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원리(分院里) 시기 조선백자의 특징 | ||||||||||||||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는 영조 28년(1752)에서 분원의 경영권이 민간으로 이양(移讓)되기 전인 1883년까지로 조선시대 마지막 왕실 관요가 꽃피웠던 시기이다.
분원리 시기에는 폭 넓어진 백자 수요층의 요구에 상응하는 다양한 문양소재가 등장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장식기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갑번(匣燔)한 다채(多彩) 장식의 백자들이 제작되고 있어 기존의 검박하고 진중한 조선 백자의 미감(美感)과 구별되는 또 다른 조선 백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쇠락해진 국력은 영조(1724~1776년 재위)와 정조(1776~1800년 재위)를 거치면서 실학의 발달과 이모작(二毛作)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향상으로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었으며, 중국 · 일본과의 활발한 해외무역을 통해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활발한 상업 활동을 통해 축적된 부(富)를 기반으로 중인과 유산계급층들이 분원리 시기에 새로운 백자 수요층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중국으로부터 값싼 토청(土靑) 안료가 대거 유입됨에 따라 사번(私燔)에 의해 분원에서 제작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청화백자(靑畵白磁)들이 민간에까지 유통되기에 이른다.
간결하고 단아한 순백(純白)의 분원백자 제작에 있어 기묘하고 화려한 장식적 기법의 성행을 이끌어냈다. 음 · 양각을 비롯하여 기교 있는 솜씨로 투각(透刻)하거나 상형(象形)하여 장식한 백자 위에, 청화(靑畵) · 철화(鐵畵) · 동화(銅畵) 등의 안료로 채색하거나 청채(靑彩) · 철채(鐵彩) · 동화채(銅畵彩)로 시문하는 등 복합적인 장식기법이 적용된 화려한 다채(多彩) 장식의 백자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분원 백자는 중국 · 일본에서 제작된 저화도(低火度)의 유상채(釉上彩) 장식 대신 담청색(淡靑色)의 유색(釉色) 아래 고화도(高火度)의 유하채(釉下彩) 안료를 사용함으로써 표면의 화려한 색 보다는 내면의 진중하고 담백한 맛과 멋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다채 장식의 표현에 있어서도 푸른 청화(靑畵)와 붉은 동화(銅畵), 갈색의 철화(鐵畵) 안료만을 사용하여 백자의 표면 위에 기교 있는 다양한 표현 장식을 시문하였다. 주자와 합 · 찬합 · 푼주 등 그릇의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제기(祭器)를 비롯하여 연적 · 필통 · 벼루 · 필세(筆洗) · 필가(筆架) · 묵호(墨壺) 등의 문방구류와 곰방대 · 베갯모 · 타호 · 등잔 · 촛대 등의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백자로 제작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백자 기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개구리 · 두꺼비 · 잉어 · 수달 · 용 · 사자 · 호랑이 · 해태 등의 동물 형상과 대나무 · 연꽃 · 복숭아와 금강산 등 자연물의 형상을 응용한 실용적 조형물 및 기물의 표면을 각 지게 한 사각 · 팔각 등의 각형(角形) 백자의 제작도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백자들은 조선 왕실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치품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러 정조 연간에는 갑기(匣器)와 화기(畵器)의 제작을 금하는 금령이 반포될 정도로 사대부와 유산계급층 사이에 그 수요는 극대화 되어 갔다. 매(梅) · 란(蘭) · 국(菊) · 죽(竹) · 화훼초충(花卉草蟲)과 같은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의 미감(美感)을 반영하는 문양소재 이외에도 새로운 유산계급층의 취향을 반영하는 십장생(十長生) · 잉어 · 모란 · 연꽃 · 포도 · 새우 · 성수(星宿) · 박쥐 · 수복자문(壽福字文) 등 수복길상(壽福吉祥)적 문양들과 호랑이와 까치 · 산신도(山神圖)와 같은 민화(民畵)적 구성의 문양들이 그려졌다.
다양해진 수요층의 요구에 상응하는 다양한 문양소재들의 출현은 화려한 다채 장식 기법의 유행과 함께 분원 백자가 조선 왕실과 사대부 소용의 관 · 어용(官 · 御用) 백자에서 벗어나 더 많은 수요층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實例)라할 수 있다.
민영화된 이후 분원 백자 사용의 저변은 더욱 확대되어 사기전(沙器廛)에서 판매된 분원 백자들은 민간에 널리 유통되기에 이른다. 점차적으로 분원 백자는 조선 왕실의 도자로서의 그 위상을 잃어 갔으며, 결국 분원의 경영은 12명의 민간업자에게 이양되어 민영화의 길을 걷는다.
민영화 된 이후에도 분원에서는 백자의 제작활동이 끊이지 않고 근근이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장시(場市)에서 분원의 백자들이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산업화된 공장에 밀리게 됨으로써 결국 분원의 사기장들은 이천 · 여주 등지로 흩어져 버려 분원의 화려했던 요업사(窯業史)는 역사의 뒤안길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김봉준, 문화재청 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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