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홍덕유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54

 

 

 

 

 

 

[현대사 아리랑]

 

 된바람 차가운 눈보라 헤쳐온 늙은 공산주의자 홍덕유

 

 

제2차 조선공산당의 핵심요원

 

조선공산당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21년 전 일입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 늙은 몸에 열혈이 끓어오르는 듯합니다.
지금 반도호텔 옆에 있는 아서원(雅?園)에 각 도당 대표들이 극비밀리에 참집하여 역사적인 조선공산당 제1차 대회가 열리었든 것입니다. 오늘날을 당하야 그 대회에 참가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재봉(金在鳳)·주종건(朱鍾建)·진병기(陣秉基) 세 동무를 생각하면 강개함을 금할 수 없읍니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7일치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 특집 기사이다.
 
 
 
‘장안 복판에 뜻깊은 거사’ ‘당 창립식에 참석한 홍덕유씨 담’

“그때 그 대회에 참집한 사람은 일생을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바치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의 혁명가들이었읍니다.
그 대회가 서울서 개최되었든 것은 김재봉 · 박헌영 동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희생적 투쟁의 결정입니다.
표면으로는 4월 15, 16 양일에 전조선기자대회를 소집하고 기자대회를 이용하여 지방당원들을 상경케 하고
4월 19일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한다 하야 경찰의 혈안을 이상 양 대회에 총집중시킨 다음
예정되었든 4월 17일에는 전기 기자대회로 하여금 동대문 외 상춘원(賞春園)에 화유회(花遊會)를
개최케 하여 장안 전경찰의 신경을 상춘원으로 총집중시키고
그 틈을 타서 우리는 제1차 대회를 백주에 장안 복판 아서원에서 열었든 것입니다.
일경의 압박과 감시가 혹심하였든만치 우리의 기술공작 역(亦) 혈루의 노력이 필요하였고
따라서 그 공작을 우리는 언제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읍니다.”
 

‘조공 · 형극의 길 21년’이라는 큰 제목 밑에 쓰여진 머릿글이다.


1925년 4월 17일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의 이달 이날은

우리 민족해방의 전위부대인 조선공산당이 창건된 날이다.
악독한 일제의 탄압 아래의 21년이란 길고도 길었다.
강도 일본의 합병의 마수가 뻗인 지 15년. 3·1운동의 고배를 맛본 지 6년.
당시 도도히 흘러오는 세계사적 조류에 발마추어 가장 애국적이오 혁명적인 전위투사들로서 맺어진
조선공산당의 형극의 길은 이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제 해방의 백광(白光)에 쌓인 합법적 무대에서 남조선에 있어서만 이미 3만여 명의 당원을 옹(擁)하고
민족의 진두에서 정당정당한 정전(政戰)을 개시하게 된 오늘날 동 당의 영광 그 어듸다 비길 것인가.
의의 깊은 동 당 창립 21주년 기념일을 마지하야 당시 당 창립의 중심인물로서 신출귀몰의 활약을 하고
동 당이 재건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제일투사로 그 일흠을 떨치는 분들의 회고담을 간명(肝銘)하야
앞날의 지침을 삼기로 하자.

 

홍덕유(洪德裕)는 188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아호가 소죽(蘇竹)이니- 소비에트 모둠살이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대나무처럼 끼끗하게 살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된바람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죽순처럼 살아나가겠다는
매운 다짐으로 보인다. 1916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 1919년이었다.
<조선일보> 경리부장과 공무국장을 한 것이 다음해이니 39살 때인데,
그때까지 살아온 샅샅 자취는 알 수가 없다.
 

1923년 ‘신사상연구회’ 가입

1922년 11월 민립대학 기성준비회 준비위원이 되었고,
1923년 7월 사상두럭인 ‘신사상연구회’를 얽는데 들어갔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앞장서 이끌겠다는 다짐으로 모인
홍명희 · 홍증식 · 윤덕병 · 구연흠 · 원우관 · 이재성 · 조봉암 같은 먹물 든 젊은이들이었다.
24년 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를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맑스가 태어난 11월 19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홍명희 · 홍증식 · 조봉암 · 윤덕병 · 김재봉 · 박일병 · 조동호 · 김찬 · 박헌영 · 김단야 · 임원근 같은
피끓는 주의자들이 회원이었다.

김재봉 · 김두전(약수) · 유진희 · 권오설 · 김상주 · 진병기 · 주종건 · 윤덕병 · 송봉우 · 독고전 ·
홍덕유 · 조봉암 · 김찬 · 조동우(호) 등은 재작년 사월 십칠일 오후 한시경에
시내 황금뎡 아서원이란 중국요리집에 모히어 조선을 일본의 긔반으로부터 버서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야…
 

조선공산당을 세우는 데 화요회 회원들이 앞장섰으므로 조공을 ‘화요회공산당’이라고 불렀을 만큼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고갱이 구실을 한 것이 ‘화요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회원들이 잇달아 왜경에게 붙잡혀 감으로써 무너지기까지
한 18개월 동안 조공운동 채잡이가 되었다. 조공 채잡이 가운데서도 가장 먹물이 많이 들고
움직임이 거쿨졌던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화요회 회원이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신문 · 잡지 · 출판 같은 언론 동아리에 몸붙이고 있었다.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다가 허리가 부러진 제1차 조공 책임비서 김재봉에게 강달영을 다리 놓아
제2차 조공을 세우게 하는 홍덕유는 <조선일보> 지방부장이었고,
강달영도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이었다.
박헌영 · 김단야 · 임원근 · 김재봉 · 조봉암 · 조동호 · 주종건이 신문기자였다.
유진희 · 송봉우 · 김찬 · 김두전 같은 이들도 잡지나 기관지를 펴내는 언론인이었다.

 

평양음악학교 학생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서 경축대행진을 하고 있다.

(1946년 11월 3일)


 
3·1운동 때 종교계 목대잡이들은 물렁물렁한 짓거리를 보이다가 인민들한테 자빡맞는 판에서
독립운동 근터구는 언론계였다. 그때에 먹물 든 사람들은 언론계로 몰렸는데
먹물들이 해볼 수 있는 일자리가 막혀 있는 탓이었다.
총독부 공다리가 되거나 학문갈닦음에 몸붙일 수 있는 길은 아주 적었다. 언론계만이 열려 있었다.
주의자가 된 언론계 사람들은 일동무들을 끌어들였고, 인쇄공 · 판매부원 · 신문배달부 같이
언론과 이음고리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꼬리를 물어 끌어들일 수 있었다.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맡고 있던 쿠시넨이
“조선공산당에서 노동자는 눈을 씻고도 찾을래도 찾을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조선공산당원 50% 위가 먹물 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벌잇줄을 가진 부르조아지 또는 소부르조아지였다.
거의가 직업혁명가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운동가와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
또는 문필가와 여러 가지 학교 교원들이었다.
옹근 노동자는 화이트칼라를 넣어서도 당원 가운데 11.6%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 가운데도 육체노동자는 6%였고 참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거지반을 차지하는 농민은 13%였다.
신문기자라고 하더라도 품삯을 넉넉하게 받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경제적으로 시원찮은 젊은 먹물들이었다.
푼푼하지는 못하나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엘리트 동아리가 조공을 끌고 나갔던 것이다.
 

강달영과 더불어 2차 조공 조직

조선의 젊은 먹물들은 여러 가지 사상철학 가운데 하나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놓고 그 갈피를 따져들어 가며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파고들어 따지기만 할 때는 괜찮았으나
그렇게 따지면서 파고든 이론을 실천으로 옮겼을 때는 곧바로 감옥에 갔다.
그야말로,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共同山) 간다/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 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는 판이었다.

당원 146명 · 후보당원 119명.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에 보낸 조공당원 숫자이다.
책임비서 강달영. 차석비서 이준태(李準泰). 조직부 김철수. 선전부 이봉수(李鳳洙).
검사부 목대잡이는 홍덕유였다.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먼저 후보당원 동안을 거쳐야 하였는데,
출신계급에 따라 다름이 있었다. 노동자 · 농민 3개월,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소공업자는 6개월,
사무원 및 기타는 1년 위로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울을 두른 것이 강달영과 홍덕유였다.

“합병 후 조선에서는 일제의 폭압으로 말미아마 꼼짝할 수 없게 되여
특별한 조직적인 운동이 없었읍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무단정치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일종의 회유정책으로 전환하야 언론이라든지 출판 혹은 집회 등에 대해서 다소의 자유는 허용하여
민족자본가들은 회사조직 기타 기업의 자유를 얻게 되여 3·1운동으로부터 6·10운동까지의 사이에
벌써 민족주의적 정치운동가들은 전향하야
왜놈들 앞에 무릎을 꿇고 일제의 품안에 들어가고 또는 탈락해버렸든 것입니다.”
65살 된 늙은 공산주의자가 한 말이다.
 
1946년 6월 9일 <조선인민보> 편집국이었다.
양재식 · 박래원 · 이천진 · 조두원과 둘러앉아 6·10운동을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신문사 쪽에서는 고재두 편집주간 · 임화 주필 외 기자 4명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자본가는 일제의 품안에
조공만이 불굴의 투쟁
회유정책에 국내대립 격화
 

본사 “바쁘실 텐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몸소 체험하신 6·10만세사건에 관하야 말씀을 듣고저 해서 오날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먼저 당시의 국내 일반 정황을 홍선생 말씀해 주시지요.”

“그런 가운데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꾸준히 반제투쟁을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
공산주의자와 및 그 영도 하에 있는 진보적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이 있읍니다.
그런데 1925년 12월에 이러난 제1차공산당사건으로 공산당의 대부분 간부가 피검되였으나
이에도 굴하지 않고 남어지 사람들은 다시 진영을 정돈확대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든 중
1926년 4월 25일 이조 최후의 왕 이척이 서거하였든 것입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왜놈들한테 눌려서 신음하는 조선민족에게
반일적 감정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6월 10일을 기하야 반일대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각 단체와 연락하야 운동을 계획한 것이 그만 미숙에 발각된 것입니다.”

본사 “그때 해외와도 연락을 한 모양인데 그 상태의 방법은 어떠하였읍니까?”

“상해에서 그 삐라를 전해오기는 김단야 동지가 안동까지 가져오고
 거기서 또 손을 바꾸어서 서울까지 가져왔읍니다.”

본사 “그때 운동의 지도부 구성은 어떻게 하였든가요?”

“전반 지도는 조공에서 하기는 하였지만 그때 당은 지하에 있었음으로
당의 결정으로 동원 준비 재무 등 일체 공작의 책임을 권오설 동지가 지고 총지휘를 하였읍니다.
그리고 지방 연락은 여기 앉아 계신 박래원 동지가 주로 하기로 되였었죠.
학생 동원 연락에는 조두원 이천진 동지가 수고 많이 하였읍니다.
그리고 박래원 양재식 동지는 특히 인쇄물 관계로 권오설 동지와 밀접하였지요.”
 
 
 
1947년 66세로 세상 떠나

1926년 3월 조선공산당 검사위원회 책임비서 겸 당중앙 후보위원이 되었다.
같은달 조공 경성부를 맡았다. 6월 ‘제2차조공사건’으로 3년 징역을 살았다.
1930년 감옥을 나와 <조선중앙일보> 경리부장과 공무국장을 하였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을 짜는데 들어갔다.
8·15를 맞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 11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중앙위원,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조직부장이 되었고,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찰위원이 되었다.
1947년 6월 25일 눈을 감았다. 향수 66.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2009 07/14   위클리경향 833호

 

 

※ 김성동의 현대사아리랑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 김성동 선생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