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김삼룡 - 일곱 개의 얼굴을 가진 변장의 명수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47

 

 

 

 

[현대사 아리랑]

 

 

 

 인민대중의 영원한 동무 김삼룡

 일곱 개의 얼굴을 가진 변장의 명수

 
 


왼쪽)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남로당이 붕괴되었다고 전하는

<동아일보> 1950년 4월 1일치 기사. 기사 중앙 위의 사진이 김삼룡이며 아래가 이주하이다.

오른쪽) 김삼룡이 해방 후 숨어 살던 아지트인 효재동의 반찬가게 사진. <사회평론 제공>

 


하룻밤에 야체이카 하나씩 만들다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가져오게 할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이 회합의 석상에서 축사를 드리게 된 것을

우리 당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탄압 밑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한결같이 과감하게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경의를 바치는 바이다.”


연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도교 대강당을 가득 메운 600여 명의 청중을 둘러보았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인민대표들은 일곱 개 얼굴을 가졌다는 사나이를 향하여 우레 같은 손뼉을

쳤다. 하룻밤이면 야체이카 하나씩을 만들고 이틀이면 노동조합을 띄워서 사흘이면 스트라이크에

사보타주를 거쳐 총파업 투쟁에 들어가게 만든다는 전설적 조직 귀재라고 하였다.

색안경을 일곱 개씩 지니고 다니는 변장의 명수라고 하였다.

김삼룡. 1945년 11월 20일 하오 1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서 나온 조직부장 김삼룡은 축사를 이어나갔다.

“‘부르죠아지’는 1919년에 폭발된 3·1운동 때에도 민중의 혁명적 기색에 치받치어서

지도적 역할은 놀았으나 노동자와 농민운동의 발전과 중국 혁명의 경험에서 비겁하게도

총독정치와 타협하기 시작하고 그후 1930년 신간회가 없어질 때까지는

겨우 민족개량주의자로서의 그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의 중국 침략전이 시작되자 그들의 반동파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의 찬양,

소위 ‘국방 헌금’ 징병 징용의 적극적 주장, 혁명세력에 대한 탄압에 적극적 진출, 황민화운동 등으로

그의 반동적 행위를 여지없게 발휘시키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옳소!” “옳소!” 장내가 떠나갈 것 같은 손뼉소리와 고함소리는

대강당을 넘어 회관 주변 주택가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회관 앞 너른마당에는 인민대회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로 백차일을 친 듯하였다.

단상과 마당에는 조선공산당에서 내 건 표어를 적은 펼침막과 깃발들이 빽빽했다.

김삼룡은 축사를 이어나갔다.

“현하 조선 현상은 퍽이나 복잡하고 혼란 상태에 있으니 그는 8·15일 직전까지도,

아니 15일 이후도 일군이 물러가기 전까지는 일제에 대한 투쟁은 고사하고

해방운동의 전사들을 억압하여 주구의 역할밖에 못 놀던 반동배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여

가장 애국자인 것같이 민중을 농락하여 민족통일전선을 혼란시키고 있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공산당은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시키고 있다.

현하 조선의 운명으로 결정할 민족통일 전선에 있어서 ‘덮어놓고 뭉치라’는 주장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무리를 옹호하는 대변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김삼룡 · 이주하와 조만식의 교환이 흐지부지됐다고 전하는 <경향신문> 기사. <경향신문>

김삼룡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유일한 경우였다.

<동아일보> 1950년 4월1일치를 보면 김삼룡 · 이주하가 체포되어 남로당이 붕괴됐다는 사실을 보도한 1면 머릿기사와 함께 넥타이를 맨 김삼룡의 상반신 사진이 실렸는데, 아마도 이때 찍힌 것으로 보인다. 철두철미한 지하운동가였다.

해방이 된 다음에도 어쩌다 당사에 잠깐씩 들르는 것을 빼고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율적으로 맞은 해방이므로 독립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었다.

“아, 삼룅이. 심 좋구 말 잘허구 인품 좋았지.”
한 마을에서 자랐던 사람이 한 말이었다.
“눈이 오시넌 날이먼 삼룅이는 다른 사람이 등교허기 전이 미리 핵교 와서 핵교 마당을 죄 쓸어놓군 헸었지.”
김삼룡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인정이 많았으며 그릇이 컸다고 한다. 노동운동가인 이재화가 김삼룡 고향인 충북 중원군(그때 충주군) 엄정면 용산리를 찾아갔을 때 보통학교 5년 후배가 하던 말이라고 한다.

 

‘남로당 마지막 지도자 김삼룡’이라는 르포 기사가 실린 <다리> 1989년 9월호에 나온다.

“어느날 사무소 앞인디, 담뱃닢이 든 봉다리를 안구 달려가던 김삼룡을

일본 사람덜이 다리 걸어 자빠트려 넘어졌구 담뱃닢은 산산히 흩어졌어.

그러자 왜늠덜이 통쾌허다며 웃어싸면서 놀려댔지. 그런디 아이예 아랑곳허지 않구

흩어진 담뱃닢을 주서담더니 씩 한 번 웃더니먼 태연히 걸어가넌 걸 봤구먼.

여늬 사람이 아니라구 생각헸지.”

 


46년 박헌영 월북후 남로당 맡아


김삼룡(金三龍, 1910~1950)이 태어난 것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해였다.

아직 종짓굽도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홀어머니 무릎 아래서 보내야 하였는데,

송곳 꽂을 땅 한 뼘 없는 애옥살이였다. 어머니는 국밥집을 했고 보통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맏언니는

남의 밭을 빌려 황색잎담배 농사를 지어 살림을 꾸려나갔다.

6형제 가운데 셋째였던 삼룡은 13살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삼룡과 늘 일이등을 다퉜다는 동기생이 하는 말이다.

“삼룅이 그눔 키는 작구 땅땅 헸지먼 공부 하나는 긔가막히게 잘헸지.

두뇌가 아주 믱석허구 한 곳에 집착력이 강헸구 또한 우직헐 정도루 뚝심이 좋았지.”

김삼룡 삶을 결정하는 세 차례 고비가 있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민족주의자 이재현 선생을 만나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과,

19살 나이로 보통학교를 마친 다음 서울로 올라가 고학생들 자활단체인 고학당 ‘칼토페’에 들어간 것과,

이재유를 만난 것이 그것이었다.

칼토페에 나가면서 공산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고, 독서회를 만들어 공산주의사상을 파고들어 가다가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게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는다.

31년 여름, 채석장에 사역을 나갔던 김삼룡은 3년 6개월짜리 징역을 살고 있던

 ‘30년대 최고의 혁명가’로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였던 이재유와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기를 채우고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하루종일 새끼를 꼬는 틈틈새새로 책을 읽으면서도,

초비상이 걸린 지서에서 겨우 50m만 떨어진 집으로 마을 청년들을 불러 의식화 교육을 시킨다.

 

김삼룡은 늘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는 고향사람들 증언이다.

뒷간에 갈 때도 반드시 책을 들고 가는 서음(書淫)이었다. 4개월 뒤, 인천으로 간 김삼룡은

부두하역인부로 취업하고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조직작업에 들어간다.

원산에서부터 시위 경력이 있는 부도노동자 이백만(李百萬, 1909~?) · 이석면(李錫冕) 등과

두 팔 걷어붙이고 노동운동을 벌여나가는데, 이재유한테서 배운 트로이카 방식이었다.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경성그룹사건으로 1934년 이현상과 함께 체포되었고,

36년 12월 25일 새벽 이재유가 체포됨으로써 제1차경성트로이카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39년 1월에 상경하여 김삼룡씨 및 그 부인 옥숙(玉淑)씨를 만나

 태창직물공장을 중심으로 ‘콤그룹’을 조직하여 차츰 각 공장에 세포조직을….”

김오성(金午星)이 펴낸 <지도자군상> 이관술편에 나오는 대문인데, 김삼룡은 혼인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부인이 있을 수 없다. 아마도 이관술 누이 이순금(李順今, 1912~?)일 것으로 보이니,

“정식 혼인을 한 적이 없고 단지 인텔리 여성과 동거설이 나돌았다”는 고향사람들 증언이 있다.

이관술이 이순금 길잡이를 받아 출옥 후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삼룡을 찾아가

경성트로이카 조직 재건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일제의 야수적 탄압 아래 살아남은 조공당원 가운데

김삼룡만이 ‘철의 규율’에 투철한 기본계급 출신으로 빼어난 조직 수완을 갖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즈음 사상적 동지인 이순금과 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주하와 함께 50년 6월 총살당해

 

김삼룡과 동거한 것으로 보이는 이순금. 그녀는 이관술 누이다.

이관술 · 이순금 남매 제의를 받아들인 김삼룡은 곧바로 상경하여

대창직물, 경성전지, 경성방직, 용산철도공작소, 조선인쇄소 등

노동조합으로 파고들어가 야체이카를 심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조직의 귀재’ 소리를 들으며

8·15 뒤 인공 · 민전 · 조공 조직부장을 맡고,

46년 9월 29일 박헌영 당중앙이 월북하면서 불법단체로 낙인 찍힌

남로당을 책임맡게 된다. 1939년 이관술과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출옥한 박헌영을 지도자로 모신다.

그러나 해방 전 공산주의자들 충결집체였던 경성콤그룹은

40년 12월 김삼룡이, 41년 1월 이관술이 체포되면서 무너지게 된다.

8.15와 함께 광주 벽돌공장에 위장취업해 있던 박헌영 마중을 받으며

전주 형무소를 나온 김삼룡은 재건된 조선공산당 조직국 책임자 겸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는다.

서울을 5개 지구로 나누어 혁명역량을 극대화시키면서 전평 · 전농 · 민청 · 여맹 · 문 맹 같은 외곽 조직들을 건설해 나간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이 본 김삼룡 모습이다.

“일제시대 일제 군대가 사용하던 방한외투와 방한모를 쓴 사람이 앞으로 걸어오는 검은 윤곽이

눈앞에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건명태 몇 마리를 새끼로 묶은 것을 옆에 끼고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스칠 때 눈이 맞부딪쳤다. 털방한모로 얼굴의 일부밖에

보이지 않아 누군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 같았다.

나는 행여나 하고 돌아다보니 내 뒤에 따라오던 정태식(鄭泰植, 1910~?)과 만나

서울운동장 뒷길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르다가 행인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들의 옆에 따라붙었다.

‘박갑동 동무! 얼마나 수고하시오?’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몇 해 전에 듣던 김삼룡의 목소리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같이 내 손을 찾아 꽉 쥐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김삼룡의 손을 받아쥐며 ‘참 오래간만입니다.’ 겨우 한마디의 인사밖에 하지 못하였다.”

김삼룡은 큰 북과 같은 사람이었다. 치는 사람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는 북처럼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됨됨이가 컸다고 한다.

보통학교만 나온 ‘무쯩’이었으나 일찍부터 밑바닥 현장노동으로 다져진 생체험을 바탕으로 한

‘영도의 예술’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남로당 2인자였다.

1인자가 중앙당을 떠난 다음 남로당을 이끌어 가는 핵심 3인은 김삼룡 · 이주하 · 정태식이었다.

이재유시대부터 묵은 동지 이현상(李鉉相, 1905~1953)은 지리산유격대를 이끌고 있고,

이주하(李舟河, 1905~1950)는 군사부 책임을 맡았으며,

정태식은 기관지부와 이론진을 맡았는데, 김삼룡이 총책이었다.

김삼룡과 이주하가 특경대에 붙잡힌 것은 50년 3월 27일이었고 곧 정태식까지 붙잡혔으니,

남로당 지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평양 근교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는 남로당 핵심 가운데 단 두 사람 이름만 있다.

김삼룡과 이현상.

 

50년 5월 17일 특별군사재판 법정에서 하였다는 김삼룡 마지막 말은 딱 한마디였다.
“아무런 할 말이 없으니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주시오.”
이주하와 함께 남산 숲속에서 총살당한 것은 50년 6월 28일 하오 3시였다. 향수 41.

김성동

- 2009 01/06   위클리경향 807호

 

 

 

 

 

남로당 김삼룡 부인 노동신문 글 게재

8.15해방 후 남로당 지하당 총책을 지낸 김삼룡(1910.2-1950.6)씨의 부인 리옥숙(90)씨가

20일 북한 노동신문에 수기를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리씨는 수기에서

"광복 전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에서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아온 나는

그 사랑의 품에 안긴 때(월북 후)로부터 인생전환을 하여

90세 나이에 이른 오늘까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리씨는 6.25전쟁 때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차를 보내 자신과 세 딸을 월북시키고

최고사령부 근처에서 살도록 해준 사연, 김 주석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93년 1월

자신과 세 딸을 만나 오찬을 베풀고 기념사진을 찍은 일 등을 소개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편을 리현상. 성시백. 박정호와 같은 '남조선혁명가' 반열에 내세워주고

'조국통일상'(1990)과 '공화국영웅' 칭호(1993)를 받도록 국가적 조치를 취해줬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1990년 남편의 80회 생일상을 보내줬으며

자신의 70돌, 80돌 생일상도 선물했다고 리씨는 덧붙였다.

리씨는 현재 평양시 중구역에 살고 있으며

그의 세딸 경애. 영애. 해산은 대학을 졸업한 뒤 정권기관의 주요 직책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조선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는 김삼룡씨의 묘비는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2005년 07월 20일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