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화
김정희(원광대학교 사학과 고고미술학)
1. 불교회화의 전래 - 삼국시대
불교회화는 말 그대로 불교적인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불교적 주제의 그림이 언제부터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지만 일반적으로 불교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大正藏 47권)를 비롯한 여러 경전의 기록으로 볼 때는 부처님의 在世時 이미 불교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Jetvana)에 불화를 장식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남아있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회화인 아잔타벽화의 예로 볼 때 적어도 기원전 2~3세기부터는 인도의 각 사원에 불화가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그림은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됨에 따라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불화가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 중 가장 먼저 372년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입되어 375년 사찰이 세워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불화의 예는 남아있지 않아 초기 불화의 내용과 주제, 기법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고, 다만 고분벽화에 그려진 불교적 주제의 그림에 의해 그 대강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불교수용 이전인 357년에 조성된 안악(安岳) 3호분에도 이미 연꽃무늬와 같은 불교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지만 고구려의 벽화고분에는 5세기~6세기초 경에 축조된 중기의 고분들에 불교적 내용의 그림들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요동성총(遼東城塚)에는 요동성탑(遼東城塔)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무용총(舞踊塚)과 쌍영총(雙楹塚)에는 승려를 대접하고 공양하는 장면, 승려행렬도 등 구체적이고 본교적인 불교그림이 그려져 있어 당시 고구려에서 불교의 성행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천리(長川里)1호분의 불상도(佛像圖)는 불교적 그림의 내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6세기~7세기경에 제작된 후기고분들에서는 사신도가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불교적 그림은 거의 사라지고 다만 연꽃이라든가 비천도 등만이 일부 그려지게 된다.
이 밖에 고구려의 불교회화의 일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일본에서 활약한 몇몇 화가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이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비롯한 일본의 고대문헌에는 일본에서 활동했던 삼국시대 화가들에 대한 기록들이 실려있는데, 그중에서 7세기에 활동하였던 담징(曇徵), 자마려(子麻呂), 가서일(可西溢) 등이 불교회화를 잘 그렸던 화가들로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담징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찰인 호오류우지(法隆寺)의 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들은 양식적으로 보아 담징의 연대보다 늦은 시기의 작품으로 생각되지만 음영법(陰影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며 고구려의 화풍과도 상통하고 있어 고구려 사찰벽화의 일면을 추측케 한다.
가서일은 620년에 죽은 쇼오토쿠(聖德)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부인이 기원하여 제작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을 그렸는데, 여기에 표현된 인물들이 모두 고구려계의 복장을 입고 있는 등 고구려의 영향이 짙게 보이고 있다.
또한 자마려는 653년 천황의 명을 받아 다수의 佛菩薩像을 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외에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에 그려진 석가본생도의 인물들이 고구려식의 복장을 하고 있어 고구려 불화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에서는 384년 불교를 받아들여 “백제에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할 만큼 불교가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불교회화도 발달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예는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의 연화비운문(蓮花飛雲文) 정도밖에 없어 그 실상을 알 수 없다.
여기에 표현된 양식은 고구려의 것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완만한 동감을 보여주어 힘차고 율동적인 고구려회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백제의 화가 중에서 일본에서 활약한 백가(白加)는 588년 僧侶 6명, 寺工 2명, 철반공(鐵盤工) 1명, 瓦博士 4명과 함께 渡日하였는데, 아마 사찰의 불화를 그리기 위해 초청된 불교화화 전문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작품이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일본의 불교회화에 백제 불교회화의 영향이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528년에야 불교를 공인하였지만 고구려, 백제 못지않게 불교가 발달하였다. 544년 신라 최초의 절인 대흥륜사(大興輪寺)가 완공되면서부터 불교회화가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고 생각되지만 기록이나 실물이 전하지 않아 당시 불화의 모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고분출토 공예품에 그려진 연꽃무늬라든가 순흥 어숙묘와 읍내리고분의 연꽃그림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이들 그림의 양식은 고구려적인 영향이 짙게 배어있으면서도 백제적인 유려한 필선을 보여주고 있어 고구려와 백제회화의 영향을 모두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2. 불교회화의 발전기 -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각각 성격을 달리하였던 삼국의 문화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 시대에는 특히 唐과의 빈번한 교섭을 통하여 당의 국제적인 성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회화부문에서는 궁정취미의 인물화와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 그리고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채전(彩典)이라고 하는 그림을 관장하는 기관을 두어 국가적인 사업에 필요한 화공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불교회화로서 전하는 작품은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를 제외하고는 없지만 기록에 의해볼 때 당시에는 많은 불화들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三國有事>에 수록된 불화관계 기록 중에는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을 이룬 분황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를 비롯하여<卷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條)>, 남항사의 십일면관음도(十一面觀音圖)<경흥우성조(憬興遇聖條)>, 내제석원의 미륵보살벽화(彌勒菩薩壁畵)<卷5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 금산사 미륵보살수계도(彌勒菩薩受戒圖), 흥륜사 보현보살도(普賢菩薩圖), 분황사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와 단속사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열전 솔거조(列傳 率居條)> 등 불교회화에 대한 기록이 많이 전하고 있다.
물론 이들 그림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그 양식이라든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동 시대의 미술양식에 의해 살펴본다면 아마도 사실적인 양식의 이상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화적(畵跡)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754년~755년, 호암미술관소장)에 의해 볼 때 어느 정도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번역한 《 신역 화엄경(新譯 華嚴經)》의 내용을 서사(書寫)하고 그린 화엄경 사경변상도로서 자색(紫色)의 닥종이에 금니와 은니를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754년에서 755년에 걸쳐 황룡사의 승려인 연기법사(緣起法師)가 발원, 조성한 것으로 현재 1권~10권 1축과 44권~50권 1축이 남아있고 1권 앞에 변상도가 붙어있다.
맨 앞에는 보상화문(寶相花文)과 신장상(神將像)이 그려진 표지가 있으며 표지 뒷면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보현보살(普賢菩薩), 여러 보살들을 그린 경변상도가 그려져 있으며 10권 끝에 발문(跋文)이 붙어있다.
변상도에 그려진 그림들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불교그림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데, 호화로우면서도 정교한 묘선과 풍만하면서도 균형잡힌 인물의 모습은 8세기 중엽경의 불교회화가 당(唐) 미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불교조각과 마찬가지로 불, 보살의 풍만하고 우아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부처님의 이상세계를 충실히 묘사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3. 불교회화의 절정기 - 고려시대
불교가 국교가 되었던 고려시대는 불교미술이 가장 발달했던 시대이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거란과 몽고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아 불교로써 이를 막아보고자 팔만대장경의 조성을 비롯하여 각종 불교의식이 행해졌고, 이에 따라 의식 때 사용하는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귀족이나 권문세족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많은 불화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선종의 본격적인 유행과 함께 각 종파에서는 자기종파의 고승을 그린 그림을 많이 그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 전시대에 걸쳐 그려진 불교회화의 수는 굉장히 많았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나 기록들은 당시 불화의 융성에 비하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그림은 140여점 정도로서, 대부분 12세기 말에서 고려말까지의 기간 동안에 조성된 것들이며 많은 작품들이 일본을 비롯하여 유럽, 미국 등지에 전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고려불화를 직접 대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고려전기의 불화로서 현존하는 작품은 1007년에 제작된 <보협인다라니경판화변상도(寶篋印陀羅尼經版畵變相圖)>, <어제비장전판화변상도(御製秘藏詮版畵變相圖)>, <대보적경사경변상도(大寶積經寫經變相圖)>를 비롯한 몇 점의 변상도 정도이다.
이 그림들은 본격적인 불화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여기에 표현된 양식을 통해 당시 불화양식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1977년에 공개된 <어제비장전판화변상도(御製秘藏詮版畵變相圖)>는 일종의 산수화와 같은 그림으로, 전∙ 중∙ 후경의 자연스러운 구도, 원근법의 훌륭한 구사, 사실적인 인물의 형태와 배치, 대담하고 힘찬 필치는 웅장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고려전기의 회화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려불화들을 주제 면에서 살펴본다면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등이 대부분이며 그 외에 나한도(羅漢圖), 미타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등이 약간 있다. 이것은 물론 많은 수의 고려불화를 약탈해간 왜구들의 신앙적인 취향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당시 고려사회의 불교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수명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신앙 계통의 불화들, 즉 아미타도와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등이 많다고 하는 사실은 몽고와 거란 등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사회에서 현세구복적인 관음신앙, 극락정토로 맞이해가는 아미타신앙, 그리고 사후 지옥의 무서운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존하는 대부분의 고려불화들은 고려후기의 작품들인데, 협시를 동반한 예배도의 경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그림의 구도이다.
즉 화면을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본존인 주인공을 크게 강조하여 그리고, 하단에는 대좌를 중심으로 협시들을 배치하는 이른바 2단구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2단구도는 고려불화의 전형적인 구도로 자리 잡아 1307년 노영(魯英)筆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309년 관음삼존도(觀音三尊圖), 1320년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를 비롯하여 몇 점의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일본 靜嘉堂 소장, 일본 日光寺소장, 서독 베를린동양미술관소장 등)도 등 많은 예가 남아있다.
그런데 2단구도로 된 그림들의 경우 아랫부분의 협시들은 대각선으로 중앙의 본존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배치되어 2줄의 보살들이 마치 圓으로서 본존을 떠받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대각선 구도는 단조로운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고 박진감을 더해주는 한편, 보는 이의 시선을 본존으로 향하게 하는 시선집중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나 관경변상도를 비롯하여 미륵하생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 법화경변상도 등 변상도에서는 예배도와는 달리 협시들이 본존을 둥글게 에워싸는 구도법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구도법은 후에 조선불화의 특징적인 구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배도가 이처럼 엄격한 2단구도를 보여주는 반면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라든지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나한도 등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1286년의 아미타내영도는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비튼 자세의 아미타그림으로, 오른팔은 길게 내려뻗고 왼팔은 어깨까지 들어서 두 손가락을 맞댄 모습이 중생을 제도하는 아미타불의 자비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 혜허(慧虛)의 작품인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일본 淺草寺소장)의 경우 투명한 사라를 걸치고 옆으로 살짝 몸을 비틀어 연꽃대좌 위에 사뿐히 올라서서 오른쪽 구석의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유려한 귀부인의 모습을 대하는 듯하다.
이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잘 짜여진 구도는 호암미술관소장의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아미타보살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하여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맞이해가는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은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연대(蓮臺)를 받치고 있는 관음보살의 포즈가 매우 유연하면서도 자비로운 관음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 측면관으로 반가좌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수월관음도 또한 엄격한 구도에서 벗어나 부드러우면서 자유로워 보인다.
구도와 함께 고려불화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색채와 문양이다.
색채는 밝고 은은한 색조가 전면적으로 묘사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대체로 붉은색과 초록색, 흰색, 밤색, 감청색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찬란한 금색이 조화되어 화려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금색을 비롯한 몇몇 색들은 화면의 뒤에서 색을 칠하여 앞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소위 복채법(伏彩法)으로 설채하여 색채가 은은하면서도 박락이 거의 없어 오늘날까지도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고려불화의 본존을 비롯한 인물들은 대부분이 꼼꼼하면서도 화려한 무늬가 시문된 옷들을 걸치고 있는데 특히 붉은 바탕의 佛衣에 묘사된 커다한 圓文, 옷깃에 표현된 많은 식물문양들, 관음보살의 투명한 사라에 시문된 꼼꼼한 문양들은 색채와 더불어 고려불화의 아름다음을 한껏 보여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양들은 너무 번잡할 정도로 많이 그려져 다소 복잡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특히 아미타불의 붉은 佛衣에 시문된 금니의 원문은 옷의 주름에도 불구하고 항상 둥근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도식적인 느낌마저 든다.
즉 불 ∙ 보살의 옷 전반에 걸쳐 촘촘히 그려진 무늬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화려하고 요란해져 다소 형식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한편, 인물의 형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특징들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근엄하거나 단정, 근엄하면서도 풍만하고 우아한 형태를 보여준다.
1320년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일본 松尾寺소장) 및 일본 大德寺소장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 본존과 보살들은 얼굴은 근엄하고 신체는 둔중해졌으며 일본 根津美術館소장 지장보살도의 본존 역시 단정하면서도 근엄한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일본 善導寺소장 지장보살도, 혜허(慧虛)筆 관음보살도 등의 인물표현은 우아하면서도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일본 大和文華館소장 수월관음도는 얼굴이 수척하면서도 단엄하고, 신체도 가냘픈 모습이다.
이러한 인물의 형태적 특징은 당시의 불상조각에서도 공통되는 것으로 아마도 고려시대 미술의 특징적인 모습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필선은 단단하고 힘 있는 선 또는 유려하고 활기차며 세련된 선, 구불거리는 선 등 다양한데, 초기에는 원만하면서 힘 있는 선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14세기에 이르러서는 날카롭게 변하는 경향이 있고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소위 오대당풍(吳帶唐風)적인 경향까지도 나타난다.
4. 불교회화의 확산과 보편화 - 조선시대
불교가 국교로서 큰 발전을 보았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 국초부터 강력한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제까지 사회의 윤리도덕의 중심이 되었던 불교는 급격히 쇠퇴해버리고, 유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유교사회로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유교가 불교대신 사회를 이끄는 도덕으로 바뀌어갔지만 지금까지 일반 민중들의 생활의 지주가 되었던 불교에 대한 신앙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고, 심지어는 숭유억불정책의 시행자였던 왕족이나 귀족계층에서초차 내면적으로는 불교를 열렬히 신앙하는 기운이 강하였다.
즉 불교는 사회의 전면(前面)이 아니라 이면(裏面)에서 활동하는 민간신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이러한 불교의 성격에 따라 고려시대의 귀족, 왕족 계측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섬세한 양식의 작품보다는 일반 민중의 취향에 맞는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물론 조선전기에는 왕후나 비빈, 왕자들을 중심으로 한 왕실의 호불정책으로 인하여 궁정적 취향의 세련된 작품들이 많이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는 민중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대중적인 불교회화가 발달했던 시기였다.
조선시대의 불화양식은 크게는
전기(1392년~임진왜란)와 후기(임진왜란~20세기 초)로 나눌 수 있으며,
더 세분한다면
4기(1기: 1392년~1500년경, 2기: 1500년경~1650년경, 3기: 1650년경~1800년경, 4기: 1800년경~1910년)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크게 2기로 나누어 조선시대 불화의 양식적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전기(1392년~임진왜란) 불화의 양식
조선전기는 숭유억불정책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궁중의 왕비 및 비, 빈, 왕자들을 중심으로 숭불의 기운이 강하였으며, 이와같은 왕실의 호불정책(護佛政策)으로 인하여 국가나 왕실의 畵員, 匠人들이 佛事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아 수준 높은 불교미술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에 조성된 사원이라든지 불상, 탑, 불화의 경우 대중적인 불교미술과 함께 궁정적 취향의 세련된 작품들이 많이 조성되었다.
특히 명종대(1545~1567)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중심으로 불교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서 왕실의 비호 아래 불교미술이 큰 발전을 보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선조 전기의 불화는 50여 점이 남아있는데 그중 연대가 밝혀진 작품들은 대부분 명종대(1545-1567년 재위)에서 선조대(1567-1608년 재위)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佛畵가 남아있는 이유는 명종대에 시작된 문정왕후와 보우대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불교부흥정책과도 관련이 깊다.
본래 信心이 깊었던 문정왕후는 1545년 仁宗이 승하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함에 따라 섭정을 하면서, 당시 학문과 덕망으로 인하여 ‘生佛’이라고 일컬어지던 허응당(虛應堂)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중용하여 침체일로에 있던 불교계에 일대 부흥의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불교미술의 제작도 활기를 띠게 되었고 문정왕후를 위시한 왕실의 비호 아래 많은 불화들이 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열성적인 佛事는 1565연 약사삼존도(일본 德川美術館소장)의 畵記에서 보듯이 자신이 願主가 되어 명종의 건강을 기원하고 태자의 탄생을 바라며 金畵 및 彩畵 400탱(幀)을 제작, 회암사중수청(檜岩寺重修廳)에서 개안공양(開眼供養)하였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연대가 분명한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현존하는 조선전기의 불화를 주제별로 보면
변상도(變相圖)가 3점, 아미타도(阿彌陀圖)가 5점, 관음도(觀音圖) 2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5점, 칠성도(七星圖) 3점,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7점,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3점, 약사여래도(藥師如來圖) 6점, 제석도(帝釋圖) 1점, 감로왕도(甘露王圖) 2점 등인데, 이 중에서 왕실발원의 작품이 9점이나 된다.
즉 1465년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월산대군(月山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夫人 등의 시주에 의해 제작된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일본 知恩院소장)를 비롯하여, 仁宗妃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인종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도갑사 관음32응신도(道岬寺 觀音三十二應身圖: 1450년, 일본 知恩院소장), 보스턴미술관소장의 약사여래도(藥師如來圖), 문정왕후가 발원한 일련의 약사여래도(藥師如來圖: 1561년作 1점, 1565년作 3점), 보우대사가 願主가 되어 궁중 일가의 성수(聖壽)를 빌며 제작한 청평사 지장시왕도(淸平寺 地藏十王圖: 1562년, 일본 光明寺소장), 김상궁(上宮)이 願主가 되어 조성한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1532년, 일본 延曆寺 소장) 등이다.
이들 왕실발원의 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시주가 되어 제작한 작품들에 비하여 그 질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정성을 들여 제작되어 양식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조선전기에는 왕실 발원 이외에도 일반백성들이 불화조성에 대거 참여한 사실이 주목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귀족들이나 일부 특권층에서 발원하여 불화를 제작하였던 반면에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일반백성들 사이에서도 불화조성이 보편화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숭유억불 하에서도 불교가 일반민중의 신앙으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조선조 불화에서 고려시대에 비하여 크게 달라진 것은 구도면이다.
일본 與田寺에 소장되어 있는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는 언뜻 보아서는 고려불화라고 할 만큼 고려불화적인 특징이 많이 남아있으나 구도면에서 본존과 권속이 아래위로 엄격하게 배열되던 2단구도가 깨지면서 권속들이 본존의 몸체부분까지 올라오는 구도를 보여준다.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표현된 여섯 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은 종전과 같이 지장보살의 대좌 아래 몰려 표현된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둥근 구도를 이루면서 배열되어 있다.
더구나 권속들이 아주 작게 묘사되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본존과 권속 사이에는 거의 크기에 차이가 없어 이들이 지장보살을 협시하는 권속이라기보다는 그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일본 여전사(與田寺) 지장보살도의 이와 같은 구도는 1459년~1493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수종사 금동불감불화(水種寺 金銅佛龕佛畵)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나고 있으며 1476년의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無爲寺 極樂殿 後佛壁畵)에도 보인다.
무위사 후불벽화의 경우 협시의 표현이 부처님의 머리 부분까지 올라가 협시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구도로 바뀌어갔다.
즉 아미타후불벽화는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앉아있고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으며, 본존의 두광 옆에 각각 3구의 스님이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협시들은 모두 불대좌(佛臺座) 부분에서부터 아미타불의 어깨부분까지 표현되는 등 고려시대의 엄격한 2단구도와는 현격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그런데 16세기에 이르면 화면의 구도는 완전히 군도(群圖)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1565년 약사삼존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처럼 여전히 2단구도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불화에서는 엄격한 2단구도가 깨어지고 본존을 둘러싸는 구도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불화에서 공통되었던 것으로서 차츰 조선조 불화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군도양식이란 협시들이 본존의 좌우상하 가득히 둘러싸는 구도를 일컫는데 권속들의 숫자도 15세기에 비하여 훨씬 많아져서 구성이 매우 복잡해지는 양상을 띤다. 좁은 화면에 20~40명이나 되는 권속들이 꽉 들어차게 되면서 좁은 화폭에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다보니 자연히 권속들의 크기가 작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觀音寺 지장시왕도라든지 일본 持福寺 지장시왕도에서와 같이 많은 인물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려는 의도에서 인물을 3~4단으로 나누어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방법도 나타나게 되었다.
인물의 형태는 고려말보다 온화해진 경향이 있으나 좀 수척해진 것이 특징이다.
고려불화의 섬세하고 화려하고 화사하며 풍만한 인물표현은 조선초기의 일본 여전사소장 지장보살도와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1532년의 천수관음보살도(일본 持光寺소장), 1546년 지장시왕도(일본 미곡사소장), 1565년 약사삼존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일본 덕천미술관소장) 등에서 보이듯이 수척해진 얼굴과 야윈 듯하면서 길다란 몸매 등은 조선전기 불화의 인물표현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특히 인물표현에 있어 머리 위의 육계가 점점 뾰족해지고 육계 위에 계주가 표현되는 것이라든지 키형의 광배가 나타나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 인물표현에서 주목되는 것은 돈황 불화에서 보듯이 콧잔등이라든지 눈썹 등 일부 부위에 흰색을 칠하여 명암을 강조하는 수법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눈썹, 콧잔등, 턱의 아랫부분 등 얼굴의 부분 부분에 흰색을 칠하여 명암을 나타내는 수법은 흔히 삼백법(三白法)이라 하여 중앙아시아 회화의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16세기에 조성된 일련의 지장시왕도 - 일본 西方寺소장 지장시왕도, 1546년 지장시왕도(일본 彌谷寺소장), 1562년 지장시왕도(일본 光明寺소장), 1575~1577년 자수궁정사(慈壽宮淨社) 지장시왕도(일본 知恩院소장) - 등에 나타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필선은 고려후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구불구불한 수법이 사라지고 1476년 무위사 후불벽화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우 간명하고 단순한 선으로 바뀌며 전에 비하여 색채가 다양해진다.
고려불화에서 보듯이 마치 회화적인 필선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고, 필선은 단지 윤곽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찬란한 금색과 복잡한 무늬로 화면을 가득 메우던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문양이 훨씬 줄어들고 대신 색채로서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불화들, 예를 들어 일본 여전사소장 지장보살도라든지 일련의 궁중관계 발원 불화들은 여전히 고려불화 못지않은 화려한 무늬가 시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562년 보우대사가 주상전하를 비롯한 왕실 일가의 안녕을 위하여 발원한 청평사 지장시왕도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에서는 동심원문, 나선, 당초문, 화문 등 고려불화에 자주 보이던 장식문양이 본존과 협시들의 옷과 대좌 등에 널리 사용되어 마치 고려불화를 보는 듯하다.
색채는 밝은 홍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면서 갈색, 황색, 황토색, 자주색, 청색, 연두색, 희색, 금니 등이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색채의 향연을 보여준다.
즉 전에 비하여 고상한 느낌은 훨씬 줄어들었지만 다양한 색채감각으로 부처님의 이상세계를 화려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2) 조선후기(임진왜란~20세기초) 불화의 양식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중반의 병자호란 등 40여 년 간에 걸친 외국과의 전쟁은 전국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국의 사찰은 승병의 본거지였던 까닭에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전기에 걸쳐 조영된 많은 사원들은 이 기간 동안에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수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약탈, 방화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승병들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하여 조선전기의 강력한 억불정책은 다소 완화되었고 전란 중 소실된 사찰들은 숙종대 이후 대부분 중건 또는 중창되었다.
사찰의 활발한 조영에 따라 불교미술도 일대 조성 붐이 일어나 각 분야에 걸쳐 대규모의 불사가 행해졌다. 더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각 종파 고유의 신앙형태와 사상에 따라 전각의 명칭이 분화되고 세분화되었던 앞 시대와는 달리, 한 사찰 내에 여러 종파의 전각이 함께 건립되는 등 통불교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다양한 불교미술이 발달하였다.
전각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그 안에 봉안하는 불교회화 역시 성하게 조성되었는데, 일부 왕족 및 귀족계층이 주요한 시주자였던 고려, 조선전기와는 달리 조선후기는 일반백성들이 대규모로 불화조성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불교회화의 규모가 대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불화의 조성연대, 봉안처, 시주자, 발원자, 화원 등을 기록한 畵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선후기의 사찰의 전각배치와 전각 안의 불화배치를 보면
전각 안에는 적게는 몇 점에서 부터 수십 점에 이르는 불화들이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불전에는 상단탱화(上壇幀畵)에서 하단탱화(下壇幀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불화들이 한 곳에 봉안되어 중심전각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주불전 중에서도 대규모의 전각에는 삼신불화<三身佛畵: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畵), 석가불화(釋迦佛畵), 노사나불화(盧舍那佛畵)> 내지 삼세불화<三世佛畵: 석가불화(釋迦佛畵),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약사불화(藥師佛畵)>를 봉안하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대웅전에 삼세불화를 함께 배치한 예는 해남 대흥사 대웅전, 직지사 대웅전, 광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고, 대광명전에 삼신불화를 봉안한 예는 화엄사, 해인사, 통도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경우 18세기에는 삼존을 따로 그려 세 폭을 봉안함으로써 규모가 매우 크지만, 19세기에는 삼존을 한 폭에 그려 넣는 예가 많아진다.
또 주불전 외에 나한전이나 명부전 같은 부속전각에는 동일한 성격을 지닌 세트화로서의 탱화(16나한도, 시왕도 등)를 봉안하는 예가 많아진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한편 조선전기까지 후불화의 주류를 이루던 벽화의 제작은 거의 사라지고 점차 간편한 탱화를 후불벽에 걸어 예배하는 경향으로 변하였다.
후불벽에 벽화를 그려 예배화로 삼은 예는 선운사 후불벽화(禪雲寺 後佛壁畵, 1840년)를 제외하고는 별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특히 이 벽화는 약사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의 후불벽화(後佛壁畵)가 전각을 압도하고 있어 예배화로서의 장중함과 숭고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다.
주불전의 예배화로서의 벽화제작은 거의 사라졌지만 운흥사 대웅전, 위봉사 보광명전, 금산사 대적광전, 마곡사 대웅전에서 보듯이 후불벽의 뒷면에 관음보살도를 그리거나, 좌우 측면 벽에 다양한 주제를 벽화로 그리는 일<범어사 대웅전의 약사삼존도와 아미타삼존도, 통도사 영산전의 견보탑품변상도(見寶塔品變相圖)와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迹), 통도사 약사전의 약사삼존도와 아미타삼존도, 대원사의 달마도와 수월관음도 등>, 전각 내부의 전 벽면에 나한이나 비천 같은 주제의 벽화를 그리는 일은 여전히 성행하여 오늘날까지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벽화는 제작과정의 복잡성과 건축의 조형에 따라 화면의 구조가 제한을 받게 됨에 따라 제작은 점차 줄어들었고, 포벽이나 주위의 부수적인 공간에 제작되는 등 장식적인 기능이 강조되어 갔다.
대신 제작이 간편한 탱화가 후불화의 기능을 대체하였다.
조선후기의 불화는 양식변천에 의해 대략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양란을 겪은 후 새로 사찰이 건립되는 1650년경부터 1800년에 이르는 기간이고,
제2기는 1800년 이후 1910년까지의 시기이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사에서 볼 때 제1기는 조선불화의 전형양식이 정립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조선조 불화 중에서도 조선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때라고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그림의 구도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권속들이 본존을 둥글게 에워싸는 군도(群圖)형식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예배화는 대부분 화면의 가장자리에 본존의 설법을 옹위하는 사천왕을 배치하고 본존의 주위에는 보살중과 청문중, 팔부중 등을 배치하는데, 청문중과 보살중은 적게는 몇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기까지 좌우대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경우 권속은 본존의 대좌 아래뿐 아니라 양옆 또는 머리의 윗부분에까지 꽉 들어차게 묘사되며, 권속은 중앙의 본존에 비해 훨씬 작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1649년 보살사 괘불은 본존인 석가모니불의 주위에 10대제자를 비롯하여 팔부중, 보살, 청문중 등 수많은 권속들이 좌우대칭으로 본존을 에워싸고 있는데 본존에 비해 권속이 유난히 작게 묘사되는 등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권속들을 여러 단으로 질서 있게 배치하여 좁은 공간에 보다 많은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법은 1725년의 북지장사 지장시왕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 1729년의 해인사 영산회상도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해인사 영산회상도는 본존의 좌우에 4구의 사천왕, 26구의 보살, 2제자, 50나한, 팔부중, 기타 諸神, 144구의 分身佛, 12구의 他方佛 등 240여구에 달하는 권속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는 등 구도의 묘를 잘 살리고 있다.
또한 권속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작아져 마치 화면의 상부를 향해 상승하는 효과를 갖기도 한다. 이처럼 본존과 권속들의 크기를 확연히 차이 나게 한다든지 권속들의 규모를 서로 차이 나게 묘사하는 수법은 중앙의 본존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권속들은 대개 본존을 향해 몸을 틀고 있어 본존 중심의 예배화로서의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구도 뿐 아니라 형태상의 변화 또한 더욱 두드러진다.
조선전기에는 인물들의 형태가 다소 수척하면서도 세장한 형태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러한 인물의 형태적인 특징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건장하면서도 원만한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1649년 청주 보살사 괘불(淸州 菩薩寺 靈山會掛佛幀)의 본존 석가모니불은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하여 항마촉지인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중앙의 화면을 압도하게끔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데, 근엄한 얼굴과 당당한 상체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뾰족한 육계와 큼직한 계주, 작은 코와 입에 비해 유난히 큰 눈, 도식적인 귀의 모습 등은 전형적인 당시 불상의 특징이며, 직각에 가까운 어깨로 인해 상체는 거의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보살을 비롯한 권속들 역시 건장하면서도 묵중한 느낌을 준다.
1687년作 쌍계사 영산회상도에 이르면 본존은 더욱 장대해져서 우견편단으로 벗은 상체가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풍만하게 보이며, 가슴위로 들어 올린 오른팔은 비대할 정도로 두껍게 묘사되었다.
각지고 건장한 신체라든가 사각형에 가까우면서 무표정한 얼굴표정 등은 당시 불상조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청나라 불상양식의 특징 중의 하나로서, 불상의 얼굴과 상체, 하체 등을 마치 큐빅과도 같이 분절되고 각지게 묘사하는 수법은 조선후기 동안 불상, 불화에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신체가 다소 위축되고 세장해지면서 얼굴도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갔는데, 특히 경기도와 충청도 등 기호, 호서지방의 불화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두드러진다.
신체의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얼굴의 모습으로서 얼굴은 둥글거나 사각형적인 넙적한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1687년 쌍계사 영산회상도, 1693년 흥국사 영산회상도, 1715년 천은사 영산회상도, 1729년 해인사 영산회상도, 1765년 선암사 영산회상도에서 보듯이 얼굴의 크기에 비하여 이목구비가 작게 표현되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가늘고 긴 눈이라든지 유난히 작은 입, 콧수염과 턱수염의 형식적인 표현 등은 어느 작품에서나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은 부처의 자비나 위엄을 나타내주는 정신성이 깃든 상호라기보다는 무표정하면서도 획일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여, 조사도라든가 나한도 등 특정한 얼굴모습을 표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슷비슷하여 구별조차 힘들다. 더구나 본존과 권속조차도 얼굴의 윤곽, 표정이 흡사하여 구분이 안될 정도이며, 특히 보살중은 거의 흡사하여 지물과 위치에 의해서만 존상의 명칭파악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징은 불화가 오랫동안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래되는 초본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로 보이며, 따라서 지역적으로 인접한 지역에서는 일정한 화사집단에 의해 양식적으로 유사한 불화가 제작되었다.
1770, 80년대 이후가 되면 본존의 상체는 다시 길어지면서 얼굴에서는 더 이상 원만하고 풍만한 모습은 볼 수 없으며 사각형적인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로 인하여 부처의 자비와 위엄이 많이 사라졌다.
본존의 머리에는 높고 뾰족한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머리 중앙에는 넙적한 중앙계주, 꼭지에는 원형의 정상계주가 묘사되었는데, 앞 시대에 비해 유난히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이마 한가운데 八자형의 머리카락, 콧수염, 턱수염이 반드시 표현되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으로서 상당히 장식적이고 도식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특징은 본존 불상뿐 아니라 보살을 비롯한 권속들에게도 모두 공통되게 나타난다.
본존의 광배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이 겹쳐서 표현되는 이중륜광(二重輪光)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전기와는 달리 키형 모양의 광배가 많아져, 1649년 보살사 괘불을 비롯하여 1653년 화엄사 괘불, 1687년 쌍계사 영산회상도, 1693년 흥국사 영산회상도, 1708년 장곡사 아미타극락회상도 등 17세기 중엽~18세기초의 불화에서는 광배 내부를 화려한 국당초문(菊唐草文) 또는 방사형으로 가득 채운 키형 광배가 성행하였는데, 사각형에 가깝게 각지게 처리된 두광, 신광은 장대한 신체의 본존을 더욱 당당하게 보이게 해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광배 내에는 현란한 모습의 꽃장식이나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빛줄기 등으로 가득 메우고 있어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효과를 준다.
장식적인 요소는 특히 채운(彩雲)의 빈번한 사용에서 잘 드러난다.
화면의 윗부분이나 권속들의 사이사이에, 또는 여러 장면을 구획하는 부분에 묘사되는 채운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인물들이 마치 구름 사이에 서있는 것 같은 모습은 종교화로서의 신비감을 더해줄 뿐 아니라 장면 장면을 효과적으로 분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팔상도라든가 변상도, 감로왕도 등 다양한 장면들이 복잡하게 표현되는 불화의 경우, 채운은 동일한 성격의 장면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색채 또한 다양해지면서 화려해 진 것이 이 시대 불화의 한 특색이다.
1653년의 화엄사 괘불, 1683년의 도림사 후불탱화와 같이 비교적 이른 시대인 17세기 후반기의 불화에서는 색채가 매우 밝고 투명하게 설채되었는데, 특히 화엄사 괘불에서는 붉은색과 녹색이 밝고 연하게 채색되어 거의 포가 비칠 정도의 색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같은 설채법(設彩法)은 18세기 초반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1709년의 영국사 영산회상도, 1725년 북지장사 지장보살도, 1728년 용문사 팔상도에서는 주조색인 녹색과 홍색이 보색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배색으로 인하여 색이 서로 튀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불화들, 예를 들어 1744년 직지사 삼세불화, 1767년 개심사 관경변상도, 1775년 쌍계사 약사불화, 1776년 천은사 아미타불화, 1780년 선암사 회엄경변상도 등은 바탕과 광배 등에 녹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거기에 감홍색이 배합되어 강렬한 색 대비를 보여준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녹색과 홍색이 주조색을 이루면서 황토색, 검정색, 금니, 하늘색, 흰색 등을 효과적으로 설채하는 것이 이 시대 설채법의 특색이 아닌가 생각된다.
金泥의 경우 조선후기에 오면 보관, 옷깃, 홀, 법의의 일부 등을 제외하고는 금니의 사용이 극도로 제한 된 것도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불화의 시주계층이 왕족, 귀족이 주류를 이루던 고려조, 조선전기와는 달리 일반 민중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문양에서도 간취된다.
조선후기에도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문양보다는 색으로서 장식효과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1649년 보살사 괘불은 광배 안을 장식한 화문이라든지 본존과 권속들의 옷깃에 시문된 문양, 사천왕의 갑옷의 문양은 고려시대 못지않게 화려하고 꼼꼼한 필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1765년 북지장사 지장보살도와 1777년 용연사 영산회상도 광배의 국당초문, 1776년 천은사 아미타불화와 1781년 쌍계사 아미타극락회상도 본존 법의의 원문 등은 조선후기에 성행하던 문양으로서 고려 및 조선전기와는 다른 독특한 미를 보여준다.
한편, 조선후기 18세기의 불화양식은 1770, 80년대를 전후하여 변화를 보인다.
인물들의 형태는 1782년 쌍계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1786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영산회상도와 같이 한편으로는 원만하고 장대한 모습이 그대로 존속되는 한편, 1790년 용주사 삼장보살도에서는 인물들의 신체비례가 맞지 않아 마치 가분수같고 얼굴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변모하는 등 변화를 보인다.
또 1782년의 향천사 지장보살도에서는 신체가 다소 위축되고 세장(細長)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인물들의 얼굴은 유난히 길고 세장하며 본존의 얼굴은 턱 부분이 좁아지면서 얼굴은 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였고 시왕의 얼굴도 희화적으로 변했다.
이와 같은 인물표현은 동시대의 다른 불화에도 보이는 양식상의 특징으로서, 위엄과 자비가 넘쳐야 하는 본존(本尊)의 얼굴은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렵고 대부분 무표정하연서도 현실적인 얼굴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 이후가 되면 얼굴은 넓적해지고 눈과 코, 입은 더욱 작아져 더 이상 원만한 상호(相好)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인물들의 형태 또한 매우 세장해지고 얼굴이 역삼각형에 가깝게 표현되기도 한다.
조선후기 중에서 제2기에 해당하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불화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구도이다. 대부분의 불화에서는 18세기와 마찬가지로 본존을 중심으로 하여 권속들이 둥글게 에워싸는 군도형식이 가장 기본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불화의 규모가 소형화됨에 따라 일부 권속의 표현이 간략화되는 한편, 일부에서는 작아진 화면에 오히려 전보다 많은 권속들을 표현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화면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권속의 간략화 현상은 후불탱화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1840년 선운사 삼신불화, 1884년 쌍계사 나한전 아미타불화에서는 2~4구의 협시보살, 십대제자의 일부, 사천왕 또는 팔부중 일부 등 최소한의 권속만이 표현되는가 하면 1884년 전등사 약사전 약사불화에서는 일광보살, 월광보살 및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천왕을 배치하는 간단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또 1855년 은해사 심검당 아미타불화, 1862년 은해사 운부암 아미타불화처럼 아미타삼존과 두 제자만을 표현하거나 1885년 표충사 아미타삼존도, 1897년 아미타불화에서와 같이 아미타삼존만을 배치하는 예도 있다.
또한 축소화의 경향은 가령 삼세불화나 삼신불화의 경우 삼존을 한 화폭에 모두 그리거나(1891년 안심사 대웅전 삼세불화, 1907년 갑사 대적전 삼세불화) 시왕도에서는 한 화폭에 한 왕만이 표현되던 것이 세 왕 또는 다섯왕(1862년 화엄사 시왕도)을 함께 그려 봉안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전각의 규모가 소형화하는 경향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일부 불 ∙ 보살화 내지 신중화에서는 화면이 매우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 시대 불화의 한 특색이다. 광서년간(1875년~190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관음전 불화는 중앙의 아마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12제자, 사천왕상, 아난, 가섭존자 및 비구상, 주악천인상, 팔부신중, 시방제불로 구성된 복잡한 구도양식을 보여주며, 1897년 법주사 대웅보전 신중화는 세로 308cm×가로 348cm의 화면에 아수라, 제석, 범천을 비롯하여 104위 신중을 위에서 아래까지 가득 배열하여 화면에 전혀 여백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18세기 말경에 이르는 일부 불화에서 본존의 대좌 아래에 동자를 2구 배치하는 새로운 도상이 성립된다. 이러한 도상은 1786년 보덕사 지장시왕도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19세기 이후의 불화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특히 지장시왕도에 가장 빈번하게 보인다.
동자상은 비단 지장보살도 뿐만 아니라 도리사 칠성탱화, 1886년 광흥사 아미타도, 1888년 백운암 칠성각 칠성탱화, 통도사 안양암 신중도 등에도 표현되고 있어 19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였던 형식으로 생각된다. 형태는 머리에 흰 꽃을 꽂고 손에 석장(錫杖)이나 상자를 들고 있는 동자를 한 쌍 배치한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쌍계의 동자가 표현되기도 한다.
이처럼 선과 악을 상징하는 동자를 강조하여 크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권선징악적인 윤리를 강조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불화의 도상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악동자의 모습은 특히 1870년~1880년대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것 같다.
다음으로 인물표현을 살펴보면 18세기 불화에서 보이던 둥글고 원만했던 인물의 모습은 점차 형식화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어 갔다.
신체의 표현은 인체 비례와 맞지 않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 많은데 허리가 길어 세장한 느낌을 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몸에 비해 머리가 커서 짤막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예가 많다.
얼굴은 전보다 더 가늘고 긴 눈, 아주 작은 입이 얼굴 한가운데로 몰려있어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불, 보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예를 들어 1855년 은해사 심검당 아미타불화는 같은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1786년 거조암 영산회상도를 모본으로 하여 그린 듯 도상이 유사하지만, 특히 아마타불의 얼굴에서는 부처의 위엄과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본존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역시 본존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준다.
대체로 신체는 세장한 편이며 탄력이나 양감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1880년대를 전후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제작된 불화에서는 권속들의 얼굴이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음영을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눈 주위라든가 코부분, 뺨 부분에는 그 부위를 짙게 칠하여 움푹 들어간 느낌을 주며, 얼굴 골격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양화법이 전래, 수용되면서 일반회화에서도 음영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 속에서도 18세기의 원만하고 볼륨 있는 인물표현이 계승된 일련의 불화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19세기 중엽경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제작된 불화들로서, 화암사, 선암사, 쌍계사, 금산사, 화엄사 등에서 제작된 불화들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 작품들은 대부분 19세기의 작품이 다소 세장하고 현실적으로 얼굴을 표현하였던 것에 비하여 18세기의 원만하고 양감 있는 인물의 표현을 그대로 이어 받아 우수한 양식을 창출해 내었다.
또 이들 불화들에서는 보살이라든가 사천왕의 표현에서 마치 고려불화에서 보는 것 같은 아주 화려하고 복잡한 의습의 표현이 돋보인다.
19세기의 불화에서는 문양은 전처럼 중요한 장식요소는 아니었던 같다.
본존을 비롯한 권속들의 옷에 다양하게 시문되었던 여러 가지 문양이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본존의 법의와 법의 가장자리, 일부 권속들의 옷, 대좌의 일부 등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본존의 법의는 붉은 바탕에 금색의 작은 원문으로 시문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법의는 마치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의 법의를 연상시키지만 고려시대처럼 화려한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의 원문이 아닌 단순한 동심원문이나 화문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법의 가장자리에는 국당초문이 화려하게 시문되어 있다.
본존 이외의 권속들은 붉은 색 또는 녹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단색으로 처리하든지 잔잔한 원문 계통을 그린 것이 많다.
즉 색채가 다양화됨에 따라 문양은 단순화되고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변모된 것이 특징이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전반적인 색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18세기 불화에 비해, 19세기는 전반적으로 채색이 어둡고 짙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적색과 녹색 또한 전처럼 밝고 명랑한 색조가 아니라 두껍게 덧칠하여 탁하면서도 무거운 느낌을 준다. 또 몇몇 불화에서는 유난히 적색의 사용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들 불화에서 사용한 적색도 전처럼 밝은 홍색에 가까워 포가 비칠 정도로 옅게 칠해지던 것과는 달리 血色에 가까운 짙은 색조를 느끼게 한다.
검은색이라든가 고동색, 명도가 높은 청색의 빈번한 사용도 불화의 고상한 품격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金泥의 사용도 전보다 눈에 띠는데 특히 19세기 후반에 흥천사, 정수사, 칠장사 등 경기도 일대에서 제작된 불화에서는 본존의 신광 전체를 금니로 채색하여 화려하면서도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든다.
19세기말에는 더욱이 호분을 섞은 청색을 많이 사용하여 화면 자체가 탁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격조 없이 타락해버린 느낌을 준다.
청색은 18세기 말부터 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1840년 선운사 삼신불화, 1862년의 화엄사 시왕도에서는 동일한 청색을 사용하더라도 명도가 낮은 차분한 청색을 사용하여 다른 색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1858년 선암사 산신도, 1880년 불영사 시왕도, 1895년 선암사 칠성도에서는 채운과 병풍의 일부분, 하늘 등에 청색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고 또 청색 자체도 명도가 높은 색을 칠하여 다른 색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두드러져 보인다.
더구나 20세기 초의 작품에 이르게 되면 불화의 주조색이 적색과 청색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청색의 사용이 많아졌다.
다시 말하면 차분하지 못하고 약간 들뜨는 가벼운 채색으로 설채하므로써 색에 의해 조화로운 부처의 세계를 구현하던 불화의 기능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필선은 더욱 경직되어 더 이상의 유려한 필치는 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필선은 이제 더 이상 인물이나 사물의 윤곽을 정의하는 선이 아니라 단지 채색을 하기 위한 밑선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조선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경향이지만 19세기 이후가 되면 채색이 짙어지면서 선은 윤곽선으로서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초본에 의해 도상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불화의 작업과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삼국시대에 불교의 수용과 함께 조성되기 시작한 불교회화는 불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전해주는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뿐 만 아니라, 사원의 장엄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사상 큰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색태와 구성으로 불교의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주는 불화는 불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불교미술로서 또 예배대상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생활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민중의 회화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엄청난 양으로 볼 때도 우리나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불화의 주제
불화는 어떠한 존상(尊像)을 그렸는가에 따라
크게 여래화(如來畵), 보살화(菩薩畵), 조사 ․ 나한도(祖師 ․ 羅漢圖), 신장도(神將圖)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중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설명하고자 한다.
① 석가불화(釋迦佛畵)
: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또는 영축산, 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교를 창시한 분이므로 불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가장 널리 그려진 그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석가불화의 종류에는 석가독존도(釋迦獨尊圖) ․ 석가삼존도(釋迦三尊圖) ․ 석가오존도(釋迦五尊圖) ․ 석가16나한도(釋迦十六羅漢圖) ․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등 예배도의 형식이 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전생을 그린 본생도(本生圖, Jataka),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 등도 있다.
이 중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입멸(入滅)할 때까지의 주요한 사건들을 여덟 가지 장면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으로, 도솔래의(兜率來儀) ․ 비람강생(毘藍降生) ․ 사문유관(四門遊觀) ․ 유성출가(踰城出家) ․ 설산수도(雪山修道) ․ 수하항마(樹下降魔) ․ 녹원전법(鹿苑轉法) ․ 쌍림열반(雙林涅槃) 등이다.
②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그린 그림으로, 아미타독존도(阿彌陀獨尊圖) ․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 아미타칠존도(阿彌陀七尊圖) ․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여러 권속들과 함께 내영하여 임종자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그려졌다. 호암미술관소장의 아미타삼존내영도가 유명하다.
관경변상도는 아미타삼부경(阿彌陀三部經) 중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본변상(本變相)과 16관변상(16觀變相)의 두 종류가 있다.
고려시대의 아미타여래도에서는 아미타불의 협시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정토신앙과 명부신앙이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③ 비로자나불화(毘盧舍那佛畵)
: 비로자나는 광명의 부처님으로, 부처님의 진리가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의 본존으로 널리 신앙되었으며,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칭해진다.
석가모니와 같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하고 있으며, 두 손을 마주 잡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비로자나독존도(毘盧舍那獨尊圖) ․ 비로자나삼존도(毘盧舍那三尊圖) ․ 비로자나불회도(毘盧舍那佛會圖) ․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의 형식이 있다.
④ 미륵불화(彌勒佛畵)
: 미륵불은 아미타불과 함께 정토신앙을 대표하는 부처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미륵신앙이 성행하였는데, 특히 고려시대에는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구제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성불시킨다는 내용의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이 유행하여 그것을 도상화한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가 제작되어 현재 2점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미륵전의 주존(主尊)으로 신앙되었으나 남아있는 불화의 예는 많지 않다.
⑤ 약사불화(藥師佛畵)
: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과 번뇌를 치유해주는 부처님으로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를 주재한다.
전쟁이나 전염병 등이 있을 때 특히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는데, 약사여래는 손에 약합(藥盒)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불화의 종류에는 약사독존도(藥師獨尊圖) ․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 약사12신장도(藥師十二神將圖) ․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 등이 있다. 최근에 고려시대의 약사불화가 여러 점 발견되었다.
⑥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 아미타불의 왼쪽 협시보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인기 있었던 보살 중의 하나인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형상으로 그려졌는데, 대나무가 솟아있는 암벽에 흰 사라를 걸친 관음보살이 앉아있고 오른쪽 바위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이 놓여있으며 관음보살의 건너편 아래쪽에는 선재동자(善材童子)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는 형상의 관음도이다.
이외에 천수천안관음보살도(千手千眼觀音菩薩圖) ․ 준제관음보살도(準提觀音菩薩圖) ․ 백의관음보살도(白衣觀音菩薩圖) ․ 관음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 ․ 여의륜관음보살도(如意輪觀音菩薩圖) 등이 있다.
⑦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주는 명부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은 특히 외우내환이 잦았던 고려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신앙되었다.
그림의 형식은 단독의 지장보살그림(地藏菩薩獨尊圖),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의 지장보살삼존도(地藏菩薩三尊圖), 지장보살 삼존과 사자(使者), 판관(判官), 동자(童子) 등의 권속을 배치한 지장보살과 권속그림, 여기에 시왕을 덧붙인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의 협시로 등장하는 지장보살그림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고려시대의 지장보살은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⑧ 나한도(羅漢圖)
: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彌勒佛)이 출세(出世)하기까지 56억 7천만년 동안 이 세상에 남아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제자들로서, 아라한 또는 응공(應供), 복전(福田) 등으로 불린다. 16나한, 오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는 호불정책으로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았고 이에 따라 나한에 대한 신앙도 크게 성행하여 나한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오백나한도 가운데 십여 점이 남아있으며, 조선시대에는 16나한도가 주로 조성되었다.
⑨ 감로도(甘露圖)
: 아귀도(餓鬼道)의 세계를 묘사한 불화로, 영혼의 극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아귀나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甘露味)를 베풀어 극락에 왕생케 한다는 의미에서 감로도(甘露圖)라고 하며, 영혼을 위무하는 내용을 그렸다고 해서 영단탱화(靈壇幀畵), 지옥에 빠진 조상과 부모에게 우란분재(盂蘭盆齋)의 성반(盛飯)을 올림으로써 지옥의 고통을 여의고 극락왕생케 한다는 의미에서 우란분경변상도(盂蘭盆經變相圖)라고도 한다.
그림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윗부분에는 극락의 아미타불 일행과 칠여래(七如來, 또는 五如來)가 지옥중생을 맞으러 오는 장면, 중간에는 영혼을 천도하는 우란분재를 올리는 모습, 아래에는 아귀도와 지옥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고통을 묘사하였다.
⑩ 신중도(神衆圖)
: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신들[神衆]을 도상화한 그림으로 조선시대 이후 사찰의 대웅전이나 극락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 안에는 거의 빠짐없이 봉안되었다.
신중탱화의 형식은 제석탱화(帝釋幀畵), 천룡탱화(天龍幀畵), 제석 ․ 범천탱화, 제석 ․ 천룡탱화, 제석 ․ 범천 ․ 천룡탱화, 39위신중도(三十九位神衆圖), 104위신중도(百四位神衆圖), 금강탱화(金剛幀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⑪ 칠성도(七星圖)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그림으로 칠성각(七星閣) 또는 삼성각(三聖閣) 안에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와 함께 봉안된다.
중앙의 치성광여래(熾盛光佛如來)와 일광여래(日光如來), 월광여래(月光如來) 등 치성광(熾盛光) 삼존(三尊)을 중심으로 좌우에 필성(弼星)과 7여래(如來), 도인형(道人形)의 칠원성군(七元星君), 삼대육성(三台六星), 28수(宿), 자미대제(紫微大帝) 등을 배치한 형식을 취하는데, 간단히 치성광삼존(熾盛光三尊)만을 묘사한 형식에서부터 이들 권속을 모두 묘사한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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