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명국 - 설중행려도(雪中行旅圖)

Gijuzzang Dream 2008. 11. 3. 02:55

 

 

 

 

 

 

 설중행려도(雪中行)

 

 

 

김명국(:1600~1663년 이후), 17세기, 모시에 엷은 색, 55×101.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운 겨울 눈 덮인 산으로 매화를 찾아 떠났던  

중국 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일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화면 하단의 인물은 나귀 한 마리에 행자를 대동하고 아쉬운 듯 방금 떠나온 집을 뒤돌아보고 있다.

 

 

먼길을 떠나는 인물과 사립문에 기대어 배웅하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듯 찌푸린 하늘과 거친 나무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부벽준으로 대담하게 그린 날카롭게 각진 절벽과 먼 산, 앙상한 나무는

겨울의 추운 계절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산수 배치, 나무와 바위 등에 구사된 뾰족하고 날카로운 필획은

당시 새롭게 전개되었던 중국 절파(浙派)화풍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경물의 기이하고 과장된 모습과 이를 분방하고 대담하게 처리한 필묵은 김명국 산수화의 특징이다.


명대()의 절파화풍 중에서도

말기의 광태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서

17세기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적인 화풍이다.

이처럼 김명국의 그림의 근간을 이루고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절파화풍도

그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였다.

 

 

 

 

  

     김명국의 '기려도 (騎驢圖)'  

 

김명국 그림, 기려도, 29.3cmx24.6cm 

 김명국 그림, 기려인물도, 비단에 수묵, 24x19cm, 개인 소장

 

김명국 그림, 심산행려도, 모시에 담채, 103x60.2cm

소재를 알 수 없지만 한동안 김명국의 대표작으로 손꼽힌 명작이다.

근원 김용준은 이 작품을 두고

"간쾌하고 속력 있는 붓끝으로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그린 흔적이 역력하다"고 평하였다.

(<한국회화대관> 유복렬)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 1600년- ?)

 

본관 안산(安山), 자 천여(天汝), 호 연담(蓮潭), 취옹(醉翁)

도화서 화원으로 교수(종 6품)를 지냄

1634(인조 12) 충숙공 이상길의 79세 초상화 그림

1636(인조 14) 조선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1643(인조 21) 조선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두번째 일본에 다녀옴

1662(현종 3)  니금 소상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명국은 인조, 효종 연간에 활약했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이다.

많은 국가행사에서 화사(畵事)를 담당하였고, 절파(派) 화풍의 대가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으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이 많아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 후기의 시인이자 문장가 정내교()의 《완암집()》에 따르면,

'김명국은 사람 됨됨이가 거친 듯 호방하고 농담을 잘 했으며 술을 즐겨 한 번에 몇 말씩이나 마셨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면 반드시 실컷 취하고 나서 붓을 휘둘러야 더욱 분방하여지고

뜻은 더욱 무르익어 필세는 기운차고 농후하며 신운이 감도는 것을 얻게 된다.

그래서 그의 득의작 중에는 미친 듯 취한(狂醉) 후에 나온 것이 많다고 한다. (중략).

그의 집에 가서 그림을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큰 술독을 지고 가야 했고,

사대부 중에 그를 존대하여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는 자 또한 술을 많이 준비하여

그의 주량이 흡족히 채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붓을 잡았다'

 

이와 같은 기질은 힘차고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려진 그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

이 그림 역시 호방하고도 강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한다.


그림에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표출시켜 호방하고 대담한 화풍을 안겨주었으며,

특히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다. 

 

김명국이 잘 그렸던 산수인물화 중에서

'기려행(騎驢行)'과 시사(詩思)의 관련성은

북송의 취옹(醉翁)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귀전록》에서 구양수는 시문을 구상하는 데 가장 좋은 분위기 세 가지를 들었는데,

그 첫번째가 당나귀의 등 위에 앉아 있을 때이고[驢上],

두 번째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이며 [枕上],

세 번째가 뒷간에 앉아 있을 때라고[厠上] 했다

 

   

중국에서 매화파 창시자는

'답설심매(踏雪尋梅)'란 절대무비의 경공술을 가진 맹호연(孟浩然, 689-740)과

'암향소영(暗香疏影)'이란 미혼산의 비기를 감춘 임화정(林和靖, 967-1028)이다.

 

답설심매를 주제로 한 그림과 혼동되는 것이

눈 위를 나귀타고 가는 그림(패교기려, 覇橋騎驢)의 그림이다.

'패교기려'의 그림은 당나라 시인 정계선(鄭棨善)의

'눈 내리는 패교 위에서 당나귀 등을 타고 시상에 잠기도다(詩思在覇橋風雪中驢子上)'에서 온 것으로

그의 싯구 덕에 이후 파교는, 특히 눈 덮힌 패교는 시흥(詩興)의 상징이 되었다

 

청나라 때 편찬된 유명한 화본(畵本)인 <개자원화보, 人物屋宇譜> 편에,

시동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실려 있고,

그 옆에 화제(畵題)로 정계선의 위의 싯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눈이 있고 다리가 있고 나귀가 있으면 이는 '패교기려도'인 것이다.

   

답설심매와 패교기려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설심매'는 맹호연의 그야말로 매화 완상의 정취이고

'패교기려(覇橋騎驢)'는 정계선의 시적명상, 혹은 시심삼매(詩心三昧)의 경지인 것이다.

 

패교(覇橋)는 중국 문헌상에서는 이별을 상징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당나라 때 수도 장안을 끼고 흐른 위수(渭水)에는 세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동쪽, 중앙, 서쪽의 소위 삼위교(三渭橋)이다.

이중 동쪽에 있던 다리가 유명한 '패교(覇橋)'로 장안성 동쪽에 있다 하여

또 다른 이름 '동교(東橋)'라 불렸다. 

 

패교기려(覇橋騎驢)와 관련된 화목으로는

설중기려, 맹호연유파교, 파교탐매, 파교심매, 파교방매, 맹호연기려, 답설심매 등이 있다

추운 겨울에 매화를 찾는 것은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서 진정한 도를 추구하는 정신을 나타낸다.

       

김명국 그림, 탐매도

 

 

數九寒天雪花飄, 아득한 겨울 하늘 눈꽃이 나부끼고

大雪紛飛似鵝毛。 큰 눈은 오리털처럼 휘날리는데

浩然不辭風霜苦, 호연은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踏雪尋梅樂逍遙。 눈 밟으며 매화 찾아 떠돌아다니네

   

 

- 맹호연(孟浩然 : 689-740)

호북성 양양 동쪽 20리에 있는 녹문산(鹿門山) 아래 어량주(魚梁洲, 일명 대왕주)에

높은 누대를 짓고 매(鷹)를 길렀으며, 이 누대를 '응대(鷹臺)'라 불렀고 '경승대(景升臺)'라고도 했다. 

평생을 유람과 은일생활을 하며 술과 가야금과 더불어 자연에 귀의한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

고향인 이곳에서 오랫동안 은거했다. 이후 청렴결백한 군자의 상징이 된 그가

이른 봄에 매화를 찾아 당나귀를 타고 설산(雪山)으로 들어갈 때

패교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모습이 패교탐매도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탈속하고 고아한 선비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고

그림의 주제로도 널리 차용되었다. 

    

조선에서는 16세기까지는 당나귀가 ‘시사’와 탐매‘의 수단인 <패교기려>와

자연공간을 향유하는 <야객기려>가 구분되어 제작되었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기려상이 지닌 행려와 관찰의 이념성만이 부각되면서

두 화목이 점차 습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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