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조선 국문학계의 큰별 김태준 | ||||||
| ||||||
문화조선을 꿈꾸던 ‘문화공작대장’
‘3·8 이북서 찾아온 친구 하나가 백만장자의 아들로 몸집이 뚱뚱하고 큰소리 너털웃음 하고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 없다고 하더니 토지개혁 이후 수일 전에 그를 만나보니 얼굴이 몰라 보게 야위고 약간 가지고 온 돈냥은 모두 소비하고 가여운 ‘거지’가 되어 도로에 방황하는 것을 볼 때에 이 걸인이 작일까지 호걸웃음 하던 밑천은 전혀 인민의 피땀을 긁어모은 토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막살이에 사는 가난뱅이와 한길가의 거지들은 늘 저열한 것 같고 배뚱뚱이 모리배 팟쇼분자 관료 자본가 등 외래 반동세력의 주구들은 언제든지 자기네가 선천적으로 잘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8·15 이후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이 남조선은 ‘친일 팟쇼분자 모리배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적에 비상한 불쾌를 느낄 뿐 아니라 친일파 팟쇼분자 모리배의 도량(跳粱)으로 인해서 혼란을 결과한 남조선의 대비극에 대하여 해방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독립신보> 1947년 1월8일에 실린 김태준(金台俊, 1905-1949)의 글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여 조국의 완전한 민주독립을 이루자는 좌익들은 ‘인민항쟁의 애국자 극형 절대 반대!’ ‘공장은 노동자에게 토지는 농민에게!’ 같은 펼침막을 들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남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국대안 반대’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깃발 든 학생들과 ‘여남평등 이룩하여 평등조선 건설하자’는 펼침막 든 남조선민주여성동맹원들, 그리고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하라!”고 목쉰 소리로 부르짖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원들이 뒤를 좇아가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에 있던 전재민들이 돌아오고 있었고 야만적 테러가 횡행하고 있었다.
김태준 글은 이어진다. 경성에는 많은 적산사찰 유곽 요정 등 빈 집이 있건만 나에게는 ‘집’ 한 간도 없다. 오직 일제시대부터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다는 죄 때문에 테로단이 따라다니고 친일주구들의 가는 눈초리가 미치는 곳에 모든 박해의 시험이 몸에 따라다니고 쌀은 일일 일홉의 배급도 타본 일 없고 밀가루와 강냉이도 없어서 곤궁과 낙망에 신음하며 물가는 천정을 모르고 올라가니 도대체 이와 같은 곤궁은 나뿐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 전체와 동일한 처지에 있는 것이요 이 때문에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 이 인민항쟁의 지도자야말로 우리나라의 민족적 영웅이거늘 군정의 측근에 있는 팟쇼분자들이 이목을 은폐해서 정당한 말을 상부에 옳게 전달치 않음으로써 다량의 투사들께 ‘사형’이 선언될 때 민중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당국자는 이 복분지하에 일어나고 있는 민원을 아는가 모르는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백색테러에 쓰러졌을 때 진서로 조시를 썼을 만큼 한학 공부속이 밝은 국문학자였다. 몽양 영전에서 진서로 된 조시를 읽었던 이는 김태준 말고 65세 노독립투사였던 장건상(張建相)이 있다. 북선사람으로서는 특이하게 전라도에 있는 이리농림학교를 나왔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중이던 26살(1930년) 때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많은 사람들 눈을 크게 떠지게 하였다.
‘조선어문학보’와 ‘총서’를 펴내는데 힘을 보태었다. 그리고 <조선한문학사>를 펴내었는데,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처음으로 맑스의 사적유물론을 맞춰 쓴 것이다. 1933년 29살 때였다. 그뒤 고전문학 연구에 오로지 하여 <증보 조선소설사>를 첫머리로 하여 <원본 춘향전> <고려가사> <청구영언>을 교열해서 같은 해에 펴냄으로써, 조선 국문학계에 샛별로 떠올랐다. 1941년 ‘경성콤그룹사건’으로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등과 앞뒤로 붙잡혀 2년 징역을 살다가 병보석투쟁 끝에 나와 콤그룹 성원들과 소규모 써클활동을 이어나갔다.
1944년 1월, 경성콤그룹 핵심투사 가운데 하나였던 박진홍과 왜경 눈을 피하여 비밀혼인을 하였다. 11월에 박진홍과 함께 중국 연안으로 갔는데, 국내에서 비밀리에 횡적 연계를 가지며 활동 중이던 ‘공산주의자협의회’ 군사정책에 따라 중국에 있는 조선인 무장부대와 연계를 맺기 위한 것이었다. 내외가 서울을 떠나 신의주, 안동, 봉천, 금주, 산해관, 천진, 북경을 거쳐 중국 공산당 무장력인 홍군 해방구 연안에 다다른 것은 1945년 4월이었으니, 걸어서 갔던 것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이 목대잡아 세운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핵심이 되는 전국인민위원 5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12월 경성제국대학이 이름을 바꾼 경성대학에 복직됐는데, 3명의 총장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힐 만큼 경성대학 교수, 학생, 졸업생 60명으로 짜여진 전학대의원회 지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 차장이 되었는데, ‘국대안 반대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 창간호부터 3호까지에 ‘연안행(延安行)’을 연재하였다. 문맹 중앙집행위원과 평론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을 하였다. 8·15 이후도 침략자 일본놈은 패퇴했으나 일제팟쇼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서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운동은 반제, 반봉건 민족혁명인 것이고 우리 정치노선도 근로대중, 소시민, 지식분자, 진보적인 민족부르조아들을 무산계급 영도 밑에 집결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해 일제 잔재 반동팟쇼분자와 봉건 잔재를 숙청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노선도 이에 배합하여 무산계급의 영도 밑에 일제적인 것, 반동적인 것, 봉건적인 것을 배제하면서 민주문화를 건설하는 데 있다.”
‘문우인서관’에서 해방 1주년 기념으로 펴낸 책인데, 강의에 나선 12명 모두가 쟁쟁한 혁명가들이다. 엮은이 김계림(1904~?) 말처럼 ‘모두가 제일선에서 분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민적민주주의 전사들’인 이강국, 박문규, 정태식, 이우적, 박치우, 이청원, 온락중, 이석태, 강병도, 이태진이 그들인데, 김태준 글은 부인 박진홍이 쓴 ‘민주주의와 부인’과 나란히 실려 있다. 김태준은 말한다. 금후 우리 예술운동의 주요한 행동은 공장에 농촌에 가두에 광범한 써클, 클럽 활동을 전개하는 데 있다. ‘써클’은 예술운동의 온상인 동시에 우리의 정치노선을 삼투시키는 한 개의 말단기관이다. 그것을 각개의 예술 부문에 한할 것이 아니라 등산, 수영, 척사(윳), 스포츠 등 모든 경기, 오락 등을 갖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조직으로 볼 때에 문어발과 같이 자기의 주위에 집결시켜야 한다. 공장에, 농촌에, 가두에 수다한 문학동호자단체, 소인극단, 음악단체, 미술단체 등을 구성해서 혹은 자주 회합을 가져 예술을 연마하고 정치적 지식을 함양하고, 특히 문예는 잡지 단행본을 펴내어 발표할 기회를 만들며 윤독하고 비판하고 우수한 사람을 선출해서 문학가 단체에 추천한다면 비로소 대중 속에서 나온 작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예술가가 대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근로하는 인민대중과 함께 문화를 생산·소비하기 위한 전위부대로 ‘문화공작대’를 만드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극우파 청년대한테 갖은 테러를 당하고 극장 전선줄이 끊기며 극장 무대에서 폭탄세례를 받는 등 온갖 훼방공작에 시달리면서도 몇 대로 나누어 도별로 내려보냈는데, 오장환, 이용악, 유진오, 이동규, 문예봉, 황철, 유현, 이숙, 최창은, 윤자선, 한동인, 김진해 같은 예술가들이었다.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부장으로 문화공작대 지원사업과 기밀탐지사업을 하던 김태준이 경찰특수공작대에게 붙잡힌 것은 1949년 1월이다.
여순항쟁을 일으킨 김지회(金智會) 정인 조경순(趙庚順·20세), ‘인민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28세)와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수색에 있는 육군 형장에서 이승을 떠난 것이 11월 7일.
잠들어 있는 인민대중 의식에 예술의 단비를 뿌려주어 빛나는 문화조선을 이룩하려던 아름다운 꿈은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같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유진오는 그래도 같은 기계유씨(杞溪兪氏) 종친인 유진오(兪鎭午)한테서 탄원서 자구수정이나마 받아 무기로 감형되었는데, 김태준한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중앙은 월북한 지 오래이고 김삼룡·이주하 동무는 보급투쟁에 바쁜 잠복에 들어갔는데, 여론을 일으켜줄 <해방일보> <청년해방일보> <노력인민> 또한 폐간당한 지 오래였다. 혁명열사 유자녀 ‘쯩’을 빼앗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는데, 유자녀 ‘쯩’을 걷어간 이유인즉 아버지가 했던 최후진술이 부르조아적 투항주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태준이 했던 최후진술이라고 한다. 숱한 고전을 수집하여 철저하게 고증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 돌아가 그런 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왜경의 악독한 족대기질을 당하면서 ‘비참한 기형아’로 낳았던 이재유 동무 아이를 잃은 엄마 박진홍이 다시 만나서 낳은 우리 조선국문학계의 큰별 김태준 동무의 아들이다. 연안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서 돌아오던 길에 낳은 아이이다. 갓난아이 혼자서 3·8선을 넘어갔을 리 없으니 엄마가 업고 갔을 터인데, 그 엄마는 또 어디로 갔는가. ‘혁명열사쯩’까지 받은 김태준과 박진홍은 혁명열사릉에 없다. 애국열사릉에도 없다. - 2009 02/03 위클리경향 810호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사 아리랑] 조원숙 -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 (0) | 2008.12.20 |
---|---|
[현대사 아리랑] 정칠성 -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 (0) | 2008.12.20 |
[현대사 아리랑] 박진홍 - 혁명전사가 된 문학소녀 (0) | 2008.12.20 |
[현대사 아리랑] 이주하(李舟河) - 원산 무대로 부두노동자 의식화 (0) | 2008.12.20 |
[현대사 아리랑] 김삼룡 - 일곱 개의 얼굴을 가진 변장의 명수 (0) | 200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