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왜 시대에 따라 달력과 역법이 바뀌었을까?

Gijuzzang Dream 2008. 12. 9. 02:50

 

 

 

 

 

 왜 시대에 따라 달력과 역법이 뀌었을까?

 

 

 

 

    

‘역법(曆法)’은 말 그대로 달력 만드는 법이다.

날짜를 알고 계절을 알 수 있도록 절기 일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그 범위를 넓히면 일식·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예측하고,

수성, 금성 등의 오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해 하늘에 나타나는 여러 천문 현상들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인간이 생활하는 곳에는 반드시 역(曆) 개념이 따라다닌다.

시대에 따라 달랐던 역법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역법의 변화 - 왕조가 바뀌면 역법도 바뀐다


중국의 초기 역법은 달의 운동을 기본으로 해 역법을 만들고

그 법에 태양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계절 변화와 맞추고자 윤월을 두고,

24절기의 개념을 도입해 계절을 알려줬다. 이와 같은 역법을 태음태양력이라 한다.

중국과 빈번한 교류를 가진 한국의 고대 사회도 중국에서 이 역법을 배워 사용했다.

 

세종 때 편찬된 <칠정산내편, 외편>

  

백제 무령왕 묘지석(국보 163호)

 

 

고대 사회에서의 천체현상을 기반으로 한 역법 계산은 하늘에서 그 임무를 부여받은 임금만이 할 수 있다는 사상이 있었다.

따라서 역법 연구기관은 왕의 직속기관으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역법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오랜 세월이 흐르면 천체의 운동에 따라 역법 계산에 사용하는 상수가 달라지기도 했겠지만, 당시 중국 역법의 변화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도입되거나 계산에 사용되는 상수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왕조가 바뀌었으니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내용이 바뀌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의 위치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689년에 중국 당나라는 왕의 모친인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으면서, 나라 명칭을 주周로 바꾸고 1월의 위치를 바꾸었다.

즉, 689년 11월을 다음해인 690년의 1월로 정해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영향이 신라에도 미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효소왕 4년(695) 11월을 다음해 정월로 바꾼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월명도 바뀌었다.

즉 695년은 10개월만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던 때로서 무역 등의 상거래나 여러 문화교류 시 서로 다른 날짜를 쓰는 것이 불편해서 어쩔 수 없이 당나라를 따라 1년의 시작을 바꾸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 후 당나라에서 측천무후가 물러나고 중종이 복위하면서 1년의 시작점이 원위치로 환원됐고, 신라도 그에 따랐다.

그래서 700년에는 1년의 길이가 12달이 아닌 14달이었다.

 

 


우리나라 역법의 역사 - 조선만의 역법을 완성한 세종


한국에서 역법이 사용된 기록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시대, 고구려, 신라가 모두 다른 역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천체의 운동에 의한 변화량에 의한 것이 아닌

‘중국이 어떤 나라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가’에 따른 것이었다.

신라 후기에 사용하였던 선명력(宣明曆)은 후에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에 그대로 이어져갔다.

그 후 고려 말에는 수시력(授時曆)과 대통력(大統曆)이 도입돼 조선 초까지 사용됐다.

 

수시력은 1281년에 중국 원나라의 곽수경 등에 의해

정밀한 관측과 새로 고안된 천체관측기구를 이용해 측정한 값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역법으로

가장 오랜 기간 사용돼진 좋은 역법이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역법을 사용한다는 취지로 1368년에 개력된 대통력은

이 수시력과 아주 유사하다. 명나라의 대통력이 고려에 받아들여진 것은 1370년경이고,

이것은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사용됐다.
조선 초인 1422년 일식예보가 있어 세종은 일식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구식례를 행하려고

궁정 뜰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일식이 15분 가량 늦게 일어났다.

이에 신하들이 담당 관헌에게 중형을 주기를 청했으나

세종은 천체현상은 그 관원의 잘못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의 위치가 다르고,

또한 당시 사용하던 일식 계산법인 선명력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세월이 흘러 천체의 위치가 바뀌면 그에 따라 역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담당 관헌을 벌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종은 한반도에 알맞은 새로운 역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천체의 정확한 위치를 관측하기 위해 천체 관측 기기인 간의(簡儀)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해시계, 물시계 등의 천문관측기구들을 만들도록 했다.

그 당시 만든 간의는 당시의 천체관측기기인 혼천의에 비해 간단하게 만들어진 기기라는 뜻이다.

  

 간의 -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와 함께 조선 천문대에 설치한 중요관측기기

 

 <칠정산외편>의 첫 페이지

 

그리고 세종은 당시 제작된 이러한 천체관측 기기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정인지, 이순지 등의 학자들과 함께 여러 문헌을 참고로 한 역법을 연구해

1442년(세종 24)에 조선의 위치에 맞는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했다.

조선은 이때부터 비로소 스스로 독자적인 역법을 갖추게 된 것이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에서 ‘칠정(七政)’이란 말은

태양과 달, 그리고 수성, 금성 등의 오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천체들의 위치와 운동을 계산해서 역 자료를 예측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많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체의 위치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세종때부터 사용하던 칠정산내 · 외편에 오차가 커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도입하게 됐다.

시헌력은 17세기 후반에 청나라에서 사용하던 역법으로

조선에는 165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이 역법은 서양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가장 현대 역법에 가깝다.


이같이 역법은 천체의 운동에 따라 오랜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바뀌어야 하지만,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바뀔 때마다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바뀐 경우도 많았고,

당시 역법 계산을 할 수 없었던 삼국시대와 고려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리고 조선은 세종에 이르러 비로소 여러 관측기기를 이용한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자주적인 독립 역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안영숙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 2008-12-05,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