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세종대왕, 그리고 일식
1919년 3월 초, 두 팀의 탐사대가 영국을 출발했다.
한 팀은 브라질의 소브랄로 향해 떠났고,
영국 왕립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아서 에딩턴이 이끄는 다른 한 팀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작은 섬 프린시페가 목적지였다.
이윽고 개기일식이 예정되어 있는 5월 29일이 되자
프린시페 섬에서 에딩턴 일행은 관측 및 촬영 기기들을 점검하며 긴장의 고삐를 바짝 조였다.
그런데 탐사대의 바람과는 달리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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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서 에딩턴 |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정확한 시간은 오후 2시.
그때까지 비가 그치지 않으면 지난 수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오 무렵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개기일식이 일어나기 30분 전부터는
태양도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오후 2시, 태양이 달의 검은 그림자에 가려
서서히 빛을 잃어가자 에딩턴 일행은 분주히 움직이며
태양 가장자리 근처 하늘에 나타난 별을 촬영했다.
그로부터 5개월여 후인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타임스’지는
다음과 같이 거창한 헤드라인이 걸린 신문을 발행했다.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론, 뉴턴주의는 무너졌다!”
기사 내용은 영국의 일식 관측대가 천체 관측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해냈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더불어 20세기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신화도 시작되었다.
빛이 태양 중력장 속에서 휘어지는 현상 관측
개기일식 때 에딩턴이 촬영한 천체사진에는 태양 뒤에 가려져 있던 별이 찍혀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바로 거기에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이 담겨 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확장해 1915년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의 요지는
우주가 굽어진 4차원 시공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 중력장 속에서 휘어지는 현상을 실제로 관측한다면 그의 이론이 맞다는 것이 검증된다.
빛은 언제나 똑바로 나아가는 것으로 알았던 당시,
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평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에딩턴은
태양이 일시적으로 사라져 낮에도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개기일식 때 태양의 중력에 의해
별빛이 휘어지는지 검증해보기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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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은 음력 1일인 초승달일 때만 일어난다. |
4개월 전부터 영국에서 태양 근처의 별 위치를 정확히 측정해온 에딩턴은 그날 태양의 중력에 의해 그 별의 위치가 달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브라질로 간 관측대 팀과 에딩턴이 이끄는 관측대 팀의 관측 결과에는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합동 회의 결과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이론이 맞는 것으로 결론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 조선시대에도 그처럼 일식으로 인해 과학혁명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1422년(세종 4) 정월 초하루, 세종은
신년 하례식도 미룬 채 창덕궁 인정전 뜰 앞에서 소복을 입고 있었다.
만조백관들 역시 소복을 입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들이 기다린 건 바로 오래 전부터 서운관 관원이 예고한 일식이었다.
마침내 해의 서쪽 부분에 낮달이 겹치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둥둥둥…, 북이 울렸다.
얼마 있다가 태양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자 북소리가 그쳤고,
세종은 섬돌에서 내려와 태양을 향해 절을 네 번 하고는 의식을 마쳤다.
하지만 이날 일식을 맞이하는 구식의(救蝕儀)가 끝난 후
대신들은 서운관 관원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유는 15분이나 앞당겨 일식을 잘못 예보한 탓에 임금을 추위에 떨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로 인해 서운관 관원 이천봉은 곤장을 맞아야 했다.
서운관 관원 이천봉, 곤장을 맞다
꼭 10년 후인 1432년(세종 14) 정월 초하루, 공교롭게 이번에도 일식이 예보되었다.
일식이 예정된 시각은 정오. 세종은 예전처럼 신년 하례식을 미룬 채 소복 차림으로
근정전 영외의 섬돌 위에 나아가 구식의를 올렸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또 난리를 피웠다.
사흘 후 사헌부에서는 서운관 관원들에게 죄를 내리라고 세종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세종은 짙은 구름으로 인해 못 보았을 수도 있으니 관측을 잘못한 죄가 없다며
서운관 관원들을 두둔했다.
왜 세종은 10년 전 15분 정도 일식을 늦게 예보한 서운관 관원은 곤장을 맞게 했으면서
이번에는 아예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묻지 않았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일식에 얽힌 몇 가지 상식부터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일식이 공교롭게도 정월 초하루마다 예보된 이유부터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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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고리 모양으로 모이는 금환일식 |
일식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태양-달-지구의 순서대로 일렬로 늘어설 때 일어난다.
즉, 달이 태양과 지구의 중간에 끼여
지구로 오는 태양빛을 가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달이 태양-달-지구의 위치에 올 때가
삭(朔 ; 음력 1일)이고,
태양-지구-달의 위치에 올 때가 망(望 ; 음력 15일)이다.
때문에 일식은 음력 1일인 초승달일 때만 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일식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는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29.5일마다 한 바퀴씩 돌지만
지구의 공전궤도면과 달의 공전궤도면이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4년에 3번꼴로 일어난다.
지구상에서 관측자가 있는 지점이 달의 본그림자 안에 있으면
태양이 전부 달에 가려지는 개기일식이 보이고,
관측자가 달의 반그림자 지역에 있으면 태양의 일부가 달에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보인다.
본그림자 안에 들어서 개기일식의 관측이 가능한 지역은 폭이 100여㎞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달의 그림자는 지표면에서 초속 680~910m로 매우 빠르게 이동하므로
개기일식이 지속되는 시간은 2분여에 불과하다.
태양의 지름은 140만㎞이며, 달의 지름은 고작 3천475㎞ 정도이다.
그런데도 작은 달이 큰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을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태양은 달보다 400배 가량 큰 데 비해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400배 가량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기막힌 우연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겉보기 지름’은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의 공전궤도는 약간 타원이다.
달이 지구에서 가장 멀리 위치해 있을 때는 그만큼 작아 보이므로,
가끔 태양의 한복판만 가려서 태양이 고리 모양으로 모이는 금환일식이 되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식 기록은 중국 고대 경전인 서경(書經)의 하서(夏書)에 남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의 기록인데, 실제로 그때 일식이 일어났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어쨌든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기록에 속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식 기록은 기원전 54년 4월 초하루 신라 경주에서 관측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최초인지의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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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일식을 하늘이 군주에게 내리는 벌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
옛 사람들에게 대낮에 해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식은
여간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인들도 태양이 일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개기일식에
대해 어느 정도 공포감을 갖고 있다.
개기일식이 예보되면 그 전에 미리 생활필수품을 사재거나 은행예금을 인출해 현금을 마련해 놓는 사람들이 있다.
또 힌두신화에서는 일식을 나쁜 신이 태양을 삼켰다가 토해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요즘도 일식이
일어나는 날은 임산부들이 출산을 연기하려고 난리를 피우기도 한다.
옛날에는 일식을 하늘이 군주에게 내리는 벌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태양은 곧 군주의 상징인데, 그것이 갑자기 사라지므로 군주의 입장에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예보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언을 구하곤 했다.
또 일식이 일어나는 날에는 왕이 소복을 입고 구식의를 행했다.
백성들에게도 이 같은 사실을 알려 마을에서 풍악을 금했으며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등
나라 전체가 조심스런 처신을 했다.
그런데 임금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평화로우면
예보된 일식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신하들의 입장이었다.
이와 반대로 세상이 어지러우면 양음 쇠약해져 음이 양을 침범하는 일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일식은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좋은 견제장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후세에서 해괴하게 여길 것
이 같은 상황은 일식 외에 태양의 다른 이상현상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1520년(중종 15) 4월 2일 정말 이상한 사건이 중종에게 보고되었다.
전라도 전주에서 두 개의 해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태양 근처의 구름에 눈 또는 얼음 조각이 섞여 있을 경우
태양광선이 굴절되면서 태양이 둘 또는 세 개로 보이게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중종 역시 지방에서 올라온 그 이상한 보고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중종은 지극히 이상한 일이라며 만약 두 해가 함께 나타난 것을 역사에 쓴다면
후세에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아뢰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삼정승은 이에 대해 모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즉, 이들은 이상한 재변이 보고되었을 경우 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하며 근신하는 태도를 가지면
손해될 일이 없는데 굳이 다시 그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었던 것이다.
일식과 마찬가지로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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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전라도 전주에서 두 개의 해가 함께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
한편 군주의 행위에 대해 신하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경우
태양의 이상 현상이 실록에 집중적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다.
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419년(세종 1)은 한 해에만 햇무리가 나타난 기록이 무려 74회나 된다.
이는 한 해에 보통 10회 미만인 다른 해의 기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태종에게 있었다.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물러난 태종은 그 후에도 실권을 놓지 않고 나라를 모든 일을 좌지우지했다.
더구나 태종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장애가 되는 외척 세력을 미리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양위한 지 3개월 후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과 그의 동생 심정 등을 대역죄로 엮어서 처형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세종은 처갓집 일가가 파멸하는 모습을 앉은 자리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을 만큼
힘이 없는 임금이었다. 때문에 당시 세종의 처지가 햇무리 진 태양처럼 광채를 잃은 임금이란 의미에서
그처럼 많은 햇무리가 기록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하지만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는 양일병출(兩日竝出) 및 햇무리 등의 태양 이상현상과
일식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일식은 그런 현상과는 달리 미리 예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 역법 중 가장 정밀한 수시력
조선 초기 일식의 예보는 수시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시력이란 중국 전토를 평정한 원나라 세조가 곽수경 등에게 명하여 1281년 새로이 만든 역법이다.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기록한 수시력은
역대 중국 역법 중 가장 정밀하고 정확한 달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도 사실 수시력을 차용한 것으로서 내용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서운관에서는 수식력에 나온 한 달의 길이와 1년의 길이 등을 감안하여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시력에 의한 예보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수시력이 중국을 기준으로 한 역법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위도와 경도는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하면
절기와 일출ㆍ몰 시각에서 약간의 오차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422년의 일식이 15분이나 빨리 예보되고 1432년에 예보된 일식이 아예 관측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세종으로서는
일식을 잘못 예보한 서운관 관원에게 차마 죄를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1432년 정월 초하루, 예보된 일식이 일어나지 않자
세종이 중국에서도 일식이 예보되었다는 사실부터 먼저 확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세종은 잘못된 일식의 예보가 중국에서 만든 역법을 사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뒤처진 과학기준이
문제이지 담당 관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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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 |
이후 세종은 일식의 연구와 관측에 특히 관심을 쏟았다.
중국과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일식과 월식에 관한 정보를 얻어 오라고 지시하는 한편, 일식 연구를 위한 토론회까지 열도록 지시했다.
더불어 세종은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의 제작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많은 집현전 학사들이 매달린 지 10년 만인
1442년 완성된 것이 바로 칠정산내외편이다.
칠정산이란 해와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칠정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방법을 뜻한다.
즉, 7개의 움직이는 별의 위치를 파악해 절기는 물론이고
일식과 월식 등을 예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였다.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법을 한양의 위도에 맞게 수정ㆍ보완한 것이 칠정산내편이며,
아랍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원나라에서 편찬한 회회력을 조선에 맞게 고친 것이 칠정산외편이었다.
특히 칠정산 외편은 한 일본 과학사학자가 “한문으로 엮어진 이슬람 천문 역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으로 평가할 만큼 정교한 계산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 칠정산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세종과 당시 조선의 학자들은
혼천의와 간의 같은 정밀한 천문 관측기구들을 직접 제작하고,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해시계와 물시계 등을 발명하는 성과까지 올릴 수 있었다.
신년하례식도 미룬 채 기다리게 했던 그날의 잘못 예보된 일식은
세종으로 하여금 담당 관원들의 처벌 대신 조선의 과학혁명을 낳게 했던 셈이다
- 이성규 기자
- 2009년 07월 17일/ 07월 24일 [이야기 과학 실록 (60)-(6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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