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우현 고유섭先生

Gijuzzang Dream 2009. 1. 16. 12:13

 

 

 

 

 

 

 우현 고유섭 先生

 몸과 마음으로 세워낸 우리 문화재의 체계

 

최근 들어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의 전집이 다시 한 권씩 차례로 나오고 있다.

이번에는 그동안 간행되었던 여섯 권의 책뿐 아니라

등사본으로만 소개되었던 글, 미발표 유고까지 포함하여 열 권으로 기획되어 나오리라 한다.
고유섭 선생의 글 전모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의 생애


“자네, 집안에 먹을 것이 넉넉한가?”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이 조선미술사를 연구하겠다고 했더니

경성제대 미학미술사 전공의 담임교수가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고유섭 선생과 일본인 해서 단 두 명만이 미학미술사를 전공했다고 하니

“미학이나 미술사는 취직하기도 어려우니 앞날을 잘 생각하라”는 교수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러나 고유섭 선생은 그런 조언을 듣고도

소학시대부터의 꿈이었던 조선미술사 출현에 대한 바람을 접지 않고 그 자신이 몸소 실천에 옮겼다.

우리가 한국미술사의 체계를 통해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이 아닐까.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 학생으로서 3년, 미학미술사 연구실 조수로 3년,

그리고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서른아홉의 나이에 간경화로 돌아가시기까지 11년.

고유섭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연구하고 지키고자 했던 기간은

어찌 보면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생을 일 분 일 초도 남김없이 바쳐 우리 미술품과 문화재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연구가 우리 미술사와 문화재 연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진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치열함으로 삶을 채웠기 때문에

우현(又玄) 선생의 생애가 고작 서른아홉 해로 매듭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일제시대의 박물관은 경성의 이왕가 박물관과 총독부 박물관,

지방에는 경주, 평양, 부여와 개성에 박물관이 있었고,

사설로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여 지금의 간송 미술관이 된

보화각이 있었다.

공공 박물관의 관장은 모두 일본인이었지만, 개성 사람들은 조선인만을 관장으로 고집했기에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 선생 이상의 적임자는 달리 없었을 것이다.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겨우 대학원

과정 정도를 마친 스물여덟의 청년이었다.
고려의 옛 수도 개성의 박물관장으로서 그는

개성박물관이 다만 지나간 역사 유물을 늘어놓는 진열장이 아니라,

개성 사람들의 역사적인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

고려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 되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개성박물관의 중요 전시품은

바로 고려인의 감성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는 박물관을 탐방한 조선일보 기자에게 박물관을 안내하면서

고려자기의 섬세하고 치밀함이 고려의 정서와 정신을 보여주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때 기자에게 한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아마도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그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게 천 수백 년 간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남모르게 비바람 가운데 헐리고 있었다 하는 옛날의 그림 또는 석물(石物) 등에 그려지거나

또는 새겨진 한 점 한 획, 거기에 흘러 있는 옛사람의 정신을 찾아볼 때

그 줄기의 굴곡-변천은 오늘에까지 잇대어 있는 것이 뚜렷하여

우리는 이를 연구할수록 옛것에서 무궁무진한 새로운 맛을 다시 찾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사학자’로 불리는 고유섭


그의 문화재 지킴을 위한 노력은 박물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인 이점옥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틈만 나면 개성 근교의 유적지를 찾아 답사를 떠났다.

‘개성 3 제자’의 한 사람인 황수영 선생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다녔던 답사로부터 무언의 가르침을 얻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려의 왕궁 만월대(滿月臺), 국찰(國刹)이었던 흥왕사(興王寺) 터,

장대한 비가 있는 현화사(玄化寺) 터 등 우현 선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문헌에 나오는 장소들은 천 년이 지난 이제 와서는 한갓 폐허일 따름이지만,

선생은 그 답사로부터 고려의 수도 개성의 모습을 상상하여 복원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현지에 남아 있는 석탑, 비석, 잡초에 파묻힌 주춧돌 들이었다.

이렇게 찾아낸 역사유적 이야기를 격주간으로 나오던 『고려시보(高麗時報)』에

여섯 해가 넘게 연재한 것이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넘었고,

그것이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이 『송도고적(松都古蹟)』이다.


선생의 답사 여정이 개성에 한정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선생은 남쪽 경주 인근의 문무왕이 잠든 대왕암 앞바다에서부터,

북쪽으로는 고구려 국내성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 유적들을 몸소 답사하여

우리 문화재의 현상을 살피고 사진으로, 글로 기록하였다.

수필집 『전별의 병(餞別의 甁)』에 실린 유명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나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에 실린 「

고구려 고도 국내성 유관기(高句麗 古都 國內城 遊觀記)」 같은 글은

선생의 발품에서 나온 작은 소품들이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의 하나인 『조선탑파의 연구』와 같은 성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세운 우리나라 탑의 양식변천의 줄기는

전남 화순의 ‘천불천탑동(千佛千塔洞)’으로 알려진 운주사 다탑봉 군에 있는 무너진 석탑에서부터,

이제는 북한 지역인 영변 보현사의 팔각십삼층 석탑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 국토를 박물관 삼아 문화재와 유적지를 찾아다닌 노력의 결실이었다.

 


“나의 오직 하나의 소원은 한국미술사의 완성”


그의 우리 문화재 탐색은 밖에 널린 것에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문화를 폄하하는 데에 기울어 있던 당시의 인식을 뒤집기라도 할 듯,

선생은 조선시대의 정서의 집약인 서화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하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과 같이 이미 우리 그림의 산맥을 이룬 화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안견(安堅), 강희안(姜希顔), 윤두서(尹斗緖) 같은 화가들에 대한 글을 써,

조선시대 회화의 중심을 잡고자 했다. 또 이러한 서화가 나올 수 있는 사고의 바탕을 알 수 있도록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집에서 서화론을 찾아내 정리했다.

 조선시대 서화론의 정리는 그가 경성제대에서 미학미술사 연구실에 근무할 때부터

규장각(奎章閣)에 있는 고서들을 찾아서 하던 일이었는데,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해 가면서 더는 그 자료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부터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에 매주 한 차례씩 강의를 나오게 되자, 그는 강의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늘 경성제대에 들려 규장각에서 문집들을 빌려가 작업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백 권이 넘는 문집에서 서화론을 가려 뽑아 정리해 낸 것이

뒤에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으로 간행되어 나온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감식안의 정리 체계를 집대성해 펴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성과를 이으면서도,

서화가들의 인명사전을 넘어서 조선시대 문인들의 서화론을 알 수 있는 자료집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조선시대 미술문화의 근저(根底)가 되는

문인 서화가들의 서화론을 정리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문화의 복원이기도 하며

식민지가 되어 버린 백성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불과 10년 여의 연구 기간 동안 선생이 쓰신 논문은 수백 편에 이른다.

그 가운데 선생의 생전에 간행되어 나온 책은 일본어로 된 『조선의 청자(朝鮮の靑瓷)』한 권뿐이다.

다른 책들은,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초여름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뒤에

그의 뜻을 이은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 세 분의 제자들이 힘을 모아 하나하나 간행해 낸 것이다.

선생의 유고(遺稿) 가운데에는 미처 완성되지 못해서 책으로 펴내지 못한 글도 많다.

그가 말년까지 간직했지만 끝내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미술사」의 초고도 그런 글의 하나이다.

 

우현 선생이 조선미술사를 써내고자 하는 염원의 바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미술사를 다만 우리 미술의 역사를 쓴다는 의미로 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세키노(關野貞)가 세운, 타율적인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미술사도 아니고,

야나기(柳宗悅)가 본 것처럼 한(恨)이 서린 미술사도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은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 주체적인 미술사를 쓰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본 우리 미술사를 세우는 것은 우리 문화재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우리 문화재의 줏대를 세움으로써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선구자였다.

목수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