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보물창고에 전하는 우리의 문화유산 | ||||||||||
해마다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는 일본 나라(奈良)현이 북적인다. 가을 단풍을 감상하려는 관광객이 많아지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라국립박물관의 특별전인 정창원(正創院) 전시에 대한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정창원(正倉院)은 나라(奈良)현의 동대사(東大寺)에 있는 창고로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고 1동만 남아 있다. 원래 예전의 큰 사찰에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현재는 동대사의 정창원이 유명하여 고유명사로 불린다. 정창원에 전하는 유물은 광명황후(光明皇后)가 남편인 성무천황(聖武天皇, 701~756)의 49제일(祭日)에 명복을 빌기 위하여, 평소 애용하던 600여종의 물품을 동대사(東大寺)에 헌납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황실에서 추가로 기증하거나 동대사에서 사용한 물품이 포함되어, 현재는 약 8천 여 점에 달하는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소장품의 종류로는 조각, 회화, 공예 등 미술품과 각종 생활 유물, 문서 등 다양하다. 또한 일본의 자국산(自國産) 유물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등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진 물품이 전하고 있다. 게다가 유물의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각각의 유물에 관련된 문헌기록도 확인되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정창원 소장품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며,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특별전은 유물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긴다. 정창원(正倉院)에 전하는 유물은 우리에게도 남다른 감회를 준다. 소장된 상당수의 유물이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일본이 통일신라의 물품을 사기 위해 정부에 제출했던 문서의 단편들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는 당시 황실과 귀족층들이 신라를 통해서 구입했던 다량의 물품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략 30여점에 달하는 문서가 알려져 있다. 주1) 이와 관련해 752년, 동대사(東大寺) 대불(大佛) 개안공양회(開眼供養會)를 개최할 즈음에 700여 인에 달하는 대규모 신라 사신이 방문한 기록이 있어, 주2) 신라와 일본의 교역이 국가적인 관례 속에서 전개된 것을 알려준다. 또한 정창원에는『신라장적(新羅帳籍)』이라는 문서가 남아 있어, 신라의 농촌 구조와 토지제도 등을 연구하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정창원에는 현재 15자루의 먹이 전하는데, 그 가운데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이라고 양각된 두 점이 신라제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양가(楊家)와 무가(武家)의 전문공인집단이 만든 양질(良質)의 먹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창원에는 약 50여 점의 모전(毛氈)이 있는데, 이것은 양털을 압축해서 만든 깔개이다. 모전 중에는 묵서(墨書)가 있는 베조각을 실로 꿰매어 단단히 붙여 놓은 것이 있는데, 두 점에서 31자, 13자의 묵서가 확인되었다. 한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한문이나 일본식 한자가 아니라, 신라어로 쓰인 문서라는 것이 지적되었다. 따라서 2점의 모전은 신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주3) 신라는 양털이 생산되지는 않았지만 원재료를 수입하여 새롭게 가공한 후, 일본에 수출된 것으로 파악된다.
정창원에서 발견된 가위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도 2).
날부분에는 둥근 모양의 동판이 달려 있어 등잔의 심지절단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정창원 소장품은 비록 문양 장식이 없고 날부분의 동판이 없지만 안압지의 가위 형태와 거의 유사하며, 나중에 가위 날부분에서 떨어져 나간 금속구가 발견되면서, 안압지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등잔의 심지절단용 가위였음이 확인되었다.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일본이 신라에서 촛대를 구입한 사실이 나타나는데, 금동가위가 촛대와 함께 세트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4) 다음으로 정창원에는 접시, 대접, 숟가락, 가반(加盤), 병 등 여러 종류의 사하리(佐波理) 용기가 전한다.(도 3). 사하리란 보통 15~20%의 주석을 함유한 청동을 지칭하는데,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さはり라는 용어가 신라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즉 신라의 ‘사발’이란 그릇의 형태를 호칭하는 것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뒤 재질을 뜻하는 용어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주5) 사하리 그릇 중에는 문서의 단편이 부착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신라의 관등, 계량단위가 보이고 이두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주6) 또한 사용하지 않은 채로 전해진 숟가락에서도 묵흔이 있는 유사한 종이가 발견되었다 (도 4).
따라서 사하리 제품은 신라에서 제작되어 수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641~660)이 일본의 내대신(內大臣)에게 내린 주자(廚子)와 그 안에 들어있던 물품에 관한 것이다. 주7) 비록 주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납입되었던 물품 가운데 일부인 바둑돌이 들어 있는 은평탈합이 현재 4점 전하고 있다(도 5).
그 위에 다시 칠을 하여 고정시킨 다음 곱게 다듬어서 칠한 표면이 평평해지고 금은편(金銀片) 무늬가 드러나게 하는 장식기법이다. <은평탈합>은 백제 의자왕이 보낸 주자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평탈합에는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상아를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여 화려하게 장식한 모두 네 종류의 바둑돌이 담겨 있어, 수준 높은 공예미를 확인할 수 있다(도 6, 7).
대체로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그 밖에 정창원 소장품 중에도 통일신라의 유물일 가능성이 높은 예가 상당수이다. 아직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하지만 앞으로 진척된 연구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정창원(正倉院)과 같은 보물창고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외국에 전하는 우리의 문화유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정창원에 전하는 우리의 문화유산은 일제시대나 후대에 해외로 반출된 유물과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문화교류를 통한 선진 문화의 창조와 전파의 역할을 담당한 우리 선조의 국제적 지위를 복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보물 창고에 간직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正倉院文書と木簡の硏究』, ?書房, 1977, pp. 298-347 재수록):「正倉院文書からみた新羅文物」, 『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47, 1980 (『遣唐使と正倉院』,岩波書店, 1992, pp. 117-130 재수록).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pp. 364-416 재수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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