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유영준 여맹위원장

Gijuzzang Dream 2009. 5. 17. 02:08

 

 

 

 

[현대사 아리랑]

 

 

 

 여맹위원장 유영준

 

“여남평등 이룩하여 평등조선 건설하자 !


‘여남평등’을 외쳤던 유영준(가운데).

양옆은 당시 여성운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다.

왼쪽이 황신덕, 오른쪽이 최은희. <푸른역사 제공>


 

 

먼지투성이 전차길에서 겨우 몇 걸음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까 호젓이 가을맛을 느낄 수 있는 종묘 앞.

먼저 ‘유영준의원’의 현판이 너무 좁고 나지막한데 놀랐다.

미닫이를 여니 여사는 햇빛이 포근히 내려쪼이는 진찰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가

기자가 방문한 뜻을 말하니
“내가 무슨 혁명가나 된다구. 그렇지만 하구 싶은 말은 많우. 글쎄 지난 번에 김규식 박사의 부인을 찾아갔더니 떡이랑 밥 깍두기를 만들어서 인민봉기 진압하는 사람들을 먹이기에 한참 바빴다고 하겠지요.

소요를 진압하는 사람이란 북에서 쫓겨온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폭동이래도 좋고 소동이래도 좋지만 정당히 살려고 사는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강도나 절도같이

생각할 수야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끝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말하는데 ‘방직’과 ‘양잠’을 해가지고 미국에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하겠지요. 농촌에 가 보면 태반의 여성이 앞을 가릴 치마 하나 없는데 우리가 짠 ‘베’를 미국에 바쳐서 우리가 잘 살겠다고! 그건 노예근성이에요.”

산원 원장 같은 점은 조금도 없고 주머니를 느직이 찬 모양이 일찍이 ‘동우회’ ‘근우회’를 거쳐

이젠 조선여성 해방을 진두에서 지휘하는 여류투사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후덕한 시골 할머니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부드러운 가운데 칼날 같은 판단성을 내포한 여사의 어조는 쉴 사이 없이 듣는 자의

긴장을 요구한다. 이야기가 입법기관에 이르자,
“나는 민전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서 처음부터 이런 현상이 올 것을 예감하고 반대하였더니 오늘의 선거 결과란 중추원의 재현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리고 남조선 소요사건만 보더라도 민생문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오늘, 먹을 것을 달라는 솔직한 부르짖음에 탄압 일관으로 진정시키려면 그것은 정말 소요의

원인을 파악 못하는 것일 게요.”

그리고 여성 풍기문제에 화제를 돌리니까 여사는 과학자다운 날카로운 눈으로
“조선 여성들이 깜둥이를 많이 낳는 이유를 아십니까? 악덕 유한마담들은 모두 흰 아이를 배게될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돈이 있으니까 의사를 끼고 낙태를 시킬 수도 있겠지만 흑인에게 짓밟히는 것은 하층 계급의 여성들일 테니까 하는 수 없이 열 달을 채워서 ‘깜둥이’라도 낳는 수밖에 없지요.”
창에 기대어 여사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띠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이며 전국부녀총동맹 위원장인 유영준(劉英俊, 1890~?) 인터뷰 기사이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13일치.

 

 

유영준은 평남 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 정신고등여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가서 북경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다녔다.

의학공부를 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요시찰 인물 갑호로 지목되었고

1920년 1월 여자흥학회 회장이 되었다.

1927년 5월 근우회 결성에 들어 중앙집행위원 및 정치연구부 위원이 되었다.

46년 12월 부총 후신인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위원장이 되었고,

이 무렵 유영준산원을 열어 무산계급 여성들 출산을 도왔다.

‘살려는 권리를 달라’는 인터뷰 기사 바로 밑에 보이는 기사가 눈길을 끄는데,

유영준 위원장이 낸 부총 성명이다. ‘임·박 양씨는 조선여성 대표가 아니다’라는 제목이다.

임영신(任永信) 여사는 유엔총회에서 박인덕(朴仁德) 여사는 만국기독교대회에서 조선부녀 대표라 하여

반소 언구를 농하여 비난이 자자한데 부총에서는 두 여사의 자칭 대표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이승만 박사 개인의 사절인 임영신 여사가 반소 언구를 농하여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이는 확실히 추태이며

그 망동은 용서할 수 없다. 또 박인덕 여사는 조선 대표라고 자칭하여 만국부녀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나

그는 과거 일제시대 일본의 황도주의(皇道主義)를 고취한 녹기연맹(綠旗聯盟)의 간부이고

현 미군정의 관리이니 그는 절대로 조선 대표가 아니다.

이들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어떠한 희망을 갖고 있는 듯하나 이것은 일종의 환상적 미몽이다.

유영준 인터뷰가 실린 46년 11월 13일은 매우 숨가쁜 상황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인민항쟁이 경남북, 충남북, 경기도까지 번져나가고 있었다.

들불처럼 일어난 인민항쟁의 기세는 처음 “쌀을 달라!”는 소박한 요구로부터 시작하여

경찰대 발포로 죽은 6명 시신을 둘러메고 “미군 물러가라!”

“매국반동 괴뢰집단 이승만과 한민당을 박살내자!”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경찰서를 불지르고 경찰관을 죽이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참가자 300만에 사망 300, 행방불명 3600,부상 2만6000, 체포인원 1만5000에 달하는 내란 수준이었다.

47년 말에 <동학란과 그 교훈>이라는 소책자가 간행되었는데,

박헌영은 이 글에서 10월 인민항쟁을 동학농민혁명, 3·1운동과 함께 ‘조선해방사 3대 투쟁’으로 꼽았다.

 


47년 ‘8·15폭동 음모사건’으로 체포


이처럼 인민대중을 역사발전의 주체로 보는 박헌영이 서울을 벗어난 것은 46년 9월 29일이었다.

관에 담긴 채 산악을 헤매며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46년 9월 6일 좌익신문인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이 폐간되고,

박헌영을 비롯한 이주하 · 이강국 · 권오직 같은 조선공산당 요인들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은

같은 날 밤이다. 가장 큰 당세를 자랑하던 합법정당 당수라는 사람이 당사가 있는 서울을 관 속에 누워

극적 탈출을 한 조선공산당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때에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것은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한 김삼룡 · 이주하 · 이관술 · 이현상이었으니,

모두가 일제 말 ‘경성트로이카’ 핵심들이다.

그런데 당 살림꾼 이관술은 ‘조선정판사사건’이라는 조작극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고,

김삼룡 · 이현상은 지하로 들어갔으며, 이주하는 미군 CIC에서 단식 중이었다.

유영준 인터뷰 기사 옆에 실린 이주하 소식이다.

9월 초 ‘안녕질서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와 CIC를 오가며 혹독한 취조를 받던

이주하 말이다.

“나는 조선민족 해방을 위하여 40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도야지 대접을 받는 것보다

나도 조선사람으로서의 고집이 있는 만큼 사람으로서 깨끗이 죽겠다.

죽을 때까지 이 감방에서 옮기지 말고 죽거던 시체를 내다오.”
1948년 8월 15일에 낸 해방 3주년 기념 성명이다.

‘남조선 800만 여성의 의사와 이익을 대표하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은 8·15 제3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전여성이 총궐기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라는 이 성스러운 민족적 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조선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세워지며

우리 인민을 대표하는 통일중앙정부를 조직하여 외군을 몰아내며 우리의 인민과 여성이익을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외제와 국내 반역도당의 방해를 물리치고 이러한 합법적인 인민정권의 창설을 위하여

부엌에서 공장에서 직장에서 농촌에서 전여성은 더욱 용감하게 총궐기하자.

승리의 날은 멀지 않았으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제주도 4·3인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 증파가 결정되었을 때 여맹 반응이다.

단 두 문장으로 된 짧은 성명은, 여맹을 포함한 남로당 전체의 절망적 지하투쟁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죄악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전여성의 이름으로 이를 단연 배격하여 제주도의 ‘토벌’ 즉시 중지를 강경히 요구하며

우리 인민들은 외군을 철퇴케 하여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멸족적 동족상잔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뽑혀


46년 11월 24일, 공산당 · 인민당 · 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이 되었고,

조선부녀총동맹을 확대개편한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이 되면서 유영준은 위원장이 된다.

47년 8월 이른바 ‘8·15폭동 음모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된다.

‘정칠성씨 구류처분. 유영준씨 석방이란 낭설’이라는 제목 아래 설린

<독립신보> 47년 8월 27일치 기사이다.

‘서대문경찰서에 피검되어 취조를 받고 있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정칠성(丁七星)씨는

지난 25일 치안관으로부터 29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하며

중앙신문 여기자 문분란(文芬蘭)씨는 동일 저녁 석방되었다 한다.

또한 종로서에 피검되었던 여맹위원장 유영준씨의 석방설은 허보라고 하며

여맹 간부 문옥선(文玉善) 남궁희(南宮熙) 이계순(李桂順)씨 등과 함께 계속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

1948년 7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주석단의 일원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이 된다.

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이 된다.

6·25를 앞뒤로 한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것을 보면 남로당 숙청바람에서 살아남은 것 같은데,

그 다음 소식은 알 수 없다.

소련군정 사령부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등 주요 인사들 악력과 성향을 간추린 ‘평정서’가 최근 밝혀졌다.

김국후 기자가 엮고 한울출판사에서 펴낸 <평양의 소련군정>에 나온다.


‘유영준(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여성) 188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1918년부터 반일투쟁에 나섰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30년부터 여성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해방 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을 창설해 위원장이 된다.

소련에 대해 우호적이고 미국인들의 정책을 적극 반대한다.

노련한 여성 지도자로서 남조선 여성들에게 위신이 높다. 남로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조국통일을 지지하는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유영준이 한 말이다.

“남조선 여성들은 단선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수류탄 제작과 투척에 참여하고,

제주도 · 소백산 · 지리산 등지에서 봉기자들에게 식량을 나르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앞으로도 남조선 여성들은 이 회의 결정을 성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봉건유제 타파해서 여남평등 이룩하자!”
여맹 사람들이 부르짖었던 말이다. ‘여남평등’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그때에는 그렇게 말하였다.

‘남녀평등’이 아니고 ‘여남평등’이다.

그때 여맹사람들이 무슨 한시를 짓자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압운(押韻)상 여자를 앞에 둔 것이 아니다.

종속관계에 놓여진 남녀문제를 바로잡아 보자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질기굳게 다져진 나쁜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고칠 수 있는 실마리라도 잡아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그것을 앞장 서 부르짖었던 것이 유영준이었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 2009 02/10   위클리경향 8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