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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이주하(李舟河) - 원산 무대로 부두노동자 의식화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48

 

 

 

[현대사 아리랑]

 

 

 

 인민의 바다에 뜬 외로운 배, 이주하


 

원산 무대로 부두노동자 의식화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접선하던 황금정 일대.

황금정은 지금의 을지로다.

 

 

“나는 서울과 평양을 다니며 여러 유명한 공산주의자를 보았지만

이주하같이 맹렬한 공산주의자를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박갑동이 놀랐던 이주하는 불꽃이 튀는 듯한 눈매에 칼날이 선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여서

조용히 말을 하고 있어도 금새 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무서움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제는 갑작스레 열이 나서…”하고 <해방일보> 정치부 기자인 박갑동이 결근한 것을 변명하는데,

권오직(權五稷 1906~?) 사장과 같이 있던 이주하한테서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공산당원이 감기 때문에 결근을 했다구. 전쟁 마당에서 나는 감기 들어 쉬겠으니 봐주십시오 하면

상대방이 같이 쉬자고 하겠소? 그런 정신으로 당 기관지에서 어떻게 일한단 말이오!”

이주하 말은 마디마디에 칼날을 품고 있는 듯 매섭게 느껴졌고

눈에서는 붉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이주하 생각만 하면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는 박갑동이었다.

그가 펴낸 <박헌영>이라는 책은 마치 반성문을 보는 듯하여 많이 거슬리지만,

그 시절 불태웠던 깨끗한 열정에 대한 믿음과 함께

남로당 지도자들에 대한 가없는 ‘존경의 념’만은 잃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 수학


최근 일본 동경에 가서 박갑동(朴甲東 1919~ )을 만난 <이현상> 저자 안재성(安載成 1960~ ) 말이다.

고독하게 반김일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박갑동 나이 91살이다.

그런데 이주하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주의자였을까.

 

<해방일보> 1946년 5월 7일치에 실려 있는 이주하 글이 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어린이에게 줌’이라는 제목 아래 씌어진 글 뒷부분이다.

1. 어린이 동무들은 우리를 해방하여 준 련합국 어린이들과 온 세계 어린이들과 친선해야 합니다.

조선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잘났다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얕보고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독일의 힛틀러와 이태리의 뭇쏘리니와 덴노일본이 남의 나라 사람을 종으로 하려는

못된 버릇에서 나온 것입니다.

2. 남의 나라 어린이들의 잘하는 것을 배우고 남보다 뛰어나는 어린이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착한 사람 되겠다고 애써야 합니다.

3. 여러 어린이 동무들은 학교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동무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훈련하고 연구하며

성장하여야 합니다. 학교에 있어서 자치회를 조직하여 자립할 수 있는 훈련을 할 것이요,

애국소년단에 참가하여 단체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피어오르는 새 조선의 새싹이 되어야 합니다.

4. 법률로서 어린이들을 공장에서 로동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어린이들은 누구든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난해서 공장에 다니며 학교에 들 수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애달픈 일입니까!

5.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사람을 종을 만들기 위한 노예교육이 아니라

새로운 조선의 새로운 토대가 되는 어린이들을 자유로운 교육으로 자유롭게 퍼져나가고 커갈 수 있는

교육으로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6. 가정에서는 어린이라고 얕보고 구속될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존중히 하고 착하고 늠름하게

커가도록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잘 커야 조선도 커가고 발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주하(李舟河, 1905~1950)는 함남 북청(北靑)에서 부대기(화전민)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식구들과 원산으로 이사하여 보통학교를 마쳤다.

15살 때 3·1운동에 들었다가 언니가 밥벌이 하는 갑산 광산으로 몸을 피하여 광부노릇을 하였다.

검거 바람이 가라앉은 다음 원산으로 돌아가서 부두노농자 생활을 하다

객주집 심부름꾼, 일본인 상점 직원, 전보배달부 노릇을 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3학년 때 동맹휴학을 주동하여 퇴학당하였다.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적을 두고 잡역부 노릇을 하여

숙식비와 학자금을 벌었으나 너무 힘이 들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소련군정 지도부에 미운털 박혀


그러나 그때 주경야독으로 피나게 공부하였던 사회과학과 철학사상은

그를 표범 같은 주의자로 만들어주는 디딤돌이 된다.

1928년 귀국하여 원산에서 부두노동을 하며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일본 제국주의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총파업을 조직한다.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에 들어갔고,

1930년 반일 격문을 뿌리다가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적색노동운동 지도자로 조선청년의 기개를 보여주던 그는

제1차 태로사건, 곧 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5년 징역을 살고 나와

원산 · 흥남 · 진남포를 무대로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8·15를 맞아 원산에서 조공 함남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조공 정치국원 및 서기국원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이 되었다.

12월 중앙위원회 요청으로 서울로 와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중앙 월북 다음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해주대회에 참석했던 길에 김삼룡 · 이현상이 소비에트 유학을 위하여 ‘박헌영학교’로 불리던

강동정치학원에서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당중앙 권한대행으로 모든 당사업을 기획·지도하였다.

그리고 지도부 비선 비서였던 안영달(安永達) 밀고로 김삼룡과 함께 경찰에 잡힌 것이 50년 3월이었다.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埴) 장로와 김삼룡 · 이주하 교환협상이

벌어지던 중 6·25가 일어났고,

김삼룡과 함께 남산 숲속 소나무에 묶여 ‘개밥’이 된 것은 6월 28일 하오 3시였다.

최근 해제된 소비에트 비밀문서들을 토대로 김국후 기자가 엮어낸 <평양의 소련군정>에 보면

이주하 이야기가 두 군데 나온다.

평양 주둔 소련군정 사령부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주하 관련 파일이다.

‘1945년 8월 원산에서도 열렬한 반일 애국투사 이주하에 의해 원산시 공산주의 단체가 결성됐다.

이주하는 1928년부터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혁명 활동으로 인해

두 차례에 걸쳐 5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1945년 9월 이주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고,

그후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6년 9월 남조선 주둔 미군정 사령부의 명령으로 민주 운동을 지도했다는 죄로 체포돼

1946년 12월에 징역 7개월을 선고받았다.

일본이 항복할 무렵에는 조선에 노련한 공산당 활동가는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공산당을 복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조선에서 1945년 10월에 벌써 5개 도에서 공산당 도당이 결성됐다.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성 부상이었던 정률(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 거주) 증언이다.

이주하

 

“원산에 들어가보니 소련군이 조직한 원산시 인민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더군요.

위원장은 강계덕씨가 맡았고 조선공산당 원산시당은 위원장이 공석이었습니다.

얼마 후 서울에서 이주하가 올라와 제1비서를,

소련에서 온 고려인 2세 한일무(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항공사령관)가 제2비서를 맡았습니다.

나는 평양의 군정 사령부 명령에 따라 원산시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을 맡으면서

주로 소련군 원산시 위수사령관 흐레노프 소좌(우리의 소령)의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원산에 머물게 된 정률은 1945년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한 김일성 일행을 맞이하게 된다.

정률은 9월 중순경 치스차코프 제25군 사령관이 원산에 내려와

조선공산당 원산시당 제1비서 이주하를 만나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했다(정률이 통역을 맡았다).

치스차코프 당신이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주하 사령관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치스차코프 나에게는 소련공산당 당원증이 있다. 귀하는 당원증이 있는가?
이주하 공산주의자인지 여부는 신념으로 판단해야 하며 당원증은 형식에 불과하다.

당신은 소련공산당사를 잘 알 텐데, 레닌과 그의 전우들도 지하운동 시절 당원증이 없었다.

정률은 “천하의 소련군 친위대장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제 강점기에 지하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일개 조선공산당 청년 이주하의 논리적이고 명쾌한 답변에 부하들 앞에서 판정패당했습니다”라며

“이때부터 이주하는 소련군정 지도부에 미운털이 깊이 박혔지요”라고 회고했다.

미운털이 깊이 박힌 것은 치스차코프 대장한테서만이 아니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박갑동 증언이 있다.

 


“김일성 잡아 가둔 뒤 보복당해”


“내가 45년 말 행림서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해방 직후 원산에서 김일성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산은 본시부터 이주하의 아성으로 일본서 귀국 후 노동파업과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고

일제 때 운영했던 태평양노조 국제적색노동조합 태평양 지부(본부 소재 모스크바)를 그가 조직, 지도해

우리나라 최대의 파업을 일으켜 그 나름대로 터전에 자신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한다.

나는 그곳을 잘 모르나 주의의 모든 사람이 원산은 누가 무어라 해도 이주하의 땅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 그가 마치 성주와 같이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해방 후 이주하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원산시당과 강원도당을 조직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김동환(金東煥)이란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공산당을 조직합네 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 웃어 넘기려 했으나 그의 측근들이

김동환이란 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기에 하루는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 소련군부대에서 그 청년을 풀어주라는 지시가 왔고 그대로 한 뒤 알고 보니

그 김동환이란 자가 김일성이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실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이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김일성은 뒷날 이주하가 자기에게 했던 박해에 앙심을 품고 50년 이가 서울서 총살을 당한 뒤에도

그를 종파분자로 몰았고 그가 원산시대에 키운 간부들,

김원봉(인민공화당 당수이며 북한 검열상을 지낸 김원봉과는 동명이인으로 북강원도당 위원장) 등

북한에 있던 이주하의 측근을 모조리 숙청하는 등 보복을 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일까.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쌍두마차였던 김삼룡 것은 있는데 이주하 이름은 없다.

언젠가는 밝혀질 진상이겠고,

50년 5월 17일 특별군사재판정에서 했다는 남로당 2인자 마지막 말은 가슴을 친다.

46년인가 47년에 원산에서 사귀었던 여성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혼인을 하였는데,

둘 사이에 낳은 아이가 그때 두 살인가 세 살 되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내 자식놈한테는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 김성동, 작가

- 2009 01/13   위클리경향 8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