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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국어 배우기

Gijuzzang Dream 2008. 12. 29. 01:39

 

 

 

 

 

 

 조선시대 외국어 배우기

 

 

 

조선시대 외국어 - 사학(四學)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사역원(司譯院)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지고 통역전문 관리가 양성되었다.

오늘날에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 세계가 서로 교류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접촉하는 나라가 몇 개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지 네 가지 외국어가 필요할 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를 역어(譯語)라고 불렀다.

외국어의 학습과 교육, 연구, 통역 등을 통칭하여 역학(譯學)이라고 불렀고,

역학에 종사하는 사람을 역학자, 역학인,

통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역관, 통사(通事), 역어인(譯語人), 역인(譯人), 설인(舌人) 등으로 불렀다.

 

조선 태조 원년(1392) 8월 과거시험에 역과(譯科)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사역원(司譯院)이 신설되었다.

세종은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서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학(女眞學), 왜학(倭學)의 사학(四學)을 갖추었고

한어 학습을 위해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다.

 

한학은 사학의 중심으로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조선 전 시대를 걸쳐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한학강이관(漢學講肄官),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 질정관(質正官) 등의 제도를 시행하여

한어 학습을 장려하였다.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여 淸을 세운 후에도 한어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몽학은 실용적인 목적이기보다는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몽역관을 양성,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조 5백년 동안 조선과 몽골 사이에 중요한 접촉은 없었지만

조선의 왕들에게 몽골은 계속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왜학은 배를 타고 가는 길이 험하고 한어 역관처럼 벼슬얻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었다.

 

여진학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늦게 설치되었는데

청나라가 들어선 뒤 현종 8년(1667, 강희 6)에는 청학(淸學)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청나라에서는 만주어를 보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만주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나

조선에서는 19세기 말까지 청어(淸語) 역관을 계속 양성하였다.

 

 

조선시대 외국어 교재

 

한어(중국어)의 대표적 교재는

 <직해소학(直解小學)>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를 꼽을 수 있다.

 

<직해소학>은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온 설장수(偰長壽)가 지은 것으로 조선중기까지 사용되었다.

<노걸대> <박통사>는 실용 회화학습서로서 전자는 상인의 여행과 교역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비교적 고급회화를 중심으로 하여 세시풍속 등의 여러 가지 일상적 상황을 실제처럼 꾸민 것이다.

이 두 책은 <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 <노걸대신석언해> <번역박통사> <박통사언해>

<박통사신석언해> <노걸대박통사집람> 등으로 새롭게 간행되었다.

 

 

몽학(몽골어)의 교재로는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유해(蒙語類解)>의

몽학삼서(蒙學三書)를 들 수 있다.

<몽어노걸대>는 한문본 <노걸대>를 토대로 하여 몽골어로 번역한 것을 언해한 책이다.

<첩해몽어>는 회화학습서, <몽어유해>는 사전으로 중국어, 한국어, 몽골어 분류어휘집이다.

 

왜학(일본어)의 대표적 교재로는 <첩해신어(捷解新語)>를 꼽을 수 있다.

조선 초 <경국대전>에서 왜학 과시용(科試用)으로 14종의 서적을 규정하였으나

숙종 2년(1676)에 이를 폐지하고 새로이 <첩해신어>를 간행하면서

1678년부터 과시용으로 유일하게 사용되었다.

이 책은 왜학역관들에게 읽기, 쓰기, 말하기 등 세 방향으로 일본어를 가르치고

겸하여 접대와 교역 등에 필요한 사항을 학습시키기 위한 교과서였다.

 

 

청어(만주어)의 학습에는 <삼역총해(三譯總解)> <소아론(小兒論)>과

<팔세아(八歲兒)>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외국어 학습은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성취동기에 따른 것이거나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특정계층에 의해 학습되었던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대외교류실, 서윤희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11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