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읍에서 바라본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 전경 |
우리네 마을 앞 벌판 끝자락에 나앉아 솟은 뫼가 있다. 곧, 눈만 뜨면 늘 보는 앞산-조산(朝山)이다.
남쪽 너른 들판끝에 선 지킴이다. 해서, 성을 쌓았다. 산성이다.
경남 함안군 가야(伽倻)읍 앞 5리 들 - 2.5Km에도 앞산(南山)인 조남산(鳥南山, 139m)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을 모았으니, 이에 아예 성산(城山)이라고 부르는 뫼다.
고을 이름마저 그러하니 바로 가야-아라가야(阿羅伽倻=安羅國=咸安) 땅이어서
가야성으로 지정(사적 제 67호)되어있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다.
산성 서쪽 옆에서 마을까지 뻗어난 산등성이로
무려 150분이나 되는 크기도한 가야무덤이 따라 나올라 앉아 있기도 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1991년부터 발굴조사하고 있다.
땅에 박히고 묻힌 옛 자료는 파보지 않고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발굴조사를 하나하나 함으로써 차곡차곡 쌓여진 묵은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성 축성법을 밝히다 - 부엽공법의 발견
묏머리와 골짜기를 껴안고 감싼 이른바 포곡식(包谷式)이자,
얇은 벽돌꼴로 돌을 납작히 잘라 하나하나 켜켜로 쌓아올려 만든 판석(板石) 석성(石城)으로,
성벽 안팎을 곧게 쌓아올린 협축(夾築)이니 곧, 포곡식 판석협축 산성이다.
그리고는, 나중에 안팎에 덧붙인 보강벽도 있음을 찾아냈다.
정문인 동문과 서 · 남문들을 갖춘 속이 좀 오목한 둘레 1.4㎞(면적 102만 460㎡) 산성으로
물을 얻기 위한 못과 물길(水路)를 지닌 성이다.
물이 흐르는 골짝 쪽은 어떻게 쌓았는지 지난해 말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온전히 드러나 놀라게 하였다. 바로 성벽 안쪽에 8.8m 떨어져 단단히 엮은 나무울타리를
무려 15.2m 너비, 높이 2.4m로 세우고 그 속에 나뭇가지와 잎 · 풀들을 단단히 다져 메우고
못쓰는 토기와 흙을 덮은 둑차림을 밝혀낸 것이다.
현 길이 27.2m로 세운 기둥은 밤 · 상수리, 가롯대는
곧은 상수리가지로 탄력있고 잘 썩지 않는 단단한 나무를 썼음도 알아내었다.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 발굴된 함안 성산산성의 출토 목간 적외선사진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기들
이리하여, 물길을 막고 느리게 하여 성을 쌓는 장치가 드러나 감탄했고,
이른바 이러한 식물유기체로 만든 부엽공법(敷葉工法)은
일본(狹山池 · 616경 댐못)보다 반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더구나, 이 시설은 쌓은 뒤에도 세찬 골짝물에 약해지고 무너짐을 막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오늘에도 땅 밑이 약한 곳에 쓰는「저면 매트포설 시공법」이라는
고분자섬유 매트리스의 현대공법의 원조여서 우리나라 고대건축법의 맥과 우수성을 확인케 한 유적이다.
나아가, 성을 서로 나누어 쌓은 자국-분기점선과,
아랫도리에 무너짐을 막고 튼튼히 하려는 잡석의 보강벽도 드러났으며
성벽 물이 빠져나가는 네모난 물홈(水口)의 물이 떨어지는 바닥도 큰 돌널(石板) 길을 깔아,
바닥이 파여 무너짐을 막으려는 높은 슬기도 드러냈다.
더구나, 성벽을 끝까지 파보니 위아래가 서로 달랐다.
위는 다듬은 판석을 줄 맞추어 쌓았으나 밑쪽은 그냥 깨진 돌-자연활석으로 엉성하게 쌓은 모습이었다.
성산산성은 1587년(선조 20)에 군수 정구(鄭逑, 1543-1620)가 군 선비들과 함께 펴낸
함안(咸州=咸安)군지인 『함주지(咸州誌)』고적쪽에서만 가야 때 성으로 적혀 가야성이 아닌가 해왔다.
(伽倻國 舊墟 在郡北 五里許 城山之上 周回 四千三百八十三尺 至今城基宛然
隆慶己巳 張侯範 建書院于此 今移琴川)
발굴조사를 통한 현재로서는, 성의 여러 모습이나 나오는 유물(가야 것이 없음)과
특히, 나무울타리둑-부엽공법둑 위쪽에서 무려 246쪽이나 나온 나무 글씨 쪽(목간, 木簡)들이
신라로 보여져, 신라가 아라가야를 삼킨 560년 무렵 바로 뒤에 백제 · 왜에 맞서 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일본서기(『日本書紀』권19, 欽明天皇 22, 561)에 보이는 신라가 아라가야의 파사산에
왜를 막는 성을 쌓는데(新羅 築城於 阿羅 波斯山 以備日本) 도움을 준다.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과 제첨축
목간(木簡) 곧, 먹글씨(墨書)를 쓴 나무쪽(片)은
1975년의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51쪽(묵서 45쪽)쪽의 신라목간이 나와 눈길을 끌면서
30년이 넘은 지금 백제 · 신라유물이 곳곳에서 나와 600이 넘는 점(片)을 헤아리고 있다.
이 가운데, 1992년의 6쪽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무려 246쪽(묵서 193쪽)이나 이 성산산성에서 나와
최대 · 최고의 목간에다 그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국고대사 연구의 분수령을 차지하고,
한국 목간사와 우리나라 목간학이 비로소 서게 되었다.
정문인 동문 안쪽, 나무울타리둑의 위쪽이 무너지면서 쓸려내려 쌓여진 부엽층-썩은
흙층(뻘층)이 3m나 되게 쌓여진 속에서 나오고 또, 처음으로 목간용(으로 다듬은) 나무와
붓, 쓴 먹글씨를 깎아버리는 지우개용 칼(削刀 · 書刀)마저 찾아내
목간을 만드는 것까지 알려주는 보고다.
뿐만아니라, 여기에는 흙그릇(土器)쪽과 나무방망이를 비롯한 나무로 만든 유물(木器)들 및
많은 호두와 복숭씨에 도토리와 밤껍질에서 동식물유체까지 함께 나오고 있어
학계의 눈길 사로잡고 있는 곳이다.
물론, 아직 반도 발굴하지 않았기에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의 쏟아짐을 기다리고 있다.
목간은 소나무로 가장 많이 만들었으며,
그밖에 전나무 · 밤나무 · 버드나무 · 굴피나무 · 느티나무 · 뽕나무들의 13가지가 넘는
침엽수 · 활엽수로 만들었다.
더구나, 일본과는 반대로 둥치 곧, 본가지가 아닌 곁가지를 꺾어 납작하게 다듬고는,
그 등쪽에다 붓글씨를 쓴 것이 특이하다. 만든 목간의 건조나 먹의 번짐 탓 때문은 아닐까.
쓰인 글은 「직명(職名) - 지명(地名) - 인명(人名) - 관등명(官等名)」이나,
「지명(地名) - 인명(人名) - 곡물(穀物)명 - 수(數)와 양(量)」의 순으로 틀이 짜여져 적혀 있어,
신라의 다양한 내용 살핌뿐만 아니라 가야 · 백제와 왜에 이르는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적 관계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 나아가,
문자와 서예사 연구에까지 자료를 주는 소중한 것이 되고 있다.
17 마을과 23의 사람이름에 지(智 · 知 · 只 · 支)로 끝남도 19사람이나 된다.
벼슬은 외위(外位) 8등과 9등인 일벌(一伐) · 일척(一尺)이 보이고 있다.
내용으로 보아 하찰목간(荷札木簡) 바로, 짐(軍需品)의 물표인-꼬리표로서 물품에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물(荷物) 곧, 짐이 함께하게 된다.
때문에, 이를 가지고 성산산성 안 주둔군사의 배급을 위하여
피 1섬(稗 一石) · 귀한 쌀은 11되(米 十一升) 같은 수량으로
쌀(米) · 보리(麥) · 피(稗)와 소금(鹽) 들의 군수품 물자가
멀리는 김천(甘文城) · 영주(及伐城)에서까지 왔을만큼 중요한 곳이었음을 살필 수 있으며
더불어, 행정상의 물류이동과 체제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나아가, 이 성을 쌓을 축성 때에 해당 지역(주로 경북 사람들)에서 물자가 왔거나
아니면, 그 해당 지역에서 징발된 군사 그들에게 제공한 물자품 - 군량 · 군수품으로 보는 자료가 된다.
책갈피인 제첨축 12점의 발견
이들 목간 속에는 또, 이른바 제첨축(題籤軸)이라 부르는 파리채꼴 곧, 가래나 삽같이 네모얼굴에 자루가 길게 달린(총길이 20Cm 안팎) 꼴인, 종이문서를 두루마리(卷軸)로 말아둘 때 말은 두루마리 사이에 꽂아두는 색인표(인덱스)인 책갈피가 12쪽이나 나왔다.
다른 나라엔 없는 숟가락꼴도 6쪽이나 나왔다.
이는, 관청이 많은 문서를 내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펴지 않고 바로 확인하거나 쉽게 찾도록 하는 문서이름을 적은 표찰(書目札)이다.
제첨축의 문서가, 각지의 물표(荷札)들과 함께 나왔음은 바로, 힘 키운 신라가 6세기 중엽(560해 뒤, 진흥왕대)년에 전지역에 걸쳐
인구현황을 파악 · 정리한 호적(新羅帳籍)이 작성됐음을
그것도, 이 부분은(두루마리)종이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자료이다.
서예사 자료, 남북조풍
목간은 곧, 먹빛(墨色)이 흐르는 육필본(肉筆本) 글씨다.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글쓴이(書寫者)의 운필과 용필은 당시의 서법과 예술성을 보여 준다.
물론, 감상용은 아닌 필기용의 실용글씨로서 관(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쓴 이들의 신분도
중앙관(京位)으로서 12위4두품(頭品)인 대사(大舍)에서 14위인 길차(吉次)나,
지방관(外位)으로서 대사와 같은 6위 상간(上干)에서 11위인 아척(阿尺)들이 되어,
한마디로 배운 사람이다.
좁은 세로 나무쪽(片)에다 번지는 목간인 탓으로 빠르게(速筆) 또 줄여 쓰면서,
지명같은 제목은 크게 한 줄로 쓰고 밑의 설명부는 2줄씩으로 잘게 썼다.
문장형식은 바로 한국식 어순의 전통이다.
글씨체(書體)는 별체(異字體)를 쓰면서
고구려(高句麗)의 서풍이 드러나는 북조풍(北朝風) 및 팔분(八分)이 드러나고,
양(梁)나라를 비롯한 남조(南朝)의 서풍도 자리하는 한편,
당나라풍(唐風) 해서(楷書)의 앞단계를 보여주는 신라 글씨이다.
풍부한 목제 문화재 연구자료의 발견
이러한 성산산성의 목간층에선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목기를 연구하는 데도 빼놓아선 안 될 자료까지 많이 발굴조사 하였다.
빗과 접시뿐만 아니라, 고써래 유물은 옥수수나 콩 심는 골을 타는 연장으로
아직도 제주도를 비롯한 우리 산골서 쓰는 것이며, 연 날리는 얼레(실감개)같은 자료도 마찬가지이다.
1,500년이나 앞선 1,000점이 넘는 여러 전통목기는
밤나무 · 느릅나무 같은 단단하고 질긴 나무를 자귀 같은 연모로 만들어서
신라를 비롯한 그때의 삶살이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귀중하다.
- 글 · 사진/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 2009-02-05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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