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중에서 사용된 그림들
- 책가도(책거리)
무릇 회화라고 하는 것은 형상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문장으로 경위를 다 설명할 수 없고 글시로 형용해 낼 수 없는 것은 그림에서 구해야 하는 것으로,
그 요체는 현우(賢愚,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감별하고 치란을 명확히 밝혀 드러내는 데 있다. ...
어떻게 해야 온 세상의 그림이 옛사람의 화법에 다다를 수 있게 되고,
나라의 쓰임에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
(관아재 조영석, 1686-1761)
일반적으로 그림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필력이 뛰어나 보는 사람에게 큰 감흥을 주는 그림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국가적인 교훈과 도덕을 전파할 수 있도록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그림들도
아울러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궁중에는 많은 화원들이 국가에 필요한 그림들을 그렸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시간이 흘러 낡아 못쓰게 된 왕의 초상화를 이모하는 일,
중요한 궁중행사의 과정을 도설하는 일 등 궁중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그림들은
그림 실력이 출중한 궁중화원들을 통해 그려졌으며
왕이 국정을 이끌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각매체로서 기능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궁중회화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
화가의 이름이 없는 것은 왕이 열람하는 그림에 차마 자기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지 못했던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그림들은 화가 개인의 개성보다는
그림의 전통적인 형식과 구도의 제한을 많이 받으며 제작되었다.
그래서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고 서로 비슷해 보이는 그림들이 다수 전하고 있다.
궁중에서 사용된 그림들 중 상당수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선호되었고, 민화의 소재로 재생산되었다.
책가도나 백동자도 등이 궁중회화와 민화에 모두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까닭에 궁중회화는 격이 낮은 민화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는 일이 많았다.
여러 칸으로 서가에 고동기, 도자기, 꽃병과 서책, 붓 등 각종 문방구류를 진열한 모습을 그린 그림을
책거리 또는 책가도라고 한다.
책거리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들은 당시 문인들이 고동기 등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며 즐겼던
취미를 보여준다. 또한 학문에 정진하고 글공부를 적극 권장했던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서 만날 수 있는 <책가도>는 역시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그림에서는 책가나 서안(書案) 등 책과 기물을 올려놓은 가구가 생략되고
빈 공간에 서책과 고동기, 화분, 문방구류 등이 그려졌다.
책가도의 표현형식은 초기에는 서가로 구획된 화면에 소재들이 좌우대칭을 이루며
정확히 균형을 이루다가 점차 정물화처럼 자유로운 배치 구도를 취하였다.
작은 서책 위에 큰 서책을 올려놓아 불안하게 보이도록 구성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또한 벼루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책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원근법(逆遠近法)을 사용하여
뒤로 갈수록 크게 보이도록 그리기도 하였다.
책가도의 대표작품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형록의 <책가도>는
상식을 뒤집는 재치가 숨어있는 그림이다. 이형록은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화가인데,
왕이 열람하는 궁중회화에는 화원이 이름을 적어넣지 않는다는 역대 전통을
깨뜨릴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재치있게 자신의 이름을 그림 속에 남겼다.
책가도에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도장들을 세워 그리면서,
그 가운데 자신의 도장 하나를 눕혀서 그려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상식을 뒤집는 이러한 표현이 책가도의 매력이다.
1982년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간행한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름지기 민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하나의 주제가 무명의 화공들에 의해 무한한 변화를 가지고 그려지는 일이다.
그 주제가 생활공간과 결부된 상상력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표현의 무한한 변화는 “화공들의 기법에 숨겨진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제로서의 모티프는 보존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만이 생활공간에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공들은 그 하나의 모티프를 넓히고 해체하여 거의 경이적이라고 할 만한 변형을 가하였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마니에리즘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 민길홍, 미술관 회화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137회, 2009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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