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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 근대를 묻다> 展 - 덕수궁미술관

Gijuzzang Dream 2009. 1. 9. 23:03

 

 

 

 

 

 

국립현대미술관은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 특별전시.

전시기간 : 2008년 12월 23일~2009년 03월 22일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출 품  작 : 한국 근대회화, 사진, 조각 등 232점
출품작가 :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천경자, 김기창, 이응로 등 105명
관  람 료 : 무료 (덕수궁 입장료 별도 : 성인1000원, 학생 500원)

작품설명시간 :  10시, 11시, 12시30분, 14시, 15시, 16시, 17시

                  : 금토일 18:30 추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무덤덤한 얼굴로 부채질하는 모습을 그린

1915년작 <자화상>을 필두로, 국민화가 이중섭 ·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오지호, 박래현, 도상봉,

조각가 권진규 등 1900~60년대  회화, 조각, 사진 등 총작가 105명의 근대미술품 232점이

석조전 동관과 서관에 전시된다. 이중 10여 점이 최초 공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바친 김기창의 일기형식의 화첩,

금강산 여행 경로와 동반자까지 세밀하게 기록된 이쾌대의 화첩 등이 최초로 전시되며,

자유연애가 시작되던 시절 이쾌대가 부인에게 바친 연서도 공개된다.

  

덕수궁미술관에서 여는 ‘근대를 묻다-한국근대미술걸작전’ 시기는 1910년대에서 60년대까지다.

여기에는 김인승을 비롯해 김경승, 김은호, 김기창, 구본웅, 윤효중, 심형구, 이상범, 정종여 등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들의 작품이 상당수다. 일본군 종군화가 김종찬의 작품까지 있다. 

 

작가 김인승(1910~2001)은 조선미술가협회 발기인 ·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으로 태평양전쟁 때인 1943년 여성 참전을 미화 · 고취한 <간호병>,

총알용 구리 공출을 독려하는 <유기헌납도>를 그렸다.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해 국전 심사위원,

한국미협 이사장,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으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초상화를 그렸다.

 

피카소의 그림 같은 입체파적 인물 이미지에 ‘공산도배들’을 격멸하는 포신과 총구를 붙인

변영원의 <반공여혼>(1952) 같은 작품은 코믹하면서도 스산한 비감을 자아낸다.

 

이들 기묘한 전후 그림을 보는 것은

분단과 전쟁, 냉전이란 ‘블랙홀’을 나름 ‘부재한 낙원’의 복선으로 암시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박영란 학예사는 

“20세기 전반 격변했던 역사의 흔적을 미술품을 통해 만나보고,

당대 작품 속 선구적 요소가 한국미술의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피고자 했다”고 밝혔다.

한국 근대의 여러 특징으로 봉건적 신분제 붕괴에 따른 개인의 발견, 기차의 등장이 가져온

생활의 변화, 원근법 · 명암법을 이용한 사생풍경화의 등장 등을 든다.

우리 근대미술의 실체는 다름 아닌 일본 미술의 이식이었다.

유복한 계급의 자제들일 수밖에 없는 어린 유학생들이 배워 들여온 것은 일본식 사유 또는

일본화한 서양 문화였다. 기법 역시 왜색 또는 그들이 권유한 향토색이 주류였다.

해방 뒤 근대성 역시 미군과 함께 들어온 박래품인 점에서 일제의 그것을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박 학예사는 “소장가들을 설득해 어렵게 공개한 작품들이 많다”면서

“한국 근대미술의 출발이 늦은 점을 감안하며 감상해 달라”고 권했다.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됐다.

 

제 1부 ‘근대인’

근대적 특징의 핵심인 ‘주체적인 자아의 발견’은 교육을 통해 가능했으며,

근대적 인간으로서 교육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직업적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지식인의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이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반신상의 자화상과 초상화로 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집단이 아닌 개별적 의식을 반영하고 금기시되어왔던 육체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근대화와 식민이라는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근대인들의 모습을 초점을 맞춘다.

신지식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과 신여성, 구국애족의 희망으로 부상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 등이

화폭에 담겨 있다.

 

 

고희동(1986-1965)

부채를 든 자화상, 1915, 캔버스에 유채, 61×46cm, 국립현대미술관  

 

춘곡(春谷)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이다. 최초의 서양화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보존되어 전해지는 유화작품은 총 3점인데 모두 자화상 작품이다.

동경예대 졸업 작품인 '정자관을 쓴 자화상'과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으로

모두 1915년 작품이다. 이 세 작품은 한국의 최초 서양화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특히 이 작품은 공식적 포즈가 아닌 일상 속 한 장면으로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과 당당한 자세, 배경에 보이는 유화작품과 책은

화가로서보다는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선비 혹은 신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자의식과 위치를 대변해 준다.

또 화면 상단에 기입된 영문 서명 역시 근대 지식인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을 보여준다.

 

이쾌대(1913-1965)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8-49, 캔버스에 유채, 72×60㎝, 개인소장 

서구적인 양식과 전통적인 요소를 결합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와 자긍심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중절모를 쓰고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이쾌대 자신은 붓과 팔레트를 들고 푸른빛 하늘에

산과 벌판, 짐 지고 들판을 지나가는 농촌 아낙네 등 조선 땅을 배경으로 향토적 요소를 대입시켰다.

화면의 중앙에서 자신의 정면상을 통해 화가로서의 확고한 자의식을 드러내

지식인으로서 대중을 선도해 나가고자 하는 선구자적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바로 한국근대미술이 나은 걸출한 ‘리얼리즘 화가’ 이쾌대의 모습이다.

서양원근법의 깊이감과 공간감을 살리면서도 인물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진중한 표정은

이를 더욱 부각시키는 듯하다. 그러나 전통 붓에 팔레트를 쥔 손, 짙은 눈썹에 크게 눈 뜨고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은 마냥 희망과 결의에 차 있지 않다는 것을 일러준다.

가까스로 냉정을 다잡은 눈은 기실 불온하며 불안하다.

푸른빛 하늘, 윤곽만 있고 구체적 묘사가 없는 여인, 농촌 등의 뒷배경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해방 정국의 혼란에 휩싸인 나라와 미술판의 불길한 앞날일까.

실제로 그를 기다린 건 인민의용군으로 뒤바꾼 전쟁과 포로 생활, 그리고 월북길이었다.

 

이쾌대는 경북 칠곡에서 만석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낭만적 사실주의'를 추구했고

6·25 직전에 이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림 속의 그는 자기 앞에 어떤 세월이 닥쳐올지 아직 모르는 35세의 청년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밭고랑엔 초록이 넘치며, 여인들은 붉은 치마를 입었다.

그는 전쟁 통에 남하한 인민군에 합류하여 조선미술동맹에 참여했다가 국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월북을 택했다.

그로 인해 남한에 남은 가족과 영영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절절한 가족애로 볼 때 그의 북쪽행은 지금껏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의 세 아이와 부인, 자신을 그린 가족 스케치에서 엄마 젖 빠는 맏아들을 그려놓은

다른 스케치엔 피카소, 보나르, 브라크 같은 서구 근대 거장들의 이름을 깨알같이 적었다.

서구 근대미술에 대한 탐구의 열망은 그 또한 누구 못지않았으리라.  

 

홀로 남은 부인이 오랜 세월 눈물겹게 보관하던 남편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시대를 직시한 시선의 매혹을 드러낸 월북화가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었다.

 

이쾌대(1913-1965)

군상Ⅳ, 1948, 캔버스에 유채, 177×216㎝, 유족 소장  

 

이쾌대는 경북 칠곡 출생으로 휘문고 시절 장발의 지도를 받은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수학했다.

근대화단에서 보기 드물게 서양미술사와 미술이론은 물론

고미술에 대한 연구까지 두루 섭렵한 민족의식이 강한 작가였다.

이 작품은 인물이 가지고 있는 좌절과 분노, 희망과 의지에 찬 표정들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이를 치밀하게 조직하는 방법을 완벽할 정도로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다. 

 

'군상'은 좌절, 비굴을 딛고 일어서 미래로 나아가는 군상을 슬로비디오처럼 잡아낸 그림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이쾌대의 ‘군상 IV’는

동족상잔이 야기할 민족적 비극을 선구자적 혜안으로 예언함으로써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화의 자리에 오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폭발하는 화산을 배경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는 벌거벗은 사람들, 쓰러진 여인을 부둥켜안은 사람,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돌로 내리치거나 물어뜯는 이들도 있다.

이쾌대의 군상은 한반도가 맞닥뜨릴 단군 이래 최대의 참변을 그렇게 생생히 내다보았다.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도 4·3사건(1948), 여수·순천 10·19사건(1948) 외에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수백 차례 이상 벌어진 38선 사이의 교전은 이쾌대로 하여금 민족의 앞날에 대한 우려를

가장 중요한 예술적 주제로 삼게 했다. 그가 얼마나 민감하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였는가는,

도상봉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는 이쾌대.

그에게 예술은 삶과 현실의 고뇌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이유태(1916-1999)

탐구, 1944, 종이에 채색, 212×153㎝, 국립현대미술관 

 흰색 실험가운을 입은 여인의 옆으로 책상과 현미경, 토끼 등이 보이고

뒤로는 여러 가지 실험도구들이 놓여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전통사회의 현모양처 상에서 벗어난

여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과학적 연구와 실험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는 근대여성의 이상미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실험실의 신여성 연구원을 그린 <탐구>는 일제의 과학위생 정책에 강조점이 찍혔다.

 

이마동(1906-1981)

남자, 1931, 캔버스에 유채, 117×91㎝, 국립현대미술관  

 

이마동의 전성기 시절의 작품으로 근대 청년지식인, 엘리트 청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속의 인물은 서양식 트렌치코트를 입고 한 손에 잡지를 말아 쥐고 있는 지식인으로

감정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견고한 형태감을 중시했던 작가는

검은색을 사용한 뚜렷한 명암의 대비와 입을 굳게 다문 결연한 표정의 청년상을 통해

젊은이의 힘찬 의지와 강한 지적 호기심을 강조하였다.

힘찬 터치와 큰 스케일을 통해 근대예술가로서의 작가의지를 보여준다.

 

장욱진(1917-1990)

길 위의 자화상, 1951, 종이에 유채, 148×108㎝, 개인소장  

 

이 작품은 작가가 한국전쟁을 피해 그의 고향, 충남 연기에서 지내던 시절 제작하였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는 황금색으로 물든 풍요로운 들판이

이상적인 전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논밭 사이를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검은 연미복에 우산을 든 영국신사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근대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을 반영하는 듯하다.

   

구본웅(1906-1953)

비파와 포도, 1930년대 초반, 캔버스에 유채, 46×62.5㎝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1906-1953)

나부, 1929, 캔버스에 유채, 68x55㎝,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1906-1953)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65.5×53㎝,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은 함께 어울렸던 파이프 담배를 문, 수척한 시인 이상(1910~1937)을 그린 이 그림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의 실체를 생생하게 전한다.

어두운 색채와 거친 붓질로 친구의 마음에 깃든 광기와 절망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작가(구본웅)의 친일 행적으로 빛을 잃고 있다.

● 구본웅 - 친구의 초상=http://blog.daum.net/gijuzzang/696797

 

 

구본웅(1906-1953)

여인, 1930년대 중반, 캔버스에 유채, 47×35㎝, 국립현대미술관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누드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한국 근대기 누드화 중에서도 강렬한 표현이 보이는 작품이다.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가슴을 한껏 드러낸 여인의 과감한 자세는 검정, 빨강, 초록, 흰색을 주조로 하여

대담한 붓질로 간략하게 묘사하여 강한 인상을 준다.

이는 1930년을 전후로 하여 일본을 통해 수용된 서양의 야수파 화풍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본웅(1906-1953)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은 1930년대 가장 권위적인 작가였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났지만

어려서 가정부의 부주의로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불구의 신체적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고

진취적인 실험정신으로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구의 새로운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은 야수파적이고 표현파적인 작풍을 시도하며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등 서구 모더니즘을 소개하는데 앞장섰고, 화단에서 이단적인 존재가 되었다.

강렬한 원색조의 사용, 격정적인 필치, 형태의 단순화와 자유로운 구성의 작품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여인’은 단순하게 묘사된 인물이 보여주는 왜곡된 형태와 거친 붓질이지만

도도하고 신비로운 모던걸의 구본웅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서동진(1900-1970)

팔레트 속의 자화상, 1930, 나무팔레트상자에 유채, 17.7×23.5×6.2cm, 국립현대미술관  

 

근대 양화 도입기에 수채화로 작품세계를 정립한 서동진은 대구에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유화에 비해 비교적 과소평가된 수채화의 장르적 정체성을 높인 장본인이다.

서동진의 작품은 대부분 수채화이나 이 작품의 경우는 유채로 그렸다.

그러나 마치 자신이 수채화가라는 것을 강조하듯 수채화 팔레트 박스 위에 섬세한 묘사로써

자신의 얼굴을 표현하고 있다.

팔레트에는 작가가 사용했던 수채물감의 흔적이 덩어리와 색채가 살아있는 그대로 남아있어

작가 작업세계의 흔적으로써 관람자들에게 의미 있는 영감의 요소로 작용한다.

화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서동진(1900-1970)

뒷골목, 1932, 종이에 수채, 48.7x60.5㎝, 국립현대미술관 

 

 

이응노(1904-1989)

취야, 1951, 한지에 채색, 이응노미술관

 

식민지시대 동양화의 인물화가 일본적 리얼리즘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점은

인물의 삶을 구체적 양상으로 화폭에 끌어들이되 단순한 모티브로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응노는 해방공간에 들어서면서 인물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인물화와 달리 서민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한 풍경을

덤덤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그 현실풍경을 보는 관점을 뚜렷하게 제시하였다.  

 

이중섭(1916-1956)

자화상, 1955, 종이에 연필, 48.5×31cm, 개인소장

대향(大饗) 이중섭은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야수파의 영향을 기반으로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화법을 구축하여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데

공헌한 작가다. 이중섭의 작품은 꾸준한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그 작품성이 널리 인정을 받고 있지만

작가의 살아생전에는 담배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가난했으며

말년에는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보이며 쓸쓸한 삶을 살았다.

 

그의 유일한 자화상 작품인 이 그림은 이중섭의 작고 1년전 1955년 개인전을 위하여 머무르던 대구에서

그려진 작품이다. 개인전의 실패와 생활고로 인하여 많은 스트레스와 우울을 겪고 있는 자신이

정신이상이라는 소문이 돌자, 연필로 자기 얼굴모습을 자세히 그려 친구인 소설가 최태응에게

건강과 오해를 씻고 증명해보이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그는 정신착란에 빠진 사람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대로 그리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작가의 정신세계에 대한 반증이자 상징적인 결과물로서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서 한 달이나 수용되어야 했다.

외로움과 소외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56년 9월6일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인성(1912-1950), 빨간 옷을 입은 소녀,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44.7×26.5㎝, 개인소장

 

 

서진달(1908-1947), 교복을 입은 남학생, 1940, 종이에 수채, 37.4×29㎝, 국립현대미술관

 

 장우성(1912-2005), 청년도, 1956, 종이에 채색, 212×160㎝, 서울대학교 박물관

 

 

이제창(1896-1954), 독서하는 여인, 1937, 나무판에 유채, 32×23.2㎝, 국립현대미술관

 

  

변영원(1921-1988), 반공여혼, 1952, 캔버스에 유채, 93.5×130cm, 국립현대미술관   

변영원의 작품 <반공여혼(反共女魂)>은 작가가 한국전쟁 중에 제작한 것으로,

피카소 (Pablo Picasso)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는 형태 해석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전쟁의 공포와 잔인성을 암시하는 듯한 총과 탄알이 직접적으로 그려져 있다.

 

 

 

 

 

 

 

제 2부 ‘근대의 일상’

램프, 기차, 자전거와 유리창 등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준 새로운 문물의 수혜는

신문이나 잡지 등이 가져온 근대적 인식의 확산과 함께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장치로 도입되었다.

이러한 기제들이 등장하는 당대의 생활 모습에는 근대인들의 희노애락이 새겨져 있다.

자의식의 발견과 함께 확산된 자유연애사상,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내밀한 부부,

가족관계로의 변화 그리고 식민과 전쟁 등의 시대적 고난 등은 작품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김은호(1892-1979)

간성(看星), 1927, 비단에 채색, 138×86.5㎝, 개인소장  

 

서화미술회 재학시절에 순종의 초상화를 그렸을 만큼 인물채색화 분야에서 인정을 받은 김은호는

세필 채색화분야에서 활약한 작가이며, '미인도'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가로 역사적 인물의 초상화와 미인도를 많이 제작하였다.

<간성>은 기생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방 안에서 마작으로 그날의 운수를 점치고 있는 여인은 한복을 곱게 입고

화면 전반부에 주인공으로 부각되어 있다.

새장 안에 갇힌 앵무새, 나팔꽃, 생기를 잃은 죽엽, 재가 담긴 재떨이는

나른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냄과 동시에 기녀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최지원( ?-1939)

걸인과 꽃, 1939, 목판화, 62.5×47.5㎝, 개인소장 

   

이 작품은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판화작품으로

화면 전체에 대담하게 두 인물을 포치시키고 사실적인 묘사 대신 음각과 양각의 교차를 통해

공간을 분할하였다. 목판 특유의 굵은 선으로 강약을 살리고 형태를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우화적인 분위기를 끌어내었다. 최지원은 주호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주호회’작가들에 따르면 화면 앞에 깡통과 꽃을 들고 있는 걸인으로 형상화된 인물은 작가 자신이며,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소녀는 당시 그가 짝사랑했던 정창고무공장 집안의 딸이라고 한다.

 

박수근(1914-1965)

할아버지와 손자, 1960, 캔버스에 유채, 145.2×97.3㎝,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의 작품은 가난하고 외로운 서민의 삶을 다루며,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친근감을 준다.

이는 평면적인 화강암의 질감과 단순한 검은 선 등의 그만의 독특한 표현법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64년 국전에 출품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던 작품으로 박수근 만년의 회심작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하단에는 앞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인과 아이를,

상단에는 앉아있는 두 사람의 남정네와 급히 길을 가고 있는 두 행상의 여인을 그렸다.

한편 남자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쉬고 있고 여인들은 일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과 가난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정된 수직형태를 지닌 노인의 자세는 중간에 수직으로 연결된 손자의 머리와 작은 두 다리의 구성 등과

함께 치밀한 조형적 계획을 세우고 작품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짜임새 있는 구도와 분명한 형태감, 치밀한 기법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임군홍(1912-1979)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6×126㎝, 유족 소장 

 

 

월북작가인 임군홍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우측 모자상 이미지는 한국근대미술사 속에서 30년대 이후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작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한편 작가가 즐겨 그리던 일상적 기물은 화병들과 가족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한 화면구성이 돋보인다.

 

임군홍(1912-1979)

모델, 1946, 캔버스에 유채, 106×87.8㎝, 국립현대미술관 

 

임군홍은 특정한 서양미술사조나 일본 화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학한 화가이다.

작품 ‘모델’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표현을 보여준다.

세부 묘사보다는 인물의 동세를 과감히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고,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과 색채의 대비로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외곽선과 각 대상이 지닌 색채를 통해 형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밝은 색면과 간략화 된 표현이 과감한 동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이종우(1899-1981)

인형 있는 정물, 1927년, 캔버스에 유채, 53.3×45.6㎝,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작가로는 최초의 국제전 입선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종우는

이 작품으로 파리유학시절 살롱 도톤느에 입선했다.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대상의 사실적 묘사와 선명한 색채표현이 두드러진다.

유리상자 속 인형, 커다란 원형의 흰 그릇, 흰 수련과 녹색의 잎사귀, 세 송이 마거리트꽃 등

여러 대상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와 화면구성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대원(1921-2005)

창변, 1956, 캔버스에 유채, 116×91㎝, 서울시립미술관 

 

부유한 가정의 실내를 그린 작품으로,

아이의 모습이 보는 이를 등지고 창밖을 쳐다보도록 그려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적색, 황색, 녹색 등의 원색적 색채를 평면적, 장식적으로 사용하여

주관적 감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이대원의 초기작품이 야수주의 경향 중

특히 마티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창살과 창틀, 전통식 창문을 통해 화면에 통일감과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

  

박래현(1920-1976)

노점, 1956, 종이에 수묵담채, 266×212㎝,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유학을 떠나 1940년에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부에 입학, 1943년 9월에 졸업하는데,

졸업 직전인 5월에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응모했던 소녀상의 채색화 '화장'이 특선에 올라

각광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풍경화 '산길'이 입선하며 전통화단의 여성 신예로 부각되었다.

1946년 김기창과 결혼한 박래현은 연속적인 부부전람회로 화제를 낳으면서 특출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던 가운데 1956년에는 현대적 화면구성의 거리 풍경 '노점'이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그 뒤의 작품 활약은 더욱 두드러지게 이어졌다.

이 작품은 대상과 화면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중 하나로

1950년대 중반 이후에 보이는 박래현의 작업경향이 나타나 있다.

‘노점’이라는 공간이 보여주는 삶의 단면이 회화의 조형요소로서 환원되고 있는 이 작품은

일본화적 채색화에서 벗어나 담채로 처리되었으며 입체파적 실험과 반추상 양식으로의 진입을 보여준다.

 

 

 

  

 

 

김기창(1914-2001), 모임, 1943, 종이에 채색, 182×262㎝, 국립현대미술관

 

박상옥(1915-1968), 서울의 아침, 1957, 캔버스에 유채, 74.5×49㎝, 서울시립미술관

 

 

박상옥(1915-1968), 후방의 아해들, 1958, 캔버스에 유채, 65×90㎝,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1914-1965), 아기업은 소녀, 1953, 캔버스에 유채, 28×13㎝, 개인소장

  

 

이영일(1904-1984), 시골소녀, 1928, 비단에 채색, 152× 142.7㎝, 국립현대미술관

 

장우성(1912-2005), 화실, 1943, 종이에 수묵채색, 210.5×167.5㎝, 삼성미술관 리움

장우성은 초기에 채색위주의 일본화풍을 구사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간결하고 담백한 전통적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개척한 화가이다.

차분한 색조로 완성된 ‘화실’은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수상작으로 장우성에게 명성을 안겨주었다.

 

 

임직순(1921-1996), 해바라기와 소녀, 1959, 캔버스에 유채, 145.2×968㎝, 한국은행

 

 

 

 

  

■ 제 3부 ‘근대의 풍경’

종래의 전통적인 관념 산수에서 탈피해 근대적 공간으로 묘사된 자연풍경을 전시했다.

 

 

도상봉(1902-1977)

성균관 풍경, 1959년, 캔버스에 유채, 72.5×90.5㎝, 삼성미술관 리움 

 

 

도상봉이 즐겨 그리던 고건물을 소재로 한 풍경화 가운데 하나로,

그가 살던 명륜동의 성균관을 그린 작품이다.

근경의 가옥과 원경의 성균관 내부를 화면 가득 담아내면서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하고,

화면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기와지붕의 선과 수직으로 나열된 나무 및 그림자의 배치를 통해

탄탄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 작품을 통해 시공간의 엄숙함을 보여주며

붉은 목조기둥과 파란 하늘의 색채 대비로 청량감을 선사한다.

 

나상윤(1906- ) 

가면 있는 정물, 1926, 목판에 유채, 33×23.5㎝, 국립현대미술관 

 

나상윤은 함흥에서 여학교를 다닌 후 1925년 4월에 일본 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 선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7년 9월에 자퇴하고 다음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인 동향의 도상봉과 결혼하여

서울로 와서 정착했다.

작품은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유화 <동경제국대학 구내풍경〉정도가 알려져 있다.

도상봉이 법조인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로서 타고난 운명을 깨닫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희동은 당시 보성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특히 헌신적인 아내이자 같은 화가였던 아내 나상윤의 도움은

훗날 대화가로서의 업적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다.

나상윤은 일본에서 공부한 신지식인이자 나혜석, 천경자 등과 함께

우리나라 여류화가의 족보를 잇는 인물이다. 도상봉과 나상윤의 금슬은 매우 각별해 미술계는 물론

그가 생전에 살았던 명륜동 인근 주민들 사이에도 꽤나 유명했다.  

 

이상범(1897-1972)

초동(初冬), 1926년, 종이에 수묵담채, 152×182㎝, 국립현대미술관 

  

 

이상향이 아닌 일상의 공간을 소재로 선택하여 원근법을 구사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전경의 개울은 마치 냇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어 적막한 분위기에 활력을 주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도 및 묵필에 의한 사실표현과 담채 효과는 안정된 분위기를 끌어낸다.

 

임용련(1919-?)

에르블레의 풍경, 1960년, 종이에 유채, 24.2×33㎝,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의 스승으로 해방 이후 월남한 작가로 당시의 작품들을 모두 북한에 남겨두고 왔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거의 없다.

<에르블레의 풍경>은 여류작가 백남순과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을 보냈던

파리 근교 세느강변의 아름다운 마을, 에르블레의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백남순(1904-1994)

낙원, 1937, 캔버스에 유채, 166×366cm, 삼성미술관 리움 

 

백남순(1904-1994)은 서울 태생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제일고등여학교를 거쳐

1923년 4월에 이숙종 · 김명화와 함께 도쿄의 여자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을 다니고 나서 사정으로 자퇴한 뒤, 서울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 부설 가명보통학교

교사로 나가며 조선미술전람회에 풍경과 정물을 그린 유화를 출품하여 거듭 입선했다.

1928년에는 프랑스신부의 도움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약 2년간 체류하며

새로이 그림 수업을 하여 여러 살롱에 입선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만나 결혼한 미국 예일대학 출신의 화가 임용련과 1930년에 귀국해서 부부작품전을 가진 뒤

민족적 성격의 서화협회전람회와 서울의 조선인양화가단체 ‘목일회(뒤에 목시회로 개칭)’ 동인전에

부부화가로 가담하는 등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임용련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 조직에 잡혀가 생사불명이 된 후

백남순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나혜석(1896-1948) 

캉캉 무희, 1940, 캔버스에 유채, 51×33.5㎝,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중 한 사람이다.

1913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 1921년 서울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이미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7년 파리에 체류하면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접한다.

1927년부터 2년간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를 여행한 그녀는 서구의 새롭고도 다양한 화풍들을

직접 접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녀의 작품 활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서양화 도입 초기의 일방적인 일본과의 영향 관계에서 벗어나 서구 미술계와 직접 교류를 시도한

나혜석은 근대 미술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여성해방론자, 문학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 ‘무희’는 몽마르트 근처에서 캉캉을 추는 무희들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들에게서 무희나 카페 걸을 소재로 한 유행이 직접적인 근대체험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혜석의 이 작품에서도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갈색의 중후한 색채를 바탕으로 서구적인 인체를 단순화하여 그렸으며

모피코트의 화려함을 강조한 작품이다. 순종적이며 집에서만 생활했던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활동적이며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던 신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나혜석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한 고희동 · 김관호 · 김찬영에 뒤이은 조선 4번째 양화가이면서

학교는 다르나 역시 일본에 유학, 유화를 전공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00년대 초는 동경여자미술학교는 여류예술가를 꿈꾸는 일본의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여학생들이 꿈꾸던 학교였다.

실제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 유학했던 조선 여학생만도 100명이 훨씬 넘는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곳에서의 경험과 학업을 통해 우리 근대미술을 풍성하게 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나혜석을 뒤이은 2번째 여자미술학교 유학생은 자수와 일본화를 전공한 장선희(1897-?)였고

백남순(1904-1994) · 이숙종(1904-1985) · 김명화(1903-?)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나상윤(1906- ), 박래현(1920-1976), 천경자(1924- ) 등 오늘날 한국미술의 씨앗을 뿌린 여성작가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오지호(1905-1982)

남향집, 1939년, 캔버스에 유채, 80×65㎝, 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의 대표작으로 행복했던 작가의 개성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가 살던 개성집을 그렸는데 행복했던 작가의 개성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인상주의적 회화가 완성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무의 그림자나 돌 축대의 응달 부분을 청색과 보라색으로 처리한 것,

맑은 공기와 투명한 빛을 느끼게 하는 밝고 명랑한 색조, 자연미의 재인식은

프랑스 인상주의 미학과 공통점을 보이며 그의 인상주의적 회화가 완성됨을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다.

 

고희동(1986-1965)

진주담도(眞珠潭圖), 지본채색, 140.3×42.5㎝, 선문대학교 박물관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지만 1920년대 이후에는 전통회화를 제작하면서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수묵화들을 남겼다.

<진주담도>에서는 선명한 색채, 바위와 산수의 면 처리 및 질감의 사실적 표현에 주력하여

유화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전통적 주제인 금강산도를 서양화적 표현요소와 결합시켜

한국화의 전통을 새롭게 형성하고자 했다.

 

 

 

  

김주경(1902-1981),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9,

캔버스에 유채, 65.5×80㎝, 국립현대미술관 

 

 

변관식(1899-1976),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66, 수묵담채, 125.5×125.5㎝,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주(1910-1959), 소녀입상, 1944, 캔버스에 유채, 90.8x65㎝, 국립현대미술관

 

 

유영국(1916-2002), 도시, 1955, 캔버스에 유채, 60×73㎝, 유영국문화재단

 

허건(1907-1987), 목포 교외, 1942, 종이에 수묵담채, 137×171.5㎝, 국립현대미술관

 

 

허건(1907-1987), 내금강 묘길상

남농 허건은 기업으로 화업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적인 화풍에 집착하지 않고

시대적인 변화에 반응하며 새로운 미감과 양식을 추구하였다.

묘길상은 문수보살은 한자로 표기한 이름으로 내금강산에 있는 명소이다.

김홍도, 정수영 역시 이곳의 그림을 남겼으므로 주제적 측면에서 볼 때 조선후기 명승유람과

실경산수 제작의 경향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암벽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필묵을 중첩시켜

어두움을 표현해 명암을 나타낸 점, 특정한 준법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고 과감하게 붓을 다루어

바위의 질감을 강조한 점 등은 기존의 전통산수의 특징과는 차이를 보이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근대산수화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박고석(1917-2002), 범일동 풍경, 1951, 캔버스에 유채, 39.3×51.4㎝, 국립현대미술관

193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일본의 독립미술협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일본적 야수파 양식을

습득했다. 사토미 가츠조, 마기시 고타로의 영향이 박고석의 작품에서 나타나 이중섭, 구본웅과 함께

그를 한국의 표현주의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범일동 풍경’은 박고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작가가 몸소 체험했던 피난시절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제 4부 ‘근대의 꿈’

근대적 시공간 속에서 사실상 교육을 통한 자아실현과 구국애족이라는 이상이

실현되기 어려웠던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일제가 가져온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식민지의 근대인들에게는 재능과 열정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현실 속에 이루어지지 않은 꿈 대신 작가들은 유토피아를 향한 몽환적인 꿈을 꾸기도 하였고,

서구중심이 아닌 동양중심의 세계관을 꿈꾸며 전통적 특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근대와 겹쳐 논쟁적인 일제의 식민 지배, ‘바톤 터치’해 들어온 미군정 등 피식민의 상황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몽환적인 꿈이나 전통성의 회복을 담은

이달주 ‘귀로’, 김환기 ‘영원의 노래’, 박항섭 ‘포도원의 하루’, 천경자 ‘목화밭에서’, 

그리고 가족의 정겨운 모습을 담은 이중섭의 ‘은지화’ ‘애들과 물고기와 개’,

이쾌대의 초기작인 ‘여인들’은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며,

운보 김기창이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바친 화첩식 일기 역시 최초 공개작이다.

 

 

문신(1923-1995)

고기잡이, 1948년, 캔버스에 유채, 액자조각 27.5×103㎝, 갤러리 대아

 

 

이 작품은 문신의 1940년대 후반의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8명의 남자들이 고기잡이 배를 타고 서로 호흡을 맞추어 그물을 당겨 고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그렸다.

주황빛 어부들의 피부색은 청록빛의 바다와 대비를 이루어 생기가 넘치는 조형미를 더해주고 있는데,

힘을 다해 그물을 당기고 있는 인물들과 장방형을 이루는 작품의 전체적인 비율과 어우러져

팽팽한 힘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광복 직후 새로운 유토피아 수립을 열망했던 청년들의 열기가 붉은 색을 주조로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또한 작가가 직접 제작한 나무액자의 장식으로 조각된 나체의 여인은

작품 내의 남성적인 요소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

 

문신(1923-1995)

자화상, 1943, 캔버스에 유채, 94x80cm, 문신미술관

조각가로 잘 알려진 문신은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수학했으며

1945년 광복후 귀국하여 종군작가단과 대한미술협회에 자신을 유화가로 등록했던 화가로서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1968년 2차 도불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소작업을 하게 된 후에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화작업을 계속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는 대동아전쟁 말기로 일본의 패망이 짙어져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당시 문신은 조각가 故 김종영과 한 아뜰리에를 사용하고 있었다.
동경 유학당시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에서 천황으로부터 위로의 뜻으로 받아 마신 한 잔의 술은

홍조 띤 얼굴로 작품에 그대로 재현된다.

1992년 파리시립미술관 전시 때 초대된 이 작품을 본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대가로서의 문신을 예감하는 그림이라는 評을 내렸고,

이후 소중히 캔버스를 말아 함께 귀국한 작품이지만 분실되었다가

1979년 수소문한 끝에 그 행방을 알았다.

1983년 소장자의 미국 이민으로 구입하게 되어 현재 마산시립문신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중섭(1916-1956)

애들과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수채, 25.8×19㎝, 국립현대미술관 

 

자신이 처한 불운한 환경과 상반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모티브를 보여준다.

아이들과 동물이라는 소재는 순수한 밝은 웃음, 즐거운 율동으로 표현되었으며

아이들과 함께 한 행복했던 시절을 담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와 부산을 전전하며 고된 생활을 한 이중섭은 유화 ‘애들과 물고기와 개’를 통해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과 상반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모티브를 보여준다. 

 

또 이중섭‘흰소’  '부부' 와 일본으로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은지화'도 전시된다. 

 

이중섭(1916-1956), 부부, 종이에 유채, 40x28cm,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1916-1956), 흰 소, 1953-54년 무렵, 종이에 유채, 30×41.7cm, 홍익대학교박물관

 

이중섭(1916-1956), 은지화

 

 

  

이인성(1912-1950)

가을 어느 날, 1934년, 캔버스에 유채, 96×161.4㎝, 삼성미술관 리움 

 

 

1930년대 한국화단은 ‘조선향토색’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일종의 아카데미처럼 자리 잡아 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조선 향토색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인성의 이 그림은 ‘조선향토색’을 짙게 담은 대표적인 예로 이야기된다.

이인성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의 주된 경향이자 비평적 쟁점이던

‘조선향토색’을 대변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쾌청한 느낌의 푸른 하늘과 들판을 배경으로 한 반누드의 여인은

원시성과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전원성을 보여준다.

타이티 여인들을 강렬한 원색으로 그린 고갱 못지않게 강렬한 톤으로 그린 <가을 어느 날>에서는

목가적 소재, 강렬한 색채, 풍부한 서정성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경향은

광복 이후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른바 ‘향토적 서정주의’의 커다란 맥을 형성했다. 

 

천경자(1924- )

굴비를 든 남자, 1964, 종이에 채색, 120×150㎝, 금성출판문화재단 

‘한국미술계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천경자의 채색화는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 구상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담한 장식성 속에 함축된 주제의 서정성과 상징성,

전통적 패러다임을 넘어선 파격성 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굴비를 들고 돌아오는 남자와 무지개빛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행복을 꿈꾸던 작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불행했던 사랑경험으로 인한 소망의 표출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드러난 작품이다. 비가 개인 뒤 땅 위에 뒹구는 우산과

뒤편으로 넘실넘실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 또한 환상적인 행복을 암시한다.

천경자는 자연의 아름다움, 생명의 신비, 인간의 내면세계 등 폭넓은 영역을 작품에 포괄한 작가로

환상적 이상세계를 추구하였던 문학적 감수성 또한 보여주고 있다.

 

박항섭(1923-1979)

포도원의 하루, 1955년, 캔버스에 유채, 127.4×187.4㎝, 한국은행 

    

 

광복 이후 과수원에 칩거하며 정적의 세월을 보냈는데

후일 이 시기에 축적된 내면적인 요소들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1955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고갱풍의 원시성을 드러내며 대상을 단순화하면서

강한 색채와 마티에르를 강조함으로써 강인한 생명력과 자아를 드러내는 표현주의적 작품이다.

농촌의 이상향, 낙원을 묘사한 이 작품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담고 있는 남녀 군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포도원의 정경이나 인물의 사실적 표현보다는 작가의 의도에 의한 인물 배치와 구상성이 두드러진다.

포도넝쿨 그늘 아래 일렬로 서 있는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채색되고 신체비례가 길게 늘어져

작가에 의해 재해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들의 남녀 인물들은 정작 유유자적이 아닌, 고대 이집트인처럼 경직된 얼굴과 포즈를 짓고 있다.

   

전화황(1909-1996)

전쟁의 낙오자, 1960, 캔버스에 유채, 84.2×159.5㎝, 광주시립미술관

 

평양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 숭인학교를 다니며 삭서회 회화연구소에서 기초적인 미술지도를 받았다.

본명은 봉제. 1926년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종교인 일등원(一等園)과의 만남을 계기로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수다 쿠니타로의 영향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일본 화단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식민지배 및 전쟁으로 인한 어두운 고국의 현실을 주제로

활동하다가 1960년대 관념적인 종교화에 몰두 ‘불상의 화가’라 불렸다.

말년에 일본 교토에 전화황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이수억(1919-1990)

구두닦이 소년, 1952, 캔버스에 유채, 113.5×75.5㎝, 개인소장 

 

 

1943년 일본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일본에 체류하면서 창원회 공모전에 입선(1942),

동경에서 제1회 미술협회 공모전에 입선(1946)하였다.

1946년에 귀국, 함경남도 미술동맹 서기장을 맡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종군화가로 활동했다.

1953년부터 국전을 무대로 작품발표를 하였으며

자연풍경과 인물을 다루면서 한국적인 현실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덕(1931- )

전장의 아이들, 1955, 캔버스에 유채, 91×73㎝, 국립현대미술관 

 

청맥동인전(1950), 경남미술제(1958) 등에 참여하였고, 1967-1980년 구상전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명쾌한 색감처리와 평면적인 화면처리 방식으로 납작하게 깔린 인물을 통해 부정적인 시대를 반영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것은 서구 엥포르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당시 국내화단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시대의식과 조형미를 결합시키고자 한 결과이다.

 

장욱진(1918-1990) / 마을(1951), 수하(1954), 까치(1958)  

  마을/ 1951, 종이에 수채, 26x36cm, 개인 소장

장욱진은 한동안 수덕사에서 수도한 경험이 있는데 이 경험은 그의 삶과 모든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마을’에는 그런 분위기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그림에 상자처럼 보이는 집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집안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녀자들의 모습이 있다. 마치 동화책의 삽화 같다. 왜 화가는 모든 등장인물을 사진처럼 전면으로 향하게 만들었을까.

분명한 것은 방 안에는 모두 아녀자와 아이들만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남정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밥벌이 나갔을까, 아니면 전쟁터로 나갔을까

이런 정황을 근거로 이들 아녀자들이

모두 남편이나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림의 위에 나타나는 언덕에는 소와 함께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자가 그려 있다.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있는 거동으로 보아 철없는 아이 같아 보인다.

이 한가롭게 묘사된 풍경이 이미 도원의 경치를 연상케 한다고 말하는 것은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소며,

나무에 앉아있는 새며, 또 집 옆에 멍청하게 서 있는 검은 강아지의 모습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욱진은 1950년대의 처절한 현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며

‘무릉도원’에서처럼 세속적인 시간을 멈춰 세우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이야기>, 박용숙, 예경, 2003

 

수하/ 1954, 캔버스에 유화, 33.0x24.7cm

   

까치/ 1958

이 그림은 1940년대 말에 신사실파에 가담하면서 이룩한 양식화된 그림으로

그의 천진무구한,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과도 같은 자유로운 정신이 잘 반영된 것이다.

나무가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그 안에 길조를 알리는 한 마리의 까치가 들어 있으며

오른쪽 위에는 그믐달이 떠있어 향토적이며 꿈과 낭만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형상들은 자연과 사물을 자신의 통합된 간략한 언어로 변형시켜 자기를 드러내어 놓은 것이다.

또한 유화로 발라올린 마티에르를 긁어내어 담백한 표면을 보여주는 작업 방식을

장욱진이 자주 되풀이하여 말한 '인생은 자신을 철저히 소모시키는 것이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렸던 장욱진은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1945-47)과 서울대교수(1954-1960)를 역임한 후

덕소, 수안보, 용인 등지의 시골마을을 다니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작보다 소품 위주의 그림을 그렸던 그는 자신의 삶을 단순함으로 표상하고

그 심플함 아래 삶의 진리와 예술혼을 담아냈다.

1958년작 ‘까치’는 나무 위에 앉은 새와 밤하늘에 유유히 떠있는 초승달을 통해 작가의 고독함을 담아냈다.

까치는 작가가 즐겨 그린 소재 중 하나로 원형 구도 위에 곡선과 직선으로 재구성되어 등장한다.

표현방법에서 특이점은 유화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나이프로 긁어낸 흔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작가는 “이것은 곧 마음을 비우는 행위다”고 설명했다.

그림에 욕심부리지 않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순진무구한 미술을 추구했던 그는

자연과 삶의 합일을 이루는 도교적 세계, 즉 현실을 초월한 미술을 추구했던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김환기(1913-1974)

영원의 노래, 1957, 캔버스에 유채, 162.4×130.1cm, 삼성미술관 리움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 뿐이 아니라, 동해 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르도록 흰빛을 사랑하고 흰 옷을 많이 입습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흰 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 김환기의 개인전


‘백자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등 백자항아리를 예찬하며

유난히 백자항아리를 사랑한 화가 김환기는 그의 집 마루 밑까지도 백자항아리로 가득했다.

백자항아리에 미친 화가이며,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김환기는

일생에 걸쳐 서양의 조형언어로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조화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작가이다.

‘영원의 노래’는 김환기가 파리 체류 중에 제작한 작품으

도불 이전부터 즐겨 다루던 도자기와 창문이라는 소재에

산, 나무, 구름, 학, 사슴 등 십장생 도상이 더해져

도불 이후에도 여전히 작품제작의 모티브를 한국의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가져오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영원의 노래’는 항아리와 학, 사슴, 산, 구름문양 등이 조화를 이루며 문학적인 정서를 강하게 풍긴다.

평면적인 구성과 장식성 그리고 두터운 마티에르를 통해 작품은 견고성을 획득한다.

‘영원’의 소재인 전통과 자연이 같은 공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천경자(1924- )

목화밭에서, 1954, 종이에 채색, 114×89㎝, 개인소장

 

 

 

천경자(1924- ), 청춘의 문, 1968, 캔버스에 유채, 145×89㎝ 

 

스웨덴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그린 그림으로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영화를 통해 본 여배우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극중 역할에 관심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사용된 보라색은 화면을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만든다.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여학교를 나오고

1941년에 도쿄로 가서 여자미술전문학교 고등과 일본화부에 입학, 1943년 9월에 졸업하고 돌아왔다.

박래현과 졸업동기생이었으며, 천경자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입선(1942∼43)을 통해

전통화단에 데뷔했고, 광복 직후에는 개인전을 거듭하며 작품 역량을 드러냈다.

1955년에는 신선한 채색표현의 소녀상 작품 '정(靜)'이 국전에서 박래현에 앞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그녀의 찬란한 작품 활동은 박래현과 줄곧 쌍벽관계를 이루었다.

 

 

 

 

 

권옥연(1923-) 꿈, 1960, 캔버스에 유채, 73×100㎝, 국립현대미술관

 

 

박영선(1910-1994), 향토, 1955, 캔버스에 유채, 194.5×131㎝, 한국은행

 

 

장욱진(1917-1990), 물고기, 1959, 27×45.5㎝, 국립현대미술관

 

 

서진달(1908-1947), 인물, 1940, 종이에 연필, 28x24.6㎝, 국립현대미술관  

 

 

이달주(1920-1963), 귀로, 1954, 캔버스에 유채, 113×151㎝, 삼성미술관 리움

   

 

박고석(1917-2002) - 풍경(종이에 콘테)

 

 

 

 

 

 

제 5부 ‘근대의 복원’ 

근대미술작품의 보존과 수복을 소개한다.

식민과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 일구어져 오늘에 이른 근대미술작품이 제작되었던 시기는

보존적 측면은 고사하고 작업에 필수적인 재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였으므로

근대미술품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에 비해 재료의 열악함은 작품의 보존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미술작품의 보존 수복(修復) 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미술품의 보존관리와 관람문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권진규(1922-1973)

마두(馬頭), 1969년, 테라코타, 34×58×20㎝, 국립현대미술관 

 

테라코타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권진규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말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일본의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부르델의 제자였던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에게 사사하였다.

서울신문회관 화랑에서 개인전이후 크게 주목을 끌었고 1968년 일본전시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독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로 인물이나 말 등의 동물상을 정신적인 형상으로 표현하여

한국현대 조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말의 골격과 근육, 정확한 비례에 대한 엄밀한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약간 벌어진 입과 목의 긴장된 근육은 앞을 향해 달려 나가려는 말의 전신을 상상하게 할 만큼 생생하여

그 안에 내재된 힘을 느끼게 한다.

 

이유태(1916-1999)

화음(和音), 1944년, 화선지에 수묵채색, 210×148.5㎝, 국립현대미술관  

 

피아노가 있는 실내에서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실험실을 배경으로 한 <탐구>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피아노를 등지고 앉아 사색에 빠진 단아한 여성을 그린 것으로

그녀 앞에 놓인 모란꽃이 활짝 핀 화분은 풍요와 부귀를 의미한다.

이 작품은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한 사실적인 화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음악을 사랑하며 예술에 몰두하는 근대여성의 이상적인 미를 담았다.

 

김주경(1902-1981)

사양, 1927년, 캔버스에 유채, 77×93㎝, 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와 함께 인상주의에 심취하였던 김주경은

활동 초기, 인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한국의 풍토를 그려내고자 노력한 작가이다.

이와 함께 일본의 유화풍을 극복하고자 표현주의적 기법을 동원한 자연의 풍광을 주로 그렸는데

<사양>은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전체적으로 햇빛을 받은 푸른 녹음이

자연주의적 풍경화의 근간을 보여준다.

 

 

  

 

 

 

 

 

 

 

 

- 전수연 / 'one Fine Day'에 실린 '꽃 반딧불이의 첫 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