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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Gijuzzang Dream 2009. 2. 12. 20:31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 보물 제585호, 22.1×32㎝, 개인소장(이영재, 李英宰)

 

 

1.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

    : 진적첩에 담긴 퇴계의 친필수고본(親筆手稿本) 「회암서절요서」초본 내용은

    『퇴계집(退溪集)』권42에「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라는 제목으로도 전한다.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발문 2편

    : 송시열이 현종 15년(1674) 중추일과 숙종 8년(1682) 11월 17일에 쓴 발문 2편,

    : 겸재의 집 ‘인곡(仁谷)’에 전해지는 내력을 적은 정만수의 발문부기의 내용

 

3.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기록화

   겸재 정선이 71세 때인 1746년(영조 22) 퇴계 이황의「회암서절요서」와

   우암 송시열의 제발(題跋)을 사연으로 한 그림이 차례로 실려 있다.

(1) 「계상정거(溪上靜居)」

     : 시화첩 맨 앞쪽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이황이『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짓고 있는

       모습을 그림이 실려 있다. 

(2) 「무봉산중(舞鳳山中)」

     :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 1625~1694)이 「회암서절요서」초본을 가지고

       수원 만의촌(萬義村) 무봉산(舞鳳山)에 은거해 있는 스승 송시열을 두 번이나 찾아가 보여주고

     「회암서절요서」발문을 지어받는 장면

(3) 「풍계유택(楓溪遺宅)」

     :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이 살던 집을 그림

(4) 「인곡정사(仁谷精舍)」

     : 정선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림

 

계상정거 / 퇴계 이황이 기거하던

안동 도산서당일대

무봉산중 / 우암 송시열이 기거하던

화성 동탄 무봉산일대

풍계유택 / 박자진(겸재 외조부)의 집

인곡정사 / 겸재 정선의 집

 

4. 발문(跋文)

(1) 정만수(鄭萬遂, 1701~1784) 발문

     : 영조 22년(1746)에 쓴 겸재 정선의 차자(次子)인 정만수의 발문(지어識語, 지기識記)이 실려 있다.

       퇴계의 절요서 초본 입수경위와 그 동안의 내력, 정선의 4폭 묵화를 그린 사실과

       당시까지의 첩(帖) 내용 및 그 분량을 서술하였다.

(2)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제시(題詩) 

     : 정선의 평생지기 이병연이 겸재의 4폭 묵화 중 <인곡정사>를 그린 사실을 읊은 칠언절구가 있다. 

(3)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 1811~1876) 발문

     : 진적첩을 소장하게 된 고산 임헌회가 그 벅찬 소감을 적어놓은 발문

       고종 9년(1872) 6월에 쓴 「경제퇴우이선생진적후(敬題退尤二先生眞蹟後)」발문(후지, 後識).

       임헌회의 발문은 독성(獨醒)이란 곳에서 서화첩의 작성배경과 전래경위 및

       노석현(盧碩鉉), 전우(田愚), 김보현(金寶鉉)과 함께 완상했음을 적어놓았다.

(4)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 1878~1968) 발문

     : 진적첩을 완상한 구룡산인 김용진이 그 마음에 느낀 바를 적은 발문으로

       김용진은 <차성지보야 의기보장지(此誠至寶也 宜其葆藏之)> 10자를

       자신의 독특한 서체로 쓰고 서명, 낙관하였다.

(5) 모운(茅雲) 이강호(李康灝, 1899~1980) 발문(별지)

     : 손자를 얻은 것을 기념하여 지기였던 동교(東喬) 민태식(閔泰植, 1903-1981)으로부터 전해받은

       모운 이강호가 마음의 느낌과 후세 · 후손에게 당부하는 글을 적어놓은 발문별지의 내용

       서화첩과는 별도로 정사년(1977) 5월에 쓴 이강호의 발문이 낱장으로 전한다.

 

     

 

‘퇴우이선생(退尤二先生)’은 대유학자 이황과 송시열의 아호 ‘퇴계’와 ‘우암’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하고 쓴

「회암서절요서(晦庵書節要序)」1 (당초에는 ‘주자서’라 하지 않고 ‘회암서’라 했음)초본과

그 서문 초고를 경완(敬玩)하고 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제발(題跋),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 4폭과

후대인의 발문(識語)을 모은 서화첩이다.

 

모두 8엽(葉)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第)1엽(葉)의 표면(表面)에는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라는 제첨(題簽)과 부화(附畵)라는 표서(表書)가 있다.

그 뒷면과 제2엽의 앞면에는 겸재(謙齋)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가 쓰여 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제발(題跋)이 있다.

제5엽 뒷면 · 제6엽 앞뒷면에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

무봉산중(舞鳳山中) · 풍계유택(楓溪遺宅) ·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겸재(謙齋)의 아들 정만수(鄭萬遂, 1701~1784)의 글(지어, 識語),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제시(題詩) 등이 있고,

뒷면과 제8엽 앞면에는 고산(鼓山, 또는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글(후지, 後識)과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 1883∼1968)의 제서(題書) 등이 연대순으로 모아져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楮紙)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厚紙)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화첩은 조선시대를 지탱한 지주인 도학(道學)의 연원으로써의

『주자대전(朱子大全)』중의 48권에 이르는 서한(書翰)에서 14권으로 선취(選取)한 의도를 서술한

이황의 자필 서(序)에 대한 후인들의 향념의 일단을 전해준다.

그것은 주희와 이황의 만남으로 형성된 우리나라 도학의 한 극점의 상징으로써의 사건에 대한 향념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

 

晦菴書 晦菴二字 刊本作朱子 言之言 刊本作論 分寫訖 刊本分下 有卷字

又曰 又刊本作或 實錄 錄刊本作學夫子之說 刊本作集註諸說 夫子之書 刊本書下有札字 而作其心 刊本無而字 盍嘗 止書乎 刊本無此十一字 別有今夫書札之言六字

責勉工程 刊本此下有非同於泛論如彼七字 可與泝伊洛 刊本無可與二字 達洙泗 刊本此下有無往而不可五字 夏四月日 刊本此下 有後學眞城李某六字

 

 

晦菴朱夫子 挺亞聖之資 承河洛之統 道巍而德尊 業廣而功崇

其發揮經傳之旨 以幸敎天下後世者 旣皆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矣.

회암(晦菴) 주부자(朱夫子) 2는 아성(亞聖)의 자질로 태어나 하락(河洛)3의 계통을 이었는데,

도는 우뚝하고 덕은 높으며 사업은 넓어서 공로가 높다.

그가 경전(經傳)의 뜻을 발휘하여 천하 후세를 가르친 것은 모두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다.4

 

夫子旣沒 二王氏及余氏 襃稡夫子平日所著詩文之類爲一書 名之曰朱子大全 總若干卷

而其中所與公卿大夫門人知舊往還書札 多至四十有八卷

然此書之行於東方 絶無而僅有 故士之得見者蓋寡

선생께서 별세한 뒤에 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 5가 선생께서 평소에 저술한 시문(詩文)들을 모아

한 책을 만들고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고 이름 부치니 총 약간 권이 되었다.

그 중에 공경대부와 문인 및 아는 친구들과 왕복한 서찰(書札)이 무려 48권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것이 아주 없거나 겨우 조금 있었을 뿐이므로 얻어 본 선비는 적었다.

 

嘉靖癸卯中 我 中宗大王 命書館印出頒行

臣某於是 始知有是書而求得之 猶未知其爲何等書也.

因病罷官 載歸溪上 得日閉門靜居而讀之

自是漸覺其言之有味 其義之無窮 而於書札也 尤有所感焉.

가정(嘉靖) 계묘년(=중종 38년, 1543)우리 중종대왕(中宗大王)께서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쇄해서 반포하게 하였다.6

이에 臣 황(滉)은 비로소 이런 책이 있는 줄을 알고 구하여 얻었으나

아직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잇따라 병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계상(溪上)으로 돌아와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앉아 읽어 보았다.

이로부터 점점 그 말에 맛이 있음과 그 뜻이 무궁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 서찰에 있어서는 더욱 느끼는 바가 있었다.

 

蓋就其全書而言之 如地負海涵 雖無所不有 而求之難得其要

至於書札 則各隨其人材稟之高下 學問之淺深 審證而用藥石 應物而施爐錘

대체로 그 책 전체를 두고 논한다면 대지가 만물을 싣듯 바다가 모든 냇물을 포용하듯 없는 것이 없지만,

읽어 봄에 그 요령을 터득하기 어렵다.

서찰에 이르러서는 각기 사람들의 자질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에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며,

사물에 따라 저울추를 운용했다.

 

或抑或揚 或導或救 或激而進之 或斥而警之

心術隱微之間 舞無所容其纖惡 義理窮索之際 獨先照於毫差

規模廣大 心法嚴密 戰兢臨履 無時或息 懲窒遷改 如恐不及 剛健篤實輝光日新其德

其所以勉勉循循而不已者 無間於人與己 故其告人也 能使人感發而與起焉.

혹은 억제시키거나 발양시키며, 혹은 인도하거나 구원하며,

또는 격려하여 진취시키기도 하고 배척하여 경계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에 작은 악(惡)이라도 용납될 수 없게 하였고,

의리를 캐내고 찾을 때에는 조그마한 차이점도 먼저 비춰주었다.

또한 규모가 광대하고 심법(心法)이 엄밀하여 두려워하고 조심해서

깊은 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하여7 언제라도 혹시 쉬는 적이 없었고,

분노와 욕망을 억제하고 미리 막아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8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이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였다.

그처럼 힘쓰고 따르면서 그치지 않는 것은 남과 자신의 간격이 없었으므로

그가 남에게 고해주면 능히 남으로 하여금 감동되어 흥기토록 하기 때문이다.

 

不獨於當時及門之士爲然雖百世之遠 苟得聞敎者 無異於提耳而面命也 嗚呼至矣.

顧其篇帙浩穰 未易究觀 兼所載弟子之問 或不免有得有失

某之愚竊不自揆 就求其尤關於學問而切於受用者 表而出之 不拘篇章惟務得要

乃屬諸友之善書者及子姪輩 分寫訖

凡得四十卷爲七冊 蓋視其本書 所減者殆三之二 僭妄之罪

無所逃焉 雖然 嘗見於北山何先生云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만 그러했을 뿐 아니라 비록 백세의 먼 후일이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 자는,

귀에 대고 말하며 직접 대해 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 지극하도다.

그런데 돌아보면 책의 규모가 광대하여 다 살펴보기가 쉽지 않고

함께 실린 제자들의 문답(問答)에도 혹 득실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나 황(滉)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그 중에서 더욱 학문에 연계되고

쓰임에 절실한 것을 표출하였는데, 편(篇)이나 장(章)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요점을 터득하는 데에 힘썼다.

마침내 여러 벗 중에서 글씨를 잘 쓰는 자와 자질(子姪)들에게 부탁하여 책을 나누어 필사(筆寫)케 하였다.

이를 마치니 모두 14권7책이 되었는데 본래의 책에 비교하여 거의 3분의2나 줄어들었으니

외람되고 망령된 죄는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송학사집(宋學士集)>9을 보니, 그 기문(記文)에

“노재(魯在) 왕선생(王先生)이 그가 뽑은 주자의 글을 가지고

북산(北山) 하선생(何先生)에게 교정을 구하였다.”고 하였다.

 

則古人曾已作此事矣 其選其訂 宜精密而可傳 然當時【宋公猶嘆】其不得見

況今生於海東數百載之後 又安可蘄見於彼 而不爲之稍加損約 以爲用功之地也哉.

그렇다면 옛사람이 벌써 이 일을 했던 것이며, 그 뽑고 교정한 것이 정밀하여 전해질 만하였을 것인데도

당시의 송공(宋公)도 얻어 볼 수 없음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더구나 지금 해동(海東)에서 수백 년 뒤에 태어나 어찌 그것을 구해보기를 바라서

간략하게 해서 공부하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又曰 聖經賢傳 誰非實錄

又今夫子之說 家傳而人誦者 皆至敎也.

子獨拳拳於夫子之書 抑何所尙之偏而不弘耶

曰 子之言似矣 而猶未也.

혹자가 말하기를, “성인의 경(聖)이나 현인의 전(傳)은 어느 것인들 실학(實學)이 아니겠는가?

또한 지금 여러 집주(集註)의 학설이 집집마다 전하고 사람마다 읽고 있어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대는 홀로 선생의 서찰에만 알뜰하니 어찌 그 숭상하는 바가 한쪽에 치우치고 넓지 못한가?”

하였다. 이에 나는 “자네의 말이 그럴 듯하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夫人之爲學 必有所發端興起之處 乃可因是而進也.

且天下之英才 不爲不多 讀聖賢之書 誦夫子之說 不爲不勤而卒無有用力於

대체로 사람이 학문을 함에는 단서를 발견하고 흥기되는 곳이 있어야

이로 인해 진보(進步)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천하의 영재(英才)가 적지 않으며

성현의 글을 읽고 부자(夫子)의 학설을 외우기에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此學者無他 未有以發其端而作其心也.

盍嘗熟復深繹於夫子之書乎

其一時師友之間 講明旨訣 責勉工程 何莫非發人意而作人心也.

그러나 마침내 이 도학에 힘쓰는 자가 없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단서를 발견하여 그 마음을 진작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선생의 서찰을 익숙하게 익히고 깊이 연역(演繹)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의 사우(師友)들 사이에 좋은 비결을 강론하여 밝히고 공부에 힘쓸 것을 요구한 것이니

어느 것인들 사람의 뜻을 감발(感發)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진작시키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昔聖人之敎 詩書禮樂皆在

而程朱稱述 乃以論語爲最切於學問者 其意亦猶是也.

嗚呼 論語一書 旣足以入道矣.

옛날 성인의 가르침에 예악시서(禮樂詩書)가 모두 있다.

그런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이를 칭송하고 기술함에 있어

마침내 『논어(論語)』를 가장 학문에 절실하다고 했으니, 그 뜻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

아! 『논어』한 가지의 책만으로도 넉넉히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之於此 亦但務誦說 而不以求道爲心者 爲利所誘奪也.

此書有論語之旨 而無誘奪之害

然則將使學者 感發興起 而從事於眞知實踐者 捨是書何以哉.

지금 사람들은 이 『논어』에 있어 외우기에 힘쓸 뿐 도를 구하기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이것은 이익의 꾐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논어』의 뜻은 있지만 꾐에 빠지는 해독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느끼고 흥기되게 하여

참으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는 이 글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夫子之言曰 學者之不進 由無入處而不知其味之可嗜 其無入處 由不肯虛心遜志 耐煩理會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학자가 진보되지 못하는 것은 들어갈 곳이 없다고 여겨

그 맛을 즐길 만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고,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며

번거로움을 참고 깨닫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使今之讀是書者 苟能虛心遜志 耐煩理會

如夫子之訓 則自然知其入處 得其入處 然後知其味之可嗜 不啻如芻豢之悅口

지금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며

번거로움을 견디고 깨닫게 하기를, 선생의 가르침처럼 한다면 자연히 들어갈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들어갈 곳을 얻게 된 뒤이면 그 맛을 즐길 만한 것임을 아는 것이

맛나는 음식이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닐 것이다.

 

而所謂大規模嚴心法者 庶可以用力矣.

由是而芳通直上 則可與泝伊洛而達洙泗

向之所云聖經賢傳 果皆爲吾之學矣 豈偏尙此一書云乎哉.

또 이른바 규모를 크게 하고 심법(心法)을 엄하게 하는 것에도 거의 힘쓸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널리 통하여 곧바로 올라간다면 이락(伊洛)에 소급되고 수사(洙泗)10에 달하게 되어

어디로 가나 불가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성인과 현인의 경전(經傳)이 사실은 모두 우리의 학문인 것이니

어찌 이 한 책만을 치우치게 숭상한다 할 수 있겠는가?

 

某年薄桑楡 抱病窮山 悼前時之失學 慨餘韻之難理 然而區區發端 實有賴於此書

황(滉)은 나이 늙었고 병들어 궁벽한 산중에 있으면서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성인의 여운을 깨닫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그런데 구구하게 단서를 발견하였던 것은 실로 이 글에 힘입었음이 있었다.

 

故不敢以人之指目而自隱 樂以告同志 且以俟後來於無窮云

그래서 감히 남이 지목(指目)하는데도 스스로 숨기지 못하고

기꺼이 동지들에게 고하며 또한 무궁한 후세에 공론을 기다린다.

 

嘉靖戊午夏四月日 謹序

가정(嘉靖) 무오년 4월 일(=명종 13년, 1558) 삼가 서문을 지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발문 1편

 

右節要序與目錄 只見於見行印本矣.

今朴進士自振氏 以先生草本眞蹟 來示余於舞鳳山中

余方素襪待罪 撫玩移晷 至於紙毛而不忍捨

噫眞不負此行矣.

이상 절요서(節要序)와 목록(目錄)은 다만 현행 인본(印本)에만 보인다.

지금 진사(進士) 박자진(朴自振)이 선생의 초본진적(草本眞蹟)을 가지고 와서

무봉산(舞鳳山)11에 있는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흰 버선으로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어루만져 종이가 피는데도 놓지 못하였다.

아, 참으로 이번 행차는 나를 저버리지 않았도다.

 

朴進士因言得之於其外舅正郞洪公有炯 洪是先生外玄孫云爾

박진사(朴進士)가 그의 외구(外舅) 정랑(正郞) 홍유형(洪有炯)에게 얻었다고 말했는데,

홍정랑(洪正郞)은 퇴계 선생의 외현손(外玄孫)이라고 하였다.

 

時 崇禎閼逢攝提格仲秋日 後學恩津宋時烈敬書

때는 숭정(崇禎) 알봉섭제격(閼逢攝提格)12 중추일(仲秋日)에

후학(後學)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 삼가 지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발문 2편

  

後九年壬戌至月十七日 再見於舞鳳山中 其不魚食塵昏若是 可見其葆藏之誠也.

그 뒤 9년 임술년(=숙종 8년, 1682) 동짓달 17일에 다시 무봉산(舞鳳山)에서 보았는데,

좀이 슬거나 먼지에 더럽혀지지 않고 이와 같으니 잘 갈무리한 정성을 느낄 수 있다.

 

時烈再書

시열(時烈) 다시 적음

 

 

 

 

  정만수(鄭萬遂, 1701~1784) 발문(跋文)

 

余於退陶李文純公外裔 李先生節要序草本 得之於朴兄宗祥氏 藏于家 蓋余誠心欲得 故朴兄許之.

然此書之前後 必傳於外裔者 其亦異哉.

나는 퇴도(退陶=퇴계退溪의 도산서원) 이문순공(李文純公)께 외예(外裔)가 되어

선생의 <절요서(節要序)>초본(草本)을 박종상(朴宗祥)13 형이 집안에 수장(守藏)하고 있던 것을 얻었다.

대개 내가 성심(誠心)으로 얻고자 한 까닭으로 박형이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전후로 반드시 외손(外裔)에게만 전해진 것14은 또한 기이하다.

 

尤庵宋先生 爲眞外曾王考所請 題跋語

其下 家大人 又以水墨作溪上靜居舞鳳山中楓溪遺宅仁谷精舍凡四幅

以其出於老先生 而撫玩於宋先生 藏於楓溪 而傳於仁谷也.

節要序全篇而爲四幅 跋文二節而爲兩片耳.

우암(尤庵) 송선생께서 진외증왕고(眞外曾王考=진외증조부)15의 간청으로 제발(題跋)을 썼다.

그 아래 가대인(家大人)16께서 또 수묵(水墨)으로

계상정거(溪上靜居)와 무봉산중(舞鳳山中),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인곡정사(仁谷精舍) 네 폭을 그렸다.

이는 아마도 노선생(老先生=퇴계 이황)에게 나와서 송선생(宋先生=우암 송시열)이 완상(玩賞)하였고,

풍계(楓溪)17가 갈무리하고 있다가 인곡(仁谷)18에게 전해진 것임을 뜻한다.

<절요서(節要序)> 전편(全篇)은 네 폭이고, 발문(跋文) 두 절(節)은 양 편(片)이다.

 

崇禎後再丙寅 後學光山鄭萬遂敬書于地山齋中

숭정(崇禎) 후 재병인(再丙寅=영조 22년, 1746)

후학(後學) 광산(光山) 정만수(鄭萬遂)는 지산재(地山齋)에서 삼가 지음.

 

 

 

정선의 둘째아들 정만수(鄭萬遂)의 영조 22년(1746) 발문에는

이 서화첩의 성첩 배경과 전래 경위에 대해서

곧, 이황의「회암서절요서」초본이 이황 외현손 홍유형(洪有炯)에게 전해지다가

자신의 집안에서 수장하게 된 내력을 적어놓았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황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고 난 뒤

명종 13년(1558) 4월에 쓴 서문(序文) 초본을 이황선생의 손자인 직장(直長) 이안도(李安道, 1541-1584)가

외손자인 정랑(正郞) 홍유형(洪有炯)에게 전수했는데,

홍유형은 이것을 사위 박자진(朴自振, 1625~1694)에게 물려주었다. 박자진은 바로 정선의 외조부이다.

박자진은 이 서문을 가지고 스승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두 번이나 찾아가 보여드리고

발문을 받아낸다. 현종 15년(1674) 예송(禮訟) 문제로 수원의 무봉산(舞鳳山)에 은거하고 있던

우암(尤庵)에게 보여주고 제발을 받고, 그 뒤 숙종 8년(1682)에 또 무봉산을 찾아 우암의 발문을 받아

마침내 이황과 송시열의 진적(眞蹟)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뒤 이들 진적은 박자진의 장증손인 박종상(朴宗祥, 1680~1745)에게 전해졌는데,

정선의 차자(次子) 정만수(鄭萬遂, 1701~1784)는 「회암서절요서」필적이 본래 외손가에 전해오던

것임을 들어 진외가 재종형이던 박종상에게 간청하여 이를 자신의 집으로 물려받았다.

그러자 정선은 기쁜 마음으로 영조 22년(1746) 두 선생(퇴계와 우암)의 진적이 있게 된 상황과

전래과정을 그림으로 그리는데,

이황이 계상(溪上)의 서당에서 <주자서절요서>를 짓던 도산서당 일대를 그린 「계상정거(溪上靜居)」,

외조부 박자진이 수원 무봉산 만의촌에 은거한 우암 송시열을 두 차례나 찾아가 뵙고

발문을 받아오던 장면을 그린「무봉산중(舞鳳山中)」,

외조부 박자진이 살던 청풍계 외가댁을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정선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등 모두 네 폭의 그림이 그것이다.

그리고 서화첩 첫장에는 정선의 평생지기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에게

제시(題詩)를 부탁하여 서문을 대신하였다.

 

그 뒤 고종 9년(1872)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9가 입수하여 자신의 지어를 첨가하고,

다시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의 제서(題書)가 첨가되어 현재의 시화첩이 이루어졌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기록화(附畵 : 부가된 그림)

 

(1) 계상정거(溪上靜居)

 

 

 

겸재의 <계산정거도> 

 

 

 “새 천원권 그림 ‘도산서원’ 맞다”

 

안동 도산서원관리사무소는 논란이 일고 있는 새 천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진 <계상정거도>가

명백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한국은행측이 새 천원권 지폐 뒷면의 그림이 ‘계상서당(溪上書堂)’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보물 585호로 지정된 <퇴우이선생진적첩>에 달린 주석을 근거하고 있다는 것.

한국은행은 당초 지폐 도안 확정과정에서 천원권 신권 그림 속의 장소를 ‘도산서당’이라고 밝혔다가

논란이 일자 겸재 정선 선생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에 나온 ‘계상서당’이라고 수정했다.

그러나 계상서당의 작품과 등장인물의 연대를 비교해보면, 현재의 도산서원이 맞다며

한국은행에 조속한 시일내에 고증 작업을 통해 그림 속의 장소를 명확하게 바로 잡아 줄 것을 촉구했다.

 

“계상서당은 퇴계 선생 51세인 1551년에 건립됐으며 겸재의 <도산서원도>는 1735년에 그린 작품이다.

또, <계상정거도>는 1747년 작품으로 당시 제자인 김성일과 우성전의 기록으로 미뤄볼 때

계상서당은 초가 이엉집으로 얼마 못가 쓰러졌다는 것을 근거로 하면 잘못된 주석”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겸재의 <계상정거도>는 계상서당 건립 후 200년이 지난 후 그려진 것으로

이때는 이미 계상서당은 없었기 때문에 그림의 서당이 도산서당임을 주장했다.

또 그림 속의 한옥이 분명히 기와지붕으로 묘사 된 점을 들어 초옥 이엉집으로 지어진 계상서당이 아닌

도산서당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계상정거도>는 도산(陶山) 일대의 실사도(實寫圖)라 할 수 있어

도산서원의 지형을 모델로 그려졌다는 반증이라고 밝혔다.

 

<도산서원도>에서는 농암 이현보의 분강(분천)서원과 애일당을 확인할 수 있고,

퇴계 선생이 제자 이귀암을 떠나보내면서 읊은 시가 각인된 석간대가 묘사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에서 기록한 <도산잡영(陶山雜詠)>의 유적지는

서원 앞 낙동강의 곡구암을 중심으로는

좌측으로 운영대(雲影臺) 우측으로 천연대(天淵臺)가 그려져 있다는 것.

 

한편 계상서당을 약칭해 ‘계당(溪堂)’이라 부르고 있어

계상서당에서 집필 중인 퇴계선생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면

작품의 명칭 또한 <계상정거도>가 아니라 <계당정거도(溪堂靜居圖)>로 불러야 하므로

겸재의 작품이 아닌 소장품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계상정거도>에서 ‘계상(溪上)’의 의미는

‘퇴거계상(退去溪上, 물러나 물가에 거처)’의 의미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현재 새 천원권 지폐 속에 새겨진 <계상정거도>의 형태나

각종 자료 속에 수록된 기록을 근거로 할 때도

그림 속의 서당은 한국은행 측이 주장한 계상서당이 아닌 도산서당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밝혔다.

- 2007-03-06, 경북일보

 

 

 

(2) 무봉산중(舞鳳山中)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느낌이 살아있는 역동적인 그림인데

사방관을 쓰고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송시열이고 갓을 쓰고 검은 수염이 있는 사람이 박자진이다.

뒤에 많이 부드러워진 수직준으로 그려진 무봉산과

정자 옆에 강인하게 서있는 나무에서 우암 송시열의 강직함을 느낄 수 있다.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신리 만의 무봉산(舞鳳山)은

우암이 생전에 도성으로 왕래할 때 항상 이곳에 머무시던 곳으로

57세때인 현종 4년(1663) 초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암이 정읍에서 사사되자 송자묘(宋子墓) 초장지(初葬地)로 결정되어

이곳에서 1689년 7월18일 장례를 치르고

영조 33년(1757)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이장할 때까지 68년동안 유택이 있었던 곳이다.

 

 

 

(3) 풍계유택(楓溪遺宅)

 

 

보물 585호,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영조 22년(1746) 종이에 먹, 22.0×32.3㎝, 개인소장

 

‘청풍계(靑楓溪)에 남아있는 외가댁'이란 의미인 풍계유택은

겸재의 외조부 박자진이 세상을 뜬 뒤 그 자손들이 물려받아 살던 집이다.

 

겸재가 14세 되던 숙종 15년(1689) 부친 정시익(鄭時翊, 1638-1689)이 세상을 뜨고,

기사사화(己巳士禍)로 후원세력이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스승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등

율곡학파의 중진들이 연이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 경복고 경내에 살던 겸재가

그 맞은편 개울 건너 청운동 50일대의 드나들며 자라났던 외조부 박자진의 외가는 매우 큰 의미였다.

 

겸재 외조부 박자진(1625-1694)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자결한

퇴우정(退憂亭)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의 당질(5촌조카)로 광해군의 세자빈 친정아버지가 되는

병조참판 박자흥(朴自興, 1581-1623)과는 재종형제인 명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고조부인 이조판서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이래 닦아온 가업의 기반이

자못 튼튼했을 터이니 이만한 대저택을 누리고 살기에 족하였을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楓溪遺宅)을 그릴 때는 겸재의 모친 밀양박씨가 92세로 세상을 뜬 지 12년이 지난 때였고,

큰외숙인 박견성(朴見聖, 1642-1728)도 87세로 19년 전에 세상을 뜨고 없었다.

이 대저택 별당에서 겸재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은

또래인 큰외숙의 셋째아들 공미(公美) 박창언(朴昌彦)과 함께 성리학 원전을 읽고 강론했다고 하는데,

겸재 외숙까지 삼세(三世)를 대물려가며 살았던 풍계유택의 규모는

장동 일대에서는 손꼽힐 만큼 컸던 것으로 보인다.

 

측백나무 단 앞에 눈발이 희끗희끗, 등잔불 화롯불은 꿈같이 아득하다.

주미 휘두르던 제옹(霽翁, 박창언)은 간 데 없고

담경(談經)하던 겸로(謙老, 謙齋 鄭敾)는 이미 백발되었네.

(側栢壇前雪霰稠, 燈檠爐火夢悠悠

濟翁揮麈歸玄夜, 謙老談經已白頭) 『순암집(順菴集) 권4』

 

이 시를 짓게 된 사연을 순암(順菴)은 표현하기를,

“편지를 쓰면서 입으로 불러 정원백 선에게 보내다.

이날 주자서(朱子書)를 읽다가 공미(公美), 원백(元伯)과 함께 강론(講論)하던 옛일을 추억하고

그것을 위해 쓸쓸해하다.”하였다.

(臨書 口占 奇鄭元伯敾, 是日讀朱書, 追憶公美元伯講論舊事, 爲之悵然)

 

이 그림은 당시 71세의 겸재가 북악 아래 경복고등학교 경내인 유란동(幽蘭洞) 난곡(難谷) 그의 집에서

본 외가는 본채와 후원 쪽만 바라다보였는지

이 그림에서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딸려있을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안채 정당(正堂)은 2층누각이고 ㄱ자형태의 안채는 겹집인데 담이 2중, 3중으로 둘러있고

후원에는 대궐 전각 규모의 별채와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동아일보사, 2004, p116-120)

 

 

 

(4) 인곡정사(仁谷精舍)

 

  

 보물 585호,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영조 22년(1746) 종이에 먹, 22.0×32.3㎝, 개인소장

   

현재 종로구 옥인동 20번지 부근 인왕산 아래 겸재가 71세 때(영조 22년, 1746) 살던 인곡정사의 전경이다.

 

남향으로 행랑채가 붙은 솟을대문 안에 ㄷ자모양의 안채가 있는 집인데

담장이 굽이굽이 있고 앞뒤 정원이 알맞게 갖춰져서 아담한 느낌이 든다.

뒤뜰 안에는 대나무가 있고, 밖 뒷동산 언덕 위로는 노송이 숲을 이루었다.

앞뜰에는 잡목 두어 그루, 행랑채 옆 담장 안에도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고목 아래 그늘에 가끔 나와 앉을 수 있는 좌대석(座臺石) 하나 놓여 있고,

울바자로 지붕을 씌운 김치막 곁에는 바위더미가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中問)은 사랑채로부터 직각의 곡장(曲墻)을 교묘히 쳐내 동향문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돌출한 담장 안으로 동향한 그 안에 디딜방아도 한 틀 놓여 있는 헛간이 一자 초가로 지어져

쓸모 있어 보인다.

대체로 안채가 30-40간 되어 보이고, 행랑채가 5-6간 되어 보이는데,

곁에 살았다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택기(宅記)>에 의하면

‘삼실일청(三室一廳)’ 즉 방 셋에 대청 하나가 있는 그의 16간집을 당시에 은화 150냥에 샀다 하였으니,

그 갑절이 넘어 보이는 이 집(仁谷精舍)은 아마 은화 300-400냥은 되었을 듯하다.

 

이보다 30여 년 전인 숙종 34년(1708)에

숙종이 막내왕자인 연령군(延齡君)에게 서울에서 제일 좋은 집을 사주려 할 때

대지 2,260간에 기와집 건평 177간의 집을 은화 3,325냥에 사들이려 한 것을 보면

당시 집값은 30여 년 동안에도 그리 큰 변동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관아재가 쓴 <소문첩(昭文帖)>에 제함(題昭文帖)>이라는 글에서 보면,

화첩(畵帖) 한 벌을 그려주고 3,000전(錢, 300냥)을 받았다 하고,

연령군 집값이 동전(銅錢)으로 따지면 1만 냥이 넘는다 하여

은화 1냥에 동전 닷 냥 정도로 교환되었던 것 같으니 그림 값은 거의 작은 집 한 채 값과 맞먹었던 것이다.

당시 쌀값은 흉년, 풍년에 따라 변동은 있었지만 대개 가마당 동전 석 냥-닷 냥으로 오르내렸으니

3000전이면 300냥, 즉 쌀이 60가마에서 100가마에 이르는 값이었다.

그러니 겸재가 이만한 집을 꾸미고 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동아일보사, 2004, p23-28)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제시(題詩)

 

宋翠之邊竹籟中

揮毫草草應兒童

輞川不是他人畵

畵是主人摩詰翁 (秉心塞淵)

 

푸른 소나무가 대나무 소리 가운데

초초히 붓을 휘둘러 아이에게 응대하네20

망천(輞川)은 다른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오.

주인 마힐옹(摩詰翁)을 그린 것이라오21. - 병인년 가을에, 우인(友人) 근로(槿老)22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경제퇴우이선생진적후(敬題退尤二先生眞蹟後)」발문

 

퇴우 2선생의 진적 뒤에 삼가 적음.[敬題退尤二先生眞蹟後]

 

此退陶李先生朱書節要序草本 尤庵宋先生跋語也.

今年春暮 余爲先世延蔭禮 作牙鄕行 行至獨醒得此

開卷肅然 怳若親承警欬於陶山舞鳳之間

眞尤翁所謂眞不負此行者

而鄭謙齋畵李槎川詩 亦可謂雙絶也.

이는 퇴도(退陶) 이선생의 주서절요서 초본(朱書節要序草本)과 우암(尤庵) 송선생의 발문(跋文)이다.

금년 모춘(春暮)에 내가 선세(先世)를 위하여 연음례(延蔭禮)를 하러 아향(牙鄕)으로 행차했는데,

독성(獨醒)에 이르러 이를 얻게 되었다.

책을 펴니 숙연하여 마치 친히 도산(陶山)과 무봉(舞鳳) 사이에서 말씀을 듣는 것 같으니,

참으로 우옹(尤翁)이 이른바 ‘참으로 이번 행차를 등지지 않았다[眞不負此行者]’는 것이다.

게다가 정겸재(鄭謙齋)의 그림과 이사천(李槎川)의 시 또한 둘 다 빼어나다고 할 수 있다.

 

噫 此帖自洪而朴 自朴而鄭 鄭以後又不知歷幾人而歸於余

至寶難私化工無偏 有如此者

異日之又不歸他人 亦未可知

其惟讀二先生書 學二先生道 世世勿替 則帖亦可以傳之永久也歟

後之人勖哉.

아, 이 첩이 홍씨에서 박씨로, 박씨에서 정씨로,

정씨 이후에 또 몇 사람을 거쳐 나에게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

지극한 보배는 사사롭게 하기 어렵고 천지의 조화가 치우치지 않는다는 이치가 이와 같음이 있도다.

다른 날 또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도 알 수 없으니,

오직 두 선생의 글을 읽고 두 선생의 도를 배워 대대로 쇠하지 않는다면

이 첩(帖)을 영구하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뒤의 사람들은 힘쓰도록 하라.

 

崇禎五壬申六月日 後學西河任憲晦謹書

숭정(崇禎) 5년 임신(壬申) 6월 일(=고종 9년, 1872) 후학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 삼가 씀.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 1878~1968) 발문

  

六月炎天 非七十老人近筆硏時節

偶得夕雨驟至書

盧碩鉉田愚金寶鉉適來同翫

雨止蟬聲淸

此誠至寶也 宜其保藏之

6월의 무더운 날씨는 일흔 노인이 필연(筆硯)을 가까이 할 시절이 아니다.

우연히 저녁비가 쏟아지기에 썼다.

노석현(盧碩鉉)과 전우(田愚)23, 김보현(金寶鉉)이 마침 왔기에 함께 완상(玩賞)하였다.

비가 그치자 매미소리는 더욱 맑았다.

이 첩은 진실로 지극한 보배이다. 잘 보관하여야 할 것이다.

 

金容鎭敬題

- 김용진(金容鎭)24 삼가 지음.

 

 

 

 

  모운(茅雲) 이강호(李康灝, 1899~1980) 발문

     

此帖 退陶李先生手筆也 朱書節要序文原稿也 豈不重且寶歟

尤庵先生之撫玩移晷不忍捨 其在此也.

이 첩은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의 수필(手筆)이며, 주서절요서문(朱書節要序文) 원고(原稿)이니,

어찌 중요하고 보배롭지 않겠는가?

우암(尤庵)선생이 오랫동안 어루만지며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謙齋之畵此帖 所稿之溪上 撫玩之舞鳳 葆藏之楓溪 自家藏之仁谷

此豈自衒其畵也 亦敬慕之感而寫也.

겸재(謙齋)가 이 첩에 그림을 그린 것도

퇴계가 원고를 쓰신 계상(溪上)과 우암이 완상했던 무봉(舞鳳)과

보장(葆藏)했던 풍계(楓溪)와 자가(自家)에서 수장했던 인곡(仁谷)이니,

이 어찌 스스로 그림을 자랑하려는 것이었겠는가. 또한 경모하는 느낌으로 그렸을 것이다.

 

伊後歷幾人 而歸於鼓山任先生 任先生 亦學問之士也.

至寶難私 託後進以讀先生書學先生之道 世世勿替 則帖亦傳之永久 豈非知道之言耶

그 뒤 몇 사람을 거쳐 고산(鼓山) 임선생(任先生)에게 돌아왔으니, 임선생 또한 학문을 닦은 선비이다.

지극한 보배는 사사롭게 하기 어려우니,

후진(後進)에게 “선생의 글을 읽고 선생의 도를 배워 대대로 쇠하지 않는다면,

이 첩(帖)을 영구하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당부했으니, 어찌 도를 아는 분의 말이 아니겠는가?

 

余亦以讀書學道爲托於後生 其勉之哉.

나 또한 글을 읽고 도를 배우라는 말로 후생(後生)에게 부탁하니 힘써야 할 것이다.

 

丁巳夏五月三日 後學全州李康灝敬題.

정사년(丁巳年=1977년) 5월3일 후학(後學) 전주(全州) 이강호(李康灝)25 삼가 지음.

 

 

  

 

 

 

 

 

 

  1. '회암사절요서'는 문집에는 '주자서절요 서'로 되어 있다. 1561년 황준량(黃俊良)이 처음 간행할 때는 '회암사절요(晦菴書節要)'로 하고 퇴계의 자서(自序)도 붙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575년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 간행할 때부터 퇴계의 자서를 붙이고, 이름도 '주사서절요'로 바뀌었다. 또한 퇴계의 이 서문은 '퇴계집(退溪集)' 42권에 실려 있다. 현재 원본에는 간본(刊本)과 대비하여 글자의 출입을 두주(頭註)에 적었다. 번역은 초고에 따라하고, 필요한 경우에 간본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중국 남송 사상가 주희(朱熹, 1130-1200)를 높여 부른 칭호이다. 자는 원회(元晦), 증회(仲晦)이며, 만년에는 호를 회옹(晦翁), 둔옹(遯翁), 창주병수(滄州病叟)라 했다. 송대 이학(理學)의 집대성자이며 사후에 편찬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과 '주자어류(朱子語類)'는 '사서집주(四書集註)' 등과 함께 주희 및 주자학연구의 필수문헌이다. [본문으로]
  3. 하수(河水)와 낙수(洛水)라는 강이름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두 분의 학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4. '중용장구(中庸章句)' 29장에 “군자의 도는 자기 몸에 근본하여 여러 백성들에게 징험하며, 三王에게 상고해도 틀리지 않으며,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質正)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百世에 성인(聖人)을 기다러도 의혹되지 않는다” 하였다. [본문으로]
  5. 두 王氏는 왕야(王埜, 자 子文, 호 潛宰)와 왕수(王遂, 자 去非, 호 實宰)를 말하며, 余氏는 여사로(余師魯)를 말한다.이들이 각기 편찬한 책은 대전(大全) 100권과 속집(續集) 11권, 별집(別集) 10권이다. 현존하는 '회암선생문집(晦庵先生文集)'은 송대에 간행된 것으로 주희의 셋째 아들 주재(朱在)가 편집했는데, 그 분량이 모두 백권에 이른다. [본문으로]
  6. 선조실록 선조 6년 계유(1573) 1월12일(계사)조에 유희춘(柳希春)이 “전에 중종 계미년(1523)에 '주자대전'을 인출했으나 그때에는 교서하는 관원이 거칠고 정하지 못함이 많았으므로 식자(識者)가 한탄했습니다. 이제는 이황(李滉)이 교정(校定)한 문자를 얻었고 아울러 우신(愚臣)의 좁은 소견으로 여러 장점을 모아서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책이 죄다 정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는 기사가 있다. 이에 근거하면 퇴계가 '주자대전'을 처음 본 것은 1543년 이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7.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하듯이 하며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노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라는 구절이 있다. [본문으로]
  8. '주역하경(周易下經)' 손(損)괘의 ‘상전(象傳)’에 “山 아래에 못이 있음이 손(損)이니, 君子가 보고서 분노(忿怒)를 징계(懲戒)하고 욕심을 막는다(象曰 山下有澤 損 君子以 懲忿窒欲)”라는 구절이 있고, 또 익(益)괘의 ‘상전(象傳)’에 “바람과 우레가 익(益)이니 君子가 보고서 善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象曰 風雷益 君子以 見善則遷 有過則改)”는 구절이 있다. [본문으로]
  9. 明나라 초기의 학자 송렴(宋濂)의 문집 [본문으로]
  10. 수사(洙泗)는 공자가 이곳에서 도를 강론하였던 산동성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무봉산(舞鳳山)은 수원부 만의현(萬義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당시 우암 송시열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였고 사후에 임시로 장사지내기도 했던 곳이다. [본문으로]
  12. 고갑자(古甲子)인 갑인(甲寅), 즉 현종 15년(1674)을 가리킨다.고갑자로 알봉(閼逢)은 갑(甲)이고, 섭제격(攝提格)은 인(寅)이다. 이 무렵 1674년 효종비의 상(喪)으로 인한 제2차 예송(禮訟)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西人)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본문으로]
  13. 박종상(朴宗祥, 1680~1745)은 박자진(朴自振, 1625~1694)의 증손자 [본문으로]
  14. 박자진이 외조부 홍유형(洪有炯)에게 이 첩을 받았고, 박자진은 겸재의 외조부로 또한 홍정랑(洪正郞=洪有炯)은 퇴계의 외현손(外玄孫)이다. [본문으로]
  15. 박자진 [본문으로]
  16. 정만수의 부친(父親)으로 겸재 정선(1676-1759)을 가리킨다.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17. 박자진(朴自振, 1625~1694) [본문으로]
  18. 겸재 정선의 둘째아들, 정만수(鄭萬遂) [본문으로]
  19. 서하(西河) 임헌회(1811-1876)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호는 고산(鼓山), 서하(西河),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이다. 경서(經書)에 몰두,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 9)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본문으로]
  20. 겸재가 아들 정만수의 요청에 의해 계상정거 등의 그림을 그려준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21. 唐의 시인 왕유(王維, 699?-759)가 망천(輞川)에다 별장을 짓고 배적(裵迪) 등과 거문고를 타며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 20곳을 골라 각기 이름을 붙이고 시를 읊었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망천이십경(輞川二十景)’이라 하였다. 마힐(摩詰)은 그의 자(字)이다. 벼슬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기 때문에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한다. 그는 오칠언(五七言), 고시(古詩), 율시(律詩), 절구(絶句) 등에 뛰어났고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저서에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본문으로]
  22. 근로(槿老)는 사천 이병연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3. 전우(田愚, 1841-1922)의 호는 간재(艮齋), 구산(臼山), 추담(秋潭)이다. 임헌회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았으며, 만년에는 전라도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본문으로]
  24. 김용진(1878-1968)은 한국서화가이며, 호는 영운(潁雲), 향석(香石), 구룡산인(九龍山人)이다. 한말에 수원군수 및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등을 지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주로 초야에 묻혀서 서화에만 전념해오다가 광복이후 194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참여, 서예부 심사위원 및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25. 현재 이 첩을 수장하고 있는 이영재(李英宰)씨의 선고(先考)인데, 호는 모운(茅雲)이다. 고서화의 감식에 뛰어나 아들에게 고서화의 이론과 감상법을 전수했다. 1978년에 신세계미술관에서 '고서화(古書畵)'란 책을 발행하기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