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명문종가, 고택(古宅)의 제례와 음식문화

Gijuzzang Dream 2009. 1. 14. 19:37

 

 

 

 

 

 진정한 명문가에 대물림 되어 온 위대한 유산

 

  

  

  

‘5백리 조선을 살린 것은 청백리 정신이다’ 혹자는 조선 5백년을 청백리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조선의 명문가들이 5백년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 또한

물질적인 바탕이 아닌 ‘자긍심’이라는 정신적인 바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비길 데 없는 겸손함을 보였고, 결코 명성이나 부, 권력 등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부와 명예가 아닌, 정신을 물려주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가문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5백년 된 은행나무가 자라는 전통의 명문가

 


전남 해남 연동리에 있는 고산 윤선도 종가인 녹우당에 가면

제일 먼저 5백년 된 은행나무 네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이 은행나무는

윤선도(1587~1671)의 고조부인 윤효정이 세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자 이를 기념해 심었다고 한다. 

 

 해남윤선도 고택인 녹우당(사적 제167호)입구 은행나무

400여 년 전 윤효정이 세 아들의 과거합격을 기념해서 심었다.

현재는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씨가 후손과 함게 살고 있다.

 

현재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종손이 거주하는 몇 안 되는 고택이다.

특히 녹우당 뒷산으로 통하는 돌담길은 고즈넉한 전통미를 만끽할 수 있다.

윤씨는 한때 연세대를 나와 서울에서 독일인과 합작사를 세워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30대 초반에 녹우당에 내려와 2남 2녀를 키우며 40여 년을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윤씨의 삶에서 4백년을 내려오는 고산 가의 전통을 만나게 된다.

 

윤씨는 의학과 천문학 등 당시에 천시했던 실용적인 학문을 앞서 공부했던 고산처럼

지금도 그의 실용정신을 앞장서 실천하고 있다. 종가도 우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윤씨는 인근 덕음산에서 다산 정약용이 산에 심어두었다던 차나무 종자를 얻어

5만여 평의 다원(차밭)을 조성했다. 차를 재배하면서 그는 ‘해남다인회’라는 다도회를 만들었다.

차와 관련한 수많은 서적을 사들인 덕에 해남의 다인회 사무실은 ‘다도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매년 2천여 명의 전국 다인들이 이곳 녹우당에 모여 차문화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열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

 

고산 家는 특별한 경제적인 수입이 없는 다른 명문 종가들과 달리 한결 여유가 있다.

이게 다름 아닌 고산의 실용정신의 대물림이 아닐까.

정쟁에 휩쓸려 14년 7개월을 유배지에서 보낸 고산 윤선도는 죽음을 앞두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인연이 닿아서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탓에 윤선도가 작고한 이후 고산가는 가능한 권력을 멀리했다고 한다.

이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에 이어 그의 아들 윤덕희, 다시 그의 아들 윤용 등 3대에 걸쳐

문인화가를 배출하게 된 숨은 이유가 됐다. 문인화가의 길은 일반 사대부들이 가는 길이 아니었지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고산 家는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갔다.

 


고산이 후손들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

 

“대대로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하고 유학과 경제, 지리, 의학, 음악 등에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당시 엄격한 양반질서에서 잡학이라고 천시하는 의학, 천문학, 점성학 등을 대대로 공부했어요.

고산과 같은 대학자이자 시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3대째 화가가 나온 것인데,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화가가 되는 경우는 정치적 이유로 과거를 볼 수 없거나

과거에 떨어져 벼슬길에 오르지 못할 경우 하는 천한 일이었어요.

달리 말하면 과거에 낙방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할 때 붓을 들었던 거죠.

그런데도 고산의 후손들은 스스로 화가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종손 윤형식씨의 말처럼 고산가의 실용 중시 가풍은 조선의 양반사회에서는

돌연변이와 같은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명문가의 명성을 훌훌 털어버리려고 벼슬과는 담을 쌓고 ‘마이웨이’를 선택한 격이다.

지금은 서양화가로 활동 중인 윤형식의 장녀 윤보숙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고산 家에는 수많은 중국 서적들이 있는데 조선후기에는 시서화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풍수지리학, 의학, 천문학, 병가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접할 수 있는

‘잡학도서관’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공재 윤두서가 그림을 공부하는 데 교본으로 이용한 ‘고씨화보(顧氏畵譜)’를 비롯해

고문서들 중 상당수가 중국 서적이다. 이는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으로 이어졌다.

고산은 74세 때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에서

큰아들 인미에게 가훈이 적힌 ‘기대아서(寄大兒書)’라는 글을 보냈다.

'기대아서'는 고산이 해남 윤씨가의 가훈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기대아서'에는 종가관리, 재산분배, 노비관리, 검소한 생활과 예절 등에 관해 8개 항목에 걸쳐

후손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산은 이 글에서 특히 의복이나 안장, 말 등 몸을 치장하는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라, 다른 사대부들이 흔히 하듯이 망아지를 길러서 이득을 보려하지 말아라

등등 검소한 생활을 거듭 당부하고 있다.

 


과연 명문가다운 명망과 학식


명문가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명문가는 변증법적이고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명가의 지위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상당한 재산가의 반열에 오르고

이어 이러한 ‘물질적 부’를 바탕으로 지역주민들에게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면서 신망을 얻게 된다.

이어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큰 인물이 나오면서 한 가문의 ‘정신적 부’를 이룬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합쳐져 지속적으로 자긍심 높은 가문과 인물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를 대대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물질)-반(정신)-합(물질과 정신의 총합)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산 家의 경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상속재산으로 거부가 된 윤효정에 이어 그의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했고,

이어 그의 고손인 고산 윤선도는 명문가로 위상을 드높였다.

특히 거부가 된 윤효정은 먼저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윤효정을 비롯해 해남윤씨家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근검과 함께 적선은 녹우당에서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1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가훈이다.

 

윤효정에 이어 고산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면서

호남의 명문가이자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했던 것이다.

고산 家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의 학문적인 취향이 오랜 세대에 걸쳐 지속되면

가학의 전통으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대로 수집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에게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향기로 작용한다.

이 향기는 가문 구성원들에게 절제심과 자긍심을 높여주는 촉매제가 된다.

지속적인 명가의 재생산은 자긍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제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안 된다.

이웃들로부터 신망을 얻어야 한다. 자녀교육을 통해 인물을 배출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적어도 이러한 기본조건을 충족시킬 때 명가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자녀교육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백년 전 경영학을 가르쳤던 신지식인 가문

 

우리나라에는 이미 4백년 전에 자녀교육을 위해 문중차원에서 ‘종학당’이라는 학교를 만든 가문이 있다.

다름 아닌 조선 최고의 백의정승으로 이름난 명재 윤증(1629-1724) 家이다.

명재 윤증은 명분이 앞선 조선의 정치현실에서도 실리를 추구한 인물로 선비정신을 상징한다.

우의정을 제수 받고 올린 사임 상소가 18번이고,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가 9번이다.

윤증이 사직상소를 올리면 왕은 승지를 보내거나 사관을 보내며 그를 불렀지만

명재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백의정승’으로 불리었다.

 

명재 家는 다른 어떤 명문가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실용적인 가풍을 지녀 특히 주목받고 있다.

특히 4백년 전에 지금의 경영학에 해당하는 과목을 가르쳤다.

종학당의 교육 체계에 따르면 “재화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일(理財)”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이것은 곧 경영학인 셈이다.

돈을 관리하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당시 분위기로 보아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재를 가르친 것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했다.

그가 살던 17세기는 병자호란으로 피폐했던 시대로

당시 조선에서 가장 절실한 실용주의 정신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종학당은 내(內) · 외(外) · 처가(妻家) 등 3족 자제들을 모아 합숙 훈육한 교육기관이다.

10세 아이부터 과거를 보는 청소년들까지 연령과 학문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교육 과정을 보면 초중고에서 대학과정, 나아가 고시준비까지 포함하는 규모였다.

여기서 모두 42명의 과거합격자가 나왔다.   

 

종학당은 교칙이 엄격했다.

여기에는 일용(日用, 하루에 할 일), 야매(夜寐, 밤에 잠자는 것), 지신(持身, 몸가짐의 방법),

사물(四勿,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독서지서(讀書之序, 독서의 순서), 독서지법(讀書之法, 독서의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 부모의 처소에 가서 안부를 여쭈어야 한다.

밤에는 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고 밤에 잘 때에는 부모님께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다.

요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한국화의 뿌리를 지켜온 아름다운 명문가

 

대대로 존경받는 명문가의 필수요소는 지속적인 인재의 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해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것도 한 방편이지만, 가학이나 가업을 계승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5대째 화통을 이어오고 있는 소치 허련 家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진도의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1808~1893)의 생가인데, 한국화의 뿌리가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허련은 헌종 때의 화가로 조선후기 전통문인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운 인물.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될 당시에도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소치는 녹우당에 기거하며 ‘공재화첩(恭齋畵帖)’을 보고 독학으로 그림 수업을 시작했다.

33세 때에는 녹우당 인근에 위치한 대둔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인연은 인연을 낳아 초의선사는 그의 재능을 아껴 추사 김정희에게 소개하게 된 것이다.

소치의 화통(畵脈)은 그의 아들 허형으로 이어졌고,

그의 아들인 남농 허건-허림-허문을 거쳐 남농의 손자 허진(전남대 미대 교수)으로 현재 이어지고 있다.

5대째 2백년 동안 당대의 화가를 배출해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강할 경우 가족의 정에 이끌려 분별력을 잃을 수 있지만,

소치 家에는 이러한 틈을 허용하지 않은 냉철한 혜안이 있었다.

후계를 뽑는 대물림의 과정은 핏줄의 정을 훨씬 뛰어넘는 엄격한 것이었다.

허진은 5대째 화가로 내려올 수 있었던 비결로

“붓(畵) 재주 하나로는 결코 화가로 이름을 남길 생각을 말라”는 소치의 가르침을 꼽았다.

바로 ‘냉정한 대물림’이다. 

 

소치는 큰아들(허은)이 성격도 깐깐하려니와 글공부를 착실히 하고 붓솜씨도 있어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자기의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4남(미산)이 그린 묵모란을 처음 본 소치는 붓솜씨는 놀랍지만 글공부가 너무 얕아

결코 성가(成家)하지는 못할 것으로 헤아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순태 <毅齋 許百鍊>에서)

하지만 기대했던 큰아들은 18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큰아들이 세상을 뜨자, 소치는 넷째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요절한 큰아들 은의 호가 미산(米山)이었던 것을 넷째 아들에게 붙여 불렀다.

그때부터 죽은 큰아들은 큰 미산, 넷째아들은 작은 미산, 혹은 후미산(後米山)이라고 불렀다.

 

소치는 후미산에게라도 자기의 화통을 잇게 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 공부를 시켰으나

후미산은 끝내 아버지가 바라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남농은 전통 한국화를 대표하는데 그 아들이 화가의 길을 포기해 결국 조카들이 이었다.

다행히 그의 손자인 허진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남농은 아들이 화가의 길을 외면하고 서울대 법대를 진학하자 붓을 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허진도 처음에는 법대를 목표로 공부하다 고 1 때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뒤늦게 그림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에도 할아버지 남농은 손자에게도 대를 이으라고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소치 허련의 그림 ‘수자매수’로

그의 화폭 주제는 松., 竹. 梅, 籣, 牧丹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명문가의 보이지 않는, 위대한 유산

 

진정한 명문가는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자긍심’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다.

고산家, 명재家, 소치家는 각기 가학을 계승해 대대로 인재를 배출하며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명문가의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은 옛글을 인용하면서 ‘3대에 걸친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 세대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동 작업이지

결코 한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문가는 ‘궁합’이 좋은 부모와 자녀, 세대 간의 합작품에 의해 탄생하며

대대로 그 정신과 철학이 대물림될 때 존경받는 가문으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 소장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1-09

 

 

 

 

 

 고택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제례와 음식문화

 

 

봉화, 충재 권벌종가 사당

 

안동, 퇴계종가 사당

  

 

 해남 녹우당, 해남 윤씨 고산 사당

 

종가는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유교문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속 굵직한 획을 그었던 명문 종갓집들의 제례문화와 특색 있는 음식문화를 통해

선조들의 간소하지만 정성된 마음을 느껴본다.


제례의 구분


제례는 모시는 주체에 따라

국가의 제례, 학교 등에서 행하는 사회의 제례, 일반 가정에서 개개인이 지내는 제례로 나눌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예서인 『국조오례의』에서는

제사의 대상을 천, 지, 인 삼재(三才)로 분류하고,

제례의 등급을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기고(祈告), 속제(俗祭), 주현(州縣)으로 구분하였다.

 

『종묘의궤』나 『사직서의궤』 등의 의궤라든가,

대한제국의 『대한예전』등에 국가의 제례에 관해 기술했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는

“제향(祭享)에 쓰는 준뢰(樽) · 변두(豆)에 담는 제물 중에서

『오례의(五禮儀)』의 도식(圖式)에 어긋나는 데가 있는 것은 낱낱이 바로잡아

본서(本署)와 봉상시(奉常寺)에 나누어 주어 살펴서 장만하게 하는 일을 분부하였다.”거나,

“녹포(鹿脯)는 봄 · 가을에 포를 만들 소(牛)의 값을 호조(戶曹)에서 준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고,

예서와 맞지 않는 제물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제사 중에서 종묘대제나 사직대제는

지금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고, 매년 행해지고 있다.

국가제사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행하던 제례도 있었는데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등 공립학교와 개인이 세운 서원 등 사립학교에서

각각 봄과 가을에 배향하는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이중에서 성균관의 석전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성균관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들 국가 제례와 학교 제례의 제물은 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지내는 제례의 절차나 음식과 사뭇 다르다.

제기(祭器)도 변, 두(豆), 보와 궤, 형, 조(俎), 작(爵) 등을 사용하고 있어서

집안의 제사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가정의 제례에 관해서는 주자의 『가례』,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상례비요』,

이이의 『격몽요결』, 이재의 『사례편람』 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종가의 제례


제사에는 4대 조상에 관한 기제사, 설 · 한식 · 단오 · 유두 · 칠석 · 추석 · 중양 · 동지 등

명절이나 계절에 따라 새로운 음식을 올리고 지내는 약식제사인 차례(혹은 절사),

음력 시월에 날을 잡아 조상의 묘소에서 제례를 올리는 묘제 등이 있다.

차례는 오늘날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지내지 않고 있으며,

묘제의 경우에도 안동지방에서는 ‘시사(時祀)’ 또는 ‘시제(時祭)’라고도 하고,

일부 경상도 지방에서는 기제사의 대상인 4대조를 포함하여 모든 조상을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기호지방에서는 친진(親盡)된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만 지내므로

‘세사(歲祀)’,  ‘세일사(歲一祀)’,  ‘세일제(歲一祭)’라고도 한다.

 

『가례』에는 3월 상순에 날짜를 정하여 묘제를 지낸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묘제를 중시하여 속절에 묘제를 지내왔으며,

또 음력 10월에 따로 날을 정하여 지내기도 한다.

결국 묘제의 대상이나 시기 등은 지방과 가문에 따라 일정치가 않다.

일반가정과는 달리 종가에는 사당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의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4대봉사라고 한다.

그러나 나라에 큰 공적이 있는 공신이나 학덕이 높은 유현에 대하여 4대가 지나도 그 신주를 없애지 않고

그 자손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는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과, 유림에서 인정한 향불천 또는 사불천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례의 순서는 대개 강신, 참신, 초헌, 아헌, 종헌, 사신, 음복의 순으로 이어지는데,

신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보내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묘제의 경우에는 강신이 먼저냐 참신이 먼저냐에 관해서 집안에 따라 달리 해석하고 있다.

이는 예서에서조차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데,

『가례』를 비롯한 대부분의 예서에서는 묘제에서 참신을 먼저하고 강신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율곡의 『격몽요결』, 『제의초』에는 강신을 먼저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합설과 단설의 경우, 예서에서는 기일에 해당하는 조상은 한 분이기 때문에

단설로 지내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상 배우자와 함께 모시고 지내는 합설이 관례화되어 왔다.

지금도 예서의 규정대로 단설로 지내는 집도 있기는 하지만 합설이 일반화되는 추세이다.


예서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상의 제례에 관한 언급이라든가, 제의절차 등에 관한 사항,

제기 등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청송심씨 심온 종가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친정인데,

소헌왕후는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가 되었다.

심온은 국구가 되어 명나라에 세종의 즉위에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했다. 이에 소헌황후의 어머니와 친족들은 관비가 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조정에서

임금의 외조부인 심온과 합장한 부인 순흥안씨의 제사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한 내용이 보인다.

『세조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임금의 외조부 안효공심씨와

그의 아내 삼한국대부인 안씨의 분묘는 한식, 추석마다 구례에 의하여 향과 축문을 내려서

소재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를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문종실록」에는 “졸(卒)한 영의정부사 심온의 분묘에 사용할 제기를

삼한국대부인 안씨 묘소의 제기에 예에 의하여 고동 향로 · 유향합 · 유잔 · 유선 · 유병 등의 기명(器皿)을

공조(工曹)로 하여금 제조하여 주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종가의 음식


종가의 제례음식은 각 종가가 위치한 지역이나 사회 ·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해안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고산 윤선도 종가 혹은 죽천 박광전 종가의 제례음식과

영남의 내륙에 위치한 퇴계 이황 종가나 충재 권벌 종가의 것이 비슷하거나 같을 수 없다.

바다 인근에 있는 종가의 경우에는

신선한 해산물과 꼬막 등을 재료로 제물을 만들고,

내륙에 있는 종가의 경우에는 말린 생선과 소금에 절인 생선 등으로 제물을 장만하기도 한다.

 

동일한 지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종가가 처한 사회 ·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도

제물은 달리 나타나기도 하고,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제물의 진설이 달라지기도 한다.


종가의 설과 추석 차례는 주 · 과 · 포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는 것으로 간소하게 준비한다.

 

또 종가는 매우 규범적이고 철저해서 정해진 것 이외의 음식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일반가정과 큰 차이가 없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사례도 있다.

응와 이원조 종가에서는 고인이 평소 즐겼다던 ‘집장’을 꼭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집장이라는 것은 장의 일종인데, 메주를 빻아서 고운 고춧가루 따위와 함께 찰밥에 버무려

장항아리에 담고 간장을 조금 친 뒤에 뚜껑을 막은 다음 두엄 속에 8~9일 묻었다가 꺼내먹는 장이라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이 댁에서는 왕겨에 묻어두고 하룻밤동안 은근한 불에 익히는데,

가끔씩 시간이 부족할 때는 중탕해서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그만큼 고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그 음식을 빼놓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도 고인이 평소 즐겼던 ‘중박계’라는 음식을 올리는데,

이는 밀가루를 반죽해 발효시켜 튀겨낸 음식으로 과자의 한 종류이다.

맛은 건빵과 비슷했는데 류성룡이 생전에 전시에 드셨던 음식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찌되었든 17세기에 돌아가신 고인이 생전에 즐겼다던 음식을 21세기인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충재 권벌종가의 완성된 편

 

 

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오색강정’을 제사에 꼭 사용하는데

깨, 흙임자 등을 이용해서 만든 누에고치 모양의 한과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1군 1품목운동을 실시하면서

‘닭실종가 전통유과’로 상품화 하게 되었고 지금은 명절이 되면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한다.  

 

퇴계종가의 불천위 기제사 상차림

 

퇴계 이황 종가에서는 포를 특별하게 진설하고 있었다.

포는 예서를 비롯해 일반적으로 제사상의 왼쪽에 진설한다고 했으나,

이 댁에서만은 특별히 과실의 중간에 진설하고 있다.

최숙경,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1-09

 

 

 

 

 

- <종가의 제례와 음식> 16권 완간 -

 

 

명문 양반가의 제사는 어떻게 지낼까?

제사의 절차조차도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종가의 제례와 음식』3권이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전국의 종가 27곳의 제사를 조사․ 연구하여

책으로 발간한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전통종가 5곳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제례제사 절차, 준비 모습 등을 풍부한 사진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국가의 제례인 종묘제례와 사직대제, 학교의 제례인 성균관 석전대제의 경우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일반인들에게 제례모습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집안의 제례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을 계기로 조선시대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종갓집 제사를 상세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집안은 농수 김효로(金孝盧, 1454~1534) 종가,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종가,

방촌 황희(黃喜, 1363~1452) 종가,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종가와 진주류씨 종중이다.

이들 대부분 조선시대 때 불천위(不遷位/ 보통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내지만 큰 공을 세울 경우

국가에서 영원히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한 인물) 제사를 지낼 정도로 명문집안들이다.

   

‘종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제사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는 아직도 일년에 십차례 이상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리 이원익 종가의 경우 간소하게 지내라는 그의 유언으로

현재 후손들이 제사의 부담 없이 한 차례만 지내고 있었다.

진주류씨 종중의 경우 일산신도시 개발로 인해 종중의 묘역을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와 같은 형태로 정비해서 지금껏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설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가 자기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양반 명문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번 연휴기간에 이 책을 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지 한번 권유하고 싶다.

이번에 나오는 책은 일반인도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판매하고 있다.

“종가의 제례와 음식” 14권 : 219쪽,

“종가의 제례와 음식” 15권 : 141쪽,

“종가의 제례와 음식” 16권 : 171쪽, 예맥출판사 Tel 02-745-8334

오리 이원익 종가의 제물준비

 

우복 정경세 종가 아헌례

 

진주류씨 종중의 독축 

 

 

 

 

 

 

 

 

 

 - 바람꽃 / 전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