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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 정병(淨甁)

Gijuzzang Dream 2009. 2. 2. 19:49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 정병의 의미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는 일반일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형태인 불교물병들이 진열되어 있다.

물을 넣는 곳인 귀때[流]와 따르는 곳인 첨대(尖臺)가 있는 이 물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정병(淨甁)이다.

 

그 중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은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가에서 물오리가 헤엄치며 노는 한가로운 정경을 은사로 상감한 것이어서

현존 청동은입사정병 중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고려 전기의 회화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림 1 .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고려11~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정병(淨甁)은 원래 인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범어로 “쿤디카(Kundika)”라 부르며

불교와 함께 동점하여 중국에서 '군지(軍持, 君持 · 軍遲) · 군지카(君稚迦)' 등으로 음역되었다.

 

승려들이 사용하는 정수(淨水)를 담는 수병으로서

남북조시기에 한역된『범망경』,『십송율』,『사분율』등 율부경전에 의하면

대승비구가 두타행(頭陀行)을 떠날 때 새의 날개처럼 반드시 몸에 지니는 십팔물(十八物)중의 하나이면서

불 · 보살 전에 정수를 올리는 공양구이기도 하다.

돈황에서 발견된 당대 고승상 그림에는 휴대용 자리인 니사단을 깔고서 좌선하고 있는 승려의 옆에

이 군지형 정병이 놓여있는데, 오늘날 생수병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림 2 . 고승상

(당 9세기말~10세기초, 紙本, 돈황장래, 영국 대영박물관)


그런데 물병에는 정병과 촉병(觸甁)의 두 가지가 있었으며 사용법도 각기 달랐다.

당대의 구법승 의정(義淨)은 인도 나란다 승원에서 10년동안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지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정병과 촉병의 용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모든 물에는 정촉(淨觸)의 구분이 있다.

병도 두 개가 있어 깨끗한 물은 모두 와(瓦)자를 사용하고,

보통 물은 구리· 무쇠 등의 병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깨끗한 물은 식사 때가 아닐 때 음료수로 사용하고, 보통 물은 대소변 후에 필요한 물이다.

깨끗한 물은 깨끗한 손으로만 지닐 수 있고 반드시 청정한 곳에 안치하여야 하며,

보통 물은 언제나 필요할 때 잡을 수 있게 하여 손이 닿는 곳에 이를 놓아둔다.

(凡水分淨觸, 甁有二枚. 淨者咸用瓦瓷, 觸者任兼銅鐵. 淨擬非時飮用, 觸乃便利所須.

淨則淨手方持, 必須安著淨處. 觸乃觸手隨執, 可於觸處置之.)”


의정(義淨)은 동병은 대소변후에 사용하는 보통 물을 담는 것이라 했지만

선종 7조인 신회(神會, 684-758)의 묘에서 출토한 금동정병이나 고려시대 청동은입사정병을 보면

실제로는 정촉의 구별 없이 동제나 도자제, 모두 정병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병은 실용성 외에 정신적인 기능도 있는데,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419년, 약칭 청관세음경)

의한 법수(法水)의 상징으로서 관음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해 주는 감로수가 담긴 병이라 하여

'감로병(甘露甁), 보병(寶甁)'이라고도 한다.

이『청관세음경』에는 부처님이 암라수원에 계실 때,

월개장자가 부처님께 비사리국의 악병을 구해달라고 청허하는 내용이 있으며,

양지(柳枝; 버드나무가지)와 정수가 모든 병을 고치는 도구로 등장한다.

“부처는 서방무량수불 및 관세음, 대세지 두 보살을 청하라고 설하시니

그 불 및 두 보살이 함께 이 나라에 오셨다.

그 때에 비사리 사람이 양지와 정수를 갖추어 관세음께 올리니

관세음은 삼보(三寶) 및 자기의 명호를 부를 것을 가르치고

또 시방제불구호중생신주(十方諸佛救護衆生神呪)를 설해 그 나라 사람은 다 회복하여 원래처럼 되었다.”

병자에게 버드나무가지로 깨끗한 물을 뿌려 병을 고치는 방법은 양지정수법이라 하며

서진 혜제(290-306) 말에 중국에 온 인도의 전법승 기역(耆域)이 처음 행했던 치병수단이다.

이후 물이 담긴 정병과 버드나무는『청관세음경』이 한역되자 도상적으로 관음보살의 지물이 되었다.

 

 

우리나라 정병의 시원은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삼국시대에 불교가 발흥할 때부터였을 것이며,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삼양동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의당 출토 금동보살입상이 들고 있는 보병,

부여 동남리 사지 출토 토기병 등을 보면,

중국 남북조시기에 유행했던 유형인 세장경병(細長頸甁)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형태인 군지형은 751년에 조성된 석굴암의 범천상이 들고 있는 정병이 최초 예이지만

문헌 기록으로는 7세기에 당 법장현수(法藏賢首)가 의상(義湘)에게 보내 온 것이 있어

유입 시기는 좀 더 이르다.

즉『삼국유사』, 의해편, 승전촉루(勝詮髑髏)조에 의하면,

법장은 전에 의상이 신라승 효충을 통해 보내 온 금에 대한 답례로 승전법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에

“지금 서국의 군지조관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今付西國軍持薯灌一口. 用表微誠. 幸願檢領)라는 편지와 정병을 예물로 보냈는데,

당시의 서국 군지조관이란 바로 이 군지형 정병이다.

사용법은 신부(身部)의 어깨부분에 있는 귀때를 통해 물을 넣은 뒤

병목을 잡은 손을 높이 올려 첨대로부터 입안으로 떨어지는 물을 마신다.

 

1123년에 고려에 온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곁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 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 목 중간에 턱이 있고 턱 위에 다시 작은 목이 있는데, 잠필의 형태를 본떴다.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과 관사(도관과 사찰), 민가에서 다 쓰는데 다만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4촌, 용량은 3승이다.” 라며

정병의 형태와 용량, 사용계층에 대해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이 정병은 실물뿐 아니라 고려시대 불화에서도 관음이 양지와 함께 들고 있거나

수월관음 옆에는 양지가 꽂힌 상태로 그려진 모양을 쉽게 대할 수 있다.

그림 3 . 아미타삼존도 중 관음보살 부분
(고려 14세기 중반, 일본 松尾寺)

 

그림 4 . 수월관음보살도 중 정병
(14세기전반, 일본 대덕사 소장)


그런데 고려인들은 왜 양지를 좋아했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양지'란 본래 대승비구 18물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의 칫솔격인 치목(齒木)으로 쓰였다.

늘 승려들의 신변에 있었던 양지는 입안의 악취를 제거하는 기본적인 기능에서 발전해

“먼지나 고통을 털어낸다”는 의미로 상징화되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도가에서도 양지를 더러움을 깨끗이 하고 사악함을 걷어내는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양지로 업구(業垢)를 쓸어내 정화하고 진예(塵穢)를 없앤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청명절 때 버드나무 다발로 무덤을 청소하거나

영계(靈界)와 교신하는 초혼술의 매개물로 버드나무조각상을 사용하거나,

가족들에게 길조가 된다고 생각해 앞문에 매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양지는 대중들과 각별했던 모양이다.

12세기 초에 북송의 손목(孫穆)이 고려어를 역한『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이를 닦는 것을 양지라고 한다(齒刷曰養支)”고 설명되어 있는데,

“양”자는 달라도 “양치한다”는 뜻이다.

치목으로 “양지를 씹는다(嚼楊枝)”라는 말에서 연원된 이 습관이 고려까지 지속되어

버드나무가지를 가늘게 쪼개 치아를 닦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언어자체는 분명히 존재해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양치질한다”는 말을 늘 쓰고 있다.

 

세월에 의해 청녹이 곱게 덮인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은

어깨가 불룩한 신부와 귀때를 따로 주조한 후 붙인 것인데,

표면전체에 은입사기법으로 포류수금문을 비롯해 구름과 파초를 시문했다.

 

표면은 3단으로 구획해 가는 은선을 써서 마치 그림 그리듯이

신부에 포류수금문으로 지상 현실세계를,

목 부분에는 구름으로 하늘을 표현했고,

그 위에는 파초문으로 천상 극락세계를 상징한 것이다.

즉 신부에는 은상감된 두 그루의 늘어진 수양버들이 있는 언덕과

갈대가 우거진 언덕을 배경으로 헤엄치는 오리나 날아오르는 물새들,

낚시 하는 사람, 조각배를 젓고 있는 사공 모습,

그리고 멀리 나무가 있는 산들과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는 서정적인 정경이 묘사되었다.


그림 5 . 은입사된 포류수금문(버드나무, 물오리, 낚시하는 사람)


버드나무(blue willow)가 있는 물가에서 오리가 노니는 장면을 문양화한 포류수금문은

오직 고려시대에만 유행했으며,

양지정수법이라는 불교적 의미와 봄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정형화시킨 것이다.

 

이 정병은 조형적인 안정감과 장식성이 뛰어나서 고려 불구의 상징적인 작품일 뿐 아니라

바람이 부는 방향까지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청동바탕을 정으로 쪼아내고 은선을 끼워

우리나라 은입사기법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걸작이다.

더욱이 고려인들이 정병에 버드나무를 은상감하거나

관음이 정병과 함께 버드나무가지를 들고 있거나

관음 옆에 버드나무가지가 꽂힌 정병을 즐겨그린 점은

결국 치병이나 팔난극복 · 기복 · 아들 등 소원성취를 염원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나 현대나 사람들은 변함없이 많은 질병과 고통, 정신적인 고뇌를 안고 살면서,

구제와 기복을 갈망한다. 고려인들은 버드나무와 정수를 통해 심상의 위안을 삼았지만

현대인들은 무엇으로 구원수단을 삼고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을 만나면

잠시 명상에 젖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안귀숙,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2-02

 

 

 

 

 

 

 

 

청동제 물가풍경무늬 정병(청동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 淨甁)

 

 

 

 국보 92호, 고려, 청동제, 높이 37.5㎝,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의 정병은 대체로 몸체가 계란형이며 매끈하게 빠진 긴 목 위로 뚜껑 형태의 둥근 테가 놓이고

그 위로 다시 대롱형의 물을 넣고 빼는 첨대(尖臺)가 솟아 있으며,

몸체 한 쪽에는 중간을 잘록하게 좁힌 비녀처럼 생긴 귀때(注口)가 튀어나와 있다.

 

정병은 물가의 서정적인 풍경을 담아냈는데, 우거진 갈대,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오리를 비롯하여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고, 물 위로 노를 저어가는 어부와 낚시꾼 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 모든 풍광이 표면에 홈을 파서 은선을 두드려 박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병의 긴 목에는 구름무늬, 동체의 어깨와 굽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文),

귀때에는 풀무늬(草文)가 입사되었다.

은을 돌린 굽은 지금은 파랗게 녹슨 몸체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정병은 형태에 있어서 안정감 있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며,

무늬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려 전기부터 크게 발달된 입사기법(入絲技法),

즉 은을 박아 장식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청동제의 병에 은상감을 한 예는 적지 않으나,

이 정병은 잘 조화된 우아한 모습을 보여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법이 고려청자에도 통용되어 주목된다.

 

 

 

청자 물가풍경무늬 정병/ 청자 양각 포류수금문 정병(靑磁 銀入絲蒲柳水禽文 淨甁)

  

 

보물 344호, 고려 12세기, 높이 34.2×밑지름 12.8㎝, 국립중앙박물관

 

수양버들 아래 노닥거리는 원앙 한 쌍 등 한가로운 물가풍경이 새겨져 있는데

국보 92호로 지정된 청동물가풍경무늬 정병(靑銅 陽刻蒲柳水禽文 淨甁)과 매우 닮아 있다.

 

이 청자 정병 몸체의 한 면에는 물가의 갈대와 그 밑에서 노니는 기러기 한 쌍이,

다른 면에는 수양버들 아래 쉬고 있는 원앙 한 쌍이 새겨져 있다.

굽다리 주변의 갈대나 버드나무가 서 있는 곳이 물가이므로

그 윗부분의 몸체를 수면으로 볼 수 있다.

병목 둘레에 여의두문대(如意頭文帶)가 돌려져 있고

어깨쯤에 붙은 병입의 뚜껑 둘레에는 뇌문(雷文)띠가 양각되었다.

병 목 중간에 있는 넓은 마디의 천부(天部)는 안쪽 둘레와 바깥쪽 둘레로 나누어

안쪽 둘레의 사방에 구름무늬(雲文)를, 바깥쪽 둘레에는 덩굴무늬(唐草文帶)를 돌렸다.

 

병 목 중간 마디에 수직으로 물을 따르는 주구가 세워져 있는데, 6각으로 모서리를 깎아냈다.

굽다리는 밖으로 약간 퍼져서 안정된 자세를 보인다.

유약의 색깔은 맑은 담청색 계통, 대체로 고르게 입혀져 있고 전면에 그물꼴의 빙렬(氷裂)이 있다.

고려시대에 널리 제작되던 청동정병(靑銅淨甁)과 형태와 곡선이 매우 닮아 있는

전형적인 청자정병으로 비스듬히 음각하여 양각의 효과를 보고 있는 12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이와 같은 청자편(靑磁片)이 전북 부안군 유천리(柳川里)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沙堂里) 가마터에서 출토된 바 있어

제작지를 알려 주고 있다.

 

 

 

 

 

 

 

 

 

 

 

 

 

 정병(淨甁)

불전에 올릴 깨끗한 물을 담는 병

 

 

마음 속 번뇌 씻으려는 서원 상징

관세음, 대세지보살, 범천 등의 ‘삼매야형’

경주 석굴암 범천상 정병이 대표적 사례

팔상도 가운데 수하항마상에도 정병 등장

열대 청결용 물병서 유래… 예술작품 승화

 

 

정병은 이름 그대로 정화용(淨化用) 물을 담아 두는 병,

또는 의식 장소를 청정도량으로 조성키 위해 물을 뿌릴 때 사용하는 물병이다. 인도를 비롯한

남방 열대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kundika(쿤디카), 또는 kendi(캔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 등으로 불리는 정병은 향로와 더불어 공양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에서의 정병은 브라만과 시바에 대한 경건한 마음의 상징으로 간주되며,

불교에서는 범천, 천수관음, 수월관음, 대세지보살의 지물 혹은 도상(圖像)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쿤디카 혹은 캔디는 원래 열대지방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물병으로

와기(瓦器) 또는 자기(磁器)로 만들어졌다.

입수구와 출수구가 분리되어 있는 이 병의 당초 제작 목적은

더운 낮에도 물을 시원한 상태로 보관하려는 데 있다.

인도네시아 서(西) 자바섬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달걀을 깨뜨리는 의례 다음으로

쿤디카의 물로 신랑 발을 씻어주는 청결 의식을 행한다고 하며,

발리에서는 지금도 두통치료를 위해 코 속으로 물을 붓기 위한 약병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불교적 의미의 정병에 관한 기록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대당서역기>등에서 발견된다.

<남해기귀내법전>은 당나라 의정(義淨, A.D.635-713) 스님이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에 시리불서국(尸利佛逝國), 즉 오늘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 머물 때

순례했던 나라들에 대한 견문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수유이병(水有二甁)’ 조(條)에 정병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개 물은 정(淨)과 촉(觸)으로 나누어 사용하며, 따라서 병은 두 개다.

정병은 와기(瓦器)나 자기(瓷器)로 만들고, 촉병은 동과 철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정병은 수시 음용(飮用)으로 사용하며, 촉병은 편리한 대로 쓰인다.

정병은 깨끗한 장소에 보관하지만 촉병은 손에 잡기 쉬운 장소에 놓아두고 함부로 사용한다.

정병의 물은 아무 때나 마셔도 되지만 촉병의 물은 그렇지 않다.”

 

정병의 모양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병 꼭대기에 두 손가락 길이의 뾰쪽한 대(尖臺)가 있다.

그 속에 구리 젓가락 굵기의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이를 통해 물을 마실 수 있다.

옆쪽에 별도의 둥근 구멍이 나있으며, 크기는 대략 동전만하다.

물을 채울 때 이곳을 이용하며, 약 2-3되 정도의 물을 넣을 수 있다.

벌레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을 덮어두거나 대나무 또는 나뭇잎 등으로 틀어막는다”

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용법에 대해서는

“물을 채울 때는 반드시 병 속의 먼지나 더러운 것을 씻어낸 다음에 새 물을 채워야 한다.

병에 남은 물을 버릴 때는 옆 주둥이 쪽을 기울이면 물이 흘러나와 흩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당나라 현장스님(602-664)은 인도 방문길에 갠지스 강 남쪽의 우렌(Uren)산 불적을 찾아갔을 때

부처님이 정병을 놓아두었던 흔적을 보았다는 내용이〈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용인 즉, 정병 자국의 깊이가 1촌 남짓이고 여덟 개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했으며,

권10의 각주(脚註)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군지(軍持)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고

군치가(稚迦)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밀교에서는 칼, 창, 약합(藥盒), 석장 등 세속적인 기물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불. 보살이나 신중의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삼매야형이란 부처와 보살의 존격(尊格)이나 내적 깨달음의 내용, 서원, 공덕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범천 등의 삼매야형이 바로 정병이다.  

 

 

석굴암(국보 제24호) 범천상의 정병, 통일신라

 

범천의 삼매야형(三昧耶形)을 나타낸 대표적인 사례로 경주 석굴암 범천상의 정병이 있다.

범천은 ‘범마(梵摩), 범람마(梵覽摩)’라고도 하며,

원래는 힌두교의 신이었으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신중이다.

경전에서는 범천이 거울, 연꽃, 정병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석굴암 범천상처럼 정병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석굴암 범천상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데,

정병의 어깨 부분에 입수(入水) 꼭지가 붙어 있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석굴암(국보 제24호) 십일면관음보살상의 정병, 통일신라

 

보살이 정병을 든 작례를 살펴보면,

석굴암 본존불 뒤 벽의 십일면관음보살,

무량사 소조아미타삼존불상의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정병이 나타나 있고,

경주 배동 삼존석불입상의 좌협시, 경주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좌협시 관음보살,

함안 대산리 석불의 우협시보살,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의 경주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 등에서도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보살의 삼매야형을 볼 수 있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 나타나는 정병

 

그림의 경우에는 고려의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일본 센소사 소장)’를 비롯한

수월관음도 계통의 불화에서 보살이 정병을 들고 있거나,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는 정병이 보살 앞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 중의 하나인 수하항마상에도 정병이 등장하고 있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는 마왕 파순과 그의 군대가

석존 앞에 놓인 물병을 밧줄로 감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물병이 바로 정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정병 유물은 형태상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긴 목을 가진 비교적 단순한 병의 형태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통의 한쪽 어깨에 꼬부라진 깔때기 모양의 입수구(入水口)가 달려 있고,

병의 위쪽에 긴 목과 대롱을 닮은 첨대(尖臺)와 환대(還臺, 첨대와 목 사이의 뚜껑처럼 생긴 마디)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보통 병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어깨 부분이 넓고 풍만하면서

주둥이가 넓게 벌어져 있는 점이 일반적인 병과 다르다.

첨대와 입수구를 갖춘 정병은 우리나라 전통공예 미술의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동제 정병 중에는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과 조형미를 자랑하는 걸작들이 많다.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 /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의 포류수금문 부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가 37.5㎝ 정도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이 정병은

첨대, 긴 목, 몸체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깨에 뚜껑 달린 작은 깔때기 모양의 입수구가 달려 있다.

특히 첨대와 목을 연결하는 환대 부분과 입수구의 뚜껑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 환대에는 은판(銀板)을 투각하는 높은 금속 세공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첨대 아래쪽 부분에는 풀잎무늬가, 목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몸체에는 주문양인 포류수금문이 몸체를 돌아가며 대칭적인 구도로 시문되어 있다.

물가에 낚시꾼이 앉아 있고, 수면에는 배와 오리가 한가로이 떠돌고,

하늘에는 기러기 떼가 허공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자연계 모습을 담은 이 정병은

형태미, 문양표현의 격조, 은입사기술법과 금속투각기술의 수준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높이 37.0×밑지름 8.9㎝, 고려, 간송미술관 소장.

 

또 하나 주목되는 정병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이다.

고려 전기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 정도의 크기인 이 작품은

청아한 담녹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기법으로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한 쌍을 회화적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8각으로 기품 있게 만들어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물을 넣는 아가리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는데, 원래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몸에

상감무늬를 곁들여 장식효과를 한층 더 높인 이 청자 정병은

초기 상감청자 정병 중에서는 가장 정제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허 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 <사찰 100美 100選> 下, 2007년, p45-50, 불교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