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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팔공산 파계사 건칠보살좌상

Gijuzzang Dream 2009. 1. 6. 23:37

 

 

 

 

 

 파계사 보살상이 품고 있던 조선왕실 이야기

 


팔공산은 대구공항에서는 지척인데다 순환도로를 따라 오르기만 하면

일정 없이도 완벽한 답사를 할 수 있어 즐겨 찾는 곳이다. 산자락을 따라 절집은 굽이굽이 이어지고

봄에는 벚꽃이 하늘을 뒤덮고 여름이면 산능성이에 펼쳐진 포도밭과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붉은 터널을 만들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싶다.

 

파계사는 조선왕실의 원당(願堂)역할을 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 사찰의 중심전각을 이룬다.

파계사의 원통전(圓通殿)에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화려한 수미단 위에 상현좌(裳懸座)의 형식으로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보살상은 113㎝의 등신이며 전면에 금색이 찬연하고,

머리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높고 큰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양손은 제1지와 제3지를 맞대어 아미타정인의 수인을 하고 지물(持物)은 없으며,

보살상이 입은 불의(佛衣) 위에는 화려한 영락(瓔珞)이 장식되어 있다.

 



1979년에 보살상을 개금(改金)하면서 복장(腹藏 : 불상을 조성할 때 배 안에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일

또는 사리나 불경을 이르는 말)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영조의 도포와 함께

1447년(세종 29)에 보살상이 중수(重修)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발원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파계사 보살상은 작품성, 시대성, 현존상태 등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불상을 편년하는 기준작품으로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최근 파계사 보살상에 관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그동안 나무로 만든 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건칠불상(乾漆佛像)이라는 점이다.

문화재청은 불교문화재연구소와 공동으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불교문화재 일제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주요 불상에 한해 비파괴 광학조사를 실시하던 중 파계사 보살상의 재료가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X-ray 사진촬영을 통해

불상의 내부에 납입된 유물의 내용과 불상을 만든 재료 및 제작기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불상은 외면에 금칠을 하기 때문에 육안조사로는 연구에 많은 한계가 있어왔는데,

실로 문화재조사에도 과학적 기술의 도입이 보여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계사 보살상의 내부에 나온 유물은 건륭(乾隆) 연간에 작성된 발원문 1점과

옹정(雍正) 연간의 발원문 2점, 그리고 영조의 도포 1점, 불서류와 동경, 수정 등 총 16품목 75점이다.

특히 1740년(乾隆 5)에 기록된 발원문은 보살상의 중수연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고,

파계사 보살상과 복장유물 일괄은 보물 제992호로 지정되어있다.

1740년 9월에 작성된 발원문에는 영조대왕이 불화 천불을 희사하고 파계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성상의 청사상의(靑紗上衣)를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발원문의 내용처럼 함께 발견된 도포가 바로 영조대왕의 청사상의(靑紗上衣)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동안 사찰에 구전되어오던 영조대왕과 파계사의 관련이야기들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간에 관심을 모았던 보살상의 중수연대와 영조대왕 도포에 관한 정보 뿐,

그동안 복장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알 수 없었다.

최근 조사에 의해서 비로소 파계사 건칠보살상의 복장유물 75점이 소개되었고,

조선시대 왕실발원의 다른 불상과도 비교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보살상의 바닥면을 덮은 목판과 불상의 복장 내부에서

조성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계사 보살상의 저부목판에는 발원문에서와 같은 1447년(正統 12)에 중수했음이 기록되어있고,

복장내부의 벽면에는 대시주(大施主)와 화주(化主)의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이 두 종류의 명문 자료는 불상에 직접 기록된 1차 자료인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복장내부의 명문에서 대시주자가 소개된 것이다.

시주자는 불상의 조성에 있어 다방면의 공력을 들인 인물로서,

불상이 조성된 배경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大施主로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李琰), 신빈김씨(愼嬪金氏), 영해군 장(寧海君璋)”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소생으로 세종의 8번째 아들이다.

이염은 세종16년(1434)에 태어나 1441년에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졌다가

1443년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이후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이염이 영응대군으로 봉해졌던 때가 그의 나이 14세로,

파계사 보살상을 중수하여 영응대군 이염이 대시주로 참여했던 1447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염은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도 총애를 극진히 받은 것으로 전하며,

1450년 세종대왕의 죽음도 그의 집인 동별궁을 택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시주의 두 번째에 기록된 신빈 김씨(愼嬪 金氏)라는 인물은 세종대왕의 후궁으로서,

명문에서 신빈김씨 다음으로 기록된 영해군 장(寧海君 璋)의 어머니이다.

이장(李璋)은 세종과 후궁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9번째 아들로,

파계사 보살상의 대시주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차례대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영응대군은 왕실 사람 중에서도 신빈 김씨와 그녀의 아들과 나란히 대시주자로 동참한 것일까.

영응대군은 세종의 적손으로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이며, 영해군은 후궁 신빈 김씨의 아들로 서손인데

신빈 김씨를 사이에 두고 차례로 기록된 점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은 당시 세종대의 왕실 상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빈 김씨는 원래 내자시(內資寺)의 종으로 공노비였는데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 나인이 되었다.

세종 9년부터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는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신빈 김씨는 애초 공노비였던 신분에서 왕비의 지밀 나인으로

세종의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후궁으로 수직 상승한 셈인데, 과연 조선시대의 신데렐라라고 할 수 있겠다.

신빈 김씨는 조선시대 후궁들 중에서 두 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헌왕후 역시 조선시대 왕비 중에서는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왕비인데,

세종 9년 이후 아이를 낳지 못한 소헌왕후는 7년 만에 임신을 하여

세종 16년(1434) 4월 15일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낳았다.

보기 드물게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그리고 신빈 김씨는 의가 좋아서

소헌왕후는 영응대군이 태어나자마자 신빈 김씨에게 맡겨 보살피게 했다.

영응대군 이염과 영해군 이장은 1살 차이로 1447년은 영응대군의 나이 14세, 영해군이 13세 되던 해이다.

따라서 파계사 보살상의 중수불사에는

이염이 영응대군의 군호를 받은 것을 기념하여 대시주로 참여하였으며,

신빈 김씨와 그녀의 아들 영해군도 함께 동참하여

永膺大君 李琰 - 愼嬪 金氏 - 寧海君 李璋의 순서로 기록되었다는 중요한 숨은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의 파계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서 寺歷이 분명하지만,

조선전기의 파계사는 기록이나 유물이 전하는 바가 없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파계사의 사력과 관련된 자료는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일부 복장자료와

「파계사원당사적(把溪寺願堂史蹟)」,「어보사적(御寶史蹟)」,「어보봉안제차(御寶奉安第次)」,

그리고 몇 종의 「완문(完文)」등이 전하는데

모두 조선중기 이후의 사찰역사와 관련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파계사 역사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고

사적기에도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心地)왕사의 창건 이후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파계사는 숙종대부터 조선왕실과 깊은 인연으로 왕실의 원찰로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고

조선의 마지막 왕조까지 이러한 관계는 계속되어왔다.

영조가 11세 때 파계사의「자응전(慈應殿)」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는 사실로도

영조와 파계사, 조선왕실과 파계사의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751년에는 우의정 이의현을 파견하여 기영각(祈永閣)을 세워

생전의 수복(壽福)과 사후의 명복을 기원하는 축원당으로 삼았다.

정조 1년(1777)에는 「천향각(天香閣)」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고,

순조 31년(1831)에는 왕실에서 내려준 돈과 희사로 미타암을 세웠다.

철종 11년(1860) 백화루를 중수할 때는 왕비가 내탕금을 내려준 바 있고,

고종 14년(1877)에는 순찰사 박제인이 기영각을 수리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성종 · 숙종 · 덕종 · 영조의 위패가 이곳에 봉안되었다는 점도

파계사가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지속하였음을 말해 준다.

파계사 건칠보살좌상은 불상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중요성뿐만 아니라,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과 영조대왕의 어의를 봉안한 점,

특히 불상의 중수에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을 비롯한 왕실가족이 대시주자로 참여한 점 등에서

그동안 파계사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조선전기의 사력을 실증적인 자료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산속 작은 법당, 고된 세월의 풍파를 겪었음이 분명할 터인데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는 변함없고 그 안에 숨은 이야기마저 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 최은령,문화재청 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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