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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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개인 인장과 인보(印譜) 등에서
조선 왕실의 인장(印章)에 담긴 학문 및 예술 세계를 알아볼 수 있다.
동서양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인장은 초기에는
주로 사용자의 이름과 직위를 새겨 신분과 신용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던 인장은 중국 송, 원대에 이르러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적인 용도로 사용이 확대 되었다.
인장은 돌, 금속, 나무, 흙 등을 이용하여 각각의 재질이 갖는 색채와 조형적 장점을 살리면서
좁은 인면(印面)에 아름다운 서체로 뜻 깊은 글귀를 균형 있게 배치하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조각이 집약된 고도의 종합예술로 발전하였다.
인장은 전서(篆書)로 글씨를 새긴다 하여 전각(篆刻)이라 불렸는데,
중국 명대에 이르러 문인들의 전각(文人篆刻)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양의 문인들이 추구했던 시(詩), 서(書), 화(畵)가 함께하는 예술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인전각으로서의 인장예술은 중국 명대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민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유행하게 된다.
조선왕실의 인장에는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엄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
그리고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인장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개인 인장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조선 왕실의 문예취미를 보여준다.
조선 제24대 왕 헌종(재위 1834-1849년)의 개인 인장과 수집 인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헌종은 조선 왕실의 인장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문예(文藝)에 뛰어난 자질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인장에 대한 관심이 커서
많은 인장을 수집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인장예술의 기념비적인 인보인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펴냈다.
특히 헌종이 사용하고 수집했던 인장에는 헌종 뿐 아니라,
정약용, 김정희, 강세황, 신위 등 당대를 대표하던 문인 석학들과
문팽, 옹방강, 오숭량 등 청나라 문인들의 인장들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측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헌종이 애장하였던 인장과『보소당인존』에는
왕과 문인들의 교감, 조선과 청나라의 학문적 교유(交遊)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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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여가(萬機餘暇), 헌종 인장
(임금의 바쁜 정무 사이의 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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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極), 정조 인장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에서 따온 것으로 임금을 상징)
원헌(元軒), 헌종 인장
(헌종 임금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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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 헌종 인장
(창덕궁 내 헌종이 여가를 보내며 서화와 인장을 감상했던 곳)
다산(茶山), 정약용 인장
(정약용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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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담재인(寶潭齋印), 김정희 인장
(김정희의 호)
선태화어인수(扇太和於仁壽), 고종 인장
“태화(太和)를 인수(仁壽)에 부채질하다” 임금이 정치를 잘하여 백성을 화목하고 장수하게 한다는 뜻.
『구당서(舊唐書)』유분(劉蕡)의 <상소문(上疏文)> 중
헌종과 보소당인장 (憲宗․寶蘇堂印章)
조선 제 24대왕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은 8살에 왕위에 올라 2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서화를 좋아하여 역대 이름난 작품을 많이 수집하였고,
문학적 소질도 뛰어나 『원헌집(元軒集)』이란 문집을 남겼다.
헌종은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청나라에서 유행한 금석학에 영향 받아
오래된 청동기와 비석에 새겨진 글을 수집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특히 인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다양한 인장을 수집하고 감상하기를 즐겼다.
헌종이 수집했던 인장에는 漢나라 고인(古印)을 비롯하여
明나라의 대표적인 문인 전각가 문팽(文彭)의 인장,
강세황(姜世晃),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권돈인(權敦仁) 등 조선의 명사들이 사용하던 인장이
포함되어 있다. 전각에 관한 감상 수준이 매우 높았던 헌종은 스스로도 많은 개인용 인장을 사용했다.
헌종의 자(字)와 호(號)를 새긴 인장을 비롯하여 서화 감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낙선재(樂善齋),
보소당(寶蘇堂) 등 궁궐 전각의 이름을 새긴 인장,
그리고 문예 취미를 공유하던 김정희 일문이 즐겨쓰던 문구를 새긴 인장들이 있다.
헌종이 애장하였던 인장들에는 19세기 조선의 전각예술과
김정희, 옹방강으로 대표되는 조선과 淸의 학문적 교유내용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헌종은 이 인장들을 인보로 엮어『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이라는 이름으로 편찬케 하였으며,
편집은 전각에 조예가 깊었던 신위(申緯)와 조두순(趙斗淳)이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궁궐의 잦은 화재로 인해 많은 인장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전하는『보소당인존』과 대부분의 인장들은 고종 연간에 다시 모각하여 편집한 것이다.
고종대 왕실소장의 인장(高宗代 王室所藏 印章)
조선 왕실에서는 헌종 임금 이후에도 많은 인장들이 지속적으로 수집, 제작되었다.
특히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헌종의 수집 인장을 모각하고 인보를 복간(復刊)하여
자칫 잊혀질 위기에 처한 헌종의 인장과 학문적 업적을 되살렸다.
헌종대에서 꽃피운 전각 예술은 고종대에 와서 대중화의 길로 들어섰으며,
전문 전각가에 의해 다양한 인보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전문 전각가로는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유한익(劉漢翼, 1844-1923),
강진희(姜璡熙, 1851-1919), 오세창(吳世昌, 1864-1953), 김태석(金台錫, 1875-1953) 등이 있다.
이 시기 역시 중국 금석학의 열풍을 기반으로,
다양한 금석문 집성류와 19세기 중국 금석학자의 작품이 다수 왕실에 수장되어 있었다.
또한 왕실에서는 『덕수궁인존(德壽宮印存)』,『은친왕인존(垠親王印存)』등의 인보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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