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김순남 - 조선 제일의 작곡가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47

 

 

 

 

[현대사 아리랑]

 

 

 

 조선 제일의 작곡가 김순남 

 

애국가처럼 불렸던 ‘인민항쟁가’

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절 합창부를 지휘하는 김순남. <김세원 제공>


“우리의 해방이 만일 진정한 것이었더라면 금년이라는 해는 자유로웁고 원대한 기획이 실제화되는

도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정치적 혼란과 갈등은 여지없이 그러한 기획성을 파괴하여 왔고

몇몇의 실천은 반동적 정치성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발전이 저해되었을 뿐더러

그의 방향은 비밀주의이며 제국주의적인 역사의 역행을 하고 있기까지에 이르렀다.

남조선의 이러한 현상은 곧 문화의 발전을 억제하여 왔으며

따라서 우리 악단은 이러한 파문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백제>라는 예술전문 잡지 1947년 2월호에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김순남이 쓴

‘악단 회고기’ 첫 대문이다.

악단을 억누르고 있는 여러 비민주적 · 비음악적 짓거리와 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을 헐뜯는

우익 쪽 음악인들의 반음악적 짓거리를 안타까워 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창작면은 현실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활발히 발표되지 못하였다.

다만 성의 있는 방송음악 편집이 몇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기타는 수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 (…)

우리 조선의 민족음악 수립을 담당하는 창작활동이 이와 같이 여의치 못하게

현실적 제조건에 구애되고 있음은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우리의 민족음악은 과학적이며 진실성을 갖춘 창작이 모든 연주활동과 더불어 발전하여 나가는 데서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니 이 점으로부터 우리 악단은 참된 발전을 갖추어

국제적 의의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8·15를 맞으면서 좌우 대립이 깊어졌다고 하는데, 그 속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세계관의 골칫거리였다.

민족과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골칫거리를 놓고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 것은

마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눈 제 몸이 달랐던 탓이었다.

을사늑약부터 40년에 걸친 일제식민체제를 씻어내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이룩하는 길에서

날카롭게 맞서게 된 두 갈래였다. 혁명노선과 수구노선이 그것으로,

민족주체세력과 반민족친일세력 사이 쟁투사는 정치동네 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음악동네 또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교향악협회’와 ‘조선음악가동맹’이 그것이었다.

러취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모시고 1946년 9월 15일 생겨난 ‘교향악협회’에는

이사장 현제명, 사무국장 김관수, 그리고 김성태·임원식·전봉초 등 회원이 48명이었다.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향상과 차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목적함’이 강령이다.

1951년 러시아 유학 시절 허진과 함께.

왼쪽이 김순남. <김세원 제공>

1945년 9월 10일 79명으로 비롯한 ‘조선음악가동맹’ 회원과 강령이다.

 

위원장 김재훈. 부위원장 안기수. 서기장 신막. 총무부장 박영근. 사업부장 최창은. 작곡부장 김순남. 연구부장 정종길. 중앙집행위원 김재훈, 안기영, 신막, 정종길, 김순남, 이건우, 이범준, 최창은, 박영근, 정영모, 김훈, 노창진, 신용팔, 강장인, 하길한, 김창섭, 박남수, 노광욱.

강령

1. 일본제국주의 잔재음악의 소탕을 기함.

1. 봉건주의적 유물음악의 청소를 기함.

1. 국수주의적 경향을 배격함.

1. 악단의 비민주주의적 세력의 구축을 기함.

1.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를 기함.

1.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음악문화의 건설을 기함.

1.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를 기함.


김순남(金順男)은 1917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본이름 현명(顯明). 어렸을 적부터 덕수보통학교 교사였던 어머니한테 피아노를 배웠다.

14살에 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사범학교 두 군데에 합격하였으나,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경성사범학교와 1937년 경성사범학교 연구과를 마친 다음

잠깐 보통학교 교사를 하였다. 같은 해 ‘한 트렁크의 작곡 작품을 가지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구니다치 음악학교에서 작곡 공부를 하였고, 동경제국음악학원 작곡과를 나왔다.

 


가곡집 ‘산유화’  ‘자장가’ 펴내


1944년 귀국하여 ‘성연회’라는 지하써클에서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목대잡았다.

같은 해 교사였던 문세랑(文世娘)과 혼인하였고, 다음 해 7월 1일 무남독녀인 세원(世媛)이 태어났다.

1945년 9월 조선음악가동맹 일을 하면서 평론 ‘음악’과 ‘조선작곡계의 신발족’ 발표.

1946년 순수아카데미즘을 파고드는 ‘음악가의 집’ 동인으로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7년 10월 우리나라 첫 음악교과서인 <임시중등음악교본>에 ‘건국행진곡’이 실렸고

가곡집 <산유화>를 펴냈다.

1948년 가곡집 <자장가>를 펴냈는데,

이 가운데 2편 자장가는 딸 세원을 위하여 스스로 시를 써서 곡을 붙인 것이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은 꿈나라의 꽃밭이란다
바람아 부지 마라 물결도 잠자거라
아기 잠든다 우리 아기 꿈나라 고개 넘으면
엄마의 가슴 우에 눈이 나린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야
뒷동산에 별 하나 반짝여준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에 고이 안겨 어서 잘자라
사나운 가마귀떼 모진 바람 몰아다 너를 울린다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주렴아

흘러가는 것은 강물만이 아닌가.

김순남이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나게 꼭꼭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너무도 사랑스럽던 딸 세원은

42살 중년이 되었다. 아버지 핏줄을 이은 것인가.

라디오 음악프로 진행자로 물망 높은 성우 김세원은 아버지한테 편지를 쓴다. <가정조선> 89년 1월호.

(… 어느날 밤 제가 국민학교 1, 2학년쯤이었을 겁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제가 잠든 줄 알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고 계셨어요.

그 내용은 아버지의 불 같은 성격, 아버지가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과 제일고보(지금 경기고), 이 두 일류학교를 다 합격하자

교장선생님이 아버지를 업고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돌았다는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의 어린 가슴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아버지가 유명한 <산유화>를 만든 월북 작곡가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날 이후 ‘김순남’은 절대 입 밖에 내지도, 나의 아버지라 밝힐 수도 없는 이름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건 감옥살이와도 같았어요. 더구나 어린 나이에 그 비밀을 지키기란 너무나도 벅찼습니다.

때론 나도 딴 아이처럼 아버지 자랑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다른 아이들 다 가지고 있는 눈깔사탕을

나만 안 가지고 있어 처마 끝에 쪼그리고 앉은 작은 아이 같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산처럼 쌓여 갔습니다.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겠지…

아버지의 손도 만지고 얼굴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

아버지, 모스크바에서 아버지를 만난 쇼스타코비치는 동양에도 이런 귀재가 있었느냐고 했다죠?

미군정 때 음악고문 헤이모워츠는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글을 남겼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오히려 저를 더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일찍이 숙청되어 창작활동을 못하셨다니, 상처받았을 자존심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저려와요. (…)

김세원이 아버지 자취를 찾아 모스크바에 갔을 때였다. 89년 9월.

아버지 사진을 보게 된 김세원은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나의 아버지 김순남>에 나오는 김세원 글이다.

“소련에 와서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다.

그 사진 속에는 날카로운 코와 넓은 이마와 아주 약간의 미소띤 입술,

그리고 외로움이 배어 있는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손으로 막았다.”


아버지는 북한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평양으로 가기 며칠 전,

운명이 달라질 것을 전혀 예측도 못한 채 이 사진을 찍고 잠깐 다녀오마며 가서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허 선생님은 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이북에서도 서로 알고 지냈지만,

특히 소련 유학 때 더욱 가까웠다고 한다. 허 선생님은 바로 어제 일인 듯 말씀하셨다.

“그분은 참 하이칼라였어요. 생각이 하이칼라죠. 즉흥 연주곡은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하차투리안이 김 선생의 곡을 편곡해서 발표도 했지요.

하차투리안은 김 선생을 이북에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어요.

6개월 만이라도 자기와 더 같이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소환당했지요.

그분은 정열적이었어요. 흥분을 하면 말이 막 빨라졌지요.”

 


무남독녀 김세원씨 성우 활동

 

1944년 부민관에서 열린 제1회 작곡발표회 시상 후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김순남.

 <김세원 제공>

평양과 소련 합작으로 문을 연 평양식당으로 가는 차 속이었다. 허진은 두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김순남 노래를 불렀다. 너무도 서정적이면서 또 전투적으로 힘찬 노래였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곡가 하차투리안이 편곡한 김순남 곡이었다.

 

허진이 말하였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술가란 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없는 거거든요. 바로 그 예술가는, 때문에 그분이 작곡한 것은 남는 것입니다. 그가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민중에게 손해로 남는 겁니다. 따라서 예술가나 작가에 대해서는 사상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가야 얼마든지 나오죠. 물론 좋은 정치가가 나오면 행복한 일이지만,

정치는 뜻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술은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죠.”

“전 아버지의 음악을 들으면 첨 듣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데… 정확하게 곡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고…

그저 감정만 좀 내보겠어요… 고향은 하늘가 아득히 멀고, 덤불길 헤치며…”
허 선생님은 눈을 감으며 열심히 불렀다. 워낙 노래를 잘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시는 분 같았다.

“가사가 전혀 안 돼. 한없이 서정적이고…” 허 선생님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그저 고수가 장단 맞추듯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김순남 선생 하면 당시 소년단으로부터 직업적인 가수까지 누구할 것 없이 다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아마 북한 땅에서는 아리랑이나 도라지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내 알기로는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김순남이 조선인에게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인민항쟁가’였을 것이다.

1947년에 나온 이 노래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렇게 죽엄을 맹서한 깃발을

 

 

노동자 · 농민 함께 부른 ‘빨치산 노래’

경성사범 재학 시절 전교생 앞에서 피아노 독주회 모습. <김세원 제공>


“애국가 혁신운동.
가장 절실한 문제의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그 보수적인 태도에서 혁신이 못 되고 있다.

적어도 일국의 애국가가 타국의 가요로써 대용될 수 없을 것이며 더욱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음악에 무지한가를 폭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요가 아닌 안익태씨 작곡도 역시 8·15 이전 것이며 야소찬미가조로 된 것이어서

그 멜로디나 리듬에 있어 예컨대 마르세즈 같은 애국적인 감격이 표현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은

시위행렬시에 애국부인들이 겨울밤에 부르고 다니는 처량한 소리 같은 것임을 들어 알 것이다.”

 


‘인민항쟁가’ ‘해방의 노래’ 등 100여 곡


<예술연감> 1947년 판에서 박영근(朴榮根)이 말하는 ‘음악계’ 진단이다.
“본래 이 곡이 ‘그리운 옛날’을 추억하는 노래였는데

일제시대에는 송별가로 졸업식에서 부르는 노래였음은 다 알 것인데

선배가 우연한 기회에 음악에 대한 상식부족으로 정한 것을

보수적으로 망국 당시의 추회로 그냥 부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봉건 · 종교적 잔재인 애국가(특히 안익태 작곡)와

김순남 작곡인 ‘해방의 노래’를 비교해 보면 잔재 여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항일투쟁에 몸 바쳤던 민족주체세력이 모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불렸던 ‘해방의 노래’였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다.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김순남(金順男)이 북조선으로 간 것은 1948년 4월이다.

48개 정당 ·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였는데, 체포령이 떨어져 있었다.

‘인민항쟁가’며 ‘해방의 노래’ 같은 빨치산 노래를 만들었다는 죄목이다.

‘한라산 빨치산 노래’  ‘오대산 빨치산 노래’ 같은 김순남이 작곡한 빨치산 노래며,

‘우리의 노래’  ‘독립의 아침’  ‘농민의 노래’  ‘청총가’  ‘여맹가’  ‘인민의 소리’ 등 100곡이 넘는다.

김순남이 만든 빨치산 노래는 야산대나 인민유격대 같은 빨치산들만 부르는 게 아니었다.

노동자도 부르고 농민도 불렀다. 어른도 부르고 아이들도 불렀다.

일제와 그 졸개들에게 고통받던 피압박 · 피착취 대중들이 목이 터지도록 불러보는 ‘인민의 노래’였다.

 

<나의 아버지 김순남>을 보자.

“나는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있던 박병률입니다.

나는 여기서 순남 선생의 따님을 만나게 되어 아주 감격스럽습니다.

순남 선생은 1948년 강동정치학원에 오셔서 많은 문화사업을 하셨습니다.

순남 선생은 눈이 빛나고, 불 같은 성격에 천재이셨습니다.”

박병률 선생님은 82세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눈이 반짝이고 말씀하시는 기억력에는 총기가 엿보였다.

박 선생님은 아버지의 노래를 수도 없이 부르셨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89년 9월 김세원이 아버지 자취를 찾아 모스크바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가 연구원으로 다녔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도 가보고, 그 안에 있는 볼쇼이 홀 아버지가 앉았던

걸상에도 앉아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김세원은 또다시 슬픈 울음을 터뜨린다.

극작가 함세덕(咸世德)이 작사하고 김순남이 작곡한 <산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제주도 4·3이야기였다. 그때 강동정치학원에는 4·3을 목대잡았던 김달삼(金達三)도 있었다고 하였다.

“작곡이야 순남 선생이 세계적이잖소. 빨치산노래는 모두 순남 선생이 작곡했지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순남 선생은 세원 선생처럼 양머리(곱슬머리)였소.

눈 있는 데가 순남 선생과 비슷합니다. 아버지 모습이 있어요.

순남 선생은 아주 정열적이셨습니다. 온화하고 강했지.”
박병률은 그러면서 두 손을 흔들며 열렬히 ‘제주도 빨치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라산 깊은 골짝 우리의 진지
아- 아- 제주도 빨치산은
아- 조국의 자유를 지킨다
침략을 반대하고 일떠선 동포
우리는 삼천만의 아들과 딸이다

김세원은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연구원 입학원서를 보았다. 러시아말로 된 간동한 자필 이력서였다.

김순남은 1952년 여름에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말을 공부하였고, 정식 입학을 한 것은 12월 23일이다.

이력서 뒷장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소환명령장이 붙어 있었다.

 

김순남 운명을 갈라버린 종이쪽이었다.

“시인 임화에 이어 이태준(李泰俊), 김남천(金南天), 이원조(李源朝) 등 문인 그룹과

작곡가 김순남, 연극인 황철(黃澈) 등 월북 예술인들이 무더기로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문화혁명’ 식으로 소부르주아사상과의 투쟁이라는 간판 밑에

남로당파의 월북 예술인들을 말살하는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숙청작업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 수상을 비롯, 당 · 정 고위 인사들 대부분이 소속 정파를 초월해

이태준, 김순남, 최승희 세 사람을 ‘우리 조선민족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라며

공 · 사석을 가리지 않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강상호(姜尙昊, 1909~?) 증언이다. 그때 내무성 부상이던 강상호는 ‘소련파’ 간부 가운데 하나였다.

강상호는 “박헌영 · 이승엽 간첩사건은 김일성의 뜻에 따라 박금철, 박창옥, 박정애, 박영빈 등이 추진한

정치공작의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이들 월북 예술인은 박창옥, 기석복, 정률, 정국록, 박길룡, 전동혁 같은 소련파 간부들과 어울려

탁주를 마시며 일제하 조선예술인들의 항일투쟁 등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하였다.

강상호도 빠짐없이 끼어 있었다.

 


이태준 · 최승희와 함께 ‘3대 예술가’

 

구니다치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김순남(맨 오른쪽). <김세원 제공>

“이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남조선에서 추억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봉건주의 잔재가 있고 친일파들이 설치는 사회(남조선)에서는 주체성 있는 예술을 진흥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상이 선진사상이고 사회주의운동만이 예술의 본질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월북했다. 특히 우리의 이 같은 진보적인 예술활동은 애국자 박헌영 동지가 충분히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그를 따라 공화국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 보니 처음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사정이 달랐다’며 자신들의 월북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당이 모든 작품활동을 사상의 테두리 속에 너무 맞추려 하다 보니 예술활동이 억압받게 된다’면서 ‘이런 환경에선 올바른 예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친빨치산파 찬양 위주의 풍토에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울러 이들은 ‘이제 공화국에서도 해외에서 빨치산운동을 했던 사람의 항일운동만 추켜세우지 말고 국내의 일본놈들 밑에서 모진 탄압을 받으며 항일운동을 했던 국내파나 박헌영 동지의 불굴의 애국정신도 함께 인정해주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는 등 ‘박헌영 찬양론’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한 말과 움직임이 당에 보고된 것은 물론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고자는 박창옥이 틀림없다고 보는 강상호이다.

53년 봄 어느 날 새벽 권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 3명이 이태준을 끌고가 사상검토를 할 때였다고 한다.

“박헌영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다. 민족통일을 위해서는 그의 혁명노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미제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지 않았는가?”

“해방의 공간에서 서울은 다소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미국의 간첩활동을 한 적은 결코 없으니 날조하지 말라.”

이태준은 이승엽 등 남로당 핵심간부 12명의 재판이 끝난 다음 산골 협동농장에 끌려가

감자재배 등 막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산간 협동농장 부근 외딴집에서 병들어 돌아간 것이 60년대 초였다.

김순남도 이태준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연행되어 사상검토를 받았다. 강상호의 증언이다.

“당 · 정 고위 간부들과 외국 귀빈들이 참석한 연회석상 등에서 그의 즉흥적인 피아노 독주는

가위 천재적이었다. 1948년 9월 중순, 평양 시내 모 음식점에서 남로당파 간부와 월북 예술인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헌영의 부수상 겸 외무상 등용 환영연회가 열렸다.

이태준 선생의 축사와 임화의 축시에 이어 이승엽의 건배 제창으로 환영연회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을 즈음 김순남이 박헌영을 환영하는 즉흥 피아노 독주를 연주, 분위기를 절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피아노 독주가 훗날 그에 대한 숙청 구실이 됐다. 그에게는 동료 월북 예술인들처럼

지하감옥에 감금해 조사한 후 산간오지로 정배 보내지 않고 창작 금지만 내려졌다.”

 


10년간 폐결핵 앓다 1982년쯤 숨져


김순남과 가까웠던 전 문화성 부상 정률(鄭律, 본명 정상진, 1918~ ) 증언이다.
“53년 봄 창작 금지 명령을 받고 2년여 집에 박혀 있던 김순남이 54년 말 우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선생님, 예술가에게 창작 금지는 사형이나 다름없습니다. 먹고 자고 숨만 쉬는 동물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대동강 물고기 밥이 되겠습니다’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자살을 택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좋은 곡을 창작하면 당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니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어 발표하자’고

제의했지요.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던 중 당에 알려져 중단됐습니다.”

김순남처럼 월북한 작곡가에 안기영(安基榮)과 이건우(李建祐)가 있다.

둘 다 음악가동맹에서 함께 일했던 동지였다. 이건우는 6·28때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는데,

리어카에 병든 아내와 자식 셋을 실어 친척집에 맡기고 북으로 갔다고 한다.

옥바라지 끝에 얻은 병으로 아내는 숨을 거두었고 한 살짜리 막내는 죽었으며

아들 종국은 70년대 초쯤 머리 깎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김순남이 눈을 감은 것은 1982년쯤으로 알려진다.

10년 동안 폐결핵을 앓던 뒤끝이었다는 게 ‘김순남 광신도’인 노동은 교수 말이다.

러시아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아버지 자취를 찾아다니던 김순남 딸인 김세원이 일본에 갔을 때였다.

<해방일보> 기자 출신으로 남로당 마지막 조직을 추스렸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이 말했다.

“박헌영 선생도 김순남 선생을 매우 좋아하셨고,

김순남 선생 같으신 분은 우리 민족의 보배일 뿐 아니라 세계의 보배라고 하셨지.

세원이가 아버질 많이 닮았는데, 아버지는 얼굴에 재기가 배어나왔고 타고난 천재야.”
- 김성동

- 2008 12/23, 12/30  위클리경향 805호, 8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