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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일제강점기 아래 우리 불교문화재의 수난

Gijuzzang Dream 2009. 2. 5. 05:00

 

 

 

 

 

 

 

 일제강점기 아래 우리 불교문화재의 수난

 

 

 

 

-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수난사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이후 35년 동안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로 온갖 서러움과 통분을 겪었다.

이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만 했던 형극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고,

또 우리의 전통적인 여러 문화도 역시 어느 한 분야조차 옳게 발전되지 못한 채

저들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변형되기에 이르렀다.
불교의 경우 이른바 왜색불교의 강요에 의해 우리의 전통 불교가 커다란 상처를 입어

그 후유증이 해방 후까지 오랫동안 이어져 왔었다.
특히 불교문화재는 일제강점기 내내 거의 전국에 걸쳐 수난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고려 청자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목가구까지 거의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수집해 갔다.

불교문화재 역시 멀쩡한 사찰의 문화재부터 산이며 들에 방치되어 있던 폐사지 유적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은 거의 약탈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는 불국사 다보탑 사리장엄이나 석굴암 안에 봉안되었던 공예탑 등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지금 만일 그 유물들이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찬란한 문화재가 한층 늘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불교문화재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수백 건이 넘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합하면 모두 얼마나 될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 잃어버린 우리 불교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올해는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일제강점기 동안 있었던 우리 불교문화재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려는 것은 잊고 싶은 상처를 새삼스레 들추자는 게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그들에게 핍박 받았던 것은 후진적이고 열악한 우리의 정치력과 허약했던

국력이 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일본인들의 우리 문화재 훼손과

밀반출 문제는 우리들의 동조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과연 이 정도까지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그 동안 고고미술연구회에서 일제강점기에서의 우리 문화재 피해사례를 직시하여

보고서로도 엮었고(1966년), 또 중요한 문화재의 피해 전말을 수록한 책자도 나왔었다(1973년).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직히 이런 일에 무관심한 편이다.

궁궐인 경복궁 뜰에 절에 있어야 할 불상과 부도, 탑들이 늘어서 있어도

그다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마땅히 절에서 전승되고 보관되어야 할

여러 문화재들이 박물관에 있고 또 인사동 골동품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까닭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가 아무리 무기력하고 어려웠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그 때 우리가 좀 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또 좀 더 애착을 갖고 있었던들

이렇게 철저하게 약탈당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경천사 10층석탑을 수리한 뒤 복원하면서

사리장엄을 빼고 단순히 이건기만을 넣는다고 해서 불교계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경천사탑이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면 그런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경천사탑이 제자리인 개성을 떠나서 서울에 와 있는 것도,

그리고 수리를 요할 정도로 훼손된 것도 모두 일본인의 반출에 의한 것이니

원죄는 다른 곳에 있었던 셈이다.

망가지고 없어진 문화재를 다시금 돌아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켜냈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지 못했던 부끄러움과 아픔에 대한 반성을

철저히 하자는 얘기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아직까지 일본에 불법으로 반출되어 있는 문화재를 최대한 자세히 짚어보며

우리가 그것들을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광복 6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문화자주요 문화독립이기 때문이다.


-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불교문화재의 종류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피해사례를 유형별로 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제자리에서 이동된 것, 둘째 형태가 훼손되거나 파괴된 것,

셋째 제자리에 잘 있고 외형상 파손된 것은 없으나 내용물이 없어진 것,

넷째 일본에 불법반출 된 것, 다섯째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국내에 환수된 것 등이다.

첫 번째는 갈항사 삼층석탑, 남계원 칠층석탑 등 현재 경복궁에 모여 있는 문화재 거의 다가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보아도 좋다. 탑이나 부도들이 경복궁에 모인 까닭은 일정하지 않다.

남계원 칠층석탑 같은 것은 일단 보수를 위해 서울까지 운반되었다가 당시 조선총독부가 있던

경복궁에 남겨진 것이다. 보수는 탑에 들어있는 사리장엄을 얻기 위함이고,

이 탑들을 경복궁에 둔 것은 혹시라도 회복할지 모르는 조선왕실의 기운을 누르기 위함이었다고도 한다.

지금 청와대 안에 있는 석불좌상은 본래 경주에 있었으나

조선총독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방군수가 올려 보낸 것이니 불상을 한낱 선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저들의 후안무치함에는 그저 아연할 뿐이다.


두 번째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들 수 있다. 원형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시멘트를 발라놓아

원형을 크게 훼손했다. 복원을 위해 해체작업이 이루어지는 현재 이 시멘트 도포는 두고두고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


세 번째는 주로 석탑이나 부도의 경우가 많은데 불국사 다보탑이 가장 좋은 예가 된다.

다보탑은 멀쩡히 잘 있었건만 그 안에 있는 사리장엄을 탐낸 일본인들이 거의 비밀리에 사리장엄을

꺼내갔고, 그나마 수리보고에 관한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석가탑 안에서 국보 중의 국보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다보탑 사리장엄에도 역시 그 못잖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네 번째의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러한 예로는 현재 일본 도쿄의 네즈(根津)미술관 마당에 놓여 있는

고려시대 부도가 대표적이고, 그 밖에 숱한 범종 등이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다.

네즈미술관의 부도는 고려 초의 팔각원당형 부도로 우리나라에서도 그 예가 많지 않은 종류다.

또 일본 내에 있는 범종 가운데는 국내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신라시대 범종이 있다.


다섯 번째로는 앞서 말한 경천사 10층석탑이 대표적 사례가 될 텐데,

그 밖에도 봉인사 부도, 한송사 석조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경천사 탑은 한때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국내외적으로 비등하자 마지못해서

되돌려 보낸 것이 원위치인 개성까지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된 것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1965년에 있었던 문화재 반환협정에 의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기는 했어도 본래 모습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가해진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 문화재 환수 노력과 우리의 과제

이미 훼손되어버린 문화재야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볼 수 없지만

일본에 불법반출 된 것은 되돌려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 동안 이러한 피해문화재에 대해 아무런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의 일환으로 일본에 가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반환협상이 있었다.

이때 총 438점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불교문화재는

강릉 한송사 고려시대 석조보살상과 문경 봉서리 삼층석탑 사리장엄 등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438점이라는 수 자체가 일본에 불법반출 된 전체 문화재를 놓고 볼 때 턱없이 부족한 수량인데다가

주로 고분출토품이 들이어서 숫자에 큰 의미가 없다.

이들 가운데는 목걸이의 관옥(管玉)처럼 일괄 1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데도

반환될 때는 구슬 하나하나가 다 수량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보다 수량이 부풀려진 것이다.

그나마 불교문화재는 겨우 구색만 갖추었을 뿐 미술사적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문화재는 거의 빠졌다.

한마디로 당시에 국내에 환수된 불교문화재는 우리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던 것이다.

외국의 경우에도 자국의 문화재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투탕카멘 미라나 로제타스톤을 대영박물관에 가서야 볼 수 있다거나,

중국 둔황의 벽화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연구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문화재 반환요구에 대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숱한 문화재가 일본에 반출된 것이 명확하건만 반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문화재 반환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몇 년 전 민간 차원에서 고려 범종이 국내에 기증된 적이 있고,

최근에는 북관대첩비가 일본 어느 신사(神社)의 노력으로 반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에 반출된 우리의 불교문화재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우리의 의지가 있을 때 하나씩 하나씩으로 시작해서

언젠가는 문화재 전부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불교문화재가 일본에서 어떤 상황에 있는지 예의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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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천사10층석탑 

 

 

국보 제86호 경천사 10층석탑 (고려시대, 대리석, 높이 13.5m)

 

1348년 : 경기도 풍덕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1907년 : 일본인 다나카 미츠아키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 당함.

1918년 : 한국으로 반환.

1918-1959년 :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해체상태로 보관.

1959-1995년 : 경복궁 뜰에 복원 설치.

        1962년 : 국보 제86호로 지정.

1995-2004년 :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보존 복원처리 작업.

2005년-현재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현재에 이름.

 

 

고려의 수도로 500년 동안 영화를 누렸던 문화의 도시 개성(開城)과 그 주변에는

명찰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탑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시대 말(1348) 개성 근처 부소산 기슭의 경천사(敬天寺)에 세워진 경천사 10층석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대리석으로 만든 탑인데다가 그 화려한 장식으로

고려의 탑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물이었다.

 

1906년 12월 한국에 온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는

1907년 ‘고종황제가 하사했다’는 종 임금의 칙서를 위조하여 황당무계한 거짓주장과 공갈을 내세워

이 경천사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불법 반출한다. 그리고 도쿄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 같은 문서 위조와 불법 반출에 대해 양식 있는 일본인 사이에서 비난이 일자

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다나카에게 원상회복 시킬 것을 엄중 항의하였다.

마사타케의 항의는 조선의 여론을 잠재우는 동시에

자신과 정적 관계인 다나카의 잘못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경천사탑은 곧바로 반환되지 못하다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어네스트 베셀과

미국인 호모 헐버트의 집요한 언론고발과 반환운동에 힘입어 1918년 서울로 되돌아오게 된다.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국에 되돌아온 석탑은

그 후에도 고향 땅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채

경복궁 근정전 회랑과 마당 뜰 등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게 되는 우여곡절을 또 다시 겪게 된다.

그러다 1995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보수와 복원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마침내 2005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금자리를 틀게 된 것이다.

한 개인의 그릇된 욕심으로 인해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 뻔했던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

경천사 10층석탑. 이 탑이 한반도 이 땅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외국인 베셀과 헐버트의 헌신적인 노력과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 거돈사 원공국사탑  

 

 

거돈사 원공국사 현묘탑지 입구 / 거돈사 원공국사탑 8부신중

거돈사 원공국사 현묘탑지

거돈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사리에 있는 거돈사(居頓寺)는 고려시대 굴지의 대찰이었다.

원주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지방의 호족이 세력을 크게 떨치던 곳으로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다. 그래서 거돈사를 비롯해 여러 명찰들이 자리하고 있다.
거돈사 원공국사현묘탑은 고려의 부도탑 가운데서도 미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이미 고려의 주요 문화유적으로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인된 문화재도 일본인의 약탈의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느 때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와다(和田)라는 상인이 절터에 있던 이 부도탑을

남대문 자기의 집 정원에 불법반출 한 것이다.

그것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지대석은 그냥 놔두고 탑신부만 들고 왔다.

그래서 지금 거돈사터에는 지대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 탑은 해방 뒤인 1948년 무렵에 다시 성북동 민가 정원에 옮겨졌다가

미 군정청과 박물관 사람들의 노력으로 경복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3)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 입상 

 

십일면관음보살 (머리부분) - 현재 

 

십일면관음보살 - 30년대 도난초기 / 십일면관음보살 (머리부분) - 30년대 도난초기 

석굴암의 상설(像設)은 그 뛰어난 조각으로 말미암아

석굴암의 신비를 한 층 높이고 있는 걸작이다.

그 중 본존상 뒤에 있는 11면 관음보살입상은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이와 같은 종류가 거의 없다는 희소성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11면이라는 것은 본체 얼굴에 10위의 다른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지금 이 관음입상을 자세히 살피면

머리 위 보관에 새겨져 있는 보살상 가운데 1위가 떨어져 나가 없는 것은 알 수 있다.

석굴암 내 대리석 5층탑과 마찬가지로 1909년 무렵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반출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  

(4)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 / 다보탑 석사자

1구만 남아있는 석사자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석가탑으로 부르는 삼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다보탑(多寶塔)은

8세기 신라 석탑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석가탑이 이른바 전형양식의 대표라고 한다면

이 다보탑은 이형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보탑은 여느 탑과는 다르게 기단부에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계단을 두었는데,

이런 의장(意匠)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다보탑 자체가 수미단(須彌壇)처럼 중생계에서 꼭대기의 극락세계로 향하는

상층 구도를 하고 있는데, 맨 아래에 있는 계단은 중생들이 선업을 닦아

이 계단을 통해 극락세계로 올라가라고 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개의 계단 위에는 호법의 의미로 돌로 만든 사자(獅子)를 안치해 놓았다.

이 사자상 4구는 적어도 1902년까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이 가운데 3구의 사자상이 도난당해 없어졌다.

1924년 불국사와 석굴암 안내를 맡았던 기무라(木村靜雄)의 책에도 이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190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일본인 무뢰배에 의한 소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불국사사리탑  

 

불국사 사리탑 / 불국사 사리탑 탑신 동면 여래상 

불국사와 석굴암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불교미술의 정화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이 이런 불국사와 석굴암을 그냥 놔둘 리는 없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기 시작했던 것은

대략 1907년에서 1909년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들에 의한 불국사의 피해를 말할 때 우선 사리탑을 들 수 있다.

지금 불국사 관음전 앞에는 보호각이 하나 있고,

그 안에 고려시대에 만든 아름다운 부도탑이 모셔져 있다. 1906년 일군의 일본인들이

불국사를 찾아 무단으로 이 부도탑을 일본 도쿄로 옮겨갔다.

그것도 박물관이나 사원에 둔 것이 아니라 우에노(上野)공원 부근에 있던

한 요릿집 정원의 장식물로 가져간 것이다.

그 뒤 다시 일본인 사업가 자택 정원으로 옮겨졌다가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933년 불국사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부도탑의 사리장엄이 없어진 것은 물론,

부분적인 훼손도 있었으니 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6) 청와대불상 

 

지금 청와대 정원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에는

신라시대의 불상이 보호각 안에 놓여 있다.

이 자리는 절터가 아닌데 어떻게 해서 불상이 있게 된 걸까?

이 불상은 본래 경주 내동면 도지리에 자리한 유덕사(有德寺) 터에 있었다.

그러나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이 자신의 집 정원으로 옮겨놓아

한낱 석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1913년 경주를 순시하던 데라우치 총독은 그 일본인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가 정원에서 이 불상을 보았다.

데라우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훌륭한 작품이라며 한참 동안이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순시를 마치고 관저에 돌아온 데라우치는 깜짝 놀랐다.

관저 정원 한쪽에 자신이 경주에서 보았던 그 불상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상인이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올려 보낸 것이었다.

당시 총독 관저는 지금의 남산 아래 왜성대에 있었다가 1927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옮겨졌는데,

이 불상 역시 그 때 이운 되어 지금까지 이 자리에 놓여 있다. 

(7)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 지광국사 현묘탑이 있던자리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에는 법천사(法泉寺)라는 대찰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의 번성을 말해주고 있다. 비록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당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많은 고승대덕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 경복궁 뜰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은 고려시대 해린(984∼1070) 스님의 부도탑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틈타 일본인들이 오사카(大版)로 몰래

빼돌렸다. 한참 뒤에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일자 어쩔 수 없이 반환되었으나

종래 있던 제 자리에 가지 못한 채 경복궁 뜰에 놓이게 되었다.
본래 탑의 기단 네 모서리에 사자가 각각 1구씩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는데

아마도 일본에 반출되었을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도탑은 6 •25전쟁 때 포탄의 피해를 입는 등 연속으로 수난 당했는데,

따지고 보면 처음 그 자리에 잘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같다.
법천사지에는 탑비가 아직 남아 있고, 탑과 비가 같이 서 있었던 건물 자리도 그대로 남아 있다.

(8) 봉인사 부도

 

 

 

경복궁 광화문 뒤 한쪽에 봉인사(奉印寺) 부도가 있다.

봉인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던 절이다.

1619년(광해군 11) 중국에서 석가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지자

이듬해 왕명으로 이 탑을 세운 뒤 불사리를 봉안토록 했다.

그 뒤 줄곧 왕실의 후원을 받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조선왕조 몰락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1927년 일본인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황폐화 된 절터에 와서 이 부도탑을 해체해

일본 고베(神戶)로 반출하였다. 얼마 뒤 오사카(大阪)시립미술관에 이건 되었으나

민간의 노력으로 1987년 2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되돌아오기는 했으나 지금의 자리가 제자리가 아닌 만큼,

원래의 터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조금이나마 이 부도가 입은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9) 반가사유상(국보 83호 / 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78호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는 세계에 내놓아 자랑할 만한 작품이 많다.

그 중에서도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금동 반가사유상은 해외전시를 가장 많이 가졌고

또 그만큼 숱한 외국인들의 눈길을 붙잡은 ‘스타’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은 7세기 신라에서 만든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본래 경주 남산의 어느 절터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때인가 일본인에 의해 강탈되어 모습을 감추었다가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에 이왕가박물관에서 일본인 골동상에게 거금을 주고

이 불상을 매입하여 비로소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본인 골동상이

다수 활개를 치고 다니며 노골적으로 불교문화재를 빼앗거나 훔쳐서 각지에 팔아 넘겼다.

분명한 불법이었지만 당시 치안을 담당했던 총독부는 모른 체 했고,

그들의 약탈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어 숱한 불교문화재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역시 정확한 전래지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것은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원 사찰에서 불법으로 강탈해 갔기 때문이다.

(10)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불법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그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1945년 해방이 된 뒤 강제로 뺏긴 우리 문화재에 대한 반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5년 외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이 있었는데

이 때 문화재 반환논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측 요구와 저들의 수용 의지에 너무 커다란 차이가 나서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반환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때 돌아온 불교문화재 가운데 하나가

지금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한송사(寒松寺) 석조 보살좌상이다.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의 한송사는 1880년에 불어 닥친 가공할 위력의 태풍으로 폐사 되었고

한송사에 전래되던 고려시대에 대리석으로 만든 보살좌상은 칠성암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고려시대의 걸작 보살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와다(和田)이라는 일본인이

1911년에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손에 넣었다.

그는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에 건너가 이 보살상을 제실(帝室)박물관에 인도했다.

일본 정부에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기 위한 만행이었다.
비록 1966년에 우리나라에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기는 했지만,

반출 과정에서 머리가 깨지고 그 밖의 부분도 손상을 입었으니 그 피해가 보통이 아니었다.

(11) 유점사 능인전 동조 석가여래 입상

 

 

유점사 능인전 동조 석가 여래 입상 / 유점사 능인전 동조 동자 입상

유점사 능인전 동조 석가여래입상 2위

유점사 능인전 동조 불보살입상 3위

유점사 능인전 동조 불보살입상 5위

유점사 능인전 동조 불보살입상 10위

유점사 전경

 

금강산은 아직까지 우리가 언제나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점차 왕래의 기회가 잦아들고 있다. 민족의 산 금강산에는

숱한 명찰대찰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점사(楡岾寺)다.

창건 이래 끊임없이 법등을 이어왔는데,

1912년 금강산 지역의 불교유적을 탐사하던 세키노(關野貞)와 야스이(谷井濟一)가

유점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50위를 발견한 뒤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높이 7-41㎝의 소형불로 본래는 53불이 조성되었으나 발견 당시는 50불만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알려진 것은 당시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불상의 운명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 무뢰배들은 치밀한 사전 모의를 거쳐 1916년 유점사에 가서

개성의 유력자라고 속이며 스님들을 안심시킨 뒤 법당에 들어가 불상 17점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 뒤 사찰의 신고로 범인을 붙잡기는 했지만 정작 경찰이 회수한 것은 9점뿐이었다.

하지만 회수한 9점 중에서 6점은 본래의 불상이 아니라

값없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바꿔 치기 된 것이었다.

이것은 범인과 경찰이 공모하여 그렇게 다른 유물로 바꿔 넣은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훔친 불상을 국내외에 팔았는데,

현재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이 그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그 행방을 모르고 있으니,

이렇듯 우리 불교문화재의 피해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이다.

(12) 상원사 범종과 바꿔치기 된 일본식 범종

 

현재 경기도 파주군 보광사 종각에 걸린 일본식 범종

 

유점사 53불과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가만히 잘 있는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인에 의해 멋대로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된 것이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龍門山) 자락에 상원사(上元寺)라는 신라시대 고찰이 있었다.

근대에 와서 폐사가 되었고,

그 터에는 신라시대에 만든 커다란 범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선을 강제병합 한 일본은 1906년 11월에 서울 남산의 북쪽 기슭에
일본식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를 짓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고찰의 냄새를 풍기기 위해 어디선가 오래된 범종을 가져와 걸기로 했는데

마침 상원사의 범종이 그 대상이 되었다.

1908년 그들은 상원사에서 범종을 옮겨오기로 하고, 4월에 드디어 대종이 도착했다.

그 뒤 해방이 되고 나서 이 범종은 조계사로 이운되었고, 국보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12월 국보 해제됨.)
그러나 1962년에 이 범종은 본래 상원사에 있던 범종이 아니라

중간에 바꿔 치기 된 20세기 초에 만든 일본식 범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08년 동본원사로 옮길 때 일본인들이 한강에서 바꿔 치기 하여

진품은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40여 년 동안 가짜 일본종을 우리의 국보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우리 불교문화재 훼손은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를 짓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3) 보신각범종

 

 

종로 2가 네거리에 있는 보신각에 걸려 해마다 섣달 그믐날 자정 서울 밤하늘에 제야의 종소리를

가득 울려 퍼트렸던 보신각종의 애환도 빠뜨릴 수 없다.

본래는 지금의 돈의문 안에 있던 원각사(圓覺寺)의 범종으로 1468년(세조 13)에 만들어졌다가

임진왜란 직후에 보신각에 걸리게 되었다.

보신각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에 지어져 종을 걸어 놓고 서울의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서울에 쳐들어온 왜병이 불에 녹여버렸기 때문에

원각사 종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보신각 종은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대작으로 한국 종의 전통을 계승한 아름다운 조각이

일품이었고, 울리는 소리도 웅장하기 그지없어 한양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범종이었다.

사찰에 걸렸던 범종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장엄하고 그윽한 소리를 울려 퍼뜨렸으니

당시 한양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거룩한 불음(佛音)을 향유했던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일본인들은 이 범종의 가치를 인정하여

1934년에 보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패전의 위기에 몰린 저들은 국내를 전시분위기로 몰아넣고 금속류 공출을 강제했다.

가정의 놋쇠 숟가락과 젓가락에서부터 사찰의 범종, 심지어 철불마저 강제로 빼앗아 가며

전쟁물자로 충당하려 했다. 이 때 빼앗긴 범종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쇳물에 녹여져 총알로 바뀌는 통탄할 일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 보신각 종도 1944년 8월에 총독부의 앞잡이였던 국민총력 경성연맹이라는 단체의 건의로

공출될 위기에 처했다.

공문이 제출되어 총독부는 이 범종을 하루빨리 공출해야 한다는 강력한 건의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후안무치한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 스스로 보물로 지정했던 이 범종을

쉽게 공출해 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머뭇거리다 1945년 8월에 드디어 해방의 날을 맞아 불구덩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범종은 그 뒤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고, 1985년까지 제야의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노쇠하여 1986년에 그 일을 새로 만든 종에 물려주고

자신은 경복궁 뒤뜰에 만든 종각으로 물러나 앉았으나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보신각 종’하면 곧 이 범종을 떠올릴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범종이었다. 최근에는 새로 이전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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