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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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 최전선서 불굴의 투지
김두봉씨는 전투적 정열의 지도자라기보다도 오히려 학자형의 냉정한 의지의 지도자이다. 금일 조선의 지도자들 중에서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존경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은 김두봉씨를 제일로 칠 것이다.
30년 가까이 해외의 유랑생활 속에서 백절불굴의 굳은 의지로 민족해방 전선에서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끊임없이 힘있게 싸운 분이다. 한때는 김원봉씨들과 더불어 민족혁명당에서 같이 일하며 민족연합전선의 형성에 대분투하고 그후 중일전쟁 기간 중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인민의 항일대중운동을 두려워 탄압하기 시작하자 해방구인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랑하는 따님 해엽양을 데리고 도보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한때는 벙어리노릇을 하면서 국민당군 지역을 돌파하여 연안에 들어가 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동지 최창익 · 한빈 · 무정씨 등과 더불어 독립동맹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안에서 안한하게 교육사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고 제일선에 나와서 일제의 왜병들과 싸웠던 것이다. 저 유명한 ‘호가장 전투’에 참가하여 동지 석정(石丁)씨는 그곳에서 비참하게도 희생당하고 김두봉씨는 구사에 일생을 얻었던 것이다. 이승만씨나 김구씨는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따라서 제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한 일은 없었으나 우리의 김두봉씨만은 이상에 본 바와 같이 제일선에서 악전고투를 하였던 것이다. 그가 금일 출중한 과학적 판단을 가지고 굳은 의지로서 북조선에서 부강한 신조선 건설에 돌진하고 있는 것은 제일선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중경임시정부에서 대신자리를 주면서 사령장을 가지고 왔는데 씨는 당장에서 그것을 거절하니 이른바 임시정부에서는 그 사령을 다시 취소하였다 한다. 이만큼 그는 지위에 대하여서는 욕심이 없으며 오직 민족과 인민을 위하는 정당한 일이라면 지위의 고하를 가라지 않고 전진할 따름이다. 현실 조선의 지도자 중에는 그 사상적 빈곤과 지식의 기근이 심하다. 그런 중에서도 우리의 김두봉씨만은 심각한 사상적 판단력과 우수한 양식을 가지고 사물과 과업에 처하며 인민을 자기 이상 사랑하는 노숙한 지도자인 것이다. 그는 현재 신민당(전 독립동맹)의 주석이며 동시에 북조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의 요직에 있으며 그 겸손한 태도는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머리를 수그리게 한다. 필자가 작년 겨울 평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흰머리와 이마의 주름살은 넉넉히 60을 훨씬 넘었다고 인상되었으나 아직 57, 8세의 가장 노숙한 활동기에 있으며 모든 곳이 원시적 빈곤에 쌓여 있는 조선에서 정치에 학계에 김두봉씨에 대한 기대는 가장 큰 것이며 따라서 김두봉씨는 인민의 이 기대와 소망을 어그리지 않고 꼭 실천해 주리라고 믿는다. 글쓴이는 역사학자 이청원(李淸源).
아호는 백연(白淵·帛連). 서당에서 진서를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1913년 대동청년단에 들었고, 1914년 배재학교를 그만두었다. 소년잡지 <청춘>을 엮어만들었고,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들어갔다. 주시경(周時經) 밑에서 한글 갈닦음에 골똘하였고 1916년 광문사에서 펴낸 <말모이>를 엮는 데 힘을 보태었다. 1917년 보성고보, 휘문고보, 중앙고보에 시간강사로 나갔다. 1919년 3·1운동에 들었다가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니, 31살 때였다. 상해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주필이던 순진서 신문 <新大韓新聞> 편집을 맡았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2년 상해에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펴내었다. 1924년 상해교민 자녀 교육기관인 인성(仁成)학교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교장을 지내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짜는 데 들어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7년 끝 무렵 남경(南京)이 왜군에 무너지자 중경(重慶)으로 가 민혁당과 같이 움직였다. 1940년 민혁당 중앙위원과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이 되었다. 1941년 여름 화북(華北) 팔로군(八路軍) 터전으로 옮기는 조선의용대 으뜸부대와 함께하였다. 1942년 태항산(太行山) 팔로군 본바닥에 가 태항산 반소탕전에 들었다. 7월 태항산에서 열린 화북조선독립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1944년 연안(延安)에서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이 학교를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 평양으로 귀국하였고,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3월 독립동맹을 정당으로 바꾼 조선신민당 위원장이 되었다. 8월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뜨려 북조선로동당이 되었을 때 위원장이 되었다. 조선신민당 창당과 당세를 넓혀나가던 것 따위를 알려주는 문서가 요즘 밝혀졌다. 평양 소련군정 사령부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팀이 모스크바에 사뢴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조사보고서’이다. 조선독립동맹은 1940년에 중국에서 조선의 좌익 정치 망명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만주와 중국에 사는 조선인에게서 신망이 높았고, 조선을 일본 식민지 노예제도에서 해방하고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맹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45년 12월 중순에 조선독립동맹 지도부와 다수의 맹원들이 조선으로 귀국했다. 소련군정 사령부는 김일성을 앞세워 독립동맹 일행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이들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 환영준비위원회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등 남조선 단체 20여 개가 참여했다. 조선독립동맹원들은 남조선과 북조선에 가서 각각 민주정당인 신민당을 창당했다. 북조선신민당 당수에는 김두봉이 선출됐다. 1919년 조선해방운동에 참가했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 다른 조선인 정치 망명객들과 함께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0년에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1945년 12월 북조선에 귀국하였다. 조선에서는 저명한 사회정치 활동가이며 학자로 알려져 있다.
위원장 자리는 그러나 소련군정이 용춤추이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참으로는 공산당에 신민당이 빨려들어간 것이었다. 동만 빨치산 출신 김일성을 북조선 도꼭지로 밀기로 한 것이 소련공산당 중앙의 극동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장, 조국전선 의장을 맡는 따위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민당이 없어지면서 김두봉 정치생명은 끝장이 난 것이었다.
조선독립동맹 무장력인 조선의용군 8만 병력이 무장해제 당한 채 그 한 도막만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때부터 내다보이던 것이었고, 대한광복군 200명 병력이 무장해제당한 채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남조선 목대잡이 김구 살매와 똑같은 것이었다.
북로당 중앙위원 43명을 계파별로 나눈 것이다. 발리사노프 팀이 소련공산당에 보낸 보고서에 나온다. 장종식, 김월송, 이춘암, 김려필, 명히조, 김욱진, 이종익, 정두현, 임도준
- 2009 05.19-05.26 / 위클리경향 825호-826호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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