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을 담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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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와 달리 조선은 개국하면서 개혁적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나라의 통치 이념을 유교로 전환하였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인 창왕이 조선 태조에게 국권을 선양(禪讓)하는 형태를 취한 것도 유교의 윤리를 차용한 것이다. 1392년 조선을 개창하고 난 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권력이양의 정당성 문제와 국가통치 이념을 확고히 세워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태조는 상징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하게 됐다.
중국의 3원 28수의 별자리 체계를 이용해 모두 1,467개의 별을 새겨 넣었다.
이 별자리판의 제작 목적은,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알리고 개국의 정통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어 유교적 가치 기준의 중요한 요소는 하늘을 공경하고 부지런히 백성을 보살피겠다는 '경천근민(敬天勤民)' 사상과 하늘의 뜻을 살펴 백성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때와 時를 알리겠다는 '관상수시(觀象授時)' 사상이다. 이러한 유교적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계속 관측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 개국과 동시에 정비해야 할 많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수행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단순히 천문도(天文圖)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천문도 안에 있는 별자리 묘사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의의를 부각시키도록 독특한 명칭을 붙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하늘에 운행하고 있는 모든 천체들인 하늘의 적도를 따라 12차로 구분하고 12개의 영역으로 별들을 배열하여 펼쳐 놓았다는 것이다. 또 전 세계의 중심 국가인 12국을 하늘의 별자리와 대응시켜 놓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야로 나눠 차례로 펼쳐 놓은 그림이라는 것. 명칭에서 보면 하늘에 펼쳐진 별과 별자리들을 지상의 모든 나라들과 대응시켜 놓고, 지상에 사는 우리 인간과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 내용은 권근이 쓴 『양촌집』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미뤄 알 수 있다.
우선 첫째로 천문도의 모본(母本)은 1247년 중국의 남송 때 제작한『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가 아니라는 것이다. 평양성에 있었던 천문도의 인쇄본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의 문화적 유물과 유산이 조선으로 이어져 왔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당시의 천문 관측 수준이나 관측을 위한 기기 등이 발달했던 중국의 천문도를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별들의 위치가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천문도가 단순하게 모양만 배열하여 간단하게 그린 천문도가 아니라는 것. 천문도에 있는 별들의 좌표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천문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천문도는 정확한 별들의 좌표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장구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긋난 위치를 바로 잡기 위해서 관측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특별한 관측 기기를 사용해서 육안으로 관측한 것을 의미한다. 기기 없이 육안으로 관측해서는 정확한 별의 도수(度數)를 파악할 수 없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계속 전해 내려오던 천문의기들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천문의기 뿐만 아니라 이를 관측하기 위한 전문 인력인 천문학자가 계속 활동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로 누가 이러한 별들의 위치를 관측하고 세차운동에 따른 값을 추산했는가 하는 점이다. 틀림없이 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천문학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는데 참여한 사람들로서 별자리 판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아마도 이름이 거명된 순서가 이 별자리 판을 제작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학자들로 보인다.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유학자인 권근인데 이는 당시 이 사업을 주도한 사람으로 보이고, 천체를 관측하고 천체 위치 계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인물로 유방택이 있다. 그는 오랜 동안 별을 관측하고 위치를 계산하는데 직접 관여하고 또한 이를 계산했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실록 한 곳에 나오는데 이를 통해 당시 그의 위치와 하던 역할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만 천하에 공표하고 백성들에게는 국가의 통치 이념을 전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유교적 이념 구현 의지에 국한하지 않고, 과학적으로도 대단히 정확성이 높고 의미 있는 천문도를 제작한 것이다. 이 석각천문도는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의 유기적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 2008-12-05 | ||
최초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 유신 유방택이 만들었다
1467개의 별이 가로 1m, 세로 2m의 돌에 새겨진 이 천문도는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운 직후인 1395년에 만들어졌다. 이 천문도를 만든 이는 문집 <양촌집>을 지은 문필가 권근(1352~1409)으로 알려져 왔지만, 고려 유신이었던 유방택(1320~1402)이 실제 제작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과학사)는 대전 대덕연구단지 천문연구원에서 열린 ‘한국 고천문학과 천상열차분야지도 워크숍’에서 “최근 고문서를 검토한 결과 이성계의 지시로 조선이 ‘하늘의 뜻’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천문도를 제작한 천문학자는 유방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하지만 그는 고려에 충성한 조선 왕조의 반골이었다”라고 말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문에는 모두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권근이 글을 짓고, 유방택이 천문계산을 하고, 설경수가 글을 썼다고 돼 있다. 권근은 문필가, 설경수는 원나라에서 고려로 망명한 당대 유명한 서예가여서 천문학과는 관련이 없다. 뒤에 나오는 이들 가운데 권중화 역시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관으로 역시 천문학자는 아니었다. 나머지 8명에 대한 역사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유방택의 일생에 대해서는 고려 말 정이오(1347~1434)의 문집 <교은집>에 실려있는 ‘유방택 행장’이 거의 유일하다”며 “행장에는 이성계가 천문 계산을 이룩한 공로를 인정해 유방택에게 개국일등공신을 주려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개성 취령산 아래 숨어 지냈다고 돼 있다”고 밝혔다. 또 유방택은 죽는 날 두 아들에게 “나는 고려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는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공주 동학사 삼은각을 짓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세 고려 충신들을 기렸다고도 한다. 또 <고려사>에는 유방택의 맏아들 백유와 둘째아들 백순이 고려말 이성계 등이 추진한 사회경제 혁명인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 호남 광주로 유배된 사실도 나온다. 유백유는 뒷날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해 벼슬을 했다.
박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잘 알려져 있으면서 그 천문 계산을 맡은 천문학자 유방택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 전통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긴 지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뒤늦게나마 이런 숨은 사실을 발굴해 우리 과학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박석재 천문연구원장은 이날 “유방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연구원이 발견해 아직 이름 짓지 않은 소행성 가운데 하나에 선생의 이름을 붙이려 한다”고 밝혔다. - 2005.11.21 한겨레
천상열차분야지도 중국의 '순우천문도(1247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다. 이 천문도가 유방택 등 우리 조상에 의해 직접 제작됐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 나온다. 이용복 서울교대 교수(과학교육과)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순수한 천문에 대한 기술 외에 유교관과 천명관을 반영한 내용들이 들어 있고, 가장자리에서도 별자리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한 점 등에서 중국 천문도와 다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1998년 일본 옛수도 나라 근방에서 발견된 기토라고분의 천정 성수도는 중국 천문도보다는 우리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가까운 점이 많다”고 밝혔다. 이 천문도에 나와 있는 별들을 토대로 관측한 위도를 계산해보면 39도로 나온다. 고분이 제작될 당시인 7~8세기경 위도 39도에 있던 도읍은 평양이 유일하며 당시 중국의 도읍인 낙양, 서안과 일본의 나라는 34도였다. 이 교수는 “기토라고분의 천문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계승한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양홍진 천문연구원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학서적인 이순지의 <천문유초>에는 청룡, 현무, 주작, 백호 등 사신도와 별자리를 연결해놓은 설명이 나온다”며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이를 대입해보면 서양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도 별자리를 동물 모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늘의 별자리 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1395년, 태조본)’는 고구려시대의 천문도를 조선시대 하늘에 맞게 고쳐 만든 것으로 1,467개의 별과 282개의 별자리를 검은 돌판 위에 새긴 것으로 중국 순우천문도(1247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로 알려져 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북반구의 거의 모든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새 소행성에 한국인 과학자 이름 헌정
국내 과학자가 처음 발견한 소행성에 한국인 천문학자의 인명이 또 다시 헌정됐다.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 유방택(1320-1402)과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1896-1962)을 헌정, 지난 16일 국제천문연맹(IAU) 산하 소행성센터(MPC)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고 18일 밝혔다. 2000∼2002년 사이에 보현산천문대 1.8m 광학망원경으로 발견한 것이다. 지난 2003∼2005년에 등재된 최무선, 이천, 장영실, 이순지, 허준, 홍대용, 김정호를 포함한다. 조선초의 대표적인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를 제작할 때 천문 계산부분을 총괄 지휘한 인물이다. 또 이원철 박사는 1926년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규명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국내 천문학을 개척한 과학자로 유명하다. 국내에서 새로 발견되는 소행성들에 한국을 빛낸 과학자들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헌정할 계획이다. 연세대학교와 공동으로 소행성을 추적, 감시하는 무인원격 자동운영 시스템을 구축, 운영해 왔다. =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천문학자. 조선초의 대표적인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를 제작하는데 있어, 천문 계산부분의 총 책임자로 일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로서 태조 이성계가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제작된 천문도이다. 그는 조선조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고향인 서산에 내려와 고려 충신인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사당을 지어 그들의 충성을 기리면서 지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천문도 제작이 어려웠을 것이다. 천문도에 새겨진 그의 공식 직함은 가정대부 검교 중추원 부사 겸 판서운관사로서 종2품의 높은 관직이다. = 천문학과 기상학을 개척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다. 이원철 박사는 1926년에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혀내어 유명해졌다. 이 별은 학계에서 논란이 되던 별로, 서구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당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고,민족의 자랑거리가 됐다. 서울YMCA의 일반인을 위한 교양강좌를 통해 과학 대중화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또한 해방이후 중앙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6년 동안 재직하면서 기상인력을 키우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 국민일보 200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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