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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미디어법 처리 문제를 두고 몸싸움을 벌이는 의원들.
어느 날, 공의휴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에 재상을 존경하던 사람이 생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공의휴는 생선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지금 나는 재상의 벼슬에 있으니 나 스스로 생선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지금 생선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난다면 누가 다시 나에게 생선을 보내주겠소. 그래서 받지 않은 것이오.”
공직에 있을 때가 아니라면 그는 이 정도의 선물은 받았을 것이다.
때만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굴비세트나 갈비세트가 전국적으로 돌아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공직자인 그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자신의 권력이 행여 백성에게 피해가 될 것을 염려해서다.
그가 원한다면 수산시장에서 날마다 제일 좋은 생선을 그에게 상납하고
장사에 필요한 이권을 가져갈 것이다. 세상 이치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이다.
공짜는 없다. 그는 한 마리의 생선도 받지 않고 월급을 타서 사 먹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집 채소밭에 난 채소가 맛이 좋으면 모조리 뽑아버렸다.
자기 집에서 짜는 베가 좋은 품질의 것이면 불살라버렸다.
그는 자신이 앉은 권력의 자리에서 생기는 온갖 이권을 눈에 보이는 대로 없애버렸다.
그것은 잡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논에 생긴 잡초를 뽑아야 농사가 잘된다.
우리나라에도 청백리가 많이 있었다. 고려 출신의 정승 황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황희는 조선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고위관직을 역임한 뒤 세종 시절 최고위직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영의정으로 지내면서 단벌의 관복을 입고 조정에 들었다.
어느 겨울밤 관복을 빨아 말리고 있는데 급히 입궐하라는 세종의 명이 전달됐다.
황희는 당황해 부인이 바지 솜과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엮어준 여름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세종은 황희의 관복에 솜이 삐져나온 것을 보고 황희는 청렴한 관리인데,
무슨 돈으로 양털로 된 관복을 입나 싶어 물었다.
황희는 당황해 왕에게 양털이 아니라 솜바지에 넣은 솜이라고 아뢰고 자초지종을 밝혔다.
황희의 모습을 자세히 본 세종은 영의정의 품위 유지도 중요하다고 보고
비단 열 필을 당장 하사하라고 명했다. 황희는 어명을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는데,
영의정이 비단 옷을 걸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결국 황희는 세종이 내린 비단을 받지 않았다.
법치와 효도의 모순 속에서…
순리, 청백리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수신(修身)이다. 수신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순리열전에 나오는 관리들은 수신을 한 사람들이다.
대학의 8조목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아직까지 우리의 유전자 속에 흐르고 있다.
수신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음을 뜻하고,
제가는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음을 말한다.
치국은 나라를 다스림을, 평천하는 온 천하를 편안하게 함을 뜻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세상사를 다스리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사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수신은 선비가 행동하는 정신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에 대해 ‘악(惡)지식’이라고 비난했던
가톨릭 원로 정의채(84·사진) 신부는 현 정권에 직언을 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한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는 정말 심사숙고해서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정해야 한다.
왜 이렇게 민심이 떠났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일대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심이 떠난다는 것은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 “고소영 인사에 촛불시위,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이어지면서 민심,
특히 젊은 층의 이반이 두드러진 것은 걱정스럽다”며
“노 전 대통령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잘 되지 않았다면
이 대통령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즉, 당조차 화목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원로가 지적하는 어지러움의 근본 역시 수신이다.
고대엔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친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신과 치국은 다른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 이 둘은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제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할 경우 순리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막중한 국사에 엄정한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청렴결백, 강직하게 행동해도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사마천은 초나라 소왕의 재상이었던 석사의 예를 들었다.
그는 건실하고 정직하고 청렴해 아첨하거나 권세를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현을 순시하는 도중 살인사건을 접했다. 재상이 범인을 찾아가보니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재상은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진해서 옥에 갇힌 뒤, 사람을 시켜 왕에게 이렇게 아뢰도록 했다.
“살인자는 저의 아버집니다. 아버지를 처형하여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불효이고
법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한 것은 불충입니다. 저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왕이 말했다. “범인을 뒤쫓아갔지만 잡지 못한 것이니 벌을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소.
그대는 전과 다름없이 맡은 일에 힘쓰시오.”
그러자 석사가 말했다. “아버지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군주의 법을 지키고 받들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 왕께서 저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지만 벌을 받아 죽는 것은 신하로서의 직분입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대에는 법보다 부모가 더 가까웠다. 효는 유가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관리들은 재직 중 부모가 돌아가면 조정에서 물러나 3년간 상복을 입고 지냈다.
국가에서도 이를 어쩔 수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부자의 관계는 법보다 가까웠다.
순리로서 강직하게 행동하다 큰 걸림돌에 걸린다.
바로 아버지가 살인자라니 법을 따르자니 불충이 되고
법을 지켜 관리로서 행동을 하자니 불효가 된다.
이때 고대의 순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대의 왕들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이 탄생한다. 현대 정치사에서 순리를 찾으라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 무척 예민한 문제다.
강직하고 청렴하게 일한 공직자 중 일부는 이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너무 많아 걱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