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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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세시풍속 - 대동(大同 = 크게 하나 됨) 축제마당

Gijuzzang Dream 2009. 2. 13. 00:49

 

 

 

    

우리의 전통 속에 오롯이 전해져 내려오는 대동(大同)은

큰 세력이 화합하고 화평하게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시화연풍을 예축하는 대동의 마을 축제

 

 

해마다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세시풍속은 매 시기마다 고유한 의미와 기능이 담겨 있다.

특히 일년 세시의 절반 이상이 집중된 정월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 상징적 의미는 ‘우순풍조(雨順風調)’와 ‘시화연풍(時和年豊)’으로 집약된다.

 

정월의 세시풍속은

흔히 ‘동제(洞祭)’ 혹은 ‘공동체신앙’으로 일컬어지는 의례와 놀이를 통해 절정을 이룬다.

새해를 맞이하여 풍농을 빌고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공동체신앙은

한 해의 시작을 고하는 성스러운 의식인 동시에,

마을의 화합을 다지고 하나됨을 확인하는 대동(大同)의 축제마당이다.

기실 ‘마을’이란 공동체 속에서 잉태되고 활짝 꽃피운 공동체신앙은

민속문화의 핵심요소가 총체적으로 깃들어 있는 아이콘이었다.

 

정월이면 각 지역에서 어김없이 전승되었던 다양한 의례와 세시풍속의 전통을 거슬러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새해의 소망을 보듬는 정초의 의미

 
음력 정월을 예스럽게 부르는 말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우리에게 조금은 익숙한 맹춘(孟春) · 세수(歲首) · 원월(元月)을 비롯,

단월(端月) · 조세(肇歲) · 방세(芳歲) · 초세(初歲) · 청양(靑陽) 등은 좋은 예인데,

이는 자구와 같이 ‘한 해의 시작’ 또는 ‘새봄의 시작’을 뜻한다.

그 원단元旦인 설은 ‘신일(愼日)’이란 단어에 함축되었듯이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다.

  

새해 첫날을 맞아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려야 하는 만큼

마음을 가다듬고 언행을 삼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설은 일정한 격식과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가족·친족 중심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민속놀이 역시 혈연공동체의 유대를 다지는 윷놀이나 종경도(從卿圖)가 제격이었다.

조선 초기 하륜(河崙)이 창안한 것으로 전하는 종경도는 윷놀이와 대동소이하다.

 

정일품에서 종구품에 이르는 문무백관의 관직을 말판에 그려놓고 윷을 놀아

누가 먼저 영의정을 거쳐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겨루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양반의 자제나 부녀자들이 남편과 아들의 입신출세를 소망하기 위하여

연초에 관운을 점치고 기원하는 의미로 널리 행해졌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의 관제는 등급이 많고 복잡하여

아이들에게 일정하게 체계화된 관념을 갖기가 어려웠으니,

관직제도를 쉽게 익힐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종경도놀이가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되는 금기와 재계는 우리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래서 일찍이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날(上亥日)과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여 함부로 몸을 놀리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동국세시기』월내(月內)조에는 정월에 꺼리고 삼가야 할 일들이 좀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실제 정초에는 12지일(十二支日)에 따라 조심하고 피해야 할 금기와 속신이 유난히 많다.

가령 대문 밖 출입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예삿일이고,

그 간지마다 칼질 · 도마질하지 않기, 빗질하지 않기, 도끼질 하지 않기, 손톱·발톱 깎지 않기,

바느질하지 않기, 장 담지 않기 등 다양한 금기가 수반된다.

이러한 금기와 속신은 일년을 시작하는 정월이 무탈해야

남은 한 해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한해의 시작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표인 셈이다.


 

 

(위) 정초 복을 기원하는 마을주민들이

소원을 빌며 금줄치기를 해놓은

할머니당산

(아래) 충남 공주시 신풍면 쌍대리의

장승, 솟대에 동제를 지내는 모습

 

마을 차원의 장엄한 새해맞이 의식

 
동제의 출정을 알리는 신호탄은 지신밟기이다.

정월 초삼일 무렵, 마을 공터에 농기가 걸리면 풍물패들은 가가호호 걸립(乞粒)을 돌아 부엌(조왕굿)-장광(당산굿)-안방(성주굿)-우물(샘굿)을 분주하게 오가며 집안의 평안을 기원해준다.

이때 풍물패를 맞이한 집에서는 성의껏 돈과 곡식을 내어주고 술상을 차려 대접하는데, 상쇠는 갖은 고사덕담으로 재복과 무병재액을 빌어준다.

 

제일이 다가오면 마을의 수호신이 좌정한 당산과 동구 밖에 금줄이 쳐진다. 이로써 세속의 세계는 성(聖)의 세계로 전화한다.

소에는 더없이 친숙한 놀이공간이요 쉼터인 당산은

이제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되어 모든 이의 접근이 불허된다.

이를 기점으로 공동체 차원의 엄격한 금기가 수반된다.

그리하여 온 마을 사람들은 살생을 금하고 비린 음식을 멀리한다.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음식과 김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무엇보다 ‘피’를 부정한 존재로 여겨 빨래를 하거나 산에 땔나무를 하러가는 것은 물론 이도 잡지 않았고, 행여 부정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출산을 앞둔 산모는 피막(避幕)이나 해막(解幕)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처럼 일정한 금기와 재계(齋戒)의 시간을 감내한 뒤에야 비로소 축제의 마당이 기다리고 있다.

 

차례와 세배를 매개로 하는 설이 혈연 중심의 차분한 새해맞이 의식이라면,

정월 대보름은 마을이란 공간 속에서 함께 모둠살이를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의례이자 에네르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신명의 장이다.

 

공동체를 대표하여 선정된 제관은 우순풍조와 시화연풍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는 지고의 수호신에게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신심으로 새해의 소망을 축원한다.

이 시각 각 가정에서는 집안을 돌보아주는 가신(家神)과 마을신을 위한 고사가 베풀어진다.

이른바 ‘마짐시루’가 그것이다. 즉 마짐시루(마중시루)란

공동체의 사제로서 동제를 주관하는 제관과 그 구성원들이 신의 공물인 떡시루를 ‘마주 올린다’는 뜻인데,

마을 전체가 일심동체로 하나가 되는 가장 경건하고 성스러운 신년의례이다.

 

제사에 참례한 제관이 제물을 덜고 있는 모습

 

이러한 의식을 통해 새해에도 우리 마을과 가정이 무사태평하고

농사에 풍년이 들며 더욱 번창할 것이라는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는 공동체신앙

 

강원도 강릉시의 마을 수호신


정월 대보름 동제는 지역마다 그 이름이나 형식이 퍽 다양하다.

당산제(堂山祭)로 널리 알려진 호남지역에서는

으레 풍농을 기원하는 줄다리기가 수반되어 절정을 이룬다.

도서해안지역은 만선의 열망을 담은 어민들의 당제(堂祭)와 뱃고사가 풍성한 대보름을 장식한다.

 

충남에서는 청양 칠갑산 주변의 장승제와 동화제(洞火祭)가 유명한데,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동화제는 청양보다는 오히려 이웃한 부여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동네불’이란 뜻을 지닌 동화제는 거대한 ‘홰’를 불태움으로써

마을에 깃든 모든 악귀와 잡신을 추방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동일한 성격을 띤 동화제는

경기도 광주, 양평의 산간마을에서도 ‘해동화(解洞火)’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행복도시 예정지역인 공주 장기면과 연기, 그리고 무주군 부남면 일대에서는

농기(農旗)에 대한 오랜 신성관념을 엿볼 수 있는 특유의 기고사(旗告祀)가 내려온다.

이밖에 무속의 색채가 짙은 경기도의 도당굿,

장승 · 솟대 · 돌탑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충북의 수살제와 동고사,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를 신으로 모시는 영남의 골매기제,

강원 산간지역의 서낭제[성황제] 등은 빠뜨릴 수 없는 오랜 동제의 전통이다.

 

물론 공동체신앙이 정월 대보름의 전유물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초삼일을 전후하여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적지 않은데,

위도의 띠뱃놀이와 붕기풍어제(鵬旗豊漁祭)로 알려진 황도의 당제가 그러하다.

 

또한 내륙산간지역의 동제(산신제 · 탑제)는 제일이 정초인 경우가 대보름보다 우세하고,

강원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산맥이제는 3~5월 사이에 치제되는 독특한 산악신앙이다.

뿐만 아니라 충청도에서는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짙은 시월상달의 산신제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지난날 화전을 일구며 살아왔던 충주 · 제천 등의 여러 화전촌에서는 7월 산신제가 보편화되어 있다.



달과 불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향연

 
고대사회 이래로 달은 물 · 여성과 연결되어 농경의 풍요와 생산력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달은 시간의 질서와 시절의 운행, 자연의 섭리까지도 아울러 상징한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활력의 기준이 되는 달은 농경 및 어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만큼 새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상원(上元)은 그 주술력이 정점에 달하는 시기이므로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정월 대보름에 용알뜨기 · 달점 · 달불이(月滋) · 달맞이 · 삼신달받기 등

유독 달과 관련된 세시풍속이 집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가운데 공동체신앙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세시풍속을 꼽는다면

단연 달집태우기가 될 것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달집태우기는

전국의 산간마을에 두루 분포하는 기풍의례(祈豊儀禮)의 전형이다.

보름달이 떠오를 때 달집(月幕)을 불사르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것이다.

달을 불에 그슬려야 가뭄이 들지 않는다는 믿음은

우순풍조를 비는 주술적 의례이자 풍농에 대한 간절한 희구이다.

아울러 사악한 기운과 부정을 살라 없애는 불이 지닌 정화력을 적극 차용한 액막이 의식이다.

이처럼 달집태우기는 새봄과 풍농을 예축(豫祝)하는 역동적인 의례로서

달과 맺어진 정월 대보름 의미가 종합적으로 녹아든 세시풍속의 표상으로 우뚝 서 있다.

 

마을공동체신앙은 오랜 농경문화 속에서 배태된 산물이다.

한국전쟁과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급속히 소멸되고,

때론 미신이란 오명 속에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그것은 항복무강을 염원하는 민초들의 신명나는 새해맞이 축제인 동시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희망의 노래였다.
- 강성복 충남대 마을연구단 전임연구원 /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새해맞이 축제, 민속놀이를 통해 大同을 배우다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으로 일컬어 온 인간 본성에 대해 일찍이 호이징거(J.Huizinga)는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으레 ‘각박함’과 ‘개인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

마을공동체라는 공간 속에서 연행되는 새해맞이 축제,

그 구심점인 대동놀이를 통해 각박함을 떨쳐버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된 대동의식을 일깨워 보자.

비로소 인간이 유희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해의 시작 정월, 놀이하는 비일상의 시간

 

전통사회에서 축제는

마을에서 모시는 신에 대한 제사와 대동놀이, 그리고 다양한 민속예술로 구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대동놀이는 상당수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진다.

대보름은 일 년 중에서 달이 크게 차올라 달빛이 가장 밝은 날이다.

달이 둥글게 차고지는 주기는 규칙적이며 또한 정확하기 때문에

보름 중에서도 농사를 짓기 전에 맞이하는 첫 번째 만월(滿月), 정월 대보름의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

 

공동체 신에 대한 제의가 이 무렵에 집중되어 있고,

한해의 풍흉과 모듬살이를 점치는 놀이와 행위 또한 이 날 집중적으로 행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동적이고 집단적인 대동놀이도 정월 대보름에 집중되어

마을공동체의 새해맞이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여성들은 휘영청 둥근 달빛을 받으며, 여럿 어울려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강강술래를 즐겼고,

두 패로 나뉘어서 노래를 부르며 놋다리밟기를 했다.

 

한편 고싸움 · 동채싸움 · 나무쇠싸움 · 농기싸움 · 횃불싸움 등 남성들의 놀이는 명칭에서부터

싸움 형식의 겨루기 놀이가 주종을 이룬다.

이름에서처럼 놀이의 방식이 한층 격렬하고 규모도 거대한 ‘싸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놀이감부터 거대하고 복잡하다. 동채 · 고 · 나무쇠 등 거대한 놀이감이 동원되는가 하면,

각종 풍물과 깃발 등이 함께 준비되어야 한다.

풍물을 구입 · 보존하고 동채와 같은 거대한 놀이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미 마을 단위의 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적인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단놀이는 그 양식상 오랫동안의 준비과정과 소정의 경비를 필요로 하며,

대규모의 일원이 일시에 동원되어야 하므로 수시로 판을 벌일 수는 없었다.

정월 대보름 축제에서는 중심을 이루는 놀이와 함께 다채로운 앞놀이와 뒤풀이가 배치된다.

이로서 중심적 연행은 한층 풍요로워지고, 지역민들은 보다 깊게 축제에 빠져들 수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의 경우

중심적 연행인 두 편싸움놀이의 앞놀이로서 서낭싸움과 진잡이를 한다.

이들 놀이 외에도 놀이기구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 지신밟기,

놀이기구의 제작과 운반과정, 승리를 축하하는 길놀이 등은

모두 중심적 놀이를 보조하는 놀이적 장치들이다.

 

(왼쪽)줄다리기는 '길쌈'이라고도 하며, 농경의식의 하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이다.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며, 줄다리기를 통한

농촌사회의 협동의식과 민족생활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른쪽)안동차전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남자들의 집단놀이를 한층 세련되게 향상시킨 모의전투놀이이며,

우리 민족의 흥겨운 민속놀이로 안동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모둠살이의 믿음과 섬김 사이에 대동놀이가 있었다.

 

세시풍속과 관련된 어른들의 놀이는 사실상 마을 전체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풍농기원의 제의적 성격을 지닌 놀이는 이러한 성격이 더 짙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마을 사람들 또는 고을 차원에서 전체가 함께 참여하는

가장 대표적인 놀이는 역시 줄다리기이다.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 사이에 겨루기를 통해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성행위 형식의 주술성을 지니고 있다.

각 편의 숫줄과 암줄의 생긴 모양이나 그 결합과정과 줄을 당기는 과정이

남녀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고 있어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모의적 유감(類感) 주술(呪術)의 성행위에 입각한 놀이이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때 관권에 의해 줄다리기를 하지 못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여겨

감시를 피해 밤에 몰래 놀기까지 한 줄다리기였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구경하는 놀이는 놀이자체의 집단적 성격과 함께

공동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공동 목표가 있기에 가능하다.

 

이를테면 지신밟기를 해야 지신을 누르고 잡귀를 몰아내어 마을이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든가,

줄다리기를 해야 새해의 흉풍을 점치고 마을의 질병과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제의적 목적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이웃끼리 협동하는 가운데

놀이판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특히 줄다리기는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신에 대한 제사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호남의 외줄다리기와 쌍줄다리기는

대개 제사가 거행되는 당일 제사에 앞서서 행해진다.

줄다리기를 하는 곳에서는 줄다리기와 제사가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줄 만들기, 줄굿, 마을돌기, 줄다리기, 제사, 뒤풀이 등이

하루 동안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이 매우 유기적이다.

 

마을을 단위로 행해지는 쌍줄다리기에서는

대개 줄을 당기는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줄을 메고 동신을 방문하는 과정이 있다.

사람들은 동신에게 줄다리기가 사고 없이 치러지길 기원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줄다리기 전후에 줄을 메고 동제당으로 가서,

줄을 똬리 모양으로 틀어놓은 뒤 서낭에게 고한다. 이 과정의 전, 혹은 후에 앞놀이가 행해진다.

 

이 뿐만 아니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 줄의 처리과정에서도

공동체 신이 좌정하고 계신 곳으로 여겨지는 당산에 줄을 모셔놓고 일년 내내 당산과 함께 섬긴다.

경북 포항시 모포리에서는 아예 줄을 골매기의 신체로 인식하고

동사(洞舍)에 영구보존하여 섬기고 있다.

이 외에도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토막 내거나 통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줄을 지붕 위에 얹어 놓으면 집안에 액이 들어오지 않는다.’

‘논밭에 줄을 넣으면 곡식이 잘 된다.’

‘불임녀가 달여 먹으면 아기를 갖는다.’

'배 위에 싣고 바다에 나가면 풍어(豊漁) 진다.‘ 등의 언술이 그것이다.

 

모두 줄다리기 줄이 지니고 있는 제액(除厄) 내지는 액을 막기 위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줄다리기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제액을 통한 안과태평을 기원하고 있다면

줄다리기로 주력(呪力)을 확보한 줄은 각 집안 단위의 제액과 안과태평을 보증하는 것이다.

 


험난한 세월과도 싸워야 했던 놀이사의 단면


조선 말엽에서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민속놀이는 규제를 받기 시작했다.

석전(石戰)이라든가, 줄다리기 등 편싸움과 같은 지역 단위의 대규모 겨루기놀이는

법령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놀이가 너무 격렬한 나머지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역단위, 마을단위에서 행해진 크고 작은 대동놀이가 지니고 있는

협동심과 애향심 등을 통해 힘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고자 한 의도가 숨어있다.

 

관아의 금령에도 굽히지 않고 계속되던 편싸움은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이 자행되면서부터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 석전금지(石戰禁止) 條》에 의하면,

일제는 대동놀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총포를 쏘기까지 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비상시기를 선포하고 민중집회를 금지시키면서

노골적으로 편싸움 뿐만 아니라 횃불싸움 · 지신밟기 등 대규모 집단 놀이 등의

공동체의식을 드높이며 상무(尙武)정신을 고취시키는 놀이들을 다중(多衆) 집회(集會)의 금지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안동지역에서는 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인들의 관심 속에서 소규모의 차전(동채싸움)이 행해졌다.

이 싸움이 워낙 격렬하게 진행된 나머지 투석전(돌던지기)으로까지 이어져

서로 던진 돌에 맞아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를 이유로 차전의 연행을 엄금하였다.

이에 지역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수차례에 걸쳐 차전놀이의 연행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1936년에 차전놀이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하는 조건하에 놀이를 허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한 당시 차전놀이는

놀이기구인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꾼들간에 싸움이 벌어져

몇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고 막을 내려야만 했다.

본격적인 차전은 중단되었지만 약식 동채를 이용하여 1940년대 초반까지 소규모의 차전이 행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차전의 전승은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1966년이 되어서야 몇몇 지역민에 의해 차전이 복원되었고,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제2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례처럼 수많은 대동놀이가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처럼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은

대동놀이를 통해서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광주 칠석고싸움놀이는 주로 전라남도 일대(현재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에서

정월대보름 전후에 행해지는 격렬한 남성집단놀이로,

고싸움의 '고'란 노끈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을 말하며,

2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 해서 '고싸움'이라 부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은 상고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남녀가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을 흔히 여기에 두고 있으며,

지역마다 특징이 있어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진주삼천포농악, 강릉농악, 이리농악, 평택농악, 임실필봉농악 등

다섯 지방의 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놀이를 통해 ‘너와 나’ 아닌 ‘우리’, 대동(大同)을 맛보다

 

겨루기 형식의 대동놀이는 준비과정부터 놀이를 마칠 때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이 기간 동안 때로는 고함으로 목이 쉬고, 때로는 병이 날 정도로 열성을 보이면서

차츰 서로 간에 협동심과 단결력이 자연스럽게 다져진다.

때로는 싸움이 격하여 팔이 부러지는 등 부상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되고 위험천만인 대동놀이가 성행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더욱이 이긴 편이나 패한 편 모두가 승부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드라마틱한 놀이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데에는 그 무엇이 있다.


줄다리기나 차전놀이, 고싸움놀이, 쇠머리대기 등의 놀이는

지연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진행하는 편싸움이다.

놀이의 구성은 대체로 동부 · 서부, 윗마을 · 아랫마을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편은 마을 내 또는 고을 전체의 수많은 마을들로 꾸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각 편은 상호협의를 통해서

자기편의 수많은 지연공동체를 조직적으로 엮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를 바탕으로 준비에서부터 싸움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의 역할을 분담하여 진행한다.

또한 각 편 놀이꾼의 편성은 개인의 능력에 맞게 적절하게 이루어진다.

이들은 거듭되는 경험을 통해서 단결력을 키우며 조직적으로 상대편과 맞선다.

 

대동놀이가 축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참여주체의 개방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줄다리기에서 여성편의 압도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전라도 지역의 외줄다리기는

남성중심의 일상세계가 전도되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녀가 일체가 되어 진행되는 쌍줄다리기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줄다리기의 경우,

갓 시집온 새댁이 줄다리기에 참여하여 어떤 남정네의 사타구니 밑으로 손을 넣고 줄을 잡고 당겼는데,

알고 보니 시아버지더라는 에피소드는 ‘함께 줄을 당긴다’는 것 이외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줄다리기의 대동 지향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줄다리기를 비롯한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는

성적, 사회적 차별을 최소화하고 대동을 극대화하는 축제적 장치이기도 했다.

편싸움에서 강제된 구별은 우리 편과 다른 편 뿐 이다.

우리 축제는 물론 세계 각 문화의 축제에서 중심적 놀이로서 편싸움이 즐겨 채택되는 것은,

경쟁이라는 동기부여의 모티프를 갖고 있으면서도 차별과 구별을 최소화함으로써

폭넓은 참여를 통한 축제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 편은 오직 놀이에 함께 참여한다는 동질적 평등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비로소 ‘너와 나’ 아닌 ‘우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편싸움 놀이를 비롯한 대동놀이 승패의 명암이 엇갈린다 하더라도

모두가 유희인(Homo Ludens)으로서 동질감을 실현시키는 대동 그 자체인 것이다.
- 황경순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평택농악보존회

 

 

 

 

 

 

 오롯한 정성, 신명나는 마을현장에 서서  

 

 

 

하늘은 녹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모둠살이마다 마을이름이 있고, 내력 있는 마을이면 으레 공동체신앙이 살아있다.

이름하여 '마을제사'요, '동제'다. 동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지를 담는다.

의미로 본다면 삶에서 감히 거부할 수 없는 현실문제이기에 정성을 바치고, 신명을 다한다.



역사는 짧아도 정성은 오롯한, 안성시 아롱개마을의 미륵고사

 

마을마다 사정이 다르고 세월이 가면 인심이 변하듯

동제 또한 때로는 단절되고, 복원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옛것을 고수하며 공동체의 신명을 푸는 마을들이 있다.

특히 설부터 대보름까지는 한해에 대한 소망과 함께 정성을 다했다. 그러므로 외부인이 동제에 참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마을의 허락도 얻어야 하고, 동제 기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으며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런 사정은 현대에 와서 많이 달라졌다지만 느슨하나마 금기가 부가되고 있어 외부인의 참여를 제약한다.

신앙의례를 근거로 하는 지역축제도 같다.

 

이를테면 충남 연기군 용암리에서는 ‘강다리기’라는

줄다리기를 하는데, 줄을 타거나 넘지 못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하지만 신성한 줄을 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이제 전국에서 행해지는 마을제사와 함께 축제성을 띤 민속현장 네 군데를 소개하면서

일반인이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경기도 안성시 아양동 아롱개마을은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인,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안성 이씨와 해주 오씨 몇몇이 들판에 모여 살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마을공동체가 지내는 ‘미륵고사’의 내력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46년 홍수로 물구덩이에 쳐박힌 여미륵을 세우고 재전통화(Retraditionalization)한 의례이다.

이전까지는 내력을 알 수 없는 여미륵과 남미륵 앞에서 개인적인 기복행위가 이루어졌다.

엄밀하게 말해 마을공동체 의례와는 무관한 곳인데,

아롱개마을 사람들이 쓰러진 미륵을 세우면서 공동체의례로 활성화했다.

공동체의례가 소멸, 축소하면서 개인의례처로 남는 경우는 많으나,

아롱개마을처럼 개인의례가 공동체의례로 확대된 것은 퍽 드물다.

 

당시 아롱개사람들은 쓰러진 미륵을 세우려고 걸립패를 구성하여 자금을 모았다.

미륵을 세우고 목이 부러진 여미륵을 시멘트로 봉합하는 수술까지 했고,

다시는 쓰러지지 않게끔 미륵을 깊숙이 묻었다.

제당을 ‘미륵댕’이라 부르는데, 미륵당(彌勒堂)이 변한 이름이다.

미륵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쇠울타리를 쳐놓았는데 보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높은 아파트가 뒷마당을 차지하고 있어 미륵이 생뚱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 때마다 정성을 다한다.

비록 도시화된 마을의 공동체 신앙이고, 정월 대보름날 오전 낮제사로 지내지만

제관을 선정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여느 동제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탓인지 미륵 오른쪽에 고사한 듯한 아름드리 아까시 고목에서 새순이 돋고 있다.

특히 누군가 불을 질러 아까시가 죽었다고 여긴 상황에서 고목생화(枯木生花)라는 말을 증명이라 하듯

새순이 돋는 것을 미륵의 영험함이라 마을사람들은 자부한다.

딱히 이것을 들어 마을신앙을 지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륵을 지키려는 마을사람들의 오롯한 정성이 있고, 때마다 발원을 하는 한

아롱개 미륵고사는 소중한 신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강줄을 메겨 남녀가 겨루는 연기군 용암리의 강다리기

 

충남 연기군 서면 용암리 '강다리기' 현장에 내걸린 깃발들

 

충남 연기군의 용암리는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를 ‘강다리기’라 한다.

강줄을 다린다 해서 강다리기라 하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평소에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 한다.

물론 이 때의 ‘강’은 줄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짐작하지만 어원은 알 수 없다.

 

강다리기의 승부는 이미 예견된 채 진행된다.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들고 동네가 평안하다는 논리에서다.

여자와 여성성은 풍요 다산과 관련된 생성성(fertility)을 갖기 때문이다.

강다리기는 정월 16일 마을제사인 목신제를 지내고 나서 행한다.

제주(祭酒)인 강술을 미리 빚고 강줄을 다리는데,

16일에 하는 것은 이 날의 보름달이 가장 밝은 날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에 쓰일 강줄은 집집마다 짚단 다섯 단을 추렴하여 메긴다.

암줄과 수줄을 메기고 수많은 곁줄을 게발처럼 매달아 마치 지네처럼 생긴 줄이다.
목신제를 지내고 풍악을 울리는 가운데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고,

‘용목’이라 부르는 비녀장을 꽂아 빠지지 않게끔 한다.
암수줄을 연결할 때 각종 음담패설이 등장한다.

동그랗게 생긴 암줄의 머리에 수줄을 넣어야 하는데, 이 때의 모습이 성행위를 연상하는 탓이다.

농익은 음담이지만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다.

이는 풍년을 기원하는 신성의례로 행해지는 신성행위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암줄을 당기고, 남자는 수줄을 당긴다. 장가를 들지 않은 총각은 여자편에 든다.

처음은 남자가 이기기 일쑤이나 두번째부터는 동네 할머니들이 회초리를 들고

장정들의 손등을 때리며 방해하여 여자편이 이기게끔 한다. 일종의 놀이장치이고 의례전략이다.

강다리기가 끝나면 강목은 따로 보관하고, 강줄은 불태운다.


길가에 세워져 휘날리는 마을깃발들, 천지를 진동하는 풍물패의 징, 꽹과리 소리들,

그리고 보름달을 향해 올라가는 화톳불, 이 모두가 용암리의 줄다리기를 달군다.
옛날에는 용암리 강줄다리기를 보려고 인근 사람들이 원정을 올 정도였고, 그럴 때마다 난장이 섰다.

지금이야 마을행사로 줄었지만 여전히 외부인의 출입은 자유롭다.

널리 알려진 줄다리기는 아니지만 한적한 마을의 소박한 줄다리기를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단 하나, 강줄을 타넘는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성만이 참여하고, 앉아서 당기는 경북 포항시 이진마을의 앉은줄다리기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이진마을에는 특별한 줄다리기를 한다.

이름하여 앉은줄다리기이고 여자들만 한다. 이 마을의 줄다리기도 동제와 맥락된다.

 

이진마을의 동제는 ‘최씨 터전’과 ‘윤씨 · 서씨 골목’을 모시는 제사인데, 대보름날 전날 밤에 지낸다.

최씨 터전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를 가리키고,

윤씨 · 서씨 골목은 입향조 다음으로 들어온 분들이다.

여느 마을처럼 제관에게 금기가 주어지고, 마을사람들 또한 조신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제사 지내는 동안 외출하는 것을 삼가야 하며, 개들이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짖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옛날부터 2,3년 간격으로 벨손별신굿을 해 왔는데,

어느 해에 굿을 하던 무당이 굿판에서 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불길하게 여겨 점을 쳤더니, 굿 대신 여자들만의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줄다리기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앉은줄다리기의 암수줄은 각각 네 가닥으로 돼 있고, 좌우의 다리가 각각 네 개인 게를 닮았다.

그래서 이름이 ‘게줄다리기’이다.

갯목을 가운데 주고 암줄과 수줄을 연결한 게줄은 다른 지역의 줄과는 다르다.

마을 골목을 경계로 남쪽을 말편, 북쪽을 서편으로 구분하여 당긴다.

동제를 지낸 다음 암수줄을 끌어다가 결합하는데,

“말편이 먼저 대라.”,  “서편이 가까이 오너라.”는 농이 섞인 말싸움을 벌인다.

남자들은 게줄다리기에 낄 수 없는 탓에 풍물을 울리며 응원한다.

줄꾼들은 모두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서 당긴다.

승부는 단판으로 하되 승부가 나면 풍물패를 앞세워 갯목을 메고 제당까지 행진하고 마을신에게 고한다.
그리고 집집마다 찾아가는 지신밟기를 한다.

 

이처럼 이진마을의 줄다리기는 여성만이 참여하고,

앉아서 당긴다는 여성중심의 민속의례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게다가 암수줄을 연결할 때 쓰인 갯목을 메고 유가(遊街)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남성중심인 동제에 대응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갯목을 여성들이 메고 유가하는 것은

어쩌면 억눌려 왔던 여성의 성정(性情)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첫 보름달을 맞는 의례, 전남 곡성군 곡성읍 달집태우기

 

전남 곡성군 곡성읍 마을주민들의 달집태우기
 

 

(왼쪽) 충남 연기군 서면 용암리 주민들의 강줄 다리는 모습

(오른쪽) 전남 곡성군 곡성읍 마을 주민들의 달집태우기 전에 달집 앞에서 제사지내기

 


전남 곡성군의 곡성읍 3구에서는 정월 보름날 전날 저녁에 달집을 태운다.

예전에는 이를 ‘망우리집놀이’라 불렀다. 마을 한쪽에 흐르는 영운천 다리 앞 공터에 달집을 세운다.

달집태우기는 오래 전에 전승이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된 민속의례이다.

누군가 발의하여 시작했더니 “호응도가 높아서” 점차 커졌다.

소멸한 민속을 재개하여 지속시킨 일종의 재활성화(Revitalization) 사례이다.

달집태우기에서 중요한 것은 달집이다. 달집은 보름달을 상징하는 인공물이며,

‘첫 보름달이 떠오르는 바로 그 만월시(滿月時)에’ 밝힌 사람들의 달불이다.

이는 매우 특별한 행위이기에 달집을 만들 때에는 정성을 다한다.


달집을 세우기에 앞서 사방에 대나무를 꽂고 소지를 꽂은 금줄을 친 다음

제단과 달집을 세울 땅에 토신제를 지낸다.

터 한 가운데에는 무더기로 소금을 쌓아 놓고, 동서남북 네 곳에도 조금씩 놓는다.

여기에 통나무를 우물정자로 쌓고 그 위에 솔가지를 세운 후 겹겹이 살아있는 청대를 쌓는다.

생죽(生竹)은 달집이 탈 때 소리가 크게 나게끔 하려는 의도이다.

대나무를 빽빽히 세운 후에 그 위에 볏짚을 마름으로 얽어서 덮는다.

달집 꼭대기에 오색 천으로 만든 깃발을 세우는데, 이는 무지개를 상징한다.

달집이 탈 때 불이 잘 타고 불꽃이 높이 솟아야 풍년이 들고,

달집이 한쪽으로 넘어지면서 타면 흉년이 든다는 점세(占歲)도 있다.

어쩌면 쌓기에 따라 불타는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니 정성을 다해 쌓기 마련이다.

 

또 달집이 탈 때 날아오르는 불티가 몸에 닿으면 액운을 쫓아내 준다는 점풍(占風)이 있다.

그래서 날아오는 불티를 애써 피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기대하는 새해, 희망을 노래한다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대보름의례를 모두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다.

민속의례의 대부분이 설과 대보름에 집중되어 있어 소개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설과 대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새해의 출발과 함께 한해를 기원하고, 생업의 시작과 함께 풍농과 풍어를 비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소멸하고 있지만 여전히 삶의 염원을 담은 기원의례로

의미를 가진 채 민속현장의 신앙으로 살아남아 있다.

삶이 늘 그렇듯이 꿈꾸는 만큼 충족되지 않고, 원하는 만큼 채울 수 없다.

하지만 희망을 노래하는 삶은 늘 즐겁고, 고난까지 헤쳐갈 수 있다.

 

설과 대보름을 맞으며 몇몇 사례를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장장식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문학박사
 

- 2009-02-05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