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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조각

Gijuzzang Dream 2008. 12. 25. 02:40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


ㅇ전시기간 : 2008년 12월 16일~2009년 3월 1일

ㅇ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오는 12월 16일(화)부터 내년 3월 1일(일)까지

기획특별전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8년 전 개최한 <삼국시대 불교조각>전의 후속편적인 성격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시대별로 재조명하는 특별전시의 일환이다.

 

전시유물은 통일신라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200여 점이 공개되며

특히, 백률사 금동불입상을 비롯한 국보 10점, 감은사 금동사리함 등 보물 9점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小倉) 수집품 중 통일신라 불상 5점과

일본 중요문화재 5점을 포함한 총 17점이 함께 전시된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군을 축출한 신라는

민족 통합정책을 펼쳐 우리 역사의 흐름에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통일신라인들은 개방성과 국제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우리 문화에서 고전미의 전형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특히 통일신라의 조각은 사실성과 초월성 그리고 종교성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나라 고대 문화유산의 정수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시는 크게 여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부터 제4부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통일신라 조각의 변화 양상을 조망할 수 있다.

이어 제5부에서는 통일신라 조각의 또 다른 전통인 십이지상과 무덤조각을,

이어 제6부에서는 신라 예술혼의 절정인 석굴암의 내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을 조성하였다.

 

제1부 <전환기, 변화의 모색>에서는

옛 백제지역인 충남 연기에서 출토된 불비상 같은 보수적인 상과

경주 감은사지 석탑 발견 금동사리외함처럼 통일 초 새로운 사실성을 보이는 작품들을 나란히 전시하여

7세기 후반 조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제2부 <새로운 지평을 열다>에서는

7세기 말 8세기 초에 새로운 당 조각 양식을 수용하여

생명감 넘치는 ‘통일신라 조각’의 특징이 성립되는 과정을

안압지 출토 금동판불이나 선산 출토 금동여래입상 등으로 제시한다.

특히 8세기 초에 제작된 중국 서안(西安) 출토 보경사(寶慶寺) 석조삼존불상 등을 함께 전시하여

통일신라 조각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3부 <완성과 변주>에서는

조형성과 정신성, 그리고 제작기법 면에서 절정기에 이르는 8세기 통일신라 조각의 명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 히코산진구[英彦山神宮]의 헤이안시대 경총(經冢: 경전을 땅에 묻은 곳)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현존하는 통일신라 최대의 금동불인 백률사 금동불입상 등

이 시기의 찬란한 금동불 20여 점이 장관을 연출한다.

뒤이어 전성기 조각의 여운을 간직하면서도 토착화를 걷는 금동불과 현세구복적인 약사불,

진리 추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함께 전시되어 당시의 신앙의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제4부 <공덕의 세계, 석탑 부조>에서는

통일신라 조각의 독자성을 잘 나타내는 사천왕과 팔부중 같은 석탑 부조를 종류별로 전시하여

당시 유행하였던 불교조각 도상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제5부 <무덤의 수호자들, 능묘조각>에서는

불교조각과 더불어 통일신라 조각 전통의 또 다른 축을 이루었던 십이지상과 무덤 조각이 전시되며,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제6부 <신라 예술혼의 절정, 석굴암>에서는

석굴암에서 출토된 금강역사상 머리 등의 실제 유물을 전시하는 한편,

일제 강점기에 석고로 본을 뜬 실물크기의 석굴암 부조 모형의 일부를 활용하여

석굴암의 내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불국토이자

장엄한 소우주의 중심에 들어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울림,통일신라 조각' 전시유물]  

 

 

  

 

석조불입상(石造佛坐像) Buddha

통일신라 751년, 경북 경주 석굴암, 높이 345.0, 국보 제24호  

 

석굴암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상으로서 완전한 환조로 뒷면까지 새겨졌다.

오른손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 끝을 아래로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다.

이 수인은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위엄 있고 당당한 신체와 자비로운 얼굴을 통하여

이상적인 부처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금제 아미타불좌상]
통일신라 706년, 경북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높이 12.0cm, 국보 제79호, 국립중앙박물관 

[금제불상]

금제아미타불좌상 / 금제불입상

통일신라 706년,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높이 12.0㎝, 국보 제79호 / 국보 제80호 

 

경주 구황동의 삼층석탑 2층 지붕돌 윗면에서 출토된 순금제 불입상과 불좌상이다.

불입상은 왼손에 옷주름 끝을 쥔 고식(古式)으로 만들어진 반면,

불좌상은 양식적으로 조금 더 진전된 표현을 보인다.

불상이 들어있던 사리상자 뚜껑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692년 효소왕(692-702 재위)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세웠으며,

이후 성덕왕(702-737 재위)이 706년 새로 탑을 중수하고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불입상은 석탑을 세우던 692년에 넣은 것이고,

불좌상은 706년 새로 봉안된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맺고 왼손을 무릎에 두는 불좌상의 수인은

7세기 중후반에 唐에서 유행하였던 아미타불의 그것과 같다.


 


[금동 약사불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 경북 경주 백률사,

높이 179.0cm, 국보 제28호, 국립경주박물관 

 

불국사의 비로자나, 아미타불과 함께 통일신라 3대 대형금동불로 꼽히며

주조기법이 우수하다. 상의 표면 곳곳에는 주조시에 내형과 외형의 간격을 유지시켜 주었던 30여 개의 원통형 틀잡이의 마감 흔적이 남아있어

매우 정밀한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로 주조하여 끼워넣은 두 손이 없어졌으나

팔의 높이로 보아 왼손에는 약합을 든 약사불일 가능성이 크다.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경북 경주 안압지, 높이 35.8㎝,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에서 출토된 9세기 금동불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불신과 대좌를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으며,

벌어진 가슴 부분으로 노출된 속옷에 바둑판무늬와 원무늬를 선으로 새겨 넣었다.

몸의 양감표현을 통하여 전체적으로 장대한 표현을 의도하였지만

像이 편평하고 조각이 얕아 조형적으로 입체감을 덜 하다.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통일신라, 높이 280.0㎝

 

대좌와 광배를 완전히 갖춘 통일신라 하대의 전형적인 석조불좌상이다.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낮은 육계와 나발의 머리, 단정한 얼굴모습, 대좌와 광배의 형태가

경상도지역에서 나온 다른 상들과 유사하다.

중대석에는 연꽃대좌 위에 부처에게 공양하는 다양한 천인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766년의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특히 9세기에는

865년의 철조비로자나불 등 부처의 모습을 한 비로자나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금동판삼존불좌상

통일신라, 경주 안압지, 높이 27.0㎝, 국립경주박물관, 보물 제1474호

 

밀랍을 이용하여 주조한 판불(板佛)이다.

결가부좌한 하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이 시점을 달리하여 깊이감을 구현하였고

협시보살상의 발끝을 본존의 연꽃대좌 아래로 살짝 내밀어 인물들 간에 공간감을 부여하는 등

진전된 표현수법을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행한 전법륜인(轉法輪印)의 불좌상은

아미타불로 알려져 있다.

  

 

탑신석에 새겨진 신장神將像 (또는 명왕明王像)

       Heavenly Guardians (Luminous Kings)

통일신라, 경북 경주 읍성 동문터 출토, 높이 86.0   

 

‘ㄱ'자 형으로 다듬어진 네 개의 돌덩어리를 합쳐 만든 석탑의 1층 탑신석의 일부이다.

총 6구의 인물상으로 석탑의 한 면당 두 구가 중앙의 문비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된 형식이다. 인물상들이 모두 짧은 치마를 두르고 팔이 4개씩 달린 특이한 형상이다.

이를 밀교(密敎)의 명왕(明王)으로 보기도 하나,

석탑에 새겨지기에는 격이 맞지 않으므로

명왕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통일신라, 경북 영덕 유금사, 높이 11.8㎝, 동제(銅製)

 

구름 위에 앉아 피리를 부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으로, 피리부분은 현재 소실되었다.

생기 있는 얼굴과 움직임이 많은 몸의 표현에서 조각적인 입체감이 돋보인다.

천인들은 공중을 날아다니며 꽃을 뿌리거나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공양행위를 통해 정토나 부처의 설법회, 열반 등의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사리상자]
통일신라 682년경, 경북 경주 감은사터 서삼층석탑,

높이 28.0cm, 보물 제366호, 국립중앙박물관 

 

 

 

 ‘기축(己丑)’이 새겨진 아미타불(己丑銘阿彌陀佛碑像)

통일신라 689년, 충남 연기 비암사, 높이 57.0㎝, 보물 제367호

 

‘계유(癸酉)’가 새겨진 아미타불과 함께 발견되었다.

물결로 표현된 연못 한 가운데에서 연꽃이 솟아올랐고,

그 위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역사(力士) 등이 9존을 이루고 있다.

난간과 계단의 표현 등에서 깊이감이 느껴지며 정토그림을 보는 듯하다.

뒷면의 명문에 새겨진 ‘기축(己丑)’은 689년으로 추정된다.

 

 

 

[십이지(원숭이, 申)]
통일신라 8세기, 경북 경주 성덕왕릉, 높이 116.0cm, 국립중앙박물관

 

 

십이지(十二支像) (돼지, 亥)  Zodiac Figure (Boar)

          납석(蠟石製), 통일신라, 전 경북 경주 김유신 장군묘, 높이 39.8, 국립경주박물관 

 

김유신 장군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의 둘레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봉분 주위를 두른 호석에 한 벌의 십이지상이 더 있어서

십이지상을 이중으로 배치한 드문 예가 된다.

토끼와 돼지의 시선 방향의 차이는 상의 배치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무장한 모습이 사천왕상과 비슷해 보이지만, 무기의 종류나 갑옷의 세부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석조 삼존불좌상]
중국 당 701~704년, 서안(西安) 보경사(寶慶寺),

높이 109.5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청동 약사불좌상]
일본 나라시대 8세기, 높이 37.3cm,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 헤럴드 경제, 2008.12.15 통일신라 금동불상, 슬픈 귀환

- 불교신문 2486호/ 12월20일자, 2008-12-16

 

 

 

 

 

 

 

 통일신라 초, 전환기의 불교조각(1) - (3) 

 

 


1. 전통 양식의 계승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사활을 건 대결 양상으로 치닫던 삼국시대 말,

신라는 양국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려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펼쳐졌다.

신라는 당시 중국의 신흥왕조였던 당과 연합하여 660년 숙적인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강국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이후 676년 신라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던 당까지 몰아내어 명실상부하게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였고 불완전하다는 약점을 지니어

고금을 통해 그 의미가 낮게 평가되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우리 민족문화의 형성에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686년에 기록된 청주 운천동사적비에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이 땅을 넓혔다’라는 구절의 예로 보더라도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인들은 당시에도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던 것 같다.

실제로 신라왕조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 삼국의 유민을 아우르는 민족통합정책을 펼쳐

통일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나가는 동시에, 당과의 교류도 재개하여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면서

점차 통일신라 특유의 문화를 성립하여 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각이 있었다.


문무왕(재위 661-681)과 신문왕(재위 681-692), 효소와(재위 692-702)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7세기 말까지의 통일신라 조각은 삼국시대 양식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도, 서역, 중국 등 외국의 최신 조각 경향을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구 양식과 신 양식이 공존하는 다양성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문무왕대에 토함산에 만들어 봉안한 석탈해상과 같은 초상 조각과

경주 황성동 고분 출토품처럼 무덤에 부장하는 조각도 제작되었으나, 현존품은 불교조각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 남아있는 조각품 중에는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다만 통일 이후에도 옛 백제지역인 충남 연기 지역에서 출토된 불비상(佛碑像)처럼

백제의 조각 양식을 보이는 보수적인 작품이 만들어져

한동안 삼국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기 지역의 불비상들은 무른 납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섬세하고 깊이있는 군상구도를 특징으로 하여

비슷한 시기의 경주지역 조각경향과는 차별화된 지역성을 지닌다.

이들 중에는 명문이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계유명은 673년(문무왕 13)으로, 무인명은 678년, 기축명은 689년(신문왕 9)으로

각각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명문의 발원자 집단에는 백제의 관등(官等)을 사용하는 백제 유민이 포함되어 있어

조각사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초 피정복지 모습의 역사적 복원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금동불은 삼국시대 조각양식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면서 부분적으로 변화를 보였다.

특히 경주 구황동에 있는 황복사(皇福寺) 터로 알려진 삼층석탑의 2층 옥개석 위에 출토된

금제불입상과 금베불좌상은 왕실에서 발원한 불상으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준작이다.

상이 들어있던 사리외함 뚜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692년 신문왕이 사망하자 그 아들 효소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상자에 불상을 넣어 안치하였으며, 효소왕의 동생인 성덕왕(재위 702-737)이

706년에 새로 탑을 중수하고 아미타불을 추가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조각수법이나 수인의 특징을 볼 때

입상은 비교적 고식을 띠어 692년경의 상으로,

양식적으로 보다 진전된 좌상은 706년에 성덕왕이 새로 납입한 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두 금제불상의 차이점을 통해 삼국시대 조각의 전통이 계승되면서

점차 새로운 양식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변화 양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119회, 2008년 12월17일

 

 

◆ 2. 사실적인 조형미의 등장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삼국시대의 고졸한 조각과는 전혀 다른 사실적이고 힘이 넘치는 조형의 작품들이

680년 무렵부터 제작되었다.

특히 흙으로 빚는 소조상은 기법과 표현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도상적으로는 사천왕처럼 인체의 근육과 갑옷의 표현이 극적이고 강렬한 신장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상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일정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불교에 크게 의지하였다.

<인왕경> 같은 경전에서는 불법을 받드는 국왕을 위하여 불교가 그 국토와 인민을 보호해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믿음을 호국불교(護國佛敎) 신앙이라고 하는데,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사원과 탑을 건립하고 불상과 경전을 제작하면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여 불교미술 제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통일신라의 호국불교신앙은 사천왕과 같은 부처의 권속 신들에 대한 신앙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인 사천왕천에 거주하며 불법을 받들고

사방의 국토를 수호한다.

<금광명경>의 ‘사천왕호국품’은 이와 같은 사천왕의 호국불교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에 의거하여 679년(문무왕 19) 경주 낭산(狼山)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다.

사천왕사는 일찍이 669년과 670년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밀교의식을

행하여 당의 침략을 물리친 내력을 지닌 호국불교신앙의 성지 같은 곳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절에는 통일신라 말에도 문두루비법과 관련된 오방신상(五方神像)이 있었다고 한다.

사천왕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천왕사(四天王寺)라는 이름으로 보아 이 절에 사천왕상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같은 맥락에서 사천왕사 목탑 터 출토의 녹유신장상 전돌 역시 호국적인 불교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전돌은 사찰이 정식 창건된 679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조각에 능통한 승려 양지(良志)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중을 제작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사에 근거하여 이 상들의 제작자를 양지로 보기도 한다.

한편 최근 실시된 발굴성과에 의하면,

이 상들은 본래 목탑의 기단부 벽면에 세워졌던 면석의 일부였음이 밝혀졌다.

한 면에 6구씩 총 24구가 둘러졌으며, 세 종류의 도상 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최근에는 사천왕이라는 종래의 명칭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통일신라의 본격적인 사천왕은 경주 감은사터 서탑과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 표면의 상들이다.

감은사는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던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그 아들인 신문왕(681-692 재위)이 682년에 완성한 절이다.

사리외함 네 면의 사천왕은 마치 경전의 내용과 같이

안으로는 내부의 불사리 즉 불법(不法)을 수호하고,

밖으로는 호국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의 배치형식과 의미체계는

훗날 석탑 일층 몸돌의 네 면에 새겨지는 사천왕 부조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금동사리기 외함의 북방다문천

통일신라 682년경, 경주 감은사지 서탑 출토, 높이 28.0㎝(사리기 외함),

국립경주박물관, 보물 366호

 

감은사 사리상자의 사천왕은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 칼, 곤봉 등 서로 다른 지물을 들고 있다.

사천왕 지물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북방 다문천은 대개 탑을 들고 있어서 사천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한편 서탑의 동방지국천과 동탑의 북방다문천은 발밑에 양(羊)을 밟고 서 있는데.

이러한 동물좌는 일반적인 악귀좌와 구별되며 시기적으로 이른 편에 속한다.

唐 675년에 제작된 용문석굴의 천왕상 중에도 감은사 사리함의 상과 유사하게

갑옷을 입거나 동물을 밟고 서 있는 것들이 있어서 중국과의 영향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능지탑으로 불리는 경주 낭산 유구의 사방에서 출토된 소조불좌상편들도

이 시기 조각의 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존재들이다. 

사방불 중의 어떤 상이라든지 신체의 어느 부위임을 알려주는 명문이 안쪽에 새겨진 편들도 있다.

상의 추정 복원치는 높이 약 2.5m로서

이 정도 크기의 소조불상을 불에 굽고 조립식으로 만든 제작기법은

중국과 일본에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유적은 종래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막연히 추정되어 왔으나,

근래들어 원래의 모습과 명칭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노천의 탑이 아니라 금당 내부에서 사방불을 감입한 중심주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120회, 2008년 12월 24일

 

 

◆ 3. 새로운 지평을 열다

 

통일신라 조각사의 시대를 구분할 때에는

8세기 중반의 석굴암을 기준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일신라 전기, 특히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반은 삼국통일 이후,

신구(新舊) 양식이 공존하는 전환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당나라 양식을 수용하여

통일신라 조각의 전형이 차츰 성립되는 시기로 여겨진다. 즉 이 기간동안

지금 우리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통일신라 조각의 특징적인 양식이 형성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

 

7세기 말경, 한국과 중국은 나당전쟁 이후 껄끄러웠던 관계를 청산하고 사신의 왕래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교류를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불교방면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에 따라 한, 중, 일의 불교조각품에서도 국제적인 공통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렇게 공유된 조각양식은 7세기 초당기에 중국과 인도,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배경으로

당 조각에 적극 수용되었던 인도 굽타시대 후기의 사실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조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품으로는

경주 안압지와 구황동 연못터에서 출토된 일군의 금동판불 들을 들 수 있다.

밀랍을 이용하여 주조한 이 상들은 불신의 팽팽한 탄력감과 굴곡이 율동적인 옷주름과 어울려

여태껏 보지 못한 조형적인 긴장감과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 중에서 679년경에 완성된 안압지 즉 월지(月池) 삼존판불의 본존을 보면,

한 장의 대의를 통견식으로 입고 전법륜인 즉 설법인을 하고 있다.

비슷한 모습의 불좌상이 7세기 중국 唐나라 초기의 돈황석굴에 그려진 아미타정토변상도와

일본 나라시대 7세기말 , 8세기초의 압출아미타불좌상에서도 보인다.

금동판 삼존불좌상

통일신라 7세기 후기, 경주시 안압지, 높이 27.0㎝,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75호

 

 

아미타 오존압출불

일본 나라시대 7세기말 또는 8세기초, 높이 39.0㎝,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호류지 헌납보물, 중요문화재

 

재료나 제작기법은 서로 다르지만 월지 삼존판불은

통일신라 조각이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미술에서 유행하였던 도상과 양식을 공유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그 존명이 아미타불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금동불보다 새로운 변화의 수용속도가 느린 석불에서도 唐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도상이 채택되고 있어

조각에서의 국제적인 공통성이 확인된다.

대략 700년 전후 제작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칠불암의 마애삼존불은

대의를 편단우견으로 입은 본격적인 항마촉지인의 불좌상이다.

이 像은 보경사 석불상의 예와 같이 인도불상의 영향을 받아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唐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된 일련의 항마촉지인 불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항마촉지인 자체도 석굴암 본존불을 거쳐

훗날 통일신라의 수많은 불좌상에 반복되는 중요한 수인이기도 하다.

이 시기 통일신라 조각의 기준작으로

경주 감산사(甘山寺)터 출토 석조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감산사 석불상 두 구의 광배 뒷면에는 불상을 만든 내력이 새겨져 있는데,

성덕왕대(702-737 재위) 때인 705년에 唐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지성(金志成)의 발원으로

719년(성덕왕 18)에 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당하고 육감적인 신체는 전성기 당나라 조각의 양식을 적극 수용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넓적한 얼굴과 관능미를 절제한 약간 경직된 신체표현은 한국적인 조형감각이 반영된 것으로,

이후 중국불상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될 통일신라 조각의 경향을 암시하고 있다.

 

감산사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은 통일신라 불상과 보살상의 한 형식으로 각각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불입상의 경우 경북 선산(구미) 출토 금동불입상이 좋은 비교가 된다.

이 상은 국내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입상 중에서 크기가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조각양식이나 주조기법 면에서

이른바 Y자형 옷주름의 금동불입상이 정형화되기 이전인 8세기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국제적인 보편성과 신라적인 특수성을 함께 지닌 이 시기의 불상들에서

통일신라 조각양식이 ‘완성’되기 이전 단계의 신선함과 활력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묘미이다.

     

왼쪽 :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통일신라 719년경, 경북 경주시 외동면 신계리, 높이 275.0㎝,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오른쪽 :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8세기 전기, 경북 선산, 높이 40.3㎝,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82호

 

-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큐레이터와의 대화 121회, 2008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