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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月城)과 해자(垓子)
경주를 방문하는 많은 이들은
불국사, 석굴암, 시내 한복판에 불룩하게 솟아있는 고분들, 첨성대, 안압지 등 이른바 ‘천년왕국’ 신라의 한 단면을 보면서 옛 영화를 실감한다.
특히 천마총,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고분들과 안압지를 보며
당시 나라를 지배했던 신라 왕실이 많은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는 데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부와 권세를 누렸던 이들은 어디에서 생활하였을까?
즉, 신라왕실의 궁궐은 어느 곳에 있었을까?
우리에게 알려진 신라 왕궁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월성(月城)이다.
경주를 찾는 많은 이들은 무심히
사적 제 16호인 월성(반월성)을 지나다닌다.
신라 파사니사금 22년(101)에 건설되었다는 월성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반달과 같은 평면을 하고 있어 반월성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숲에 가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으레 연상하는 돌로 되어 있는 성곽(城郭)이 아닌 토성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평지 위에 서 있는 둔덕처럼 보인다. 성 내부에는 당시의 건물은 물론 한 채도 없다.
‘과연 이곳이 신라 궁성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이곳이 궁성임을 증명하려면
성 내부와 주변지역을 발굴해서 의구심을 떨칠 만한 유물 또는 유구(遺構)가 발견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월성 내부는 전면적으로 발굴조사된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벽을 조사한 유리건판 사진이 있고,
197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동쪽 성벽 부근을 조사해서 문지(門址)를 찾았으나
내부 깊숙한 곳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다만, 월성 내부에 대한 지하물리탐사(Ground Penetrating Radar 탐사)를 통해
내부에 많은 건축물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확인하였을 뿐이다.
대신, 월성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1984~1985년에 이루어진 월성외곽지역 시굴조사는
월성 남쪽에 남천(또는 문천)이 흐르고 있는 것 외에도
북쪽에도 성벽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현재 ‘월성해자’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고 있다.
필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월성해자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1985년 월성을 둘러싼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월성해자’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밖에도 많은 건물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보통 ‘성 주위를 판 연못’이라는 해자의 정의상
월성 주위를 물이 둘러싸고 있었음은 확인되었으나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우리가 보통 연상하는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로 된 넓고 깊은 연못은 아니다.
월성해자는 작은 연못들이 여러 개가 이어져 하나의 해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10여 개의 연못들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고
이러한 연못들이 서로 연결되어 일정한 방향으로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각각의 연못들은 큰 것은 약 3,600㎡, 작은 것은 약 1,000여㎡ 정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그 형태도 일정하지 않다.
다만 연못의 외곽을 돌로 둘러서 그 경계를 표현하였고,
경계가 변함에 따라 개축된 흔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9~2006년, 2007~현재까지 조사된 연못(이하 4호 해자, 5호 해자로 칭함)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월성 성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유적인 석빙고(보물 제66호)의 북서 · 북동편에 위치한
이 해자는 물이 고이고 흐르기를 반복하는 습지에 돌을 둘러 조성되었다.
처음엔 지름 30cm 내외의 강돌을 쌓아 석축을 조성하다가
이후 50cm 내외의 할석(다듬은 돌)을 쌓아 앞선 것보다 좀 더 정연하게 석축해자를 만들었다.
특히 4호 해자의 경우 강돌로 쌓은 석축인 4-1차 해자의 영역이 가장 바깥쪽으로 넓게 이루어져 있고,
약 5m 가량 안쪽으로 할석으로 쌓은 4-2차 해자,
그보다 더 3~5m 안쪽으로 강돌과 할석을 섞어서 쌓은 4-3차 해자가 있다.
즉, 가장 넓었던 석축해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역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4호 해자의 동쪽에 있는 5호 해자의 경우도 별반 차이가 없다.
5호 해자 역시 강돌로 석축을 조성한 이래 할석 및 강돌+할석의 혼합 등으로
수차례 개축한 흔적이 보이며, 담겨져 있는 연못물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돌로 짠 배수로가 연못과 연못 사이를 잇고 있다.
월성의 전체적인 고저차(동서간의 해발고도 차이가 약 18m)를 감안해 보면
동에서 서로 물이 흘렀을 것이다.
할석으로 된 석축해자는
앞서 언급한 4호와 5호 해자 말고도 임해전지(현재의 안압지) 길 건너 월성 동쪽 벽에 붙어 있는
일명 ‘나 구역 석축해자(시굴 및 발굴조사가 시작될 무렵 성벽을 따라 가~라의 4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하였음)’ 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총길이 약 200m, 면적 약 1,150㎡의 평면 삼각형에 가까운 연못으로
북면과 동면은 직선, 성벽에 닿은 면은 벽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제작에 이용된 돌은 50×20cm의 할석을 쌓아 축조하였는데
임해전지의 석축과 유사한 축조 방식으로 보아
임해전지가 조성될 당시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이렇게 월성을 휘감고 도는 물길 덕분에
성벽 외부를 자연스레 방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국력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졌을 때
이 해자는 방어적인 기능이 약화되어 임해전지와 같은 조경시설의 일부로 그 용도가 변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건설된 해자 안에서는 어떤 유물들이 주로 나올까?
해자의 내부퇴적토는 물기를 많이 머금은 고운 점토로,
거의 회색 또는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을 띤다.
조사구역 내에서 나온 유물들은 고분처럼 의도적으로 묻은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유물의 종류나 보존상태, 성격 등을 말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유물의 종류는 토기, 기와뿐만 아니라 철기, 동물뼈, 목제품 등 다양한 편이다. 토기는 대각에 2단 이상의 구멍이 뚫린 접시에서부터 병과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기와는 뾰족한 연잎을 가진 초기 막새에서 보상화문, 가릉빈가문과 같은 화려한 양식의 것들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유물은
‘재성(在城)’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로서 유일하게 월성 일대에서만 출토된다. 새로운 월성조사를 꿈꾸며
지금까지 월성해자 발굴조사에 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월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물길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월성과 외곽지역을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성의 권위를 높였을 것이며, 성 내 · 외의 물을 처리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능도 갖추었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해자의 전체적인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조사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야 하며,
연못으로 둘러싸인 해자를 건너 어떻게 성 내부로 출입하였는지 등에 대한 연구도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야 한다.
월성해자 발굴조사는 유구한 천년의 역사를 갖는 신라왕실의 궁성인 월성조사를 위한 첫 걸음으로서
앞으로도 많은 조사 성과가 나와서 월성조사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정태은,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2009-06-08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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