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Gijuzzang Dream 2009. 5. 14. 20:23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민족해방 최전선서 불굴의 투지

 

 

북조선노동당 결성 후 1946년 8월 30일

당 고위 간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김두봉.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인용


 

 

김두봉씨는 전투적 정열의 지도자라기보다도 오히려 학자형의 냉정한 의지의 지도자이다.

금일 조선의 지도자들 중에서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존경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은 김두봉씨를 제일로 칠 것이다.


임시정부 대신 자리도 거절


김두봉씨는 원래 유명한 한글학자로 일찍이 3·1운동 당시에 해외로 망명하여

30년 가까이 해외의 유랑생활 속에서 백절불굴의 굳은 의지로

민족해방 전선에서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끊임없이 힘있게 싸운 분이다.

한때는 김원봉씨들과 더불어 민족혁명당에서 같이 일하며 민족연합전선의 형성에 대분투하고

그후 중일전쟁 기간 중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인민의 항일대중운동을 두려워 탄압하기 시작하자

해방구인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랑하는 따님 해엽양을 데리고

도보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한때는 벙어리노릇을 하면서

국민당군 지역을 돌파하여 연안에 들어가 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동지 최창익 · 한빈 · 무정씨 등과 더불어 독립동맹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안에서 안한하게 교육사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고

제일선에 나와서 일제의 왜병들과 싸웠던 것이다.

저 유명한 ‘호가장 전투’에 참가하여 동지 석정(石丁)씨는 그곳에서 비참하게도 희생당하고

김두봉씨는 구사에 일생을 얻었던 것이다.

이승만씨나 김구씨는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따라서 제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한 일은 없었으나 우리의 김두봉씨만은

이상에 본 바와 같이 제일선에서 악전고투를 하였던 것이다.

그가 금일 출중한 과학적 판단을 가지고 굳은 의지로서

북조선에서 부강한 신조선 건설에 돌진하고 있는 것은

제일선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그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중경임시정부에서 대신자리를 주면서 사령장을 가지고 왔는데 씨는 당장에서 그것을 거절하니

이른바 임시정부에서는 그 사령을 다시 취소하였다 한다.

이만큼 그는 지위에 대하여서는 욕심이 없으며

오직 민족과 인민을 위하는 정당한 일이라면 지위의 고하를 가라지 않고 전진할 따름이다.

현실 조선의 지도자 중에는 그 사상적 빈곤과 지식의 기근이 심하다.

그런 중에서도 우리의 김두봉씨만은 심각한 사상적 판단력과 우수한 양식을 가지고

사물과 과업에 처하며 인민을 자기 이상 사랑하는 노숙한 지도자인 것이다.

그는 현재 신민당(전 독립동맹)의 주석이며 동시에 북조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의 요직에 있으며

그 겸손한 태도는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머리를 수그리게 한다.

필자가 작년 겨울 평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흰머리와 이마의 주름살은 넉넉히 60을 훨씬 넘었다고 인상되었으나

아직 57, 8세의 가장 노숙한 활동기에 있으며

모든 곳이 원시적 빈곤에 쌓여 있는 조선에서 정치에 학계에 김두봉씨에 대한 기대는 가장 큰 것이며

따라서 김두봉씨는 인민의 이 기대와 소망을 어그리지 않고 꼭 실천해 주리라고 믿는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5일치에 실려 있는 ‘김두봉론’이다.

글쓴이는 역사학자 이청원(李淸源).

 


1946년 3월 조선신민당 위원장에


김두봉(金枓奉)은 1889년 경남 동래(東萊)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백연(白淵·帛連). 서당에서 진서를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1913년 대동청년단에 들었고, 1914년 배재학교를 그만두었다.

소년잡지 <청춘>을 엮어만들었고,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들어갔다.

주시경(周時經) 밑에서 한글 갈닦음에 골똘하였고

1916년 광문사에서 펴낸 <말모이>를 엮는 데 힘을 보태었다.

1917년 보성고보, 휘문고보, 중앙고보에 시간강사로 나갔다.

1919년 3·1운동에 들었다가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니, 31살 때였다.

상해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주필이던 순진서 신문 <新大韓新聞> 편집을 맡았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2년 상해에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펴내었다.

1924년 상해교민 자녀 교육기관인 인성(仁成)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교장을 지내었다.

1928년 대한독립촉성회에 들었고, 1930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얽어 짜는 데 들어 이사가 되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짜는 데 들어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끝 무렵 남경(南京)이 왜군에 무너지자 중경(重慶)으로 가 민혁당과 같이 움직였다.

1940년 민혁당 중앙위원과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이 되었다.

1941년 여름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터전으로 옮기는 조선의용대 으뜸부대와 함께하였다.

1942년 태항산(太行山) 팔로군 본바닥에 가 태항산 반소탕전에 들었다.

7월 태항산에서 열린 화북조선독립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1944년 연안(延安)에서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이 학교를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교장이 되었다.

1949년 1월 1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신임장을 받는 장면.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인용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국하였고,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3월 독립동맹을 정당으로 바꾼 조선신민당 위원장이 되었다. 8월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뜨려 북조선로동당이 되었을 때 위원장이 되었다.

조선신민당 창당과 당세를 넓혀나가던 것 따위를 알려주는 문서가 요즘 밝혀졌다. 평양 소련군정 사령부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팀이 모스크바에 사뢴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조사보고서’이다.

조선독립동맹의 기초 위에서 신민당이 1946년 12월 16일 창당되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0년에 중국에서 조선의 좌익 정치 망명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만주와 중국에 사는 조선인에게서 신망이 높았고, 조선을 일본 식민지 노예제도에서

해방하고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맹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45년 12월 중순에 조선독립동맹 지도부와 다수의 맹원들이 조선으로 귀국했다.

이 가운데 김두봉을 수반으로 하는 일부는 북조선에 남았고 나머지는 남조선으로 갔다.

소련군정 사령부는 김일성을 앞세워 독립동맹 일행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이들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 환영준비위원회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등 남조선 단체 20여 개가 참여했다.

조선독립동맹원들은 남조선과 북조선에 가서 각각 민주정당인 신민당을 창당했다.

북조선신민당 당수에는 김두봉이 선출됐다.

조선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김두봉은 경성대학에서도 공부를 했다.

1919년 조선해방운동에 참가했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 다른 조선인 정치 망명객들과 함께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0년에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1945년 12월 북조선에 귀국하였다. 조선에서는 저명한 사회정치 활동가이며 학자로 알려져 있다.


김구의 ‘남북 지도자 회담’ 제의 받아


북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면서 김두봉은 북조선 정계 엄지가락이 된 것으로 보였다.

위원장 자리는 그러나 소련군정이 용춤추이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참으로는 공산당에 신민당이 빨려들어간 것이었다.

동만 빨치산 출신 김일성을 북조선 도꼭지로 밀기로 한 것이

소련공산당 중앙의 극동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장, 조국전선 의장을 맡는 따위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민당이 없어지면서 김두봉 정치생명은 끝장이 난 것이었다.

 

조선독립동맹 무장력인 조선의용군 8만 병력이 무장해제 당한 채

그 한 도막만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때부터 내다보이던 것이었고,

대한광복군 200명 병력이 무장해제당한 채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남조선 목대잡이 김구 살매와 똑같은 것이었다.

 

 

북로당 중앙위원 43명을 계파별로 나눈 것이다. 발리사노프 팀이 소련공산당에 보낸 보고서에 나온다.

연안파   12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박효삼, 윤공흠, 박일우, 한빈, 박훈일, 김민산, 임해
빨치산파 4 김일성, 김책, 안길, 김일
소련파    8 허가이, 박창식, 김열, 김제욱, 태성수, 한일무, 전성화, 김영태
국내파·기타 19 주영하, 장순명, 박정애, 한설야, 최경덕, 강진건, 장시우, 오기섭, 이순근, 김교영,

                        장종식, 김월송, 이춘암, 김려필, 명히조, 김욱진, 이종익, 정두현, 임도준

 


김두봉 · 김일성 · 김구 · 김규식 4김회담 어름에 김구가 김두봉에게 보내었던 편지이다.

백연 인형(仁兄) 혜감(惠鑒)

(위 줄임) …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선 이남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합석하는 것을 희망하지도 아니하지마는

그 실은 절망하고 이것을 선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넘길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개걸(流離 개乞)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不似)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이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사(尤史, 김규식) 인형과 제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월을 양인의 연서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나 남북에 있는 진정한 애국자의 힘이 큰 것이니

인동차심(人同此心)이며 심동차리(心同此理) 인지라 반드시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더구나 북쪽에서 인형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이가 있겠나이까.

인형이여, 김일성 장군께는 별개로 서신을 보내거니와

인형께서 수십 년 한 곳에서 공동 분투한 구의(舊義)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 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최속한 시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 (아래 줄임)

1948년 월 일
金九


‘종파분자’로 몰려 초라한 말년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두 번째가 김두봉, 그 옆이 김일성이다.

이국후, <용양의 소련군정>인용.


 

“책임지도원 동무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키는 중키이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대머리 할아범이었다.
“나는 김두봉이라고 합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김두봉 약력 줄임) 나는 이내 차분해져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소문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게 생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맘씨 순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 내 아내는 평생 밥두 못 짓구 곱게만 지내다가 갑자기 농사두 하구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지금 치마끈두 바로 매지 못할 지경입니다.

… 지도원 동무… 제발 목장 안에 있는 유치원 교양원이라도 자리가 있으면 배치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목이 메어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는 실주름 그어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가련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태항산을 찌렁찌렁 호령하며 내달리던 연안파 호랑이였다는 사실,

국민군이 김두봉이라면 벌벌 떨었다는 사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위원장(국회의장)이었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조선독립동맹’ 결성한 연안파 우두머리

 
남파공작원 김진계 증언이다. 조선로동당 평남도당 농업부 책임지도원으로 일하던 1962년이었다.

그러니까 김두봉이 1958년 3월 ‘종파분자’로 꼬집혀 평안남도 맹산목장에서 ‘노동개조’를 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김진계가 들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맹산목장에서 일하는 사기꾼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돈과 양복을 뇌물로 바치고 잘 봐달라고

했다가 아까운 돈과 양복만 날렸다는 둥 벼라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김진계 증언은 이어진다.

가련한 늙은이의 몰상을 바라보는 순간,

죄야 김두봉에게 있지 젊은 아내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싶어 동정심이 솟아났다.

마침 그의 아내가 와서 인사를 했는데, 과연 소문대로 서른서넛 정도로 보이는 미인으로

팔십 고령의 김두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애절하게 호소했다.

“책임지도원 동무, 내레 생전에 농사일이라구는 해본 일두 없구서리 배운 거라구는 글밖에 없슴네다.

기러구설라무네 제발 유치원 교양원으루 배치시켜 주셨으면 뎡말 감사하겠슴네다.”
하지만 자꾸 매달려 간청하는 그녀에게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간부 인사를 배치하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사배치권은 군당책임비서에게 있으니까, 그분에게 말씀드려보죠.”
“꼭 좀 부탁합네다.”
그녀는 머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은근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마고 약속한 나는 며칠 후

당책임비서에게 김두봉의 처를 목장유치원 교양원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상의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후에 들었는데, 김두봉의 처는 다행히 목장 유치원 교양원으로 배치되어

열심히 아동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두봉은 연안파 우두머리였다. 연안파에서 세운 정치모임인 ‘조선독립동맹’이 머릿골이고,

손발인 군사조직이 ‘조선의용군’이다.

1945년 12월 씌여진 <해방전후의 조선진장>에 나오는 각 정당 및 정치단체 가운데

‘연안조선독립동맹’ 편이다.

이 단체는 1942년 1월에 국제정세에 호흥하여 화북조선청년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동방약소민족대동맹 산하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 단체인데,

연안정권 지원 하에서 지금까지 꾸준한 항일전을 계속하여 많은 무훈을 세워왔다.

그리고 의용군의 총사령 김무정(金武亭) 장군은 전형적 무인으로서 많은 청년들을 훈육해서

그의 인솔한 휘하 정예 부대는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바이며,

동 장군은 부사령인 박효삼(朴孝三)(참모), 박일우(朴一禹)(정치)씨와 아울러 그 무명(武名)이

화북과 동북 일대에 떨치고 있다 한다.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부주석 한빈(韓斌) · 최창익(崔昌益), 기타 제씨가 근근(近近) 귀국케 된다는데,

기(其) 일부 요인은 11월 20일경에 평양에 도착되어 김일성 장군과 회담하여 의견교환 중이라고 한다.

 


조선로동당 정치국원 5명 중 한 명

 
해방공간 평양에서 움직였던 정치두럭은 5개 동아리였다.

소련파, 연안파, 빨치산파, 국내파, 남로당파. 출신성분에 따른 계급적 처지나

정치적 · 사상적 생각이 다름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라

동아리 성원들이 해방 전 움직이던 바닥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5개 동아리 가운데 가장 떨치는 힘이 좋았던 것은 연안파와 소련파였다.

1949년 1월 14일 평양 주재 소련특명전권대사 스티코프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두봉 위원장에게 신임장을 봉정하는 모습.

해방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 현준혁(玄俊赫, 1904~ 1945), 김용범(金龍範, 1902~?), 장시우(張時雨, 1891~?), 이주관, 최경덕(1908~?), 장종식 같은 이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를 얽으면서 박헌영 당중앙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9월 28일 조공 평남도책이었던 현준혁이 암살되고 조선민주당을 세웠던 조만식(曹晩植, 1882~?)이 묶이면서 무너졌다.

 

남로당파는 스탈린 뒷받침을 받는 김일성이 46년 1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면서 힘이 빠져버렸다.

러시아 출신 조선인 혁명가들로 뭉쳐진 소련파는 처음 힘을 떨쳤으나

이론가보다 빨치산 출신을 좋아하는 스탈린 속마음이 드러나면서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니,

남은 것은 연안파와 빨치산파로 불리던 갑산파이다.

동만 항일빨치산들이 벌인 항일유격투쟁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이 보천보습격투쟁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사북으로 한 빨치산파를 갑산파(甲山派)라고도 불렀다.

46년 8월 북조선신민당이 북조선로동당에 빨려들어가면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었던 무정이

50년 끝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고, 독립동맹 부주석과 신민당 부위원장이었던 한빈 · 최창익이 57년,

김두봉이 58년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한다. 그리고 연안파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까지 올라갔던 최창익이 거칠게 앙버티었으나

흐름새를 돌릴 수는 없었다.

6·25 바로 앞 북조선 최고권력인 조선로동당 정치국원은 5명이었다.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김책, 김두봉.

그 가운데 독공부로 조선말사전을 엮어낸 김두봉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받는 우러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연설이나 담화 때 하는 목소리가 차분하고 느릿해서 사람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따뜻한 기품의 인물이었다. 6·25때 인민군 중좌로 내려왔던 팔로군 출신 군인이 있었다.

전라도 원통산 · 회문산 · 운장산 · 지리산 지구에서 기운차게 움직였던

외팔이부대’ 부대장 한팔(韓八)이 전하는 김두봉 소식이다.

 


‘해방전쟁’이라 울먹이며 독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1948년의 남북협상이 실패해버렸고,

결국 우리와 함께 남조선 인민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5·10선거와 단독정부가 수립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에 대항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 6월 23일. 인민군 제6사단 13연대는 개성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14연대는 송악산 우측, 15연대는 옹진반도에 있었다.

다른 군부대도 모두 38선 주변으로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조국에 복무하겠습니다.”
한팔 중좌가 아내에게 거수경례를 하였을 때 빙긋 웃음을 지어보이던 새각시짜리는

이내 슬픈 얼굴로 바뀌는 것이었다. 한팔 중좌는 다시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거수경례를 하였다.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송악산 우금에 천막으로 만들어진 임시 회의장이었다. 대대장급 위 군관들이 모여 있었다.

김두봉은 그때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였는데,

시국 이야기가 끝날 때쯤 눈물을 흘리기 비롯하였고, 군관들은 영문을 모른 채 김두봉을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두봉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의 노력과 더불어 6월 7일에는 민주주의전선에서 특사를 보내

조선 전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주장했었고,

해방 5주년 기념식을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등, 조선최고입법기관 구성에 따른 총선 실시,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필요한 조건, 총선을 지도할 중앙선거지도위원회 구성을 제의하는 호소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그들까지 체포해버렸습니다.

6월 14일에는 다시금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가 남조선의 2대국회와의 합작제의를 하였으나

거부되어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은 미제와 남조선 친일파 반동분자들의 책동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동포를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 군관 동무들은

해방전쟁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고 맡은 임무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1948년 이른바 ‘4김회담‘ 때 일이다.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빠져나가면

두 사람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붙인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 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김구가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두봉 또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특별 감시하라고 한 것이 48년 4월부터라고 한다.

48년 4월 17일치 ‘레베데프 비망록’에 나오는 적바림이다.

평양에 있던 소련군정 첩보망이 남조선까지 뻗쳐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놀라운 일이다.

몇 년 뒤 박헌영과 이승엽을 머리로 한 남로당 출신 사람들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시나리오’는

그때부터 이미 짜여졌던 것이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에 보면 김두봉이 저세상으로 간 것이 1961년으로 되어 있는데,

남파공작원 출신 김진계 증언에 따르면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62년까지는 살아 있었다.

얼마를 더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은 이미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미제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빨도 발톱도 죄 뽑힌 채로 집짐승이나 돌보는 ‘태항산 호랑이’였다.  

  

- 2009 05.19-05.26  / 위클리경향 825호-826호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