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아래 우리 불교문화재의 수난
-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수난사 이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만 했던 형극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고, 또 우리의 전통적인 여러 문화도 역시 어느 한 분야조차 옳게 발전되지 못한 채 저들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변형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유증이 해방 후까지 오랫동안 이어져 왔었다. 일본은 고려 청자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목가구까지 거의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수집해 갔다. 불교문화재 역시 멀쩡한 사찰의 문화재부터 산이며 들에 방치되어 있던 폐사지 유적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은 거의 약탈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는 불국사 다보탑 사리장엄이나 석굴암 안에 봉안되었던 공예탑 등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지금 만일 그 유물들이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찬란한 문화재가 한층 늘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불교문화재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수백 건이 넘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합하면 모두 얼마나 될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되돌아보려는 것은 잊고 싶은 상처를 새삼스레 들추자는 게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그들에게 핍박 받았던 것은 후진적이고 열악한 우리의 정치력과 허약했던 국력이 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일본인들의 우리 문화재 훼손과 밀반출 문제는 우리들의 동조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과연 이 정도까지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보고서로도 엮었고(1966년), 또 중요한 문화재의 피해 전말을 수록한 책자도 나왔었다(1973년).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직히 이런 일에 무관심한 편이다. 궁궐인 경복궁 뜰에 절에 있어야 할 불상과 부도, 탑들이 늘어서 있어도 그다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마땅히 절에서 전승되고 보관되어야 할 여러 문화재들이 박물관에 있고 또 인사동 골동품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까닭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가 아무리 무기력하고 어려웠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그 때 우리가 좀 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또 좀 더 애착을 갖고 있었던들 이렇게 철저하게 약탈당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사리장엄을 빼고 단순히 이건기만을 넣는다고 해서 불교계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경천사탑이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면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경천사탑이 제자리인 개성을 떠나서 서울에 와 있는 것도, 그리고 수리를 요할 정도로 훼손된 것도 모두 일본인의 반출에 의한 것이니 원죄는 다른 곳에 있었던 셈이다. 망가지고 없어진 문화재를 다시금 돌아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켜냈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지 못했던 부끄러움과 아픔에 대한 반성을 철저히 하자는 얘기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아직까지 일본에 불법으로 반출되어 있는 문화재를 최대한 자세히 짚어보며 우리가 그것들을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광복 6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문화자주요 문화독립이기 때문이다. 첫째 제자리에서 이동된 것, 둘째 형태가 훼손되거나 파괴된 것, 셋째 제자리에 잘 있고 외형상 파손된 것은 없으나 내용물이 없어진 것, 넷째 일본에 불법반출 된 것, 다섯째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국내에 환수된 것 등이다. 첫 번째는 갈항사 삼층석탑, 남계원 칠층석탑 등 현재 경복궁에 모여 있는 문화재 거의 다가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보아도 좋다. 탑이나 부도들이 경복궁에 모인 까닭은 일정하지 않다. 남계원 칠층석탑 같은 것은 일단 보수를 위해 서울까지 운반되었다가 당시 조선총독부가 있던 경복궁에 남겨진 것이다. 보수는 탑에 들어있는 사리장엄을 얻기 위함이고, 이 탑들을 경복궁에 둔 것은 혹시라도 회복할지 모르는 조선왕실의 기운을 누르기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지금 청와대 안에 있는 석불좌상은 본래 경주에 있었으나 조선총독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방군수가 올려 보낸 것이니 불상을 한낱 선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저들의 후안무치함에는 그저 아연할 뿐이다.
원형을 크게 훼손했다. 복원을 위해 해체작업이 이루어지는 현재 이 시멘트 도포는 두고두고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
다보탑은 멀쩡히 잘 있었건만 그 안에 있는 사리장엄을 탐낸 일본인들이 거의 비밀리에 사리장엄을 꺼내갔고, 그나마 수리보고에 관한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석가탑 안에서 국보 중의 국보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다보탑 사리장엄에도 역시 그 못잖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시대 부도가 대표적이고, 그 밖에 숱한 범종 등이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다. 네즈미술관의 부도는 고려 초의 팔각원당형 부도로 우리나라에서도 그 예가 많지 않은 종류다. 또 일본 내에 있는 범종 가운데는 국내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신라시대 범종이 있다.
그 밖에도 봉인사 부도, 한송사 석조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경천사 탑은 한때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국내외적으로 비등하자 마지못해서 되돌려 보낸 것이 원위치인 개성까지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된 것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1965년에 있었던 문화재 반환협정에 의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기는 했어도 본래 모습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가해진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에 불법반출 된 것은 되돌려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 동안 이러한 피해문화재에 대해 아무런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의 일환으로 일본에 가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반환협상이 있었다. 이때 총 438점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불교문화재는 강릉 한송사 고려시대 석조보살상과 문경 봉서리 삼층석탑 사리장엄 등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438점이라는 수 자체가 일본에 불법반출 된 전체 문화재를 놓고 볼 때 턱없이 부족한 수량인데다가 주로 고분출토품이 들이어서 숫자에 큰 의미가 없다. 이들 가운데는 목걸이의 관옥(管玉)처럼 일괄 1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데도 반환될 때는 구슬 하나하나가 다 수량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보다 수량이 부풀려진 것이다. 그나마 불교문화재는 겨우 구색만 갖추었을 뿐 미술사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문화재는 거의 빠졌다. 한마디로 당시에 국내에 환수된 불교문화재는 우리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던 것이다. 외국의 경우에도 자국의 문화재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투탕카멘 미라나 로제타스톤을 대영박물관에 가서야 볼 수 있다거나, 중국 둔황의 벽화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연구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문화재 반환요구에 대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숱한 문화재가 일본에 반출된 것이 명확하건만 반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문화재 반환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몇 년 전 민간 차원에서 고려 범종이 국내에 기증된 적이 있고, 최근에는 북관대첩비가 일본 어느 신사(神社)의 노력으로 반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의지가 있을 때 하나씩 하나씩으로 시작해서 언젠가는 문화재 전부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불교문화재가 일본에서 어떤 상황에 있는지 예의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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