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세종로의 이순신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Gijuzzang Dream 2009. 2. 1. 07:19

 

 

 

 

 

 세종로 - 이순신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세종로는 우리역사의 중심도로이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곳도 세종로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이룩한 월드컵대표팀이 카퍼레이드의 종착지로 삼은 곳도 세종로다.

건물만 보아도 ‘과거권력’을 상징하는 경복궁,

‘현재권력’을 상징하는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가 지척이다.

 

이런 역사의 중심도로 한복판에 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걸까?
처음부터 이순신장군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순신 장군동상 자리에 이승만 본인의 동상을 세웠다.
4.19 혁명이후에는 세종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종대왕 동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문약한 세종대왕 동상을 철거하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종로에 세워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세종대왕 동상도 빨리빨리?

 


 

고려대 앞의 한 중국음식점은 문간에 들어서면서 음식을 주문하면, 식탁에 앉을 때쯤 음식을 가져다 준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조급증에 화답할 줄 아는 그 음식점은 장사가 잘 된다.

한국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빨리빨리’라고 한다. 우습지만 당연해 보인다.

일단 단어를 자주 듣게 되고 그러다 보니 쉬 익숙해질 것이다.

더욱이 많은 외국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빨리빨리’ 증후군에 살짝 전염되는지 모른다.

어느 TV 광고의 카피가 우리의 ‘빨리빨리’ 조급증을 칭찬하고 나섰다.

“…… 우리가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면 디지털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며

‘빨리빨리’를 부추긴다.
광고 카피는 논리의 단순화를 무릅쓰고라도 귀에 쏙쏙 꽂히는 명료한 말을 골라 쓴다.

그래서 이 카피 문구는 얼핏 들으면 맞는 듯 들린다. 물론,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우리의 조급증이 인터넷과 휴대폰의 그 재빠른 속도감과 잘 어울려

이 부문의 기술력을 업데이트시키는 데 촉매로 작용했으리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강국의 필요 충분조건이 조급증만이 아닌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서울을 ‘맑고 매력 있는 세계도시’로 만들겠다고 팔을 걷어 붙인 서울시가

그 방안 중의 하나로 추진 중인 광화문광장 조성이 결국은 ‘빨리빨리’ 조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가 세종로 일대를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처럼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발표를 처음 한 것은

2년 전인 2006년 말이다. 그런데 서울시는 불과 2년6개월 만인 올 7월에 광장 조성을 완성한다.

“…… 우리가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면 광화문광장이 올해 안에,

오세훈 시장 임기 안에 조성되었을까요? ……”라는 카피가 나옴직하다.

물론, 서울시는 반론을 펼지 모른다. 광장 조성 계획을 발표하기 3개월 전부터 녹색공간 배치방안,

광장의 이름, 일본이 심은 은행나무 옮겨심기, 이순신 장군 동상 재배치 문제 등에 관하여

전문가들 ∙ 시민들의 여론을 듣고 관계기관인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치는 준비절차를 거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을 합쳐도 광장 조성에 채 3년이 걸리지 않았으니

오십 보, 백 보의 차이일 뿐 반론거리는 되지 못한다.

서울시는 이 광화문광장에 놓을 동상 문제도 급하게 진행 중이다.

최근에서야 ‘세종로’ 거리에 걸맞은 인물인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만들기로 확정하고

작가를 선정하는 한편, 동상의 위치와 형태도 논의하여

광장 조성이 완료되는 7월에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살아있는 인물의 밀랍인형을 그저 실물처럼 만드는 투소박물관의 밀랍인형 제작에도

6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시는 서울의 역사성, 경관성, 대표성을 상징하는 세종로 거리에 세워 놓을

세종 동상을 주문하고 완성하는 데 단지 6개월을 예정한다니, 참 조급하기도 하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세종로 한복판에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 이는

그 자신도 군인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시민들이 세워놓은 세종대왕 동상을 없애고

 1968년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웅변하기 위해

대한민국과 서울의 대표도로 세종로에 ‘상무’(尙武)의 인물을 턱 세워놓은 것이다.

서울시가 그런 역사적인 사실, 세종로가 갖는 상징성을 두루 감안하여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그대로 두고 세종의 동상을 더 세우기로 한 점에는 많은 이가 이해하고 찬동한다.

그러나 이왕이면 세종의 동상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만들기를 원한다.

‘빨리빨리’에 매달려 이순신 장군의 동상처럼 문제가 많은 동상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두고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었다.

용맹한 모습을 보여야 할 장군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장군은 오른손에 칼집을 들고 있으니 왼손잡이였는가 하는 논의를 일게 했으며,

얼굴이 현충사의 표준영정과 너무 다르다는 것들이었다.

21세기 이 시대에는 동상을 세우는 것 자체가 사실은 좀 이상하다.

파리의 나폴레옹 동상도, 런던 트라팔가의 넬슨 동상도 영웅 숭배주의를 부추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세종대왕의 동상 역할도 결국 비슷할 것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조각작품이 예술성에 치중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많은 시민이 ‘세종로’의 상징이미지로 두 인물의 동상을 꼽는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는 세종대왕의 동상을 만들기로 확정했다.

이제 남은 일은 문제가 없고 예술성까지 갖춘 제대로의 동상을 만들어 새우는 일이다.

그러려면 서울시는 올 7월까지 완성한다는 ‘빨리빨리’를 벗어버려야 한다.

‘임기 안’ 강박증을 벗어 버려야 한다.

- 박금자 편집위원실장

2009-01-30 inthepark@newsis.com [세상읽기]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

 

 

이순신 동상과의 대화… 김남조 시인에게 듣다

 

"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 이정도면 문화유산"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조각가 故 김세중씨 아내 김남조 시인.

"철거 얘기 나올 때마다 불편…

시민들이 동상 지켜준 셈 칼ㆍ갑옷 고증 거쳤고 길이는 비례 고려한 예술작 표현"

 

 

 장군과의 대화

 

미문(美文)의 소설가 김훈씨가 한때 일간지 사회부기자를 했지요.

모든 대형사건에 투입됐던 저는 그를 만날 날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언론계 선배지만 경쟁이 벌어지면 한방에 보내 버리겠다"며 날이 시퍼렇게 서있던 시절입니다.

200자 원고지 4~5장짜리 박스로 승부할 때는 김씨 아니라 헤밍웨이나 톨스토이가 와도

사건기자를 당할 수 없지요. 2002년 4월 중국 민항기가 추락한 현장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보고 저는 웃고 말았지만 그의 글에 감복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설 <칼의 노래>였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단문(短文)이 그 어떤 화려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책이지요.

장인(匠人)의 손으로 매끈하게 떠놓은 생선회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책을 며칠 전 다시 꺼내 읽으며 우리에게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그의 인생은 또 얼마나 처연합니까.

왕(王)과 왜적(倭敵)에게 동시에 미움받다 전장(戰場)에서 숨을 거뒀고

그의 아들은 일본도에 몸이 동강나고 말았지요.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40년째지요.

결국 새로 생길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도 함께 세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정도전 동상도 세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럼 서울을 도읍으로 지목한 무학대사 동상 이야기는 왜 안 나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정도전이 조선의 개국공신이라면

오히려 태조 이성계 동상이나 태종 이방원 동상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입 달린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 세상입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나 역사학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입은 뭡니까.

다수당의 중진이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이순신 동상을 치우라고 툭툭 내뱉는 말을 보고

저런 이의 지갑을 채워주기 위해 세금을 내는 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보면서 재건축 아파트 용적률을 1000%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과거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표만 얻는다면 자기 부모도 팔아먹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주 Why?의 주인공은 이순신 동상을 만든 고 김세중의 아내 김남조 시인과 그의 가족입니다만

실제 주인공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40년 세월 그에게 쏟아진 억측과 비판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것은

김남조 시인과 가족의 몸을 빌린 장군일 것입니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는 전통이 없는가,

왜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 돼버렸는가를

독자 여러분들은 장군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을 겁니다.

- 문갑식 기획취재부장 gsmoon@chosun.com [Why][Why? 제작노트]

- 2009.01.31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은 지상에서 높이가 18m를 넘는 데다

차도로 둘러싸여 있어 정작 시민들이 보기 힘들다.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 도록에 장군의 확대된 얼굴 사진이 있다. 마치 남쪽의 일본을 향해 다시는 침략할 마음을 먹지 말라고 눈을 부라리는 듯하다.

▲ 오른쪽 사진은 폭설에 덮인 동상.(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생전에도 동상이 돼서도 풍설(風雪)을 겪는 장군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하다. 

 

 

19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동상(銅像)으로 환생했다.

일본의 기운이 너비 100m나 되는 뻥 뚫린 길을 타고 밀려 들어올 것을 걱정한다는 여론을 보고 받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한마디로 세종로에 세종이 아닌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게 됐다.

동상 건립은 애국선열조상(彫像)위원회와 서울신문이 주관했다.

동상은 노산 이은상(李殷相), 월탄 박종화(朴鍾和), 팔봉 김기진(金基鎭) 같은 원로의 의견이 반영됐다.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石宙善)의 고증을 받았다.


동상 제작은 서울대 미술대 교수 김세중(金世中 ·1928~1986)이 맡았다.

그는 종교조각 분야의 거장(巨匠)이었다. 그의 손길은 지금 절두산과 혜화동 성당의 조각에 남아 있다.

장충동 유관순 열사 동상, 파고다공원 3·1운동 기념부조도 그의 작품이다.


재단법인 김세중 기념사업회로 바뀐 서울 용산구 효창동 5-390 김세중의 집이

장군을 되살리는 작업실이었다.

김세중 작품집에는 장군의 동상과 함께 포즈를 취한 생전의 작가 모습이 남아 있다.

좌대를 포함해 높이 18.5m, 무게 8t인 장군의 동상은 작가의 집 천장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김세중의 이순신 동상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 장군 동상 가운데 절품(絶品)으로 평가된다.

그 걸작 때문에 그의 집안은 풍파를 겪었다. 도로 폭이 계획보다 더 넓어지면서

먼저 제작한 동상이 왜소하게 보이자 새로 만들까 말까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고민하던 작가는 결단을 내렸다. "처음 것을 부수고 다시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결단은 가족에겐 큰 빚으로 돌아왔다.

김세중의 아내인 원로 시인 김남조(金南祚 · 82)를 비롯한 4남매는

4남매는 그때의 불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생전의 장군은 왕(王)과 왜적(倭敵)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제는 장군의 동상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동상이 세워진 지 10년도 안 된 1971년부터 지금까지 말의 '비수(匕首)'가 날아들고 있다.

불세출의 애국자(愛國者)에 대한 질시는 4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비판은 이런 것들이었다.

"장군이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왼손잡이란 뜻인가? 그게 아니면 항장(降將)의 자세 아닌가?"

"왜 장군의 영정과 동상의 얼굴이 다른가" "장군의 시선이 앞을 보지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가"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은 일본도(日本刀)아닌가"….

 

2002년부터 광화문광장을 만든다는 이야기 뒤에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말이 후렴처럼 따라다녔다.

서울시는 최근 장군의 동상 뒤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도 "정도전 동상까지 세우자"는 입방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김세중의 아내인 시인 김남조는 40년 세월을 침묵하다 28일 기자에게 심정을 밝혔다.

이에 앞서 서울미대를 나온 아들 김범(金範 · 46)과

그의 아내이자 시아버지의 제자 유현미(柳賢美 · 45)도 입을 열었다.

3인을 통해 이순신 장군 동상의 진실을 추적한다.

▲ 김세중의 아들 김범과 며느리 유현미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서 있다.
위 작은 사진은 아내 김남조 시인. /이덕훈 기자

― 당시 동상 건립 붐이 일었지요.

"정치인들이 선열(先烈)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자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박 대통령이, 세종대왕상 건립비용은 김종필(金鍾泌)씨가 자비로 댄다는 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애국선열조상위원회가 발족했지요."

 

― 돈만 댄 겁니까, 관심도 보였습니까.

"박종화 · 김기진 · 이은상 · 김종필씨가 위원회 멤버였습니다.

그 분들이 동상을 만들 때 2차례 작업실을 찾았고 동상이 완성됐을 때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직접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 당대의 권력자들이 관심을 보였는데도 동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놀랍군요.

"처음 만든 것은 정부가 크기를 지정한 것입니다. 그 후 세종로가 예정보다 더 넓어졌습니다.

처음 것을 가져다 놔도 무방한데 김세중 교수(김 시인은 남편을 이렇게 불렀다)는

조각가로서의 욕심이 컸던 것 같아요. 공간 확장에 따라 동상 크기를 40% 더 크게 했습니다."

 

― 재정난을 어떻게 이겨냈나요.

"동상은 1m를 키우면 그 비용만큼 빚을 집니다.

제가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천주교에 입교할 때 대모(代母)였어요.

박 전 대표가 고교생 때입니다. 고(故) 육 여사 귀에 저희 사정이 들어갔어요.

그 분이 '나라 일을 하다 개인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느냐'고 했대요.

나중에 이후락(李厚洛)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연락해왔습니다.

'손해 본 실비(實費)만 이야기하라'고요."

 

― 효창동 집이 동상을 만들 만큼 컸나요?

"동상은 찰흙으로 본을 뜬 뒤 석고로 틀을 잡고 그 틀 안에 청동을 부어 완성합니다.

효창동 작업실 천정이 동상의 높이보다 낮아 마지막으로 동상의 투구 윗부분을 완성시킬 때는

반투명 플라스틱 슬레이트로 된 천장을 벗겨내고 작업했습니다.

지금 같은 도르래 달린 사다리가 없어 휘청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동상 가슴께까지 올라가 작업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 장군의 동상이 당시로는 대단한 규모였지요.

"청동 주물 만드는 법을 몰라 탄피(彈皮)를 주워 분석해보기도 했지요.

김 교수뿐 아니라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엄태정 · 윤석원씨도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동상은 통금(通禁)시간을 이용해 광화문으로 옮겼어요.

그만한 크기의 동상을 옮길 국내 최대의 기중기가 군부대에 딱 한 대 있었는데 그걸 이용했습니다."

 

― 장군 동상이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다는 걸 두고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었지요.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요?

"(이하 김범 · 유현미) 조각에서 수호자(守護者)들은 오른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책을 든다든지 횃불을 들고 있지요.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실존모델인 영국 글래스고의 윌리엄 월레스 동상이나

대천사(大天使) 미카엘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지만

칼자루를 거꾸로 들거나 지팡이처럼 땅에 짚고 있습니다.

동상에서는 오른손이 그 인물의 의지를 대변합니다."

 

― 동상의 얼굴이 이순신 장군을 닮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저는 김세중 선생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

 

― 동상의 얼굴이 너무 무섭게 생겼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상의 얼굴은 무인(武人)의 얼굴, 근엄한 장군의 얼굴, 수호자의 얼굴 이런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든든한 아버지지만 일본인들은 잘못하면 혼내줄 것 같은

무서운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 이순신 장군의 진영(眞影)이 사실은 없지요.

"장군의 풍모에 대한 기록이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징비록>에 있습니다.

'순신의 사람 된 품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가슴에 담력이 있어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행해온 소치라 하겠다'는 부분입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월전(月田) 장우성 화백의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게 1973년입니다."

 

―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 '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입니다."

 

― 한국을 대표하는 명장이 일본 칼을 들고 서 있는 건 조금….

"칼이 한국의 검이냐 일본도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칼자루에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이순신 장군의 장검(長劒)/ 보물 제326호

전장: 197cm/ 칼날 길이: 137cm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각각 ‘세 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한다.

크게 한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 칼의 크기는 실제보다 작고 갑옷은 너무 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중국 갑옷 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칼이나 갑옷의 길이는 비례를 고려한 예술적 표현이라고 봐야지요.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의 고증도 얻은 것입니다."

 

― 동상의 시선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김남조)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백화점 건물이 옛 국제극장이었지요.

'이순신 장군이 극장 프로가 뭔가 본다'는 우스개가 있었습니다.

상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국민들과 눈을 맞추려는 의도지요."

 

― 전국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100개다, 200개가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조사해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의 학교마다 하나씩은 있는데

왜 유독 김세중 선생 작품이 구설수에 오를까요.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살아 있을 때부터 모험적인 삶이었지요.

서영훈 선생 · 조향록 목사 · 권이혁 전 서울대총장 · 이옥란 박사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원로들의 모임이 있어요. 그 분들도 제게 동상을 둘러싼 소문들을 물은 적이 있어요.

자세히 이야기하니 '이제부터 우리는 바르게 답하겠다'고 하더군요."

 

김세중의 가족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동상에 친일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억측이다.

그 억측의 근거가 동상 건립을 지시한 고 박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왔기 때문이라는 설(說),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멤버 중 한 명이 일본과 친한 JP(김종필 · 金鍾泌)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나는 황국 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에서 기원했다는 말도 있다.

친일파를 고발한 이 책에 '이순신 동상을 만든 작가가 친일파'라는 부분이 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순신 동상=광화문 동상=김세중 작품'이라고 잘못된 연상을 한 것이다.

 

 

작가의 아들과 며느리와 나눈 대화다.

 

―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와 동상도 친일 성격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박 대통령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친일하려는 사람이 왜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상을 세웠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기부를 하다 구설수에 오른 문근영씨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문씨의 선행(善行)을 그의 가족사와 엮어 몰아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조각을 만들 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 사람이 있겠어요?"

 

― 친일작가 중에 이순신 동상을 만든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까?

"그 책에 등장한 분은 다른 지역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 분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출판사와 저자에게 항의해 관련된 부분이 모두 수정됐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읽은 사람들의 기억까지 바꿀 수는 없지요."

 

― 그런 일들을 당할 때 기분은 어떤가요.

"그 친일작가의 친척을 직업상 알게 됐는데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기 친척 작품이라고 해요.

김세중 도록을 보여줬는데도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더군요."

 

― 김세중 선생을 깎아내리는 데 미술계 인사도 포함돼 있지는 않았나요.

"한 조각가가 김세중의 동상이 내려질 때를 대비해 대체품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부모님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 김세중 선생이 대학시절 대단한 반일(反日)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김남조 시인의 집안도 그랬다지요?

"아버지가 대학 시절, 영화감독 김수용 선생과 함께 독립군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많이 했어요.

각본도 쓰고 연기도 하고. 아버지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 어머니 김남조시인 쪽 이야기는….

"조부(祖父)께서 한일합방 반대 운동을 하다 옥사(獄死)해서 멸문(滅門)될 뻔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절대 안 합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괴로운 기억은 덮어버리려 한다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 유명한 조각일수록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많지요.

"로뎅의 '칼레의 시민상'이나 '발자크상'도 건립 당시 난리가 났었지요.

왜 몸을 접고 있느냐, 망토를 들고 있느냐, 왜 표정을 찡그리고 있느냐는 시비가 일었어요.

어떤 형태를 만들든지 결과적으로 그 모습이 조형적이면 되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 가족으로서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균형 잡히고 아름답고 의지가 잘 표현된 작품입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자유롭고 안전한 느낌, 집안을 지켜주는 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면 일본사람들이 볼 때는 옆집 아버지인데 잘못하면 막 때리거나

자기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비쳐질 것 같아요."

 

― 한때 한 통신회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희화화(戱畵化)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희는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했어요.

그 광고를 보고 '저 정도면 막아야겠다' 싶어 저작권 등록을 했습니다.

그 광고 때문에 아이들이 통신회사 상품 이름을 따 '메가패스 장군'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어요.

 

― 저작권 등록료는 어디다 씁니까.

"많이 받지는 않습니다만 지금까지 들어온 금액은

독도(獨島)수호 운동을 하는 반크라는 단체에 기부했어요.

그 단체 홈페이지를 보니 이순신 장군 프로젝트라는 게 있는 걸 알았습니다.

대구의 정신대 할머니 돕는 모임에도 기부한 적이 있고요."

 

주가를 날리는 인기작가 김영하(金英夏)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말미에

'보물선'이라는 단편이 있다. 살짝 맛이 간 '형식'이라는 주인공이 충무공 동상 건립부터가

친일파의 음모라고 믿고 태극기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을 덮고 시위를 벌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보물선닷컴’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주가조작을 하다 망한 형식은 소설 뒷부분에서

결국 광산에서 훔친 다이너마이트로 충무공 동상을 폭파시켜버리고 만다.

형식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가운데 그가 여전히 지리산 일대를 돌며

일제가 박아놓았다는 쇠말뚝을 뽑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그 소설에 '이순신 얼굴이 실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얼굴이다'라는 부분이 등장했지요.

"솔직히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시달렸는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소설에 등장했으니까요.

그래도 문학 쪽 사람인데 그래도 같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 김남조 시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저희가 그 이야기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세대 차이는 나지만 같은 문학인이기도 하고요.

김영하씨의 다른 소설을 사서 다 읽어봤어요. 원래 파격적인 소재를 많이 발굴해 쓰는 작가더군요.

그런 발상도 문학적 상상력의 일종인데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 거지요."

 

―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지 이제 정확히 40년을 넘겼습니다.

이 정도면 문화유산이 아닌가요.

"세종로니까 세종대왕 동상, 충무로니까 이순신 장군 동상 하는 식(式)이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길에 맞춰서 동상을 세우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서울시나 정부에서 알아서 하는 것이지만

동상에 대해 너무 목적의식이 없고 소신이 없고 전문적이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정도 되면 사실 문화유산입니다. 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가 됐고

외국에서도 한국의 이미지를 그릴 때 이순신장군 동상이 많이 나옵니다.

그 좋은 이미지를 단숨에 없애서는 곤란한 것 아닐까요?"

 

― 동상 철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언짢겠지요.

"(이하 김남조)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인 2002년에

광화문광장 이야기가 나오면서 동상 철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처음 10행짜리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얼마 지나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장군의 동상은 그대로 두기로 했으니 걱정 말라'고 전해주더군요."

 

― 왜 그때마다 유족으로서 의견을 표하지 않았나요.

"가족은 작가의 그늘에 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시민들이 장군의 동상을 지켜준 셈이 됐지요. 인터넷에 글을 많이들 올렸어요.

철거하겠다는 안(案)에 많은 시민들이 반대했지요."

 

― 그래도 철거한다면요.

"이순신 장군 동상은 망가질 겁니다.

동상은 그대로겠지만 거북선이 있는 좌대는 해체 후 조립할 수 없는 공법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당시 조각 수준이 그만큼 미숙했어요. 철거하면 모작(模作)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걸 보니 부부 사이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당시 숙명여대 교수였고 김세중 교수는 서울대에 나갔어요.

서로 바빠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었어요. 둘 다 예술가였지만 실상은 노동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요즘도 동상을 가끔 봅니까?

"최근에 광택이 나도록 깨끗이 청소한 걸 보니 기분이 좋더군요."

 

― 괜찮으면 광화문에 나와 김세중 교수 작품과 함께 데이트 한번 하시지요.

"문학지에 내야 할 시의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했는데,

문 부장도 사진보다 기사 쓰는 데 열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 그래도….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국가적으로 큰 어른(이순신 장군)을

가족(남편 김세중 교수)과 연결시키는 겁니다."

- 문갑식 gsmoon@chosun.com

- 2009.01.31 조선,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국회 본청 정문 현관의 이순신장군 동상 

 

국회 본청의 정문 현관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실이

반대쪽에는 민주당의 원내대표실이 자리 잡고 있다. 기자들에게는 이른바 '노루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이 현관에 있다.

 

△국회 정문 현관

국회 본청의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본 것은 정신없이 국회 안을 돌아다니던

지난해 초였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허덕이던 때라 당시에는 동상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대선과 총선도 끝날 즈음 이순신 장군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역사를 좋아하는데다 검도에도 관심이 있던 터라 이순신 장군 동상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번, 두 번 관심있게 보는 사이 뭔가 어색한 게 눈에 걸렸다. 칼이었다.

칼을 쥔 모습이 일본검법의 방식과 같았다.


일본 검법의 기본인 '본'에서는

검(정확히 말하자면 날이 하나이므로 '도'(刀)가 맞다)의 날은 상하(上下) 기준으로는 '위'를,

전후(前後)로 따지자면 '뒤쪽'을 향하게 잡는다.

반면 본국검법이나 조선세법 같은 우리나라 전통검법에서는 날이 아래나 앞쪽을 향한다.

 


휴대하는 방법도 달라서 통상 일본무사들은 검을 허리 띠에 끼워서 찬다.

때문에 일본도에는 칼집이 허리 띠에 걸릴 수 있도록 칼집 윗쪽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끈을 이용해 허리에 칼을 찬다.

칼집에는 끈을 끼울 수 있도록 고리가 2개 달려 있다.

 

△안릉신영도의 환도 패용 장면

이런 점에서 국회 현관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그래서 몇 번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검도할 때 배운 상식이 전부였던 터라 문제제기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달 초에야 시간도 나고 호기심도 발동해 전문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간의 확인 끝에 전문가로부터 동상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는 회신을 받았다.

기사를 쓰기로 결정이 난 뒤 참고도 할 겸

예전에 문제가 됐던 광화문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 관련 기사를 찾아봤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다는 것'과 '갑옷이 중국식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칼 자체가 일본 칼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본 결과, 국회 동상도 중국식 갑옷으로 판명이 났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한 벌로 이뤄진 포형(袍形)갑옷이다.

반면 중국식 갑옷은 어깨, 몸통, 하체 보호대가 각각 분리된 피박(披膊)형 갑옷이다.

(피박(披膊)은 어깨, 신갑(身甲)은 몸통, 갑상(甲裳)은 하체를 보호한다)


△국회 정문 현관 동상 (중국식 갑옷)      △아산시 동상 (조선식 갑옷)

칼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글에서 '검'라고 표현된 칼들은 정확히 말하면 '도'(刀)가 맞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칼'과 '검'이 같은 단어로 혼용되는 점을 고려해 그냥 '검'이라고 썼다.

사전적 의미로 '칼'이라는 단어는 양날인 '검'(劍)과 한날인 '도'(刀)에 양쪽에 모두 쓰인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 때 모델이 된 검은

'태귀연', '이무생' 두 장인이 만든 장검(보물 제326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이 검을 들고 있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이 검은 당시 파괴력과 살상력에서 앞섰던 일본도의 형태를 차용해 만든 일본식 쌍수도(雙手刀)로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 사용했던 검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썼던 검은 조선의 환도인 '쌍룡검'이었다.

 

 

△이순신 장군 장검(長劍) - 보물 326호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 쌍룡검 (조선미술대관)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동상에 담는다면 

포형식 갑옷을 입고 허리에 환도를 찬 모습이 가장 역사적 고증에 부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광화문이나 국회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잘못 제작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동상이 세워질 6, 70년대 당시에는 관련 연구자가 거의 없었고 

이런 이유로 제대로 된 자문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조선시대 무기와 관련된 전문가는

전쟁기념관의 박재광 학예연구관을 비롯해 단 몇 명에 불과하다.

민간인의 접근이 제한된 무기 분야인데다 실제 유물을 보면서 연구할 수 있는 곳도

'전쟁기념관'이나 '육군박물관' 같은 곳을 제외하면 찾기 힘들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지난 1973년 국회에 설치됐다.

한국의 무인을 대표하는 이순신 장군이 중국식 갑옷을 입고 일본 무사처럼 칼을 쥔 채

30년 넘게 서 있는 셈이다.

국회 정문 현관은 중국, 일본은 물론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30년동안 우리도 모르고 지나쳤으니 그들도 그냥 지나쳤길,

또 앞으로도 그렇게 지나치길 바라야 하는가?

- 2008-10-28, 남승모 SBS기자 smnam@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