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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려궁성 (만월대) 남북 공동 제3차 발굴조사

Gijuzzang Dream 2009. 1. 4. 15:13

 

 

 

 

 

개성 고려궁성 (만월대) 남북 공동 제3차 발굴조사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남북역사학자협의회(위원장 서중석)와 공동으로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50일간의 일정으로

고려 궁성유적(만월대)에 대한 제3차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개성 만월대는 400여 년간 고려의 황제가 정무를 펼치던 정궁(正宮)으로서,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당시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려의 궁궐은 자연지세를 최대한 살린 독특한 건물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 고려궁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7년 2차례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40여 동의 건물지와 청자를 비롯한 1,2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하여 세인의 큰 관심을 받은 바 있다.

특히 길이 48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원통형의 이형청자는

고려궁궐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되었다.

 

이번에 추진될 제3차 발굴조사는 만월대 유적의 서북지구(3,000㎡)를 대상으로 실시할 예정이며,

1차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는 경령전(제례祭禮 건물지)에 대한 정밀조사와 함께

궁궐의 배치구조와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는 학술적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사업은,

남과 북이 문화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협력 가능성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문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이었기에,

남북 간의 정치적 · 경제적 가치관 차이를 넘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는 분야로 계속 그 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조사구간 전경

 

                                                       ▲제1축대 전경

 

                                                 ▲제1건물지 및 제2축대 전경

 

                                                     ▲제3, 4 건물지 전경

 

                                                         ▲수막새

                                                         ▲암막새 

 

                                                            기타 와전류 

                                                      ▲기와명문 탁본

 

                                                     ▲도기류

                                                  ▲용두, 잡상

 

                                                      ▲자기류, 청자기와

 

- 담당자 : 국제교류과 이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이상준

- 문화재청, 2008-11-05

 

 

  

 

 

 

 2008년 개성 고려궁성 (만월대) 발굴조사 성과 발표

- 경령전 및 그 주변 건물지 배치상태 및 구조 확인 -

 

 

문화재청(청장 이건무)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위원장 서중석)는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민족화해협의회와 공동으로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개성 고려궁성(만월대)에 대한 제3차 남북공동발굴조사를 실시하여 1차 시굴조사에서 일부 확인된

경령전(景靈殿, 태조 왕건을 비롯한 5대왕의 어진 신위를 모신 제례공간)과

주변 건물들의 정확한 규모 및 배치상태를 확인하였다.

건물내부에서 5개의 예단(禮壇) 기초시설이 확인된 경령전(17호 건물지)은

동서 2,267cm, 남북 1,015cm의 장방형 기단(基壇, 건물을 건립하기 위하여 지면에 흙이나 돌을 쌓고

다져서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곳)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건물 남편에는 3개의 문과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남편을 제외한 3면은 바깥쪽 초석열(礎石列)을 따라 벽을 쌓아올렸는데, 이는 예단의 후벽과 양측벽에

별도의 시설(御眞을 걸거나 벽화를 그리기 위한 시설)을 하기 위한 용도로 판단된다.

경령전 남편에서 나란하게 노출된 18호 건물은

(기단크기 : 동서 1,880cm, 남북 1,008cm, 정면 3칸×측면 3칸)

건물의 정면과 양측면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건물 주위에 청석(靑石)을 방형으로 잘라 만든 전(塼)을 깔아 놓았다.

특히 이 건물 남편에서

길이 200㎝, 너비 90㎝ 크기의 석제 기초시설이 동서 대칭으로 2개소 확인되었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내부를 낮게 파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물 등을 놓기 위한 기초시설로 판단된다.

한편, 이번 조사지역의 전체적인 평면 배치 형태는

송악산에서 남북방향으로 경사져 내려오는 구릉에

2개의 동서방향 축대(높이 약 4m)를 쌓아 계단식 평탄면을 조성한 다음

경령전을 비롯한 중요건물을 세우고, 그 주위를 회랑식 건물로 에워 싼 폐쇄적인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이는 경령전 일곽(一廓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친 지역)이 제례를 위한 특수 공간이므로

여타 생활공간과 분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출토유물 중에는 기존 1 · 2차 조사에서 확인되었던

「赤項○○」,「德水○○」,「板積○○」, 「月盖○○」가 새겨진 기와 외에

「板占戶」등의 새로운 명문기와와

청자, 문고리 · 경첩 등 약 3,00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다수 수습되어

실물자료가 부족한 고려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앞으로도 고려궁성에 대한 연차적인 학술조사를 진행,

다양한 자료를 확보하여 고려궁성 및 도성제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 조사구간 전경 (남동-북서)

 

 

                                       ▲ ‘다’건물지군 전경 (동-서)

 

 

                              ▲ 17호 · 18호 건물지 및 ‘다’지구 마당 전경 (남-북)

 

 

                                        ▲ 17호 건물지 전경 (남서-북동)

 

 

                                                  ▲ 청자양각보상당초문대접

 

청자반구병

- 담당자 : 국제교류과 이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이상준

- 문화재청, 2009-01-02

 

 

 

 

 

 

 

 

 고려 개성 만월대 궁성유적 남북한발굴조사 

 

 

남북 합의에 따라 2007년 5월부터 7월(5.15~7.13), 9월부터 11월까지(9.3~11.16) 120일에 걸쳐,

고려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 궁성유적의 중심인 회경전(會慶殿) 영역의 서편구역 30,000㎡에 대한

시굴조사 및 일부구간에 대한 남북공동 발굴작업을 실시하였다. 

 

개성은 고려 474년간 도읍으로, 수많은 사찰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개성시 만월동 송악산(松嶽山)기슭에 위치한 고려궁성 유적은

지금까지 흔히 ‘만월대(滿月臺)’로 불려지며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사 결과, 입지와 성격에 따라 각기 중심축을 달리하여 조성된 다수의 건물지가 드러나

회경전 서편구역의 건물배치 양상을 밝힐 수 있었는데,

특히 지금까지 그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亞’자형 건물지의 구조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고려사」에 기록된 경령전(景靈殿)으로 판단되는 건물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경령전은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건물로 태조(太祖)와 역대 왕들의 진영(眞影)이 모셔졌는데,

기록에 따르면 종묘(宗廟)에 정식으로 모셔진 신위(神位)와는 별개로 궁궐에 신위를 모신 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길이가 65cm에 달하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 청자인데

지금까지 기형(器形)이 알려진 바 없는 매우 특징적인 유물이다.

유물은 녹청색의 색조에 몸체에는 모란문과 포도당초문을 복잡하게 음각하였으며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끝단 중앙에는 지름 4cm의 원형 구멍이 뚫려져 있다.


그리고 암 · 수기와의 등문양에 인장이 찍힌 100여 점의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었다.

인장에 새겨진 명문은 「赤項文昌」, 「赤項京夫」, 「赤項惠文」,「板積水金」, 「月盖○○」등으로,

특히 ‘板積’ · ‘月盖’가 새겨진 기와는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판적요(板積窯)’,  ‘월개요(月盖窯)’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 사업은,

남과 북이 문화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협력 가능성을 넓혔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문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이었기에,

남북 간의 정치적 · 경제적 가치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는 분야로 계속 그 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 문화재청, 2008-07-16

 

 

 

 

 

 

 

새로운 발굴의 설레임, 그리고 두려움

 

미답의 지역에 대한 막연한 설레임과 두려움을 안고 60일간의 일정(5.15-7.13)으로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를 다녀왔다.

이제야 조사야장을 정리하면서 개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지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발굴은 낮선 사람, 새로운 유구·유물과의 만남이 있기에

기대와 설레임으로 밤잠을 설치곤 하는데, 이번 발굴 역시 입경하기 전 며칠간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이번만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장기간 동안

북측의 통제를 받으면서 12명의 혈기왕성한 발굴대원들을 다독이며 생활해야한다는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러한 걱정은 출발 전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최초 입경하기로 한 5월 6일 새벽녘 우리는 2달치 생필품을 챙긴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전날 치른 입북 전야제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창덕궁 정문 앞에 집결해 있었다.  

그 때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우리 대원들을 거의 패닉상태에 빠트렸다.

북측이 입경을 10일후로 연기하였다는 것이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든 대원들이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송별인사를 한 상태였고,

발굴장비 및 굴삭기를 실은 트럭은 이미 통일교 근처까지 가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창원, 경주 등지에서 낑낑거리며 끌고 온 짐들을 생각하니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10일후를 기약하고 쑥스럽게 철수할 수밖에...

그 후 열흘후인 5월 14일 저녁, 다음 날 출발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창덕궁 주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황성옛터’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입경에서 첫 삽을 뜨기까지

 

5월15일 아침 드디어 우리는 남측출입경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간단한 입경수속을 밟은 후 분단의 상징이 된 녹슨 철마의 고향(?)을 지나 10분여 만에

북측출입경관리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중 나온 북측인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현장사무실(콘테이너)과 발굴장비를 실은 트레일러와 함께 곧장 발굴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만월대 앞에는 신봉문터가 있고

그 앞을 광명천이 흐르는데, 이 광명천을 가로질러 작은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다.

문제는 발굴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다리를 트레일러가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별로 견고해 보이지 않는 좁은 다리를 지나기 위해서는 트레일러가 정면으로 진입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길가 호박밭의 훼손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부실해 보이는 다리가 트레일러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설왕설래...트레일러가 산으로 올라가는 우여곡절과 현○택배 기사의 기지로

마침내 다리를 건너 현장사무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늦은 점심도시락을 먹으면서

남측 트레일러 기사에게 ′오늘 당신은 너무 무모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기사 왈 ′현○택배는 고객이 원하면 트레일러를 몰고 송악산에도 올라 갈 수 있습니다′고 하여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남북측 발굴대원 개개인의 소개와 함께 상견례가 있었다.

북측은 이번 발굴에 참여한 대원들을 위해 작업복과 모자, 신발을 일괄 지급한 모양으로

모두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챙이 달린 모자는

마치 펭귄을 보는 듯 하여 펭귄모자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9시경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마음에 발굴대원들을 독려하였다.

일부는 기준점을 잡고, 일부는 제초작업을 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오후 들어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어제 비가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하는데,

북측대원들은 송악산이 보살펴 준 것이란다..

5월18일, 개토제가 있는 날이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멎었다.

정말 송악산이 보살펴 준 것일까.

11시 반경 회경전(고려궁궐의 정전) 쪽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북측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측의 주요 인사들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북측의 주요인사도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었기에 간단한 상견례를 한 후 행사일정에 따라 개토제는 진행되었다.


 

 

 

공식적인 남북측 공동행사가 마무리된 후 남측인사들만이 참여한 가운데

간단한 제물과 그림으로 그린 돼지머리를 펼쳐 놓은 채 고유제를 지냈다.

북측에서는 고유제 자체를 우상숭배로 보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단다.

그리고 시삽과 함께 드디어 역사적인 고려궁성(만월대)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에서 확인된 사실들 

 

제초작업이 끝난 후 확인한 현장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입북하기 전 수초가 우거진 사진 몇 장(발굴대상 협의과정에서 남측인사들이 찍은 사진)과

북측자료에 소개된 현황도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칡덩쿨에 가려져 있었던 거대한 석축, 무수한 기와조각들, 경사진 언덕을 따라 형성된

7-8개 평탄대지, 그리고 초석과 장대석들. 쉽지 않은 그러나 뭔가 획기적인 사실들이

확인될 수 있는 발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선 시굴조사갱(길이 25m, 너비 1m)을 대상부지 전역에 바둑판 모양으로 설정하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첫날, 지표상 관찰 결과 축대로 판단하였던 동서방향의 긴 석축열이 거대한 건물

(동서 도리칸 47m, 남북 보칸 13.7m)의 기단석으로 밝혀져 우리를 흥분케 하였다.

이 후 이 건물은 평면이 ‘亞’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좌우측에 배수로, 계단 등이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너비 1m의 좁은 조사갱에서 확인된 역사의 작은 편린들을 조각 맞추어

유구의 전체적인 모습과 성격을 그려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명쾌한 해답을 빨리 얻기 위해 일부 조사갱을 확장했다가 북측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시굴조사갱에 대한 1차 조사가 완료된 후 확장여부를 결정하자는 선에서 서로 합의를 보고

우선 시굴조사갱 조사에만 전념하였다.

조사착수 20일째인 6월 6일 현충일 오후 조사단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토작업 중 연꽃이 새겨진 석재일부가 원위치를 유지한 채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노출된 상태만을 언뜻 보았을 때 만월대 가까이에 있었다는 흥국사 석탑(북한 국보유적 132호, 현재 고려박물관 소장)의 기단부와 흡사하여 석탑으로 추정되었다.

현장에서 남북조사단 합동미팅이 열렸고 전면 노출키로 결정되었다. 노출결과 이 유물은 석탑이 아닌 비석받침으로 확인되었다.

이날의 남북 조사원 현장미팅은 이후 조사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까지 북측이 갖고 있었던 확장조사에 대한 불신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월 11일, 앞서 언급한 거대한 석축 상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전 이미 기단석의 일부가 밀밭 속에 노출되어 있던 곳이다.

시굴갱 조사와 함께 밀을 제거하고 주변을 정리하자 건물의 대체적인 규모는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건물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였다. 지금까지 남측학자들은 이 지역을 내전이라거나 경령전(5대 선대 임금의 초상을 모아 둔 건물)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건물지를 관통해 설정된 시굴갱 조사를 유보하고 건물 전체에 대한 표토를 제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건물은 정면 5칸(22.6m), 측면 3칸(10m)의 규모로

내부는 통칸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북측에 치우쳐 기둥과 기둥사이에 5개의 별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시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사』에 보이는 경령전 관련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정월 초하루를 비롯한 명절에 임금이 친히 경령전에 나아가 태조실인 제1실부터 5실까지 차례로 들어가 선대 임금을 알현한다는 내용인데, 경령전 내부에 5개의 실이 있었다는 점이 발굴결과와 일치한 것이다.
 

6월말 시굴갱 조사를 마무리하고 현장실측 및 출토유물을 정리· 분석하였다.

출토 유물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유물은 높이 65㎝의 이형청자와 120점에 이르는 명문기와였다.

이형청자는 원통형으로 양 끝부분이 모두 둥글납작하게 막힌 상태이나

양 끝단의 중앙에 하나씩의 구멍이 뚫려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건물 외부에 세로로 세운 장식용으로 추정되었다.

 명문기와는 암수기와의 등문양 위에 명문을 스템프로 찍어서 표현하였다. 명문내용은 「月盖○○」, 「赤項 ○○」, 「板積○○」, 「德水○○」등으로 명문의 전단 2자에 보이는 명문 중 ‘월개’와 ‘판적’은 『고려사』 등 관련기록에서 확인되는 「월개요」,「판적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따라서 전단 2자는 요장을 지칭하고 있으며, 후단 2자는 기와를 생산한 와공의 이름임이 밝혀진 것이다.

 
7월 5일, 현장조사가 마무리된 조사갱부터 복토작업을 시작하였다.

대원들은 더위와 싸우면서 현장실측을 계속하였고, 일부 대원들은 보고서 작업에 매달렸다.

현장 실측도면을 토대로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양상을 다시 그려 보았다.

확인된 건물이 모두 40동에 이르렀고, 주요건물은 대부분 ‘亞’자형 평면이며,

회랑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7월 11일, 드디어 계획된 조사를 모두 마무리 지었다.

조사착수 당시 6월말까지 모든 현장조사를 마무리하고 여유를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해 보자던 대원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유구와 유물 그리고 북측의 석물조사 및 사진, 특이점 기술 등을

우리가 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양측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서로 교환하였다. 모든 조사가 마무리된 것이다.

7월 12일 개성에서의 마지막 밤, 개성공단내의 봉동관(평양 직영 식당)에서 회식이 있었다.

북측 인사들과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대원들은 모두 건강하게 남측출입경관리소를 통과하여

간단한 해단식을 갖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개성출입의 관문 '개성공단' 그리고 시가지 풍경 

육로로 북측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2개의 루트가 있다.

금강산관광에 활용되고 있는 동해안 루트와 서해안 루트가 그것이다.

이 중 서해안 루트는 도라산 남측출입경관리소 - 비무장지대 - 북측출입경관리소를 지나게

되는데 북측출입경관리소가 개성공단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루트를 따라 입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성공단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개성공단은 200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여 현재 1단계 100만평에 대한 개발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이며, 20여개의 업체가 입주하여 공장을 가동 중에 있단다.
최근 나머지 부지에 대한 입주업체 선정도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공단 내에는 관리위원회와 소방서를 비롯하여 숙소와 마트, 은행, 식당 등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공단내에서는 원화와 달러화가 통용되고 있는데,

은행은 입주 기업을 위한 것이기에 남측에서처럼 개인이 현금을 인출하거나 입금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남측에서 송금 확인된 금액만큼 인출이 가능하다.

공단에는 약 12,000명 가량의 북측 근로자들이 3교대로 일하고 있는데,

출퇴근 시간이면 60여대의 버스가 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발굴현장 철수시간 즈음에 공단 근로자들이 퇴근하기 때문에 퇴근 풍경을 매일 보게 된다.

수천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어릴 적 보았던 마산수출자유구역의 퇴근모습을

연상케 한다. 양장과 구두로 한껏 멋을 낸 여성근로자,

갈색 또는 검은색복장에 썬그라스와 모자를 쓴 남성근로자,

간혹 보이는 흰색저고리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성 등...

우리는 매일 아침 북측에서 나온 버스를 타고 발굴현장으로 출퇴근하였다.

약 20분간의 출퇴근길이 개성시가지를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공단을 가로질러 개성검문소를 통과하면 봉동읍에 이르게 된다.  

도로 주변에는 회색빛 근대 건축물들이 서 있고 이들 건물의 1층에는 과일, 남새(채소), 책방 등

가게들이 보인다. 봉동읍을 지나 청봉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이 도로 쪽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 산 정상을 따라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오는 개경 나성을 보게 된다.

다시 손하역을 지나 산업다리를 끼고 좌회전하면 개성시내를 관통하는 주도로가 나타난다.

이 도로가 개성과 임진나루를 연결하는 도로였으리라.

이 도로를 따라 하천을 끼고 시내 쪽으로 얼마간 직진하면 십자교차로가 나타나고,

이 십자교차로 주변에 영화관과 미술관, 그리고 수산물상점, 식당 등이 밀집(?)되어 있어

아마도 개경의 가장 번화가인 것으로 보인다.

십자로 중앙에는 하늘색 바지에 흰색 남방을 입은 기관원이 늘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사람을 우선으로 교통정리를 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를 우선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자동차가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도로 주변에는 비교적 역시 회색빛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주민,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주민들, 러시아에서 보았던 작은 바퀴의 소형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 소달구지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우리가 탄 차를 따라오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길가에서 구공탄을 만드는 사람 등을 볼 수 있다.

십자교차로에서 우회전 하면 그 유명한 자남산이 보였다.

자남산 앞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북한의 국보유적 남대문이 보이고

여기서 다시 우회전하면 민속마을을 지나게 된다.

잘 정돈된 민속마을 길은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남대가였을 것이다.  

주변에는 개성수예점, 소년인민공전, 구 호수돈여고 건물, 민속여관, 은행, 밥공장 등이 보인다.

민속마을 끝부분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송악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 발굴현장인 만월대가 있다.

 

 

개성의 문화재, 그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써 473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때문에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의 자료로 추정해 볼 때

능 31, 분묘 20, 성곽 19, 궁터 8, 탑 8, 부도 및 비갈 6, 불상 1, 당간지주 2, 정각 8, 서원향교 3,

가마터 1, 기타 유적 33건으로 총 193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개성에 머물면서 현지를 답사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고려의 궁궐인 만월대(국보 제122호)를 비롯하여 선죽교(국보 제159호), 표충비(국보 제138호),

성균관(국보 제127호)이며,

멀리서나마 눈도장을 찍은 것은 발어참성(국보 제129호), 개성옛성(국보 제130호),

현화사 7층석탑(국보 제139호), 첨성대(국보 제131호), 개성 남대문(국보 제124호),

연복사종(국보 제136호), 숭양서원(국보 제128호), 민속마을 등이다.

조사 초기 북측과 접촉을 통해 하루 날을 잡아 개성의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하였으나

결국 답사는 하지 못하였다. 대신 남측의 주요 인사들이 현장을 방문하였을 때 동행하여

유적지를 찾아가 본 것이 전부이다. 다시 말해 북측은 남측 인사들이 방문하였을 때

선죽교, 표충비(선죽교 바로 앞에 있음), 성균관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나마 발굴현장을 방문한 손님에게는 만월대가 추가된 셈이다.

발굴현장 주변에는 첨성대(현장에서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음)와

발어참성(고려건국 이전 왕건이 거주하였던 성),

개성옛성과 이 성의 성문인 눌리문(홍예가 남아 있음) 등이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어

당장이라도 뛰어가 보고 싶지만 현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특히 개성 남대문은 서울 남대문과 마찬가지로 로터리로 형성되어 있어

차가 지나가면 손에 잡힐 듯이 보이지만 그냥 눈요기만 할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연복사종은 개성 남대문의 문루에 걸려 있고,

민속마을을 관통한 남대가로 차가 운행하기 때문에 이 또한 매일 2번씩 보고 지나침)

답답한 마음에 운전기사에게 제발 좀 천천히 지나가자고도 해보았고,

늘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퇴근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도 해 보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꼭 한번 보고자 했던 왕건릉과 공민왕릉, 박연폭포는 그냥 꿈이 아닐런지...

 

아무튼 선죽교를 관람한 소감은 다소 허무하다.

길이 6m 내외의 이 다리에서 어떻게 정몽주가 이방원 일당에게 척살되었을까

당시 스토리텔링 전문가에 의한 조작은 아닐까 하는 등의 불경스러운 생각에 잠시 잠기게 된다.

그나마 그 동안 행방이 묘연하다는 묘각사의 다라니당이 이 다리의 상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음은 큰 성과로 삼을 만하다.
 

성균관(고려박물관)은 청자위주의 전시를 하고 있으나 남측에서 보는 고급청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금속활자 1점(?자명)과 수령이 1천년이라는 은행나무,

그리고 외부에서 들여 온 것으로 생각되는 석재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는 만월대의 석재들도 많이 옮겨져와 있을 것이다.


고려박물관 서편 노천에 전시되어 있는 현화사 7층석탑을 비롯한 석물들은 관람구역이 아니라는 말에 얼른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개성의 먹거리 

예로부터 개성에는 약밥, 추어탕, 보쌈김치, 닭곰 등이 유명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개성시내에 몇 군데의 식당만이 외지인에게 음식을 팔고 있는데,

자남산여관, 평양냉면(분점), 봉동관 등이 그 곳이다.

모두 한상 차림으로 음식을 내지 않고 식탁마다 몇 가지 기본 반찬을 준비한 뒤

추가 주문한 음식을 접대원이 골고루 나눠 주는 식으로 손님을 맞고 있어

마치 중국의 음식문화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자남산 여관에는 닭곰국, 잉어회, 약밥, 우매기(일종의 떡), 토끼고기, 더덕구이 등이 준비되어

있고, 봉동관에는 털게찜, 소꼬리찜, 송이버섯구이, 순무오이무침 등이,

평양냉면(분점)에서는 소불고기, 소간, 육개장, 가지무침, 순대, 도라지무침 등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식사로 냉면이나 토장국을 먹을 수 있다.

 

 

한편 현장에서 점심은 자남산여관과 평양냉면집에서 도시락을 주문하여 먹었다.

도시락은 밥과 반찬을 별개로 담아 주며, 맥주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북측에서는 맥주를 술로 분류하지 않는 듯하며 일반적으로 술은 소주를 일컬음)

김치와 나물은 늘 나오며, 나머지 반찬은 약간씩의 변화를 주는 선에서 제공되었다.

특히 생선인 이면수와 식초를 넣은 오이냉채가 끊임없이 제공되어

대원들간에 이면수와 오이냉채로 우리는 사육되고 있다는 농담도 하곤 했다.

 

 

다시 개성으로 ... 

2007년 9월 3일 다시 개성으로 간다.

시굴결과 시급히 발굴조사가 필요한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는 박연폭포와 왕건릉, 공민왕릉을 볼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 이상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 문화재청, 문화재e야기, 200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