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초상화]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Gijuzzang Dream 2009. 2. 18. 21:42

 

 

 

 

 

 

 

 오리 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평양 생사당 구장 이원익 영정

166×93㎝

 

평양의 서리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에 모셔졌던 영정이다.

제작 시기는 그가 1595년 우의정에 임명되어 조정에 올라올 때를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좌측상단에 있던 화기(畵記)와 《오리집(梧里集)》에 수록된

<서기성생사철환도상배후(書箕城生舍撤還圖像褙後)>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그림의 경위를 아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이 영정은 형태상으로 오른 손은 부채를 쥐고, 왼손은 관대를 잡고 있는 것과,

바닥에 돗자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승진영(高僧眞影)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서 화승(畵僧)이 그린 영정으로 추정된다.

1978년 10월 10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초모본 이원익 영정

156×82.5㎝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도상을 그리기에 앞서 그린 것이나 별로로 그린 초본(草本)으로 추정된다.

“萬曆三十二年 甲辰草 完平府院君 李 畵像草”라는 화기가 있어 제작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양쪽 어깨선과 흉배 윗부분에 칼로 예리하게 자른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이 영정이 상반신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또한 호성공신도상의 형태와 흡사한 점으로 보아 공신도상을 제작할 때 그린 초모본이거나

그 초모본을 후대에 다시 모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흉배 윗부분만 있던 것을 후대에 윗부분의 색깔과 비율을 고려하여

아랫부분을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호성선무청난공신도감의궤(扈聖宣武淸難功臣都監儀軌)》에 따르면,

대상 인물의 얼굴 초본을 그리고[초모(草模)] 화가가 실제 인물을 대면하고 나서

신체의 비례를 파악하여 전체그림을 완성하는 것[정화(正畵)]으로 되어있다.

즉 초모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초모본 이원익 영정’은

공신도상의 제작과정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

167×89㎝  

 

1604년(선조 37) 이원익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피난했던 공적이 인정되어

호성공신으로 녹훈되었을 때 그려진 영정이다.

이원익은 선무공신(宣武功臣)까지 추대되었으나 극력 사양하고 스스로 호종공신만 인정하였다.

공신에게는 훈호(勳號)와 녹훈교서(錄勳敎書)가 내려지고, 화상(畵像)을 그려 내려준다.

아쉽게도 녹훈교서는 종가에 남아있지 않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초반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영정이다.

2005년 7월 5일자로 국가문화재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잔결본 이원익 영정

160×90㎝  

 

흉배에 쌍공작, 모란 등이 보이므로 문관 1품 벼슬일 때 그려진 이원익의 영정으로 보인다.

흉배 윗부분과 아래 족좌(足座)부분만 남아있다.

특징은 족좌가 다른 공신도상보다 매우 높은 형태라는 점다.

이는 키 작은 재상으로 알려진 이원익의 신체적 특징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호성공신도상과의 관련은 밝혀지지 않아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소수서원 소장 이원익 영정

160.5×88.5㎝

 

1663년(현종 4) 봄에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을 모사한 영정이다.

우측에 “領議政 完平府院君 文忠公 梧里先生畵像 癸卯春移摹”라는 화기가 있어

영정의 제작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소수서원에서 누가 어떤 동기에 의해 모사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이원익이 영남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 인물인지를 파악하는데

하나의 실마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원익 영정

165.8×81.5㎝

 

17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원익의 영정이다.

단령의 트임 사이로 내비치는 관복의 안감과 철릭(帖裏)만 나란히 배열한 것이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도상의 특징이다.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 후손집안에게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