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꿈과 절망이 서려 있는 <노란 집>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살던 집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화가 고흐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1)는 생전에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화가로서 성공하지도, 안정된 가정을 꾸리지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화가로 인정 받는 것과 관계없이
고흐는 2천200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고흐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팔리지 않는 고흐의 작품을 완벽하게 보관했고
사후에는 아내와 아들에게 상속했으며 아들 빈세트 빌렘이 반 고흐 미술관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흐 사후에 국제적으로 예술성을 인정 받자 네덜란드 정부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들과 같이 인식하게 되어 고흐 미술관을 설립하기로 한다.
1973년에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헤리트 리트벨트가 설계해서 지은 반 고흐 미술관이 개관한다.
이에 따라 고흐의 후손들은 미술관에 작품을 영구 대여하기로 결정한다.
반 고흐 미술관은 고흐의 유화 작품 200여 점과 소묘 500여 점, 그리고 고흐의 편지 700여 통을
소장하고 있으며 생전에 고흐가 수집했던 일본 목판화들도 있다.
반 고흐 미술관의 작품 전시는 고흐가 화가로 활동했던 시대순으로 이뤄져
그의 예술성의 발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고흐의 작품만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흐가 생전에 같이 활동했던 밀레, 고갱, 로트레크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반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의 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 <노란 집>이다.
노란 집은 아를에서 반 고흐가 살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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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집>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92 |
고흐는 고향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1년 6개월 동안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활동을 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렀던 그를 파리는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쇠약해진 고흐는 음울한 파리를 떠나 1888년 남프랑스의 아를에 도착한다.
고흐는 처음 아를에서 호텔과 식당을 겸한 카페에 머물면서
하루 종일 도시 외곽을 돌면서 그림의 주제를 찾았고 날씨가 좋으면 이젤을 세워두고 그림을 그렸다.
그해 5월, 그림을 그릴 꿈에 부풀은 고흐는
드디어 아를의 라마르틴 2번가에 있는 노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화실을 내고 아를에서 그린 작품들을 둘 공간이 충분했다.
“오늘 나는 이 건물의 오른 채에 세를 들었다. 방이 네 개 있는데 두 방에는 캐비닛이 갖추어져 있다.
볕이 잘 드는 집의 외부는 금방 만든 버터 빛 노랑으로 칠했고 창틀은 진한 녹색으로 칠했다.
집은 광장으로 나 있는데
거기에 플라타너스와 협죽도, 아카시아 등 초록의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이 하나 있다.
집의 내부는 모두 흰색으로 칠했고 바닥엔 붉은 타일을 깔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있다.
이 집에서 나는 진실로 살 수 있고, 쉼 쉬고, 생각하고, 그릴 수 있다.”라고 노란 집을 묘사했다.
고흐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화가들의 공동체를 설립한다는 꿈을 구체화시킨 곳이 노란 집이었다.
고흐는 대인관계에 서툴렀지만 우정을 중요시했다. 그는 화가들이 힘을 모아 서로 발전을 돕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화가들의 공동체 설립을 꿈꾸었다.
고흐는 파리에서 만난 고갱에게도 그 계획에 동참하라고 재촉했다.
고갱은 고흐의 열정적인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고흐를 따라 아를에 이사하기 마음을 먹는다.
그 때부터 고흐는 함께 살 고갱을 위해 노란 집을 꾸미는 일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고흐는 노란 집에서 고갱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겠다는 꿈이 산산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고흐는 절망감에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노란 집에서 고흐는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르는 일을 저지른다.
결국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으로 떠나야만 했다.
<노란 집>은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색으로 칠해진 집이 중심이다.
화면 오른쪽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화면을 이등분한 이 작품은
밝은 햇살 아래 시골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노란 집에서 반 년도 채 살지 못했지만 그곳은 고흐에게 단순하게 작업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노란 집은 고흐에게 진정한 자유와 안정, 행복을 확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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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1889년, 캔버스에 유채, 95×73 |
반 고흐를 가장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 <해바라기>다.
고흐가 처음 해바라기를 그린 것은 1886년 파리에서다.
해바라기가 피는 시절이 짧았기 때문에 그는 해바라기 그림을 굉장한 집중력을 가지고 그렸다.
<해바라기>는 고흐가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제작한 작품이다.
생레미 정신병원 의사들은 고흐가 혼자 있지 않도록 감시했다.
외출할 수도 없었던 고흐는 작품의 주제를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는 1년 전 여름 고갱을 위해 노란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렸던 해바라기를 다시 그렸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정확하게 사물의 본질을 추구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꽃은 무수히 많은 색으로 덧칠해져 있으며
선명한 노란색의 해바라기는 단순히 꽃의 이미지를 넘어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9. 04. 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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