶은 게 포부다.
조선시대 미라 ‘자연 생성’
16~17세기 회격묘서 주로 출토
발굴빈도 건설붐과 밀접
회곽묘(국립경주박물관 이양수 학예사 제공)
조선시대 미라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조선시대 특히 16~17세기에 조성된 묘에서 출토된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시대 묘 중에서도 고위층 사대부 집안에서 묘제로 택한 회격묘(灰隔墓)에서 주로 출토된다.
부경대 신명호 교수에 따르면, 회격묘는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주자가례>를 조선의 실정에 맞춰 상장례를 변용하면서 나타난 묘제.
조선 초기만 해도 집권층에서는 전통적인 석실분 묘제가 혼용됐지만
국가의 예법을 규정한 <국조오례의>와 <주자가례>에 석실분에 비해 제작이 용이하고
비용이 덜 드는 회격을 쓰도록 명시하면서 점차 회격묘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신 교수는 “특히 조선 중기 이후 회격묘가 널리 보급됐다”며
신 교수는 “특히 조선 중기 이후 회격묘가 널리 보급됐다”며
이를 통해 “조선사회가 명실상부하게 유교화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매장법을 비롯해 상장례는 문화변동에서 최후에 바뀔 정도로 보수적이기 때문.
회격묘는 관과 구덩이 사이를 석회와 숯가루, 가는 모래, 황토 등을 섞어 다져서 회격을 만든다.
학자에 따라서 회격을 시신을 안치한 목관을 둘러싼 외곽으로 보고 ‘회곽묘’라고도 부른다.
회격묘는 드릴로 두세 시간은 작업을 해야 내부의 목관이 나올 정도로 단단하다.
방수 · 방습 · 방충이 좋고 외부의 공기가 완벽하게 차단돼 미라화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모든 회격묘에서 미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회격묘에서 미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미라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염포를 해체해야 알 수 있다. 이를 ‘해포’라고 한다.
송미경 교수는 “집안마다 차이는 나지만 대개 70벌 나온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수의와 염습은 시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관에서 움직이지 않게끔 고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네모나게 시신의 형태를 잡기 위해, 옷과 솜이불 등으로 빈 공간을 채웠다”고 설명했다.
해포를 기다리는 하동 출토 온양 정씨 미라.(안동대 박물관 제공)
수의가 잘 남아 있는 경우 미라화된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커진다.
설령 유골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수의와 함께 보존된 경우 더 많은 생물학적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신동훈 교수는 “미라뿐 아니라 유골을 통해서도 다양한 의학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관을 열고 해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나 가스가 나오지는 않을까.
관을 열고 해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나 가스가 나오지는 않을까.
김명주 교수는 “외국에서는 ‘미라의 저주’ 운운하지만 의학적으로 그런 케이스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신 교수가 덧붙인다.
“수술복을 입고 진행을 합니다. 수술실보다는 위생상태가 덜 안전하죠.
수술복을 입고 진행하는 것은 시신의 DNA가 작업하는 연구진의 DNA로 오염되지 않도록 막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렇다면 이들 미라는 어떻게 해서 연구실로 옮겨지게 될까.
그렇다면 이들 미라는 어떻게 해서 연구실로 옮겨지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발견되는 조선시대 미라는 한국의 건설 붐과 맥을 같이한다.
묘역이 택지지구로 편입돼 문중에서 묘를 이장하거나 도로, 댐 혹은 저수지 건설 예정지역에서
문화재발굴기관이 지표조사를 수행할 때 발견되는 것.
신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미라가 자주 발견된 것은 우리나라의 건설 붐과 관련이 깊다”며
“미라를 통해 의학적 샘플을 채취할 수 있는 것은 향후 10~15년 이내로,
시기가 지나면 조사하고 싶어도 진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동 출토 온양 정씨 미라의 발에 신겨져 있던 종이로 꼬아 만든 지혜.(안동대 박물관 제공)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미라에 대한 후손들의 인식이다.
송미경 교수는 “대부분 이름있는 문중의 묘역에서 미라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후손들이 시신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통유교예법과 윤리가 아직도 강력하게 남아 있어서,
이장 도중 미라가 나온다 하더라도 재매장하거나 화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미라를 연구진에 기증 혹은 공개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미라를 연구진에 기증 혹은 공개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조선시대 미라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는 신동훈 교수의 연구실에는 많아봤자 1년에 2~3회 미라 조사
의뢰가 들어온다. 먼저 후손들이 해포와 조사를 의뢰해도, 나중에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와 관련해 신교수는 최근 공개된 하동 온양 정씨 미라를 연구진이 조사할수 있도록
후손들이 2주간 시간을 준 데 대해 고마워 했다.
“이렇게 연구진에게 맡겼다가 다시 모셔가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연구진에게 맡겼다가 다시 모셔가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1주일, 아니 최소 3~4일만이라도 저희들에게 맡겨주시면
의학적으로 의미있는 샘플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복식사 연구자들도 좀 더 시간을 갖고 해포작업을 진행할 수 있죠.
미라 연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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