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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唐代) 벽화

Gijuzzang Dream 2009. 4. 28. 02:18

 

 

 

 

 

 

 당대(唐代) 벽화

 

 

 

중국회화에서 묘실벽화는 별도의 장르로 분리하여 다루어질 만큼

수적으로나 내용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묘의 발굴과정에서 벽화와 함께 대부분 묘지(墓誌)도 함께 발굴되고 있어,

중국미술사에서 늘 논란이 되는 진위문제와 시대설정의 문제를

묘실벽화에서는 확실하게 해결해주고 있다.

더구나 전해 내려오는 당대회화는 매우 적고, 있다하더라도 거의 宋代 이후의 모사본인 상황에서

연대가 확실한 묘에서 발굴되고 있는 唐代의 묘실벽화는

고대 중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묘실벽화가 각 시대의 생활상이나 역사적인 사건, 

그리고 그 시대의 사상적인 측면을 설명함은 물론,

그 시대의 회화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데에 큰 의미를 지닌다.

 

주요 당묘(唐墓)벽화는 당시 수도였던 장안 즉 지금의 서안지역에서 주로 발굴되고 있으며,

이러한 벽화들은 무엇보다도 당대회화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당시 활동했던 궁정화가들과의 직접, 간접적인 영향관계를 보인다.

서안지역에서 발견된 당대벽화는 대부분 황제릉의 배장묘(陪葬墓)인데,

배장묘란 황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공주나 태자, 그리고 고관 등의 묘를

그 황제의 능 부근에 같이 매장하는 것이다.

唐朝 290년간(618-907) 스물 한 명의 황제 중 마지막 두 황제인 소종과 애제 두 개의 능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안에 매장되어 있는데,

서안 당묘(唐墓)벽화 중 가장 유명한 장회태자, 이덕태자, 영태공주의 묘가

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 부근에 있다.

 

현재 서안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당묘(唐墓)는

자연적인 피해와 도굴로 인한 훼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묘의 형태는 잘 남아있는 편이다.

당묘(唐墓) 형태 특색중의 하나는 긴 묘도(墓道)의 출현에 따라 묘도의 면적이 대폭 증가되고

벽화의 내용과 소재도 그만큼 다양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묘도 부분에 대형벽화를 제작한 것은 북제시기에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당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발굴된 당묘(唐墓)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는 이덕태자묘를 들 수 있는데,

묘도 입구에서 묘실까지의 총길이가 198m이고,

이 외에 영태공주묘는 총길이가 87.5m, 장회태자묘는 71m 등으로 묘 규모의 방대함을 짐작해볼 수 있다.

 

 

   

 

唐代에 와서 이렇게 긴 묘도의 등장으로 전체적인 묘의 크기는 커졌지만

묘의 부장품이나 묘 안의 내부구조는 오히려 이전보다는 단순화되고 간소화되었다.

특히 唐 이전 묘의 내부에 건축구조를 만들어서 장식하였던 것을

당묘(唐墓)에서는 건축적인 요소를 모두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묘실벽화에서 회화의 역할이 중요하게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형벽면임에도 불구하고 한 벽면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제작하고 있다.

이것은 당묘벽화가 평면이라는 벽화의 형식을 빌어 중국의 회화가 독특하게 지니는 구도, 색채

그리고 필법 등의 요소를 가지고 회화성을 강조하여,

이전의 묘실벽화와는 달리 당시의 현실생활을 위주로 궁정회화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唐 장회태자묘, 194.5×253㎝(국립중앙박물관 모사본)

 

장회태자묘의 외국사신도 벽화 모사본을 살펴보면

여섯 명의 인물 가운데 세 명의 외국사신은 각 나라의 고유의상을 입고 민족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인물화 표현에 있어서 실존하는 인물이 있어 닮게 그렸음을 짐작케 하며,

이러한 벽화의 인물을 통해 당시 궁정화가의 화풍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당묘벽화에는 인물 위주의 여러 가지 내용 이외에

화조화, 산수화만을 독립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중국 고대회화가 전문적으로 발달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 박성혜,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 중국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132회, 2009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