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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3. 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될까 ②

Gijuzzang Dream 2008. 9. 26. 00:19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3)

 

 

 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될까 ②

『삼국지』에서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다는 사람으로는 채옹(蔡邕, 132~192)이 잘 알려져 있다.

한나라 말 여성 문인인 채문희(蔡文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채옹은

시중(侍中, 황제의 고문관) 벼슬을 할 정도의 고관으로

환관 십상시(十常侍)들의 행패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모함을 받고 쫓겨 난 것을 동탁이 중용했다.

그러나 동탁이 살해되자 모두 기뻐하는데 채옹만이 동탁의 시체 앞에서 울다가 체포되어

당시의 실권자 왕윤(王允, 137~192)에게 끌려갔다.

 

그는 자신이 동탁의 시체 앞에서 슬피 운 이유를 왕윤에게 설명했다.

"당당한 한나라의 신하로서 어찌 나라를 배반하고 동탁을 두둔하겠습니까.

그러나 공(公)은 공이요 사(私)는 사입니다. 동탁은 일찍이 저의 재주를 알아주어

비록 국가에 대해서는 역적이지만 저한테는 지우(知遇)라 할 것입니다.

사사로운 정을 이기지 못해 한 번 울어 그의 가련한 죽음을 조상한 것뿐입니다. (중략)

원컨대 극형을 면케 해 준다면 그동안 작성하던『한사(漢史)』를 계속 탈고해서 속죄하겠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채옹이 동탁의 죽음을 애도하여 왕윤으로부터 처형되었는데 이것이 왕윤의 몰락을 초래했다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모든 사람들이 채옹의 구명을 요청했으나

이때 왕윤이 뜻밖의 말을 한다.

"한나라 효무제(孝武帝)는 사마천을 죽이지 아니하고

『사기(史記)』를 짓게 했더니 그가 책에 비방하는 글을 써서

후세에 전하도록 했소. 나라의 운수가 쇠미하고 조정이 어려울 때 간사한 신하가 어린 임금의 곁에서 사관(史官) 노릇을 한다면

후세에 우리도 욕을 먹을 것이오."

결국 왕윤이 채옹을 처형하여 그의『한사(漢史)』는 태어나지 못했다. 학자들이 『삼국지』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여하튼 사람들은 인재 중의 인재인 채옹을 가차 없이 죽인

왕윤의 처신을 보고, 그 역시 동탁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정권도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각(李郭, ?~198)에 의해 곧바로 살해됐다.

왕윤의 명을 재촉한 것은 천하의 천재라 볼 수 있는 채옹을

처형했기 때문이라는 말인데,

사실 채옹이 더 유명한 것은 그의 주량 때문이다.

그는 술 열 말을 마실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항상 취하여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를 '취한 용(醉龍)'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나관중은 채옹이 동탁의 죽음을 애도하였기 때문에 살해됐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채옹은 동탁이 죽은 뒤 동탁의 무리 중 한 명이므로 감옥에서 죽었다.

 

또한『삼국지』에서는 동탁이 권력을 잡기 전에 등장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189년 권력을 잡은 동탁이 그 재주를 알고 완력으로 끌어 벼슬길에 들어서게 하고는,

사흘 동안에 벼슬을 세 번이나 옮겨 좌중랑장(左中郞將)으로 만들었다는 것이『후한서』기록이다.

좌중랑장은 광록훈 아래에서 좌서(左書)를 맡은 품계 2000석의 매우 높은 벼슬이다.

그러나 그가 환관들을 반대해 영제에게 글을 올려 정사를 논했고,

모함당해 감옥에 갇힌 후 멀리 정배를 갔다는 것. 

후에 사면 받아 오군과 회계에서 12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다.

채옹과 같은 시대의 유학자 정현(鄭玄, 127~200)과 그의 제자 노식(盧植, ?~192)의 주량도

만만치 않아 열 말 이상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노식은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으로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무고로 귀양 갔다 후에 복권된다.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즉위시키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낙향하며,

『삼국지』초반 유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 고수들의 주량은 10말

장비의 술탐 이야기로 돌아간다. 장비가 살해되는 장면도 극적이다.

익주성을 수호하는 장비.

삼국시대에서 가장 용감한 장군이지만 술을

마시면 행패를 부려 결국 살해당하고

촉이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자료: 종로문화원) 

장비는 관우의 죽음에 복수하려고

손권을 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되는데, 그 이유가 술이다.

 

장비가 부하들에게 "사흘 안에 병사들이 입을 백기(白旗)와 흰 갑옷(白甲)을 만들라"고 명령하자 범강(范疆, 3세기 초반)과 장달(張達, 3세기 초반)은 시간이 촉박하다며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장비는 원수를 급히 갚아야 한다며

자신의 명령을 어긴다고 두 사람을 나무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기한 내에 반드시 백기와 백갑을 만들라고 했다.

범강과 장달은 어차피 기한 내에 백기와 백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왕 죽을 바에는 먼저 장비를 죽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장비가 술을 마시고 대취한 것을 알고 장비를 살해하기 위해 단도를 갖고 장비가

자고 있는 장중으로 들어갔다.

장비 곁으로 가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수염이 빳빳이 뻗쳐 있는 장비가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장비는 잠이 들어도 눈을 뜨고 잤다고

하는데 문제는 코를 골았다는 것이다.

범강과 장달은 장비가 코를 고는 것을 보고

단도로 찔러 살해한다.

장비가 죽은 후 각지에서 많은 장비 사당이
세워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사천 낭중의 ‘장환후사’이다. 고대 건축과 장비 묘, 후원으로 구성되었다.

사당은 낭중 성내에 위치하는데 장비가 낭중을 수비하고 또 낭중에서 피살되었으므로

낭중의 장비 묘는 모든 장비 묘 중 가장 의미 있는 장소로 인식한다.

실제로 장비의 묘는 사천성 운양현성 장강 남안의 비봉산(飛鳳山) 기슭에 있다고 추정한다.

이 묘는 장비의 사망으로부터 17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파촉 제1명승’으로 불린다.

장비가 술에 곯아떨어져 살해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삼국시대 사람들을 포함하여 과거의 주당들이 대체 얼마나 많이 마셨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말 명초(元末明初)의 시내암(施耐庵)이 쓰고,『삼국지』의 저자 나관중(羅貫中)이 손질한

중국 4대 기서(奇書) 중의 하나인『수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무송(武松)이 장문신(蔣門神)을 치러가는 도중에 지나치는 각 술집마다

술 세 사발을 마셔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있다.’

이는 맹주의 귀양지에서 출발하여 쾌활림까지 가는 도중 술집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큰사발로 세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사발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발을 현재 막걸리의 절반으로 계산하더라도 한 병 반 정도가 된다.

지나가는 길에 모두 십여 군데의 술집이 있으므로 이를 모두 계산하면 최소한 막걸리 30여 병이 된다.

그 엄청난 양을 단기간에 마시면 배가 남산만큼이나 불렀을 텐데 싸움을 할 수 있을 지 의아하다.

무송의 이야기 중에서 유명한 일화는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경양강(景陽崗) 산기슭에서 ‘세 잔이면 언덕을 넘지 못한다’는 투병향(透餠香, 술의 향기가 병을 뚫고 나온다는 술)을 혼자 열 잔 정도 마셨다.

이 당시는 원나라 말이므로 증류주가 중국에서 생산됐다고 가정하면,

투병향도 글의 내용을 볼 때 고량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송이 마신 술 잔을 큰사발로 보고 알코올 농도 40~50도의 고량주로 간주한다면

막걸리 병으로 5병이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무리 주당 중에 주당인 무송이라도 인사불성은 물론 걸을 수 있었을지 조차 의문이 든다.

여하튼『수호지』에는 무송이 이미 취한 상태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인데다 무송이 걸출한 무인이라 그렇지 보통 실력이라면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무송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죽림칠현.

삼국시대 후반기의 사람인 죽림칠현은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어 후대 사람들로부터 크게 회자되었다.(자료: 동건) 

위 · 진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은

모두 대단한 애주가들인데, 그 중에서

산도(山濤, 205~262)는 능히 여덟 말 이상을 마셨고

유영(劉伶)은 가히 주선(酒仙)이라 불릴 만 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그에게 부인이 몸을 생각하여 술을 끊으라고 권하자 먼저 술을 준비해 축복을 비는 제를 올린 후 술을 끊겠다고 했다.

 

부인이 기뻐하며 술과 고기를 준비하자

유영은 제를 드리면서 말했다.

“하늘이 유영을 낳았으니 술로써 이름을 날렸네.

한 번 마시면 열 말을 마시고 다시 해장으로 다섯 말을 마셔야 하니, 부인의 말을 절대 들을 수 없겠네.”

그는 제를 때려치우고 준비된 술과 고기를 모두 먹어 거나하게 취해버렸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다섯 말은 단지 해장술 정도이고

한 번에 적어도 열 말은 마셔야 양에 찼다는 뜻이다.

중국의 주당이라면 적어도 8말에서 10말 이상을 마시고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한 말은 18리터이므로 10말이란 180리터(180킬로그램)를 의미한다.

간단하게 60킬로그램 성인의 3배를 마셔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죽림칠현은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국시대 위나라 말기 실세였던 사마씨 일족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돌리고

완적(阮籍, 210~263) · 혜강(嵆康, 223~262) · 산도(山濤) · 향수(向秀) · 유영(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 234~305) 등 7명은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특히 그들은 개인주의와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식에 벗어난 언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은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씨에 의해 회유되는데

이중 혜강만은 끝까지 사마씨의 회유를 뿌리치다 결국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이 그룹을 형성한 것은 일시적인데다 집권자와 타협해 관계에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해,

본래의 취지에서 다소 퇴색된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풍부한 일화는 계속 전해져 중국의 지식인들 간에 좋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여하튼 술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유영은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술병을 들고 하인에게는 가래를 메고 따르게 하며,

만약 자신이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 묻으라고 부탁했다고 알려진다.

평소 글을 쓰지 않았기에 남긴 것도 별로 없지만,

그가 남긴 유일한 글은 술을 칭송하는「주덕송」한 편 뿐이다.

흔히 술 실력은 체력에 비례하고 ‘술 먹는 배가 따로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말에도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술 한두 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서너 잔부터는 술이 술을 마시고 아홉, 열 잔째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한다.

술이 사람을 마실 정도라면 아무리 장비와 같은 장사라 하더라도 더 이상 제 몸을 지탱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애주가들은 모두 자신의 주량을 과장하길 좋아하며

분명히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다고 우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이 주당의

기준으로 설명되는 술 10말을 마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고대의 술그릇은 모양이나 용량이 엄격하게 정해져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고대와 현대의 도량형제도는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각 시대별로 모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고대의 주당들이 말하는 10말도 시대와 나라에 따라 같은 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漢)나라 때 10말이 120근(斤)에 달한다고 하는데

1근은 대체로 0.5리터이므로 열 말은 대체로 60킬로그램(60리터)에 달한다.

이 역시 성인 한 명의 몸무게에 해당하는데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양이 못 된다.

참고문헌 :
『본 삼국지(11)』, 리동혁, 금토, 2005

이종호 과학저술가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8.08.18 ⓒ ScienceTimes