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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발굴조사 - 임해전 신라왕경(王京)유적, 분황사 가람규모, 월성해자

Gijuzzang Dream 2009. 1. 4. 15:43

 

  

 

 

 

 

 

 

 신라왕경(王京)의 흔적

- 신라왕경유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12월 12일(금) 유적현장에서

경주 임해전지(臨海殿址, 사적 제18호)북편지역의 신라왕경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설명회를 개최한다.

 

 신라 왕경유적 전경

 

 

이번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문화권 학술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신라왕경의 구조와 왕궁의 규모를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기획연구 조사이다.

안압지 북편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7년부터 2년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8동의 왕궁관련 유구와 대형 담장지, 우물 등 10여 기의 건축 관련시설이 확인되었다.

특히,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한 1호 건물지는

현재까지 확인된 건물지의 길이만 해도 30m가 넘는 대형건물지로서

인근의 안압지에서 확인된 임해전지(臨海殿址)의 전각(殿閣)건물과 유사한 규모로 추정된다.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초석의 적심(積心) 또한 직경 2m가 넘는 큰 것이어서

이곳에 신라시대 왕궁(王宮), 혹은 중요관청과 관련이 있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1호, 2호 건물지

  

또한, 4호 건물지의 서편에서 확인된 우물지는 깊이가 7.3m에 이르며

우물 내부에서 ‘습부(習部)’, ‘정(井)’, ‘문생(文生)’, ‘병일두(丙一斗)’ 등의 글자가 있는 명문와(銘文瓦)와

토기를 비롯하여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목이 긴 병(甁)과 말, 돼지 등의 동물 뼈가 다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물 또는 물과 관련된 어떤 의식이 이곳에서 행하여 졌음을 짐작 할 수 있다.

 

  

4호 건물지와 1호 우물

 

 

출토유물 - 각종토기

 

이 외에도 너비 0.7cm 정도의 정육면체에 원형의 점을 새겨 숫자를 나타낸 상아제(象牙製)주사위가

1점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30여년 전 안압지에서 출토된 14면체 주사위와 같이,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의 놀이문화를 추측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그 동안 신라왕경에 설치된 방리(方里)의 흔적으로 널리 알려졌던 황룡사와

왕경유적(S1E1유적)의 남쪽에서 확인된 너비 15m규모의 동서대로(東西大路)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까지 신라왕궁의 규모를 월성에서 안압지 정도로 추정하였던 견해에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안압지와 임해전지의 북쪽 지역에서는 건물 8동의 흔적이 확인됐다.

이 중 가장 큰 건물은 길이 30m가 넘었고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 지름이 2m나 될 정도였다.

임해전 주변에 원래 태자가 머물던 동궁(東宮) 등의 별궁이 있었다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이곳은 왕궁이나 주요 관청이 여러 채 밀집해 있던 신라의 행정타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대규모 건물터가 발견된 임해전지 북쪽 발굴 현장 통신라시대의 석조유물 근처(연합뉴스)

- 담당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주헌, 차순철
- 문화재청,  2008-12-11

 


 

 

통일신라시대엔 우물도 장례를 치렀나?  

경주박물관 · 임해전지 인근 우물의 미스터리

 

지난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 앞에서 확인된 깊이 10.27m의 통일신라시대 우물은

여러모로 의문을 증폭시킨 유적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7-8세 가량 되는 어린아이 인골이

머리를 바닥쪽으로 향한 채 거꾸로 박힌 모습으로 확인된 것을 비롯해

소 갈비뼈(4분의 1마리 분)와 닭뼈를 비롯한 많은 동물뼈,

두레박 2점, 그리고 10여 점에 달하는 토기 등이 비교적 가지런한 상태로 출토됐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인골은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가 감정한 결과 두개골이 함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우물 속 상황은 우물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그것을 폐기하던 시점에

모종의 제사와 같은 의식이 치러졌으며,

그 일환으로 사람을 희생물로 바치는 의식도 가미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이 발굴은 그 의식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가 최근 경주 임해전지(臨海殿址. 사적 18호) 북쪽

신라 왕경(王京) 유적에서 발굴한 통일신라시대 우물은 그 실마리를 풀어줄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번에 확인한 우물도 출토 유물 연대나 구조가 경주박물관 우물의 그 것과 매우 흡사하다.

즉, 깊이는 7.2m나 되는 원형 석축 우물이지만 지름은 80㎝ 정도에 지나지 않아,

성인 한 사람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하다.

이에 더해 이곳 출토 유물 또한 각종 동물뼈와 토기가 주축을 이룬다.

두 지역 우물 출토 토기류는 모두 8세기 후반에 제작됐다고 판단된다는 점도 같다.
다만, 경주박물관 우물에서 나온 인골이

이번 임해전지 인근 우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점이 다를 뿐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에서 이 우물이 8세기 말 혹은 9세기 초반에 폐기된 뒤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사실을 확인했다고 현장 조사원인 차순철 학예연구사가 말했다.
이로써 본다면, 우물 안 출토 토기류가 제작된 시점과 우물이 폐기된 시점,

나아가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시점은 큰 차이가 없이 거의 동시에 진행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우물 안 출토 토기류와 각종 동물뼈는 우물이 폐기되던 시점에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매납(埋納)된 것이 된다.
우물 속 토기류 중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은 이들 토기류가 실수에 의해,

예컨대, 물을 길어 올리다가 잘못해서 우물로 빠뜨린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임해전지 인근 우물에서도 경주박물관 우물에서
마찬가지로

머리 뒤꽂이 여러 점과 청동수저 1점이 출토된 점도 비상한 주목을 끈다.
이런 물품들은 대체로 이 시기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서 그 부장품으로 넣어주는 것들이기도 하다.

차 학예사는 "두 우물 유물 출토 양상을 보면

그 유물 상당수가 모종의 제사의식과 관련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이번 임해전지 인근 우물의 경우, 그런 의식이 우물을 만든 직후에 행해졌는지,

아니면 우물을 폐기할 시점에 치러진 것인지는 추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제사의식이 우물이 폐기된 시점에 거행된 것이라면,

신라인들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 우물을 폐기하면서

마치 사람을 장례하듯이 우물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 연합뉴스, 2008-12-12

 

 

 

 

 

 

 

 

 

 천년고찰 분황사(芬皇寺) 가람규모 확인

-경주 분황사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 개최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신라시대 고대가람으로 알려진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과 성과를

2008년 12월 12일 현장에서 관계학자와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1990년부터 신라시대 사찰의 가람배치와 그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 동안의 발굴조사에서는

석탑 북쪽에 삼금당(三金堂)이 ‘품(品)’ 자형으로 배치된

소위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창건 가람을

확인하였다.

이후 일금당(一金堂)으로 변모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배치를 이룬 중건 가람 등

3차례에 걸쳐 진행된 금당의 변천과정과 강당지(講堂址)를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이번 발굴조사 지역은, 최근까지 분황사로 진입하는 도로와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신라시대 분황사의 중문지(中門址)와 남회랑지(南廻廊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그 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1차 중건시기의 중문지를 비롯하여

남회랑지 등 대형 건물지 4동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석축 배수로(排水路) 1기가 확인되었다.

 분황사 주차장 부지 발굴유구 전경

 

 

남쪽 정문인 중문(中門)과 2중 회랑인 서남쪽 복랑(複廊)의 구조가 확인됐다.

중문의 길이가 12.63m, 서남 복랑의 길이가 62.89m이므로

절이 좌우대칭형이라면 동서 너비는 138.41m(복랑×2+중문)가 되며,

이는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의 176m에 버금가는 규모다.


중문지는 전체길이 12.63m에 도리칸 3칸, 보칸 2칸 규모이다.

이는 가람의 핵심인 석탑 및 금당과 중문이 모두 남북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분황사는 전형적인 평지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문지
중문지 초석적심석군

중문지의 양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회랑지가 확인되었는데,

보칸 2칸 규모의 복랑(複廊)구조이다.

서남회랑지는 동서 길이 62.89m의 범위에 19칸의 도리칸이 배치되어 있으며,

동남회랑지는 지금까지 5칸의 도리칸이 확인된 상태이다.

 

분황사의 가람배치가 남북중심선을 기준으로 좌우대칭형이라고 한다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동서 너비는 138.4m로 황룡사의 176m에 버금가는 대규모 가람이다.

또한, 신라지역에서 밝혀진 고대가람 가운데 복랑의 구조를 갖춘 회랑은

지금까지 황룡사가 유일한 예였으나, 분황사에서도 복랑구조의 회랑이 확인되었다는 점은

品자형 삼금당식을 배치한 창건가람과 함께 한국 고대건축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실로 평가된다.

- 담당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주헌, 유홍식
- 전화번호 : 054-777-8805
- 문화재청 2008-12-11

 

 

 

 

 

 

 

 

 

 

 월성해자(月城垓子), 천년신라의 궁성을 감싸다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4호 해자 정비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2008년 12월 30일 경주시와 함께

천년신라의 궁성으로 알려진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북편에서 2006년 발굴조사 된

통일신라시대의 해자(垓子) 1기에 대한 정비를 마무리 하고 그 모습을 현장에서 공개한다.

해자(垓子)란 옛 시기 토성(土城)이나 석성(石城)의 외부 둘레를 판 후 그 안에 물을 가두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기본적인 방어시설이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의 북편지역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습지가 형성되어 있어

자연 해자의 기능을 하여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이곳의 습지 등을 재정비하여 10여 개의 석축해자를 축조한 흔적이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정비가 이루어진 월성 4호 해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m이고 남북의 너비는 약 40m에 달하는 장타원형 모양의 큰 규모로

해자 전체의 3/4정도가 남아 있으나 많은 석축이 무너지고 유실된 상태였다.

따라서 발굴된 유구의 상태와 조사 자료를 근거로 최대한 당시 해자의 원형에 가깝도록 정비하기 위하여

차례 관계전문가의 자문과 검토를 거쳐 2년간의 보수작업 끝에 정비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자의 유실된 북서편 일부 구간은 현재 확인된 자료만으로 추정하는데 한계가 있어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부분까지만 정비하였다.

또한 내부에 있었을 물도 이번에는 채우지 않은 상태로 정비하였다. 향후 다른 해자가 조사되어

전체적인 양상이 확인되고 난 후 물을 채우는 등 종합적인 정비가 진행될 예정이다.

 

발굴조사 당시 전경


월성 4호 해자는 모두 3차례에 걸쳐 개축된 흔적이 확인된다.

7세기 후반 무렵 사람 머리 크기의 큰 강돌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쌓은 1차 해자와

8세기 전반경 잘 다듬은 장방형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2차 해자,

그리고 강돌과 다듬은 돌을 혼용하여 축조한 마지막 3차 해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자의 축조 방법과 기능이 점차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차 석축 모습

 

특히 해자의 동쪽 석축에서는 물을 담기 위한 입수구(入水溝)가,

그리고 서쪽 석축에서는 물을 빼는 출수구(出水溝)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전체 해자가 위치한 지형 자체가 동편에서 서편으로 가면서 지형이 낮아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즉 동쪽 해자의 물이 서쪽 해자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이 물이 그와 연접한 서쪽 해자로 계속 흐르게 하는 자연스런 치수를 고려한 것이다.

특히 구조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후기로 가면서 해자는 본래의 방어적인 기능보다는 조경용의 기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정비가 마무리된 월성 4호 해자는

1980년대 복원된 동문지 북편의 해자와 함께 안압지(월지), 석빙고, 첨성대 등과 연계하여

경주의 문화유적을 찾는 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천년 궁성인 신라 월성의 분위기를 한층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경주 월성 4호 해자의 정비 후 모습

 

 

경주 월성 4호 해자의 정비 후 모습 1

 

- 담당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주헌, 지성진
- 문화재청,  2008-12-30

 

 

 

 

 

 

 

 

 

 

이번 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문화권 학술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신라왕경의 구조와 왕궁의 규모를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기획연구 조사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1,000년 왕도(王都), 신라(新羅) 서라벌(徐羅伐).

즉 신라의 왕도인 경주(慶州)일 것인데,

이유는 반도(半島)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천년을 지켜온 우리 역사의 최대 중심지이기 때문이리라.


1,000년 왕도의 수수께끼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옛 도시들에 대한 흔적,

즉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데조차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문헌상에 등장하는 성(城)이나 도시가 현재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도읍이라는 고조선(古朝鮮)의 왕검성(王儉城) 퍼즐 조각은 너무도 빈약하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삼국의 왕도(王都)에 대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모두의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들의 기억 속에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서라벌(徐羅伐), 즉 신라(新羅)의 왕도(王都)인 경주(慶州)일 것이다.

승자(勝者)의 도읍(都邑)이라는 결정적 요인이 있기도 하지만, 한 곳에서만 약 1,000년을 지냈기에

그 장구한 세월의 무게가 새겨 놓은 자취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1,000년 왕도(王都)!

한 왕조(王朝)가 건국하여 500년을 지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늘 한 곳에 도읍(都邑)을 정하여

1,000년을 변함없이 지낸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동시기 고구려나 백제는 상대적으로 짧은 존속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세 번 도읍을 옮긴 예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라(新羅) 서라벌(徐羅伐)!

반도(半島)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천년을 지켜온 우리 역사의 최대 중심지.

학생시절 수학여행의 추억이 아로 새겨진 곳.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모이게 한 그 배경에도 역시 신라 왕도로서의 역사적 지위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경주에 들어서면 그 아늑한 분지(盆地) 지형의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 서, 남, 북을 가로 막고 있는 주산들과 그 안의 서쪽에 위치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서천(西川),

그리고 이 서천으로 흘러드는 지류인 남쪽의 남천(南川)과 북쪽의 북천(北川).

이 세 하천이 감싸고 있는 좁은 공간이 신라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불과 100리 밖에 동해가 있다는 것을 실감키 어렵다.

 

이 좁은 분지 안에 신라 1,000년의 역사 퍼즐이 숨겨져 있다.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무덤들과 기념물들.

이들이 신라 왕경(王京)의 일부분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다.

왕경(王京)이란 왕이 거쳐하는 왕궁을 중심으로 그 나라 수도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이다.

따라서 당대에 가장 번성한 곳이며, 중요한 산물이 모이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가장 활발했던 장소이다.

 

과연 신라 왕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세기 초부터 이곳에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초창기인 일제강점기의 조사 내용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대부분이 커다란 무덤을 파헤쳐 금은보화를 찾거나 값나가는 것들을 찾으려는

고물애호가(古物愛好家)의 각축장인 듯싶었다.

마구 파헤쳐서 얻어진 자료들은 마치 그림이 지워지고 옆면이 마모된 퍼즐 조각과도 같다.

어느 부분에 맞추어야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게 한다.

이들을 통한 왕경의 모습은, 그저 퍼즐 조각이 많고 화려하니, 막연히 대단하였으려니 할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1,000년 왕도, 신라 왕경에도 왕궁, 관청, 사원, 시장, 무덤, 생산시설, 도로, 주택,

그리고 방어용 성곽 등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잃어버린 공간들과 늘어나는 퍼즐조각


신라 왕경에 대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은 비로소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수집된 퍼즐조각(금관, 금제이식, 금동불상, 토기, 와당 등과 그 출토유적)으로 알려진

신라 왕경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찾아내고(발굴), 좀 더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서(정비)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목적이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거대한 무덤인 황남대총(98호분, 1973-1975년 조사)과 천마총(155호분, 1973년 조사)이

발굴되었다.

역시 기대처럼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부장유물들이 양호한 정보를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후 조사는 탄력을 받게 되었으며, 왕실의 정원인 안압지 발굴조사(1975-1976년),

그리고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지 발굴조사(1976-1983년)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황룡사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탔다는 사실은 발굴에 의해 여실히 그 처참함이 밝혀지고 있다.

즉, 금당지 등의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초석들이 화재 당시의 열에 의해 옆면이 터져나간 모습을

지금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심의 초점은 왕릉과 왕궁의 조사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발굴되었으며,

월성로, 계림로 개설로 인해 중, 소형 고분들이 잇따라 발굴됨으로써

죽은 자를 위한 공간 정보는 상당히 축적되게 되었다.

특히 2007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하는 이른바 ‘쪽샘지구’ 신라고분에 대한 조사는

왕족, 귀족들의 무덤 발굴이라는 점에서 또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한편 신라인들의 살아있을 때의 공간,

그 중에서도 왕의 생활 터전인 왕궁에 대해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신라 초기의 왕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치 않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나정(蘿井)이나 오릉(五陵)이 있는 서남산(西南山)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에 따르면,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22년(서기 101)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왕이 옮겨 살았다’ 고 하였다.

아마도 이후 이 월성이 왕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곳에(동문지 주변) 대한 발굴조사가 1979년 잠시 실시된 적이 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조사는 계속되지 못하고 아직까지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숙제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재성(在城)’명 기와는 이곳이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특히 2007-2008년에 월성 내부 지역에 대한 ‘비파괴물리탐사’의 결과로

상당 기간에 걸쳐 대형의 많은 건물들이 중복되어 지하에 묻혀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향후의 발굴결과가 주목된다.

 

한편, 이 월성 주변에 대한 조사가 1984년 이후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남천의 자연 방어 기능을 이용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해자(垓字)라는 방어시설로 보완하였던 점 등은

이 월성이 지닌 의미를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해자가 마치 연못의 형태로 10여 개가 연접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은

월성이 지닌 왕궁으로서의 성격 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적나라하게 조각된 남근석(男根石)을 비롯하여, 토우(土偶), 목간(木簡)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목간은 인명, 지명, 관직명은 물론 물품명 등이 다양하게 가록되어 있어

당시의 문자 생활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찾아지다


신라 왕경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중반 황룡사지 남쪽 외곽의 조사에서 확인된

동서방향의 도로(너비 약 15m)의 발견으로 증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주박물관 신축 공사 시에 확인된 남북방향의 도로(너비 23m),

그리고 분황사 남쪽, 성동동, 동천동 등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도로유적들은

잔자갈과 모래, 흙 등을 층층이 깔고 점토로 견고하게 다지는 등

아주 치밀한 토목공법이 적용된 뛰어난 기술을 보이고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일인 학자들이 추정 안을 발표한 이후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듯이,

이는 신라 왕경이 크고 작은 도로를 중심으로 마치 바둑판 모양의 격자로 구획된(하나의 구획 공간이 곧 1坊) 방리제(坊里制)로 구성된 고도의 계획도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황룡사지 동쪽에서 실시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이른바 ‘S1E1지구’에 대한 발굴조사(1987-2002년)는 본격적인 신라의 도시계획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동-서 도로와 남-북 도로로 구획된 한 방坊의 크기가(동서 167.5m, 남북 172.5m) 확인되었으며, 그 안에서 수많은 건물과 우물, 좁은 도로,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와당이나 토기 등은 당시 이 지역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또한 2007년부터 시작된 안압지 북동편에 대한 조사는 신라 왕궁의 영역은 물론 왕경의 구조 등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쏟아져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대형 기단을 갖춘 건물지와 담장의 실체,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石槽),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철제 망을 갖추고 있는 배수시설 등은 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특히 상아제 주사위는, 1970년대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사위와 더불어,

당시의 놀이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분황사의 동편에 자리한 원지(園池)유적의 발굴은

용강동 원지유적과 더불어 당시의 조경에 대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신라 왕경 내에는 이처럼 왕궁과 사원, 그리고 수많은 관청 건물과 민가, 도로들이 있었다.

또한 시장(市場)도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소지마립간 때 처음 시장을 열었다고(490년) 하며,

이후 지증마립간 때 동시(東市)(509년), 효소왕대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되었다고(695년) 한다.

아직 이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규모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라 왕경에 대한 연구는 몇몇 중심 주제(고분이나 사찰 등)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천년을 한 터전에서 살아왔으니 그 층의 두께와 갈래가 얼마나 두텁고 다양하랴!

그 후 다시 천년이 지난 지금에서 그 왕경의 퍼즐이 서서히 되찾아지고 맞추어져 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조각이 멸실되고 왜곡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새로운 방법과 지혜가 그 잃어버린 공간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 지병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사진,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9년 3월6일,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